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기도는 원래 교회의 전통에 비추어 그리 익숙지 않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 중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오늘날의 교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말이다. 이는 지난 세기의 초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오순절 운동’과 그 운동의 여파로 모든 교파를 초월하여 생긴 ‘은사운동’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지성에 호소하는 신앙’이라는 반신비적인 스콜라적 전통은 ‘듣는 기도’ 그 자체를 신비적인 행위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이를 봉쇄하였다. 또한 중세이래로 교회의 전통에서는 모든 기도란 교회의 성례와 공식 기도문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면면히 이어져온 ‘듣는 기도’의 전통
그러면서도 ‘듣는 기도’는 지난 교회의 전통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통하여 은밀히 시도되었다. 그리고 그 경건의 훈련과 방법이 중세의 수도원적 전통과 성화와 경건한 삶의 훈련을 통하여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지난 기독교 전통을 통하여 거룩한 성도들의 경건한 삶을 통하여 얻어진 ‘듣는 기도’의 훈련은, 특히 평신도 시대를 맞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자 관심사가 아닐 수 없게 되었다.
‘듣는 기도’가 중세 이래 원천적으로 봉쇄된 것은 제도교회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초대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의 증거를 소지한 자와 그 은사의 역할의 비중에 따라 그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21세기 이래 교회의 직무는 서서히 은사 중심으로부터 세습적 전통으로 바뀌어 갔다. 복음 1세대가 사라지고 다음 세대가 교회를 이어갈 즈음 그들이 필요하였던 것은 교회를 불신앙의 세대로부터 보호하고 변증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교회의 주된 관심은 ‘지성에 호소하는 신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말시온과 발렌티누스의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한 연합’이라는 신비적 합일사상은 상당한 영향을 교계에 미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후에 ‘사막의 교부들’이 등장하기까지 그들의 중심 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2.제도교회의 등장과 함께 원천봉쇄
교회가 ‘듣는 기도’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은 신앙을 지성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세우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로 분류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여겨졌던 사람들이 교회에 미친 ‘해악’ 때문이었다. 그들은 교권을 전적으로 부인하였고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한 교제를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이는 제도교회가 지닌 성직의 직제인 ‘거룩한 하이라기’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거룩한 카톨릭교회를 전면 부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모든 종류의 ‘듣는 기도’로부터 돌아서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은 교회와 하나님의 만남이 중재된 ‘예배’와 ‘공식기도’를 통하여만 확인이 되었던 것이다. 카톨릭교회가 그렇게도 성례와 공식 기도서를 중요시 여겼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성례와 공식 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신앙은 여전히 카톨릭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후기 스콜라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던 개신교에서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전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기 개신교의 신조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듣는 기도가 아닌 ‘아뢰는 기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은 공식기도문을 통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공식기도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교회는 교회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가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기도 중 묻는다’는 말의 뜻이 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개신교회는 말씀을 강조한 나머지 ‘말씀 그 자체가 스스로 말한다’는 ‘조명이론’을 말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훈련은 성서를 읽을 때만이 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1918년 모든 보수주의 신학을 대표하였던 구 프린스톤신학의 대부 위필드의 주장대로 ‘모든 은사와 듣는 기도는 사도적 표적으로서 사도시대에 끝났다’고 하는 후기 스콜라시대의 명제에 의하여 완전히 갇혀버리고 말았다.
3.전통부활을 시도한 ‘사막의 교부들’
그러나 ‘듣는 기도’에 대한 전통이 기독교사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시대에는 하나님께 묻는 기도와 즉각적으로 응답되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교회가 이러한 내적 체험을 잃어가고 있을 때 ‘사막교부들’은 이러한 교회의 전통을 다시 일으킨 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A.D.325년)DLFO 교회는 점차 영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때맞추어 교회 안에서는 자성의 소리가 높아갔고 뜻있는 교부들은 자신의 영성을 위하여 아프리카 사막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으로 택하였던 것은 ‘명상’과 ‘관상’의 길이었다. 바로 이 명상과 관상의 방법이 오늘날 우리가 소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기도의 방법이며 또한 ‘듣는 기도’를 희미하게나마 교회 전통으로 남도록 하였던 것이다. 버나드, 프란시스는 중요한 명상과 관상을 통한 ‘듣는 기도’의 전통을 남긴 사람들이었다.
반신비주의 전통에 입각한 모든 성서주의적 전통은 20세기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지난 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초교파적인 은사운동으로 퇴색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성서를 강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반은사주의를 성서가 표방하는 입장이라고 잘못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
4.‘명상과 관상’을 통한 훈련
그러나 지난 세기 후반에 .카톨릭 전통으로부터 개신교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은사주의 운동은 새로운 기도의 방법을 부활시키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교회의 전통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명상과 관상을 통한 기도 전통의 부활이었다. 이는 곧 ‘듣는 기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카톨릭 전통에서는 노틀담대학 교수들에 의해 전통적인 방법대로 명상과 관상을 통한 ‘듣는 기도’가 개발되기 시작하였고, 개신교에서는 리차드 포스트에 의해 역시 명상을 통한 기도의 필요성이 외쳐졌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난 세기말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존 웜버와 피터 와그너, 그리고 챨스 크레프트 등에 의한 기도 중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을 들려주심 내지는 마음에 조명되는 빛의 가르침이라는 방식을 통하여 ‘듣는 기도’는 개발되고 있다.
개신교에서의 ‘듣는 기도’의 전통은 카톨릭의 그것과는 약간 달랐지만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기도 훈련 방법으로서 명상과 관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명상과 관상은 우리생활의 외적인 분주함으로부터의 신앙적인 격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명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그 뜻을 묻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녀 테레사 수녀가 언급했듯이 ‘관상’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이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심을 그 분에게로 집중시키는’ 것, 곧 듣는 기도를 의미한다. 특히 ‘관상’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에 주의 은총의 약속을 기다림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명상기도와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림을 의미하고 성삼위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들의 마음에 더불어 이루어짐을 뜻한다.
우리의 마음에 오시는 예수의 영이 내재하시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명상과 좀더 깊은 단계에서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라는 관상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한 ‘응시’, 하나님 말씀을 ‘청종함’, ‘침묵’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수용 등을 배우게 된다. 결국 명상과 관상은 ‘듣는기도’의 실천적인 방법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 음성은 성경을 읽을 때,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그리고 기도 중에 명상과 관상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듣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하고 듣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게 된다. 이 모든 일들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아름다운 신앙의 한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때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즈음하여 듣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교회사를 돌아보면 듣는 기도는 사도시대 이후 제도교회가 생겨나면서 언제나 소수의 구별된 사람들에 의해 그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을 발견하게 된다. 스콜라적 전통이라는 ‘지성 우위’의 시대와, 중세 카톨릭의 엄숙한 교권주의적 풍토 속에서 비판되고 봉쇄되었던 듣는 기도의 전통이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막의 교부들’을 비롯한 이들 소수의 덕택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모든 시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즈음하여,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아름다운 신앙의 한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은혜의 때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복락이다. 듣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할 책무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