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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에 흐르는 밤의 노래 / 신작 단편소설. 김시화
1
동강에는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초승달이 떠 있었다. 비는 가랑비였다. 초승달과 가랑비의 어우러짐이 강의 분위기를 신비한 환상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현준은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려 동강 유역인 제장이라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강에 부드러운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마치 바다의 작은 백사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현준은 그곳에 앉아 배낭에 잔뜩 넣어서 가지고 온 댓병 소주중에 한병을 꺼냈다. 배낭에는 참치캔이 몇개 들어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현준은 댓병 소주를 병채로 한모금 마셨다. 뱃속에 소주 특유의 쓴맛과 뜨겁고 거북하면서도 짜릿한 액체의 맛이 전해졌다. 강변의 모래사장 위에서 혼자 술을 마시지만 쓸쓸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혼자서 지내는데 익숙해진 그의 삶이 그렇게 느끼게 하기도 하였고 또 배낭 속에 들어있는 혼자서는 다 마시기 어려울 정도의 소주의 양이 그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현준은 모든 것에 지쳐버려 세상의 잡다한 일을 다 잊고자 동강의 제장을 찾아왔다. 그저 강에 의지해 혼자 술을 마시며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고향집도 들르지 않고 근처에 있는 동강을 찾아왔고 이곳에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그 방향을 찾아보고 싶었다. 이런 것에 꼭 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만 마음껏 마시고 내일부터는 술을 끊을 결심을 하였기에 마지막 술이라 생각하고 꼭지가 돌때까지 마셔볼 생각이었다. 됏병에 든 소주를 몇모금 더 마시고 그는 참치캔을 뜯으려 하다가 관두고 그냥 강물을 오른 손바닥을 오무려 두번 퍼 먹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강물로 안주를 한다는 것은 몸에는 별로 안좋겠지만 어떤 낭만과 처철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현준은 시인이었다. 술을 마시며 시상을 떠올려보고 만약 떠오른다면 배낭 안의 노트를 꺼내 적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낭만은 물밀듯이 밀려오는데 시상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강변의 분위기에 잠겨들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생각해봤다. 마치 누더기 옷처럼 여기저기 헤어지고 터진 상처가 너무 많았다. 현준의 시는 비극적이면서 철학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거기에 묘사가 잘 가미되어 있어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름 있거나 명망높은 시인이 아니라서 시로 돈을 벌거나 어디가서 강연을 하거나 그러지는 못했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면서 공사판일, 농장일, 식당일......, 이런저런 일들을 닥치는대로 하면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현준은 결혼도 하지 못했고 어디 한군데에 정착하지도 못했다. 삶은 현준에게 언제나 벅차고 힘들었다.
저무는 강에서는 유난히 하늘이 가까웠다. 하나둘씩 떠오르는 별들이 손에 잡힐듯 했다. 그런 가운데 내리는 가랑비는 좀 차가웠지만 저녁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의 낭만을 더 잘 느끼게 해주었다. 현준은 서서히 술에 취해갔다. 안주를 동강 물로 마시다보니 아무래도 더 빨리 취기가 올랐다. 그는 취해감에 따라 예전에 동강에서 뗏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했던 여인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 그가 아는 이름은 '전산옥' 한사람 밖에 없었다. 그녀 말고도 이름 없는 수많은 들꽃들이 동강에서 피고 지고 하였을 것이다. 현준은 그녀들과 술대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지금 없고 그는 점점 더 술에 취해서 만취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제장의 모래사장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2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현준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보니 아리따운 여인 둘이서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비녀를 꼽고 있었다. 둘중에 약간 키가 작은 여인이 말을 했다.
"어머!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이렇게 잠이 들다니. 너무 외로워 보이네요. 우리 같이 한 잔 해요."
"누구세요? 저는 처음 보는데......'"
"우리는 오래 전에 동강에서 떼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했던 여인들이예요. 가끔 동강 밤하늘을 맴돌며 시간을 보내곤 하는데 이렇게 혼자 앉아서 너무 쓸쓸하게 술을 마시는 걸 보고 같이 대작해주러 왔어요. 나그네님. 어떠신지요?"
현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세상사람이 아니라는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으로 변해서 그에게 온 것인지 너무나 의아했다.
그는 무엇엔가 홀린듯이 그녀들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세상의 여자들보다 더 아름다웠고 요염했다. 한여인은 이름이 모연이었고 다른 한 여인은 설화였다. 모연은 체형이 아담한 옛여인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얼굴 역시 수줍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설화는 키가 크고 다리가 길었으며 얼굴 역시 이국적인 느낌의 미인이었다. 그녀들은 독하고 맛없는 소주는 그만 마시라 말하고 어디선가 호리병을 꺼냈다.
"나그네님. 이 술한 잔 들어보세요."
설화가 먼저 그 술을 현준에게 따랐다. 현준은 말없이 그 술을 받고 조용히 들이켰다.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맛이 그의 미각을 자극했다. 그 맛은 이승의 것이 아니었다.
''나그네님. 제 술도 한 잔 받으셔야죠.''
이번에는 모연이 현준에게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 그녀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현준은 그녀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생전에 그녀들은 동강의 꽃이었다. 외롭고 힘든 뗏목꾼의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고 정선아리랑을 기가막히게 잘 불렀다. 현준은 그녀들에게 정선아리랑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모연과 설화는 구슬프고도 애절하게 정선아리랑을 불렀다. 그녀들의 삶이 녹아있는 노래를 들으며 현준은 자기도 몰래 눈물이 나왔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도록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라네.
돈 쓰던 사람이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 맞은 국화라
놀다 가세요. 자다 가세요.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띄어 놓았네.
만지산의 전산옥(全山玉)이야
술상 차려 놓게나.
풍류가 기가 막힐 정도로 감정에 휘몰아치는 그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현준은 자신의 삶이 하나 둘씩 펼쳐졌다.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세 떠올림이 멈춰버렸다. 그것은 아버지와 동생에 관한 것이었다.
현준의 아버지와 동생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도 같이 사고를 당했는데 혼자만 살아남아 말로 표현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지니고 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또 그가 괴로운 것중의 하나는 삶의 꽃이 막 피려는 동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데려 갔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우연한 사고로 그렇게 되었지만 만약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현준은 그 신을 저주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사고의 기억은 끔찍하고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지독한 트라우마를 잘 견디는 편이었다. 일상에서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오히려 잘 웃고 쾌활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사고의 기억이 그를 엄습하면 한참동안 우울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트라우마라는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악몽 같은 것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 그들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 위로하고 같이 울고 같이 웃는 시간이 지나갔다. 두 여인중 모연은 자신이 살아있는 몸이라면 현준을 하룻밤 모시고 싶다는 얘기를 하였다. 현준은 마음은 잘 받겠다고 말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서 그녀들이 갈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내세에서 다시 볼 것을 약속하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3
현준은 그녀들과 헤어진 후 깊은 상념에 잠겼다. 죽은 후에 자신의 삶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장소를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현준 자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형태나 차원만 바뀌는 것이라고 현준은 생각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현준은 어떤 인기척 같은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개의 빛이 보이더니 그 빛은 점점 더 가까워 졌다. 마침내 그 빛의 모양을 현준이 인식할 수 있을때가 되었을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생을 마친 아버지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현준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 곧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버지! 민준아! 여기 동강에서 이렇게 다시 보다니......,"
현준의 아버지와 동생도 잠시 말을 못잇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잠시후 셋은 손을 꼭 잡은 후 서로를 포옹했다.
"아버지! 제 혼자만 살아 남아서 항상 미안했어요. 민준아! 내가 죽고 너와 아버지가 살았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너는 사법고시에 합격했을테고 아버지는 집안을 계속 잘 유지시켰을텐데......, 나는 살아서 뭐하나 제대로 한것이 없다."
"현준아! 이 아비가 죄인이다. 내 운전실수로 민준이는 나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고 너는 홀로 살아남아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게 된 것이 다 내탓이구나."
"형! 처음엔 나도 세상을 그렇게 떠난 것에 대한 한이 많았는데 이제는 괜찮아. 우리가 사는 곳은 외로움도 고통도 없는 곳이야. 죽음도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원없이 하면서 살고 있어. 그곳에서 아버지는 여행을 하면서 살고 있고 나는 학자가 되어 책을 쓰고 사람들을 가르쳐. 그러니 이제 죄책감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그래야 우리도 마음이 편해."
현준은 아버지와 동생의 말을 듣고 마음이 한없이 편해짐을 느꼈다. 죽은 가족의 마지막 모습 같은 것이 그를 아프게 하였는데 지금 두사람은 생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다른 세상에서의 행복한 삶을 얘기하고 있었다.
잠시후 그들은 평평하고 넓적한 돌을 주워서 다른 세상에서 가지고 온 고기를 구웠다. 술도 다른 세상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술은 이세상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마셨던 지상의 술을 숙취도 없이 깨게 한 다음 새로운 술취함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 술은 황홀함과 기쁨의 감정을 불러 일으켰고 그 맛 또한 마치 꿀처럼 맛있는 과일을 먹는 느낌이었다.
"현준아!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네가 아파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슬펐단다. 얼마나 그 트라우마가 너를 괴롭혔을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이제 우리가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픈 마음을 내려놓고 행복하게 살다가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아버지! 저야 그래도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의 맛도 보면서 살아갔지만 아버지하고 민준이는 한순간에 불귀의 객이 되어서 너무나 갑작스레 고통스럽게 생을 마쳤으니 얼마나 원통하고 한이 맺혔겠습니까. 저는 그것만 생각하면 그 사고에서 제가 대신 죽고 아버지와 동생이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이제 그만 그런 마음을 내려놓거라. 그것은 운명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절대 현준이 네 탓이 아니다. 우린 그렇게 가야 할 운명이었고 너는 살아나야할 운명이었던 거니까. 그러니 이승에서 남아있는 너의 생을 우울과 방황에 빠지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참 너는 시인이 잖니.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너의 시를 읽고 감동을 많이 받고 있단다. 너의 시에는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같은 깊은 철학이 있고
랭보와 같은 천재성이 있고 기형도와 같은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존재한단다. 현준아! 너는 실제 네 작품의 수준과 작품성에 비해 세상에서 인정을 제대로 못받고 있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네 시를 인정해 줄날이 올거다. 그리고 너는 시외에도 시조, 수필, 소설, 아동문학까지 문학의 많은 영역을 넘나들며 글을 쓰고 있으니 그것은 아비가 생각할때 현준이 너가 문학에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여겨진단다.
현준아! 이제 술을 그만 마시고 건강을 회복해 작품에만 매진한다면 걸작도 쓸거라고 아비는 생각한단다."
"아버지! 전 아버지가 생각하신대로 그렇게 훌륭한 시인이나 작가가 아니예요. 그냥 좋아서 쓸 뿐 별로 대단한 건 없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좋게 얘기해 주셔서 저는 기뻐요."
"형! 나도 아버지 생각과 같은 생각이야. 우리 집안엔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는데 형이 최초로 문학을 해서 참 기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라는 명언이 있듯이 형은 자신을 잘몰라서 그렇게 얘기하지만 분명히 형은 문학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해. 형의 작품을 읽으면 작품성이 뛰어나고 그 깊이와 어떤 카타르시스가 강렬하게 존재해. 그러니 어쩌면 천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거야."
현준은 대화를 하면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졌다. 세상이 그의 문학성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가족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앞으로 문학에 더욱 전념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들은 다른 세상 고기를 구워 술과 함께 먹으며 생전에 여러가지 추억들을 이야기 했다. 현준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제 그만 떠돌아 다니고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제서야 현준은 나이드신 어머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일하느라고 정작 어머니에게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이제 방랑을 끝내고 어머니 옆에 정착하여 무슨일이든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현준의 어머니 입장에서도 불의의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상황이라 그 충격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컸을 것이다. 어쩌면 직접 사고를 당한 현준보다도 더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을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곧 그 충격을 이겨내고 힘든 삶을 극복하며 헤쳐나갔다. 방황하고 힘들어 했던 것은 어머니 보다도 현준이 그랬다. 그의 어머니는 유일한 딸인 막내를 농사를 짓고 식당일을 하면서 뒷바라지 하여 대학을 졸업시키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게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하셨다. 현준은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제 방황을 끝내고 어머니 곁에서 일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준비를 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어디선가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준아. 아비하고 민준이는 새벽 닭이 세번 울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단다. 이제 우리하고 헤어지면 어머니 곁으로 가서 머무르기를 바란다.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너를 도우마."
현준의 아버지는 눈물이 글썽한 채로 아쉬운 작별의 말을 했다.
"형! 이제 우리가 가면 다시 보기는 힘들거야. 나중에 형이 생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다시 만날거야.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아주 짧으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엄마 잘 모시고 형도 건강해."
민준이는 웃으면서 얘기를 하였다. 아마도 슬픈 마음을 억누르고 형의 마음이 편할 수 있도록 그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들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을때 두번째 닭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어머니는 제가 잘 모실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는 고향에 가서 뭔가 일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버지! 저 세상에서 여행 많이 다니세요. 민준아! 영겁의 우주시간에 비하면 우리의 생은 짧으니까 내세에서 곧 만날거야. 그때까지 그곳에서 잘 지내기를 바래. 그곳의 학자로서 좋은 연구 많이 해라."
현준이 말을 마치고 곧 그의 아버지와 동생은 손을 흔들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현준은 슬프기도 하였지만 내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에 마음은 편해졌다.
4
아버지와 동생을 떠나보낸 후 현준은 무언가 나쁜 것이 빠져나간 것처럼 행복한 마음이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아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드러내며 혼자 눈을 감고 환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은 것 같은데 갑자기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정신이 번쩍나며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현준은 자신의 온몸에 모래가 묻어 있는 것을 보면서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꿈이 였다는 것을......, 조금은 어리둥절하며 생각해보니 그것이 꿈이였어도 좋았다. 그것은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동강의 두 여인이 현준을 위로해 주었고 아버지와 동생이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꿈은 현실인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였다.
현준은 서서히 동이 터오는 동강의 새벽 풍경을 바라보았다. 제장의 백사장 앞으로 펼쳐진 웅장한 파랑새 절벽으로부터 하방소 까지 쭉 이어져 내려온 기암절벽들과 그 앞을 흐르는 맑으면서 신비한 동강 물줄기가 조금씩 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앞으로 현준이 살아갈 희망을 주고 있었다. 그는 배낭에 남아있는 술을 동강에다가 다 쏟아붇고 이제는 술을 끊고 살아가리라고 다짐했다.
조금 멀리 있는 파랑새 절벽 위에서 새 한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현준은 그 새가 마치 자신 같았다. 자신도 저 새처럼 희망을 갖고 날아야 겠다는 마음을 갖고 현준은 짐을 챙겼다. 길고도 인상적이었던 동강의 밤은 그의 뇌리 속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나중에 현준은 누군가에게 얘기 할 것이다. 그 밤은 진정코 아름다웠노라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