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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 : 예수와 사람의 아들의 수수께끼(월터 윙크)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제5부 유대교 신비주의와 영지주의 속의 참사람
B.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정통파" 신학자들의 보고서
초기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외부 자료는 이레니우스다. 나그함마디 문서들은 영지주의 종파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이름들에 관해서는 기독교 이단 연구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을 통하여 오피아노이 종파를 알게 된다. 이 종파에 의하면 태초에 세 가지 신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처음 빛(the First Light)=처음 사람(First Man),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두 번째 사람(Second Man), 거룩한 영(the Holy Spirit)=여성적인 원리(Female Principle)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여성적인 원리와 교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셋째 사람=그리스도다. 여성에 의한 비극적 퇴화의 결과로 세계가 창조되었으며, 이와 함께 악마와 각종 악도 창조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감화력으로 거룩한 영(聖靈)인 지혜(Sophia)가 처음 사람에게 세 번째 사람인 그리스도를 협조자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칠층천을 내려와서 신랑이 신부를 대동하듯 지혜를 덧입었다. 그녀와 연합하여, 그들은 세례의 순간 예수에게 내렸다. 그 후 예수는 자신을 처음 사람의 아들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게 두고, 그리스도와 지혜는 불후의 시대(Imperishable Aeon)로 옮겨간다.
이레니우스는 또한 발렌티누스 학파의 여러 가르침에 대한 자료의 원천이다. 어떤 발렌티누스 사람들은 구세주가 "사람과 교회의 한 쌍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하며, "또한 그 설명에서는, 그가 말하자면, 강림한 사람인 참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호칭하고...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만물의 시조로서, 시작-이전 혹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보다도 이전의 존재를 '참사람'이라고 부른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러니 이는 위대하고도 숨은 신비, 즉 모든 것 위에 있는 권능,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때문에 구세주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이 학파의 궁극적인 신비는 하느님의 인간성이다. 아마도 그들이 옳았을 것이다.
에피파누스는 발렌티누스 학파에 대하여 약간 다르게 반응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들은 스스로 생겨난 자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가 시게(Sige, "침묵, Silence")와 교합하여 "진리의 아버지를 낳았는데, 완전한 자들이 적절하게도 그를 불러 '참사람'이라고 했으니, 이는 그가 선재하는 출생되지 않은 자에 대한 반대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창발적 특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을 지닌 자다. 이런 사상체계들에 끼친 에스겔의 광범위한 영향을 거듭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나그함마디 문서들 속의 교합에 대해서는 이런 강조점을 찾아볼 수 없다. "정통" 신학자들이 관음증적 환상에 빠졌거나, 혹은 영지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믿는 자들에게 겁을 주어서 영지주의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에피파니우스도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가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한 점을 인용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불린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었다. "영이 없는 것들, 내재적인 세계에 완벽하게 편안함을 느껴서 보다 높은 영역에 대한 동경심을 지니지 않은 자들도 정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바실리데스는 묻는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바실리데스는 "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모든 자들은 돼지들이요 개들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이 나그함마디에는 어디에도 나온 곳이 없는데, 이 말이 진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바실리데스는 진화의 개념을 인간에게 적용한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인간의 발전을 관찰해보자. 이빨들은 출생 후 몇 개월이 지나야 나오고, 성기들은 사춘기에 발달하고, 지성은 수년 후에나 발달한다. 간단히 말해, 성장하는 인간은 점차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이 모든 능력들은 실질적으로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이미 주어져 있다. 역사와 우주의 목표는 "인간들을 드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참된 영적인 집에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그 목적은 "그들에게 자연이 지명해준 장소이지만 그들이 전에는 차지하지 못한 장소를 다시 얻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서 1장을 고려할 때 비슷한 주장으로서, 인간들은 완성된 인간에서는 거리가 먼, 아직 창발적 존재이지만 이런 거대한 차이가 있다(영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는 말이다. 바실리데스는 오직 영적인 인간, 즉 영지(gnosis)에 도달한 자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이에 대하여, 그들의 인간성을 박탈당한 자들, 비인간적인 노동에 시달리느라고, 혹은 잔악한 성장 과정에 의해, 아니면 유혹적인 망상에 의해, 보다 높은 자신이 은폐된 자들, 그런 자들이야말로 "만물을 회복하실 때"(행 3:21)에 그들의 보다 높은 혹은 보다 충만한 자기를 회복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아라비아인 모노이무스에게서 우리는 영지주의의 다른 줄기를 보게 되는데, 즉 나아세니 종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창세기 1장과 에스겔서 1장에 대한 비슷한 성찰들을 보는데, 이는 엉뚱한 우주발생설로 발전되었다. 참사람 같은 한 분(the Human One="Man")이 모든 것이며, 모든 만물의 시작이고, 시원도 없고 썩지 않으며 영원하다. 참사람 같은 한 분의 자손인 그의 아들이 생각이나 의지보다도 더 빨리 생겨났다. 참사람 같은 한 분과 그의 아들은 불과 빛이 함께 생겨났듯이, 시간의 경과도 없이, 의지도 없이, 그리고 사전 고려도 없이, 그렇게 생겨났다. 이 참사람 같은 한 분은 반대의 통합, 즉 하나의 통일체로서 비복합적이며 나누어질 수 없고, 복합적이며 그리고 나누어 질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전적으로 친절하며, 전적으로 평화롭고, 전적으로 적대적이며, 비슷하지 않으며 동시에 비슷하며, 모든 것들을 만들고, 모든 것들을 발생시킨다. 이 단일체(통일체)는 어머니요 아버지다. 이런 완전한 참사람 같은 한 분으로부터 그 참사람의 자손이 나오는데, 이는 "전적인 충만함이 몸의 형체를 지닌 참인간의 자녀 속에 깃들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급이 결여된 골 2:9을 보라). "참사람 같은 한 분의 자손은 위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이오타(iota=i, 그리스어 모음문자), 단 하나의 획(劃)으로서, 충만하며 모든 것을 채우고, 참사람 같은 한 분에 속한 모든 것을 그 자신 안에 갖고 있다."
그래서 모든 영지주의 문서들 가운데서 가장 생산적인 문단들의 하나속에서, 모노이무스는 이렇게 권고한다.
하느님과 그리고 창조물들 같은 것들을 찾으려 하지 말고, 너희 가운데 너 자신을 찾아서, 예외없이 모든 것을 너희 안에 자기 것으로 전유(專有)하는 것이 누구인지를 배워 알고, 그리고 말하라; "나의 하느님, 나의 마음, 나의 생각들, 나의 혼, 나의 몸아!"라고. 그리고 어디에서 슬픔과 기쁨과 사랑과 미움이 오는지를, 저절로 깨어나고, 저절로 잠들고, 저절로 분노하고, 저절로 사랑하는 것을 배워라. 그리고 만일 네가 이런 일들을 숙고하면...너는 네 자신 안에서 네 자신을 발견하고, 저 한 획(i)처럼 하나이며 동시에 많은 것임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너 자신의 나타난 성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과제는 보다 높은 종합 속에 반대되는 것들을 통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높은 종합이 없이는 반대되는 것들이 단순히 정반대 모순들로 되어, 아무런 창조적인 것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 즉 참사람이 바로 그 종합이다. 혹은, 더 나은 말로, 종합하는 자이다. 융은 그 과정을 "초월적인 기능"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말하기를, "초월적인 기능은 목표와 목적이 없이는 진행하지 않지만, 그러나 본질적 인간에 대한 계시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 이오타는 처음엔 "완전한 참사람의 이미지"와 같았는데, 점차 사람의 아들로 넘어걌고("참사람 같은 한 분의 자손은 위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이오타, 단 하나의 획이다"), 그 후에는 신비하게도 믿는 자들에게로 넘어갔다. "너는 네 자신 안에서 네 자신을 발견하고, 저 한 획처럼 하나이며 동시에 많은 것임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너 자신의 나타난 성과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사람의 자녀들은 이리하여 그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온 참사람 속에 참여하게 된다. 그럼 누가 "나의 하느님, 나의 마음" 하고 말하는가? 그 질문에 아직도 대답을 얻지 못했는데, 심층심리학이 탄생했다. 아마도 그 질문은 대답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누가 그 대답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생각들과 장차 이루어질 것에 치명적일 것이다.
"나아세니 설교"도 천상의 아다마스, 모든 것을 만드는 자기-발생적인, 그러나 그가 만드는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은 최초 인간을 말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아세니 종파에 관한 히폴리투스의 자료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참사람과 사람의 아들을 존경한다." 이 사람의 아들은 또한 위대한 사람이라고 불려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었다. 영지주의에서 흔히 그러하듯이, 참사람은 하늘의 인물이고 예수 안에 성육신하였다.
영지주의 문서들이 사람의 아들을 하늘의 인물로 상당히 일관되게 취급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람의 아들을 원형의 영역에 속한다고 인정했다는 것을 가리킨다. 놀랍게도, "참사람, 혹은 원인간 혹은 아다마스"는 "속사람", 즉 인간을 구원할 만한 영적인 요소로서 각 사람 속에 존재하는 "내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페라테스 종파는 나아세니 종파와 가족적 유사점을 지녔는데, 왜냐하면 둘 다 요한 3:14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3:14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모세의 구리 뱀에 비유되었는데, 그 구리 뱀은 모세가 백성들이 뱀에 물리는 것으로부터 보호하려고 광야에 높이 세웠던 것이다. 창세기 3장을 반대로 해서, 페라테스 종파는 뱀을 구세주 인물로 해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모세가 광야에 세웠던 놋쇠로 만든 뱀이 "완전한 뱀"으로서 사람의 아들의 이미지로 바뀌었다.
C. 포이만드레스(Poimandres) 속의 참사람
분명히 기독교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2세기의 포이만드레스는 영지주의 배후에 있던 신화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시 우리는 하느님이 만물의 어버이, 그리고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만들어진 하늘의 원형적 인간으로 설명된 것을 만난다. 창세기 1:27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포이만드레스는 "원형적 인간"이 인간의 모습을 한 "하느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모든 것의 아버지로서 생명과 빛인 누스(Nous)가 그와 비슷한 사람을 낳았고, 그를 그 자신의 아들로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아름다웠고, 그의 아버지의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느님도 실제로 그 자신의 형상을 사랑했고, 그에게 모든 창조물들을 넘겨주었다". 이 "최조 인간"은 자연과 교접하였다; "그래서 자연은 육신들(인간들)을 그 사람의 형태로 낳았다". 그 결과, 인간들이 분열되었으니, 그의 육체 때문에 유한한 생명이요, "근원적 참사람" 때문에 불멸이다. 통상 그러하듯이, 구원은 내면의 "근원적 참사람"에 대한 지식, 육신을 벗어남, 그리고 영적인 세계로의 귀환을 필요로 한다.
4세기의 이집트인 연금술사였던 조시무스는 포이만드레스의 연금술 교훈을 중세기와 르네상스 시대의 연금술에 연결시켰는데, 특히 "참사람"인 신에 대해 그랬다. 조시무스는 최초의 인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를 "내적인 아담" 혹은 "영적 사람" 혹은 "빛"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내적인 아담이 천국에서 통치자들의 설득에 의해 통치자들이 창조한 "외적 아담(육체적인 아담)"을 옷 입어 생명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늘의 원초적 인간은 땅에 있는 원초적 인간의 영혼이고, 각 사람은 하늘의 원초적 인간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그러나 조시무스는 이 원초적 인간과 하느님, 혹은 하느님의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당시에 등장하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땅에 있는 사람들과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제는 없고, 항상 하늘에 속하지만 인간적인 중재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장차 등장할 인종에 대한 희망이었다. 이런 인간의 원형은 야생화들의 들판과 같아서, 가장 가망이 없는 곳에 혹은 감추어진 곳에 씨앗들을 터뜨려 흩어지게 한다.
D. 결론
영지주의 안에서 참사람에 대해 언급한 것들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면, 우리는 "정통주의" 기독교 신학자들과의 중요한 차이점을 곧 발견한다. 후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 말을 사용할 때는, 그것은 보통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 혹은 인간적 존재만을 가리킨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나오는 나그함마디 문서들 속에선, 단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든 문서들이 영지의 기독교적 형태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여하튼 예수에 의해 그 이미지가 주어진 온전함의 원형으로서 참사람의 의미를 보전하는 데 성공하였다.
"위대한 교회"와 영지주의자들이 거의 전적으로 신화화된 예수 속에서 만났기에, 예수의 삶은 완전히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단지 신화적인 윤곽만 살아남은 지경이 되었다. 나그함마디 문서들 속에서도, 신화적 주제들은 화려하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많은 신조들 가운데 단 하나만 언급하자면, 사도신경에서도 비록 보다 소박하기는 하지만, 똑같이 신화적 주제들만 가득하다. 즉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여기에는 하느님의 임재와 지배없는 하느님의 질서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없다. 예수의 치유, 축귀, 지배와 불평등에 대한 논쟁, 가족과 성적 차별과 폭력에 대한 그의 비판, 그리고 권세들에 대한 폭로, 그의 비유들과 기타 교훈들, 그의 생애 전체, 그의 인격과 성품, 그의 희망과 실망 등, 간단히 말해서, 한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든 모든 것이 빠져 있다.
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신학적인 맥락 속에서 참사람에 대해 강렬한 매혹을 지녔던 것만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들은 분명히 인간 예수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예수가 새로운 원형적 이미지로 변혁된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반대로, 나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충분히 회복하여, 우리가 새로운 천년을 위해 기독교의 원래 모습을 되살릴 수 있는 방식으로 그의 존재와 메시지를 새롭게 전망할 수 있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 목적에서, 우리가 관찰한 것은 첫 천년기가 시작될 즈음해서 (인간에 대한) 대규모의 원형적 변종이 폭발한 것이다. 즉, 속사람, 신적인 참인간에게서 태어난 신적인 자녀 등이 그런 원형적 변종인데, 이것은 우리의 참된 자기를 향해 우리를 돌려 세우는 귀소본능적 장치였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또 그것을 어떻게 부적절하게 묘사하든, 이 새로운 영역 이해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으로 그 장면에 터져 나온 것이다.
에스겔의 첫 씨앗과 같은 환상에 근거해서, 유대인들, 영지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 신비가들이 발견한 것은-그들의 심령 깊은 곳에서- 말하자면 참사람과 비슷한 모습의 하느님이었다. 그 하느님에게 부모와 자식처럼 관계된 두 번째 인물이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을 불러 신적인 혹은 내적인 어린이, 메타트론, 사람의 아들, 혹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여러 이름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해두자. 그것은 인간의 의식을 변혁시킬 수 있는 원형이다. 비결은 어떻게 인간적 차원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이런 "보좌관"의 원형적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전통에서도 이 비결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유대인 신비주의에서는 인간 에녹이 그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천사 메타트론이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비록 양성론으로 동시에 신성과 인성을 지녔다고 주장했지만, 인간 예수가 신적 그리스도가 되어버렸다. 사실은 인간 예수가 완전히 가려져버린 것이다.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이 신성에 의해 삼켜져버렸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인간 예수의 어떤 면모들을 살려두었고, 그래서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영적인 각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새로운 예수상과 하느님 이미지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예수의 인간됨은 아직 장식을 달지 않은 옷이라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제왕의 의복(메시아, 그리스도), 궁극적 근본원리의 의복(로고스), 그리고 신의 의복(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으로 다시 옷 입히면서, 그의 육신으로부터 벗겨낼 수 있었던 옷이었다. 나중에, 영지주의에서 예수는 선재(先在)하는 천상의 사람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구세주로, 세트(Seth)로, 혹은 누구라도 떠올릴 수 있는 신화적인 인물로, 그들이 입힌 의복이 되었다.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 나름의 신화를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자들의 신화를 배척했는데, 그들 자신의 신화 만들기 활동들이 자기들이 영지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였던 다른 사람들의 신화와 그 내용만 달랐지 그 종류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바울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미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는"(갈 3:27)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마치 그리스도가 "너희를 새사람 되게 입는" 옷인 것처럼 말이다(엡 4:22; 골 3:9-10도 참조하라).
메르카바 신비가들과 영지주의자들의 천재성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에 있다. 그들의 정교한 발판들은 단지 그들로 하여금 그 진리에 접근하도록 도와주었을뿐만 아니라, 너무나 위대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미스테리들 속으로 거꾸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들과 성찰들이 제공한 유리한 관점으로부터 인간 변혁의 계시가 시작된 것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또한 그들은 이단 사냥꾼들과 종교재판관들의 적대감에 맞서서, 미래의 세대들이 다시 찾을 수 있도록 그것을 보존하였다.
종종 그러하듯이, 이념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때로는 서로간의 반대 입장에서 가장 폭력적이 된다. 말하자면 기독교와 영지주의가 가장 대적(大敵)이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공통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공통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침묵하는 가운데 그 신비의 주변에 함게 모여, 가장 거룩한 실재들의 담지자들로 서로를 존경하기보다는, 이들 쌍둥이 형제들은 서로 상대방이 하느님에 대해 말할 권리를 거부하는 악의에 가득차서 서로를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무너지는 아취에 시멘트로 접합해줄 종교가 필요했기에, 기독교는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부분적으로는 제국의 군대 덕분에 "정통파" 기독교가 완전히 승리했다.1) 오랜 동안 죽은 줄 알았던 영지주의의 석탄이 중세기 알비파(Albigensians)와 카다리파(the Cathari)에서 새로운 불꽃으로 타올랐을 때에도, 그들은 신속히 그리고 잔인하게 진압되었고,백만 명도 더 되는 이들 "이단자들"이 그 "진리"를 수호하려다가 죽임을 당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에 대한 회개와는 거리가 멀어서, 뭔가를 "영지주의적"이라고 깎아내리면, 곧바로 그리고 모두가 동의해서 그것에 의심을 보낸다.
오늘날 영지주의는 약간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영지주의자들과 상당히 의미있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매우 개방적이며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고,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 불교인들, 힌두교인들, 무슬림들, 북미 인디언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과도 형제자매가 되기 시작했듯이, 영지주의 자매형제들로부터도 기꺼이 배우려고 하는 것을 보고 싶다.
진리는 중층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이기도 하다. 영지주의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의 진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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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찍이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발렌티누스 파가 (그들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간섭했다. 그 칙령은 불복종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지 않아서 강제로 집행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회 행사에 정부가 간섭한 획기적인 발걸음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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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영지주의를 본래의 기독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누가 제게 '당신은 영지주의자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예!"
그럼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깨달음의 문학적인 의인화다!"
그럼 예수는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는 말인가?
"예수라는 인간이 실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실재했던 것이다."
헷갈릴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앗, 저와 아주 많이 비슷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