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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1-4)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한복음 15:26-27)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6-15)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말씀을 같이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은 포도나무와 과실에 관해 말씀하시며, 또한 아버지께서 보내실 진리의 성령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부분이지요.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지역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과 사도 바울의 복음 전도 여정에 관한 말씀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으시는지요?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을 함께 살펴보며,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해하고, 또한 해답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 고민해 온 문제에 관해 깊이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드로아 옛 항구의 모습. 사도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곳입니다.)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역사상 하나님을 믿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안에 살면서 쉽게 해답을 얻지 못하는 문제, 또한 하나님께 물어보고 싶은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의 말씀을 따라, 진리 가운데 걷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주의 음성을 듣고, 주와 함께 걷는 것은 어떤 것일까?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까?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여러분들은 어떠하신지요? 여러분들께서는 주님 안에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일까, 어떻게 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 수 있을까 고민해 본 적이 없으신지요? 저는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서 살아왔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한 명쾌한 답 가운데 살아가는 분들을 많이 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많은 신앙 서적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알 수 있다 논하는 책들은 많았으나, 그것이 성경이 전하여 주신 진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는 것을 많이 보아왔지요.
어떤 분들은 부흥회나 집회에서 열렬히 기도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감정을 성령을 받은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것이다 이야기 해 왔지요. 그런데 그분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은, 그것이 감정에 의존되어진 것이었을 뿐, 실제로 주님께서 그 안에서 운행하시는 삶을 그리 많이 볼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내 뜻이 하나님 뜻과 일치되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하여 끝이 없는 성경 공부와,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분들이 그러한 연구와 고민 가운데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은 어떠하신지요? 우리가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데, 이 성령님과 동행하는 과정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들의 실질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과정에 대해 말해 보라고 한다면 어떤 간증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주변에서 들어온 이야기들을 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수많은 분들은 하나님과 동행함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참으로 그가 하나님 안에 걸은 것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걸어온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드로아 옛 도시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길.)
곧 오마 하셨던 주님은 왜 더디 오실까요?
그래서 저는 얼마 전 몇몇 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주님이 더디 오시는 줄 아십니까?”라고 말이지요. 이 땅을 떠나 가실 때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오리라 하셨고(요한복음 14:18), 또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셨는데(요한계시록 22:20), 수천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도 오지 않고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주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 하셨지만(베드로후서 3:8), 이처럼 더디 오시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럼으로 인하여 어떤 이들은 벌써 예수님께서 재림해서 왔다 가셨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의구심들이 나타났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
그러나 저는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가운데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을 보겠느냐!”는 이 말씀이지요. 이것은 제 생각을 합리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갖다 끼워 맞춘 논리도 아닙니다.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말씀과, 또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망하는 모습을 보며(창세기 18:32), 주께서는 마지막 때까지 믿음을 가진 자를 보고자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요.
즉,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며,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그 믿음이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의 모습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였던 교회, 거짓 선지자를 용납한 교회, 차지도 덥지도 아니하였던 교회였습니다(요한계시록 2:1-3:22). 이것이 과연 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었을까요?
(라오디게아의 예배당 유적.)
하나님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지난 3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던 이스라엘과 사도 바울의 선교지를 방문하며, 많은 것을 기도하며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장소들을 방문하기 전에, 그곳을 보지 않았고, 그 길을 걷지 않았고, 만져 보지 않았어도, 주의 말씀을 믿고 지금까지 걸어 왔습니다만은, 그 모든 장소들을 바라보면서 정말 많은 은혜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그 길, 사도 바울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저는 다시 한번 주께서 포도나무와 과실에 대해 말씀해 주시고, 성령에 대해 말씀해 주신 이 요한복음 15장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정말 이 요한복음 15장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가 너무나 크고 놀랍다는 것을 우리는 꼭 발견해야 합니다. 사실 이 요한복음 15장을 이해하려면, 그 앞의 14장을 조금 더 이해하면 15장이 더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한복음 14:16)
바로 이것이 핵심이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었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의 핵심이었지요! 여러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에 관해 하신 말씀과, 사도행전에 오순절날 성령이 임함으로 인하여 나타난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이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계실 때의 상황이고,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일어난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아버지께로 가셔야 할 것과, 또한 예수 그리스도 대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어 너희를 인도해 주겠다고 하셨지요. 즉,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셨습니다. 물론 이 성령은 하나님의 영, 다시 말해 하나님이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고,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 했을 때, “과연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진리 가운데 걷는 것을 제대로 점검할 수 있고, 들여다볼 수 있을까?” 또한 “내가 주님 안에서 삶을 사는데, 내 생각대로 살지 않고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라는 점이지요. 사실 이것은 어떤 말이나 글로 표현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의 공식처럼 인간의 이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복음 3:5-8)
성령으로 난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시며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신 그 의미를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행하심과, 영생의 모습과, 거듭난 자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감정이 있을까요? 인간의 연구나, 노력이나, 고민이 있을까요? 단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사실을 믿었을 때, 그분은 나를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하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고, 정결케 된 내 안에 들어오셨고, 내 안에 들어오신 그분은 내 주인이 되셨고, 내 주인이 되신 그분이 나를 이끄시는 그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2)
또한 요한복음 15장을 다시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요 아버지께서는 그 농부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가지를 깨끗케 하심과 가지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음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실질적인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보지 못하고, 이 말씀을 그저 글로만 읽고, 어떤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해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된 것이 무엇이냐면, 과실을 맺는 것과 맺지 못하는 것에만 생각이 국한되어 “과실을 맺어야 한다”라는 개념으로 이 말씀을 바라보고, 과실을 맺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로 들어가 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실질적으로 더 들어가 봐야 될 것은, 바로 이 말씀에 있습니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요한복음 15:2)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를 제해버리십니다. 즉,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을 하시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바로 “더 과실을 맺게 하려 이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가지를 깨끗케 하여 더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시라는 사실이지요! 그렇다면 가지를 깨끗케 하여 과실을 더 많이 열리게 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많은 간증을 해 왔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삶,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 무엇인가를 이루고 성취한 이야기, 수많은 이야기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자기가 목표를 하나 세우고 하나님이 여기에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매어달려 기도한 이후에,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말하지요.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고 인도하심이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생각과 계획과 의도였을까요? 많은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을 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는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지요. 저는 그러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계획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을까요, 아니면 내 안에 주인이 되어 주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셨을까요?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한복음 15:3-4)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요한복음 15:5)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어떤 역할을 하시는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나의 “믿음”과 연관되어져 있음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참 간단한 논리지요!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여기에 어떠한 인간의 이론이나, 지식이나, 노력이나, 힘을 조금이라도 보탤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때에도 나의 노력이 조금이라도 관여하지 않았고, 지금 내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는 데에도 내 노력은 조금이라도 필요치 않으십니다. 단지 “내 안에 거하라” 하시며, 그리하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왜 이것을 누리지 못할까요? 바로 성령께서 어떤 분인지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즉, 그분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와 의탁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많은 분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정확한 답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냥 믿는 것이 믿음이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저는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란 신뢰와 의탁이다”라는 것이지요. 신뢰와 의탁이라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뢰와 의탁”,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되어진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임을 저는 결론 내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브리서 11:1-2)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브리서 11:17-19)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로마서 4:17)
믿음은 바로 실상이었으며,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그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창세기 22:1-13).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마자 그는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이삭과 함께 집을 나섰고,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 놓고 칼을 들어 그를 잡으려고 하기까지, 아무런 연구도, 계획도, 고뇌도, 힘씀도, 애씀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는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탁하였기에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로마서 4:11).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하나님은 내 안에 오셔서 나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하나가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훗날 되어질 일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서 처음부터 되어진 일이며, 또한 영원하다는 사실이지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영접”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다시금 깊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을 그 안에 영접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었던 솔로몬조차도 하나님을 자기 안에 영접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지요!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죽었던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시고, 이제는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이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참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바로 하나님이신 그 말씀은 이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그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요한복음 15:26-27)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2-14)
그래서 저는 항상 “동행”에 대하여 설명드릴 때 물컵 두 개를 놓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많은 이들은 “동행”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님 옆에 가는 것이다”, “아니다, 주님이 내 뒤에서 오신다”, “아니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가야 된다”,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물컵 두 개를 포개 놓고 이것이 바로 “동행”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내 안에 주님이 오셔서 동행하시는 것이지, 따로 따로 떨어진 그러한 동행이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사도 바울이 성령에 이끌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동행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중에서도 사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살펴 보시기를 추천을 드립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온 천하에 복음을 전하는 그 여정에서, 그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연구가 조금이라도 들어갔을까요?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그대로 모든 것을 진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의 모습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으며, 주의 제자를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고자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였던 자였지요. 이것이 바로 그의 생각이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서 땅에 엎드러지고 예수님을 만난 뒤,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난 후의 그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그대로 행하는 모습이었지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사도행전 9:1-2)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사도행전 9:18-20)
(사도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 유럽에 처음 당도한 네압볼리 항구.)
또한 앞서 읽은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기에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갔고,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 앞으로 가고자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므로 드로아로 내려갔지요.
드로아에서 그는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고, 환상을 본 후에 즉시 배로 떠나 마게도냐의 네압볼리 항구에 이르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러 강가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지요. 이 모든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으며, 어떻게 사도 바울을 인도해 가셨는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행전 16:6-15)
하나님은 모든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여러분과 많은 시간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을 많이 드려 왔습니다. “믿으라”하실 때 믿을 만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셨고, “영접하라”하실 때 영접할 만한 모든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주신 하나님이셨지요!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인도한다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마련하여 주신 이후에 우리 안에 오셔서 진실로 우리를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모든 여건과 환경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전도 여정은 그의 계획이나 생각이나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하여 주신대로, 그는 그대로 하나님의 손에 이끌리어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이 사도행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요. 다시 말해 이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동행한 모습이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네압볼리의 도시와 항구 전경.)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의 내용대로 이 길을 따라 그대로 걸어 봤습니다. 드로아에서, 네압볼리로, 빌립보로, 사도 바울의 여정을 따라 그대로 가 보았지요. 걸어 봤더니만, 놀랍게도,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동행한 그 여정이 얼마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를 그대로 볼 수 있었지요!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사모드라게와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이르러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사도행전 16:11-14)
빌립보는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당도한 사도 바울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강 가로 갔지요. 사실 그 강이 지금은 수량이 줄어 도랑처럼 되었지만, 강이 흐르던 곳은 상당히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에 당도하여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여자들에게 말하다가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그 집이 다 복음을 듣고 침례까지 받게 되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길을 걸어 갔던 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각으로 걷는 분은 아니었더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여기서 하나 알아야 될 것은 말입니다, 우리가 여기 이 성경을 읽으면서 나타나는 것은, 사도가 극히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령에 이끌려서 걷는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그를 인도하셔서 그가 행하는 그 모습이 극히 자연스럽다라는 것, 그리고 여기에 조금도 인간의 생각이나 계획이나 논리나 이런 것이 아니 들어가 있더라는 사실이지요! 사도 바울은 그렇게 걸으셨습니다.
(빌립보 도시 근교 강가에 루디아가 침례받은 곳을 기념한 장소.)
여기서 잠깐 저의 간증을 드려 봅니다. 사실 저는 외국 선교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저는 외국의 언어나 문화나 역사에 대해 많이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었고, 그 나라들을 잘 이해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전에 복음을 전했던 이가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도피 중에 있다고 하기에, 가서 그를 도와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시작된 선교의 여정이었는데, 그 나라 안에서 수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저의 생각대로, 저의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가니 이 사람을 만났고, 이 사람을 만나니 저곳으로 가야 했었고, 저곳으로 가니 이곳으로 옮겨가야 했었고, 그곳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니 그 사람들을 따라가야 했었고, 주께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는대로, 주님이 인도하신 삶을 그냥 그대로 걸어 갔었고, 그래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저는 사도 바울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게 되었지요. 그 삶을 자세히 보니, 바람이 임으로 불매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삶이었을 뿐 아니라, 그 길은 어쩌면 힘들고 고난스럽고, 괴롭고, 그러한 길이었지만은, 그의 삶은 늘 감사하며, 찬송하며, 기뻐하는 삶이었지요. 그는 온갖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했지만, 항상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위협 속에 살았지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말씀이 사도 바울의 입에서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이었지요! 그분의 삶은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족한 삶이었으며, 오직 주님만이 그를 인도하시는 삶이었으며, 그 은혜 안에 젖어 사는 삶이었습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사도행전 13:50-5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사도행전 16:22-25)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빌립보의 사도 바울 감옥.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있는 곳은 “주님 안”이라는 사실이지요!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진행하여, 믿음의 결과로 주 앞에 서는 삶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이었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으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삶이지요! 그 믿음은 바로 동행이었으며,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수많은 사람들은 주님 안에 산다 하면서도 자꾸만 자기 생각대로 걸어가지요. 그러다 자기 꾀에 빠지고는 거기서 헤어나오지를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는 믿음을 가진 자일뿐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께서는 이것을 참으로 깊이 생각해 보셔야 되고, 기도하셔야 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는가, 주님이 내 안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성경은 늘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각자가 내가 주님 안에서 걷는지, 주님이 내 안에 있는지, 주의 음성을 듣고 걷는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과 방법대로, 세상의 흐름을 따라 걷는 것인지 살피시고 확증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시계를 잘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또한 달력도 잘 들여다보지를 않지요. 왜 그럴까요? 나는 시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달력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님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주님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자입니다! 여러분께서는 내가 주님 안에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꼭 아셔야만 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하시는 말씀들을 깊이 돌아보며, 은혜의 시간들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 유적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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