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열왕기하19장20~37절
제목 : 말씀의 승리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앗수르 왕을 향해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시며 심판을 선언하시고, 히스기야에게는 유다의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1. 앗수르 왕을 향한 말씀(20~28절)
1) 앗수르 왕의 오만함에 대한 고발(20~24절)
(1)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20절)
“[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본절에서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온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말씀은 다음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이다.
② 산헤립의 교만함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③ 이제 산헤립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행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보시고, 행하셨다는 연속적인 응답은 출3:7,8에서도 잘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3중적으로 분명하게 응답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본절 이하에 나오는 산헤립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앞서 랍사게가 큰소리쳤던 내용(18:17-35)과는 완전히 대립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평행 기사인 사35:21-35을 보다 참조.
(2) 하나님께서 시온의 처녀 딸이 앗수르 왕을 멸시하고 비웃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딸이 머리를 흔들 것이라고 하십니다(21절).
“[2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처녀 딸 시온. - 땅이나 성읍들을 가리켜 '딸' 또는 '처녀'로 비유하는 것은 시가서나 예언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시적(詩的)표현입니다(사23:12;47:1;렘46:11;애1:15).
그리고 '시온'(Zion)은 일명 '다윗 성'이라고도 불리운 예루살렘 성읍을 가리키십니다. 삼하5:7참조.
그런데 여기서 시온 성을 가리켜 '처녀 딸'이라고 한 것은 잦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때까지 한 번도 이방인의 발에 완전히 짓밟혀 본 적이 없는 사실을 곧 숫처녀에 비유하기 위함입니다.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 여기서 '멸시하며' (라아가)와 '비웃었으며'(비자)는 사실상 동의어입니다.
민 15:31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율법을 파괴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렘 20:7에서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롤 조롱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삼상 17:42에서는 불레셋이 다윗을 업신여기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 단어는 산헤립의 주장에 대한 부정과 그의 손재에 대한 조롱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 이것은 거절의 표시로 좌우로 머리를 혼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조롱과 멸시의 뜻으로 머리를 상하로 끄덕이는 것을 가리킵니다(시22:7;109:25;렘18:16)
(3) 앗수르 왕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22절).
“[22]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본절에서는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조롱하고 비난한 것은 곧 여호와를 비난하고 조롱한 것과 같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의 거룩한 자. - 이 용어는 이사야가 가장 즐겨 쓰는 표현으로 이사야서에는 무려 20여 차례나 기록 되었고(사5:24;41:14;43:14;47:4; 49:7 ;54:5; 60:9,14등) 그외 다른 성경에는 단지 서너 번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시71:22;렘51:5;60:9,14등).
아무튼 이 단어의 중요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과 거룩성, 그분의 의로우심과 구원의 능력 등을 강조하는 단어라는 점입니다.
(4) 앗수르 왕의 말을 직접화법으로 인용하며 앗수르 왕의 오만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3,24절).
① 앗수르 왕의 군재가 땅의 모든 곳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23절).
“[23] 네가 사자들을 통하여 주를 비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가장 먼 곳에 들어가며 그의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네가 사자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뜻은 '사자의 손으로'이다. 여기서 '손'(야드)이라는 용어는 '사자'(使者)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일반적으로 '자기 뜻을 펼쳐 행하는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랍사게와 그의 동료들의 행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사적인 움직임(18:17)까지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Hobbs).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 일반적으로 앗수르인들은 병거를 타고 평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올랐다는 표현은 좀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열왕 중에 딱 한번 레바논 산을 오른 왕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것을 굉장한 위업으로 기리고 찬양했던 것입니다(Luckenbill).
그 앗수르 왕은 바로 살만에셀 3세(B.C859-824) 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레바논 깊은 곳. - 이는 곧 레바논의 내륙지(內陸地)에 있는 높은 산들을 가리킵니다.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 앗수르 군대는 팔레스틴을 침공할 때 산악 지대의 나무를 베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거주민들에게 해를 끼치고 곤궁에 처하게 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행하기도 했지만 주된 목적은 건축 재료로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특별히 벌목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적(提喩法的)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높은 백양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벤다는 것은 그 나무들이 상징하는 팔레스틴 지방식 번영과 영예를 황폐하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Keil).
② 앗수르 왕이 물을 조롱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24절).
“[24]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 '땅을 파서...물을 마셨다'라는 표현은 병행구절인 이사야 37:25과 본절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을 판다'는 것은 적이 도망가면서 메워버린 우물을 다시 판다는 말(Thenius)이 아니고 물이 솟아날 만한 땅은 모두 파서 그 물을 취하였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당시 타인의 영역에 들어가 그곳에 우물을 판다는 것은 곧 그 지역을 정복하고 소유했다는 의미입니다.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 이것은 애굽에 있는 모든 강들을 정복했다는 뜻입니다.
앗수르 군대는 외국 정벌시(征伐時) 그곳 강의 제방들을 파괴하여 온통 강을 망쳐놓음으로써 강을 통하여 얻는 문명의 이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습성이었습니다.(Hobbs)
그러나 그의 아들 에살핫돈(B.C.681-669)은 B.C671년경, 애굽에 진근, 멤피스를 포위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본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히스기야가 팔레스틴 해안 지역의 평야를 짓밟은 것처럼 애굽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산헤립이 얼마나 오만했던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2) 앗수르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5~28절)
(1) 산헤립의 오만과 자만스런 자기 자랑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박이 시작됩니다(25절).
“[25]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무너진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옛날부터 정한 바라. - 이것은 열국(列國)의 응망성쇠를 좌우하는 분은 곧 여호와이지 산헤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이는 잠시 하나님께서 산헤립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범죄한 백성들을 심판한 것뿐인데 산헤립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능력이 있어 행한 것인냥 자랑하니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사10:5-11).
한편 이와 같이 하나님이 천하만국의 주재자이시며 모든 역사의 배후에 그분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사상은 후기 선지서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납니다(사 41:2;암9:7,8)
(2) 정복당한 백성들은 두렵고 부끄러워 마치 시든 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26절)
“[26] 그러므로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그들은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와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거기에 거주하는 백성의 힘이 약하여 . - '힘이 약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의 문자적인 뚱은 '손이 짧아서'입니다.
이는 곧 '할 능력이 없어서'라는 뜻입니다.
들의 채소와 푸른 풀과 지붕의 잡초. - 근동 지역의 풀은 여타 지역에 비해 수명이 짧고 특히 뜨거운 봄바람을 잘 견뎌내지 못합니다.
때문에 오늘 있다가 내일 말라 버리는그 같은 풀은 성경에서 종종 인생의 연약함과 허무함에 비유되곤 합니다(시37:2;102:11;사40:6,8:약1:11)
팔레스틴에서는 매년 3월경 늦은 비가 내린 후 새로 푸른 풀이 돋아나는데 그것이 바로 연한 풀입니다.
지붕의 잡초는 지붕 위에 풀이 나는 경우는 근동 지역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지은 작은 집 지붕 위에 핀 풀은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기
때문에 곧 시들어 죽기 마련입니다.
자라기 전에 시든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 그레이(Gray)는 '자라기 전에'를 '동풍이 불기 전에'로 수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Hobbs).
그렇다면 본절은 곡초의 싹이 땅에서 오르자마자 뜨거운 바람에 타죽는 것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이상과 같은 본절이 뜻하고 있는 바는 앗수르가 열방을 쉽게 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힘을 다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3)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말합니다(27절)
“[27]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내가 다 아노니. – 시139 : 2에도 본절과 유사하게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습니다.
특히 본절에서 '거처', '출입', '분노' 등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와 그 마음을 다 아셨다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 시4:4에서는 인간의 심중에서 말하는 것까지 여호와께서 아시므로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28절)
“[28]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앗수르 왕의 악한 말을 들으신 하나님의 판결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오던 길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에 대한 심판은 그들의 교만 때문임을 본서 기자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갈고리를 네 코에 꿰고 재갈을 네 입에 물려. - 이것은 앗수르인들이 행하던 행습을 본따서 하는 말입니다.
실제로 고대 앗수르 지역에서 출토된 비문을 보면 본절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정복된 이방의 왕들이 끌려가는 행상이 부조되어 있습니다(암 4:2),
즉 에살핫돈의 비석에 부각(腐刻)된 그림에는 정복자가 애굽의 디르하가와 두로 왕 발로의 코에 끈을 꿰어 그 끈을 쥐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로 보아 훗날 므낫세도 앗수르왕 에살핫돈에게 이런 모습으로 끌려간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대하33:11).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 본절은 7절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서로 연관된 듯합니다.
2. 유다 족속을 향한 말씀(29~34절)
1) 유다를 지키실 것을 약속하심(29~31절)
(1) 하나님의 약속은 유다의 초목들의 회복을 징조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29절).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본절에서부터는 히스기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사 환난 가운데서 유다 백성을 지켜 주실 것이니 그들이 안연(晏然)히 거하게 돼리라는 약속입니다.
스스로 자라난 것.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파아흐'는 '넘쳐흐르다'
라는 뜻의 기본형 동사 '사파흐'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이는 다름아니라 씨를 뿌리거나 경작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식물의 씨주머니에서 씨가 터져나와 땅에 떨어져 자라나는 곡식을 가리킵니다.
그것에서 난 것.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히쉬'는 위에서 언급된 '
스스로 자라난 것'이라는 뜻의 '사파아흐'와 동의어입니다.
한편 유다 백성들이 첫 해와 그 다음 해는 자연적으로 자라난 식물을 먹고 제 3년에 가서야 비로소 경작한 식물을 먹게 될 것이라는 본절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다음과 같이 견해가 다양 합니다.
① 제 1년과 2년은 각각 안식년과 회년(레25:5)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따라 그렇게 명령했다는 것입니다(Rawlinson).
② 앗수르 군대가 패망한 것(35절)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해에 일어난 일이 아니며 2년이 지난 후에 앗수르가 퇴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언했다고 보는 견해입니다(Keil).
③ 앗수르는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그 해에 바로 물러났으나 그동안 땅이 황무하게 되었고 또한 많은 백성들이 잡혀갔거나 죽거나 도망갔기 때문에 정상적인 회복을 하는데 약 2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Bahr).
우리는 이 세 가지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이 꼭 옳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3년 되는 해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볼 때 이는 분명 제 3년 되는 해에는 전쟁의 상흔(傷痕)이 자취를 감추고 이전과 같은 풍요함을 누리게 된다는 예언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회복의 예언은 확실히 히스기야에게 큰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2) 농사 이미지를 통해 유다의 남은 자들도 회복될 것을 약속하십니다(30절).
“[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 – 앗수르의 침입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의 예루살렘 침입과 마찬가지로(16:5;사 7장) 유다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절에서는 그 같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건짐을 받은 '남은 자'가 다시 하나님 앞에서 견고히 서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 이는 곧 유다가 앗수르의 침입에 의해 멸절되지 않고 다시 번영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은 요시야 왕치세 때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23:1-25).
(3)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보증으로 하나님께선 자신의 이름을 거십니다(31절).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본절은 반복법을 사용하면서 유다의 구원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즉 산헤립의 침입으로 인하여 시온 산과 예루살렘 성안으로 피신했던 유다 백성들이 이제 다시 성에서 나와 각기 처소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 동일한 표현이 사9:7과 사37:32에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유다백성의 구원의 근거가 여호와의 열심에 있음을 단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그런데 그 같은 열심은 당신 백성들과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련됩니다(슥1:14)
2) 앗수르가 처들어오지 못할 것을 약속하심(32~34절).
(1) 앗수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32절)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본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는 앞에서 언급된 모든 내용의 결론 부분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성을 지키시고 앗수르를 징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유다 백성들이 있는 그 성에 대하여 어떠한 해도 끼칠 수 없다고 못박고 있습니다.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 당시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키는 3단계의 과정을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즉 당시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첫 단계는 공병(工兵)을 엄호하며 화살을 쏘
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방패를 앞세운 공병대가 접근 사다리를 세우며 마지막으로 성을 공략하기 위해 성벽에 마주 대하여 토성을 쌓고 공성추를 설치하였습니다.
(2)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격은 고사하고 성에 오지도 못하고 되돌아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3절).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오던 길로 돌아가고. - 이는 여호와의 말쏨이시라.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확인시켜주십니다.
이사야의 이러한 강조적인 선언은 18:19의 '대왕 앗수르 왕의'과 본장 10-13절에 언급된 산헤립 왕의 말과 잘 대조가 됩니다.
(3)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시는 이유는 여호와 자신과 여호와의 종 다윗 때문입니다(34절).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본절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믈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①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 예루살렘의 구원은 유다 백성이나 히스기야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제 1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에게 영광 돌리기를 바라십니다(고전10:31).
② 다윗을 위하여 : 이것은 다윗의 개인적인 신앙을 기리는 말이기 이전에 그와 맺은 언약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상하7:12,16).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은 오늘날 그리스도롤 통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관계를 맺은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됩니다(마26:28;히13:21)
이것은 우리 신앙의 기반이 우리 마음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합니다.
3. 말씀의 성취(35~37절)
1) 여호와의 전쟁으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만5천명을 죽였습니다(35절)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본절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본장의 클라이막스 부분으로서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7절)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이와 관련 헤로도투스(Herodotus)와 요세푸스(Josephus)도 산헤립이 유다에서 퇴각한 것은 분명히 어떤 극심한 재난 때문이었다고 천명(闡明)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angle of the Lord)는 애굽에서 장자를 쳤던(출12장) 천사이자 다윗의 인구 조사 때 이스라엘에 온역을 내렸던 바로 그 천사(삼하24:15,16). 하나님께서 이제 앗수르를 징계하시기 위해 앗수르 군대에 그 천사를 보내신 것입니다.
십 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 이 수치로 볼 때 당시 앗수르 군대의 규모를 능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처럼 앗수르의 군인들이 일시에 십 팔만 오천명이나 죽은 데 대해서는 역병, 광야의 돌풍, 구스 왕 디르하가(9절)의 기습 등 여러 가지 까닭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추측에 불과할 뿐이고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결과였다는 점입니다.
2)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자랑하던 군대를 잃은 산헤림은 돌아갔습니다(36절)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 니느웨(Nineveh)는 티그리스 강 건너편 동쪽 언덕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곳은 B.C. 12세기부터 주목을 받긴했으나 그곳이 일약 앗수르의 수도(首
都)로 발전한 것은 산헤립 때부터였습니다.
한편 산헤립은 귀국 후 이곳에서 상당한 기간을 지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거하더니'(야솨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바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산헤립이 죽을 때까지 다시는 유다에 대하여 어떠한 새로운 원정(遠征)도 획책하지 않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3) 그곳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당하고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됩니다(37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 여기 '니스록'(Nisroch)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독수리 신으로 보고 있으나(Keil) '니스록' 과 '독수리'(네쉐르)는 어원학상 너무 거리가 멀어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습니다.
요세푸스는 '니스록'을 신명(神名)이 아닌 신전 이름으로 보고 있는데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헬라어로 옮기기를'아라스케스'라고 하였습니다(Keil &Delitzsch).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 아드람멜렉(Adrammelech)과 사레셀(Sharezer)은 에살핫돈(Esarhaddon)과 더불어 산헤립의 아들들입니다(사37:38).
그런데 산헤립이 자기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니 참으로 비극적입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산헤립의 죽음을 B.C.681년경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습니다.
산헤립이 암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그의 손자인 앗술바니팔(Asshurbanipal)의 비문에 어느정도 나타나 있기는 하나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에 따르면 에살핫돈은 산헤립이 죽은 후 후계자 계승 문제를 놓고 암투를 벌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에살핫돈은 산해립의 가장 어린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인 다른 형제들과 싸운 것입니다.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 아라랏(Ararat)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상단에 위치한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입니다.
이곳과 관련해서는 과거 노아 홍수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문 사건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창8:4).
그런데 산헤립을 시해한 그 아들들은 결국 아라랏에서 에살핫돈에게 잡혀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에살핫돈(B.C.681-669)은 자기 아버지 산헤립이 다하지 못한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애굽의 멤피스까지 함락시켰습니다. 유다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지독히 악랄한 통치자로 여겨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므낫세의 통치기간 중 유다를 침공하여 므낫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밸론으로 끌고 갔기 때문입니다.(대하 33:11).
니느웨에서 발견된 B.C. 8세기 무렵의 한 편지에는 '유대인들이 은 10마나를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바, 여기에는 므낫세의 이름도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유다와 베냐민 족속의 상당수를 포로로 잡아가거나 강제 이주시켰습니다(스4:2).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괴릅혔던 그는 애굽 내지(內地)에서 얼어난 반란을 진압하던 중 병사했으며, 앗술바니팔이 그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산헤립의 오만을 심판하십니다(20~28절).
그가 시온을 조롱하고 하나님까지 비방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일어나셨으니 시온이 산헤립을 비웃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온 세상은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산헤립이 자기 힘으로 여러 민족들을 정복했다고 자랑했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가 승리에 취해 오만해져서 하나님의 백성까지 넘보지만, 산헤립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오만한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입니다(27,28절).
2) 유다의 완전한 회복과 보호를 약속하십니다(29~34절).
산헤립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황폐해진 땅이 회복될 때까지 백성들의 삶을 세심하게 돌보십니다.
3년째에 땅을 회복하여 경작하게 하시면, 백성들이 일상의 삶을 정상적으로 누리고, 그 땅에 깊이 뿌리내리며 번성할 것입니다.
방해 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입니다.
반면, 앗수르는 예루살렘 성 근처에도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군대가 활 한 번 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과 다윗과 맺은 언약을 위해 예루살렘 성을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열심’이 교회와 성도들을 모든 악으로부터 지켜냅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이 그날 밤에 즉각 성취됩니다(35~37절).
막강해 보였던 앗수르 군대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산헤립은 빈손으로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기고만장하고, 세상에 두려울 것 없던 산헤립이 그 힘의 근원이던 군대를 모두 잃고 쓸쓸하게 돌아옵니다.
누구도 패전한 왕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니느웨에서 자신의 두 아들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참조. 이사야 37장 38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어도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잃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기도 : 힘과 지위를 자랑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