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관한 진담 외 9편
양 선 희
서랍 칸칸이 꽃씨들 넣어 둔다
맨땅에 막 뿌려도 싹트는 꽃씨
아주 오래 침묵하는 꽃씨
한번 뿌리면 매년 꽃 피는 꽃씨
나비 보고 싶다는 사람과
꽃을 사이에 두고
진담만 나눈다
씨앗은 몸속에 회오리바람을 품고 있다
작은 씨앗도
드릴처럼 벽을 뚫는
나선운동을 한다
어둠 속을 뻗어나가는
천 개의 세포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자*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인용
나비를 부른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
꽃삽으로 흙 뒤집고
물을 뿌려
동그라미 밖에서 기다려
주문을 외도 좋아
현란한 날갯짓으로
나비가 올 거야
뱀의 눈
독수리 눈
날개에 단 나비들
나비
나비들
날개 세운다
흙 밀어 올린 손
어둠에 닿았던 손
허공으로 뻗어봐
나비가 네 손 잡고
네가 나비 손 잡고
나비, 나비, 나비
나비, 나비, 나비
그러면……
그러면……
통하자, 우리
숲속에 나무뿌리
뒤엉켜 있대
뿌리들끼리 서로 전기를 주고받는대
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도
전기 보내 살린대
사랑을 나눌까?
꽃을 피울까?
나비를 부를까?
씨앗을 날려 보낼까?
가까이 오렴!
멀리 가!
심장이 떨려!
살아야 돼!
이파리를 흔들어
이파리를 물들여
이파리를 떨궈
나무들 통하는 소리, 좋지?
통하자, 우리도
옛사랑
시 한 편 보내왔다, 젊은 날 떠난 놈이
죽은 줄 알았던 감각 깨어난다
온몸 솜털 일어서고
그 사이사이 빛 스며든다
누웠다, 웃고
걷다, 웃고
약속 잊고, 웃고
미쳤나 싶어, 웃고
너의 웃음 되어줄게
떠난 놈이 청혼 반지에 새긴 말 떠올리며 웃고
외출복 갈아입다 거울 보며 웃고
향수 바꿔 뿌리며 웃고
허파 부풀리는 바람
일상 흔드는 바람
신기하다, 신기해
바람결도 행복한
이 감정 얼마 만이냐
봄날은 간다
이름 그럴싸한 희망
겁 없이 빌렸다
이자가 눈덩이처럼
나를 굴린다
개나리, 샛노래진다
하늘, 새파래진다
희망은
희망은
손으로 뜬 모래처럼
차창 밖으로 휘이익
뭉개지는 바다
제대로 뭉개진다
희망
희망
태풍의 계절
진창에서 홱홱 돌았을 뿌리들
급한 물살 못 견디고 떠내려갔을 뿌리들
다시 뿌리 내려볼 꿈 내팽개치고 싶었을 뿌리들
연이은 태풍에도 전파(全破) 당하지 않은
하천 산책로 걷는다
흙더미 패여 나간 자리마다 드러난 뿌리들
분홍 뿌리, 노랑 뿌리, 갈색 뿌리, 듣도 보도 못한 색 뿌리……
헛뿌리들……
물새들 깃 다듬던 나무들
세찬 물길 따라 납작하게 누워
몸 일으킬 힘 끌어올리고 있다
천변에서
키 큰 풀들
물 흘러가는 쪽으로 쓰러져 있다
물길 따라 태풍 지나간 모양이다
걷다가 자꾸 돌아본다
언제쯤 꼿꼿해질까
지난번에는 얼마 만에 제 자리 돌아왔나
다시 일어설 힘 어찌 키우려나
막막한 시절마다
내게 힘 됐던 친구들 문자
풀들에게
외친다
매일같이 천변 나간다
풀들이 조금씩 몸 일으키는
흔들리며
새순 틔우고
꽃피우고
바람 없으면
사는 게 밋밋해
바람 두려워 마
바람 타고 놀아
풀들이 말한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것은 본의가 아니다
어쩌다 보니 정원에
내가 씨 뿌려 나는 꽃이나 채소보다
내가 씨 뿌리지 않아도 나는 것
더 많아졌다
자책의 낫 들고
태양
바람
흙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우거진
잡초 베어냈다
뒤엉킨 뿌리들 땡볕에 내던졌다
그러고 밥벌이에 정신 팔았다
정원은 또 난리다
새들 풀벌레들 세상이다
고양이는 잡은 쥐 물었다 놓았다 물었다
밥벌이로 녹초 되어
이름 찾아 본 잡초들
살리기로 마음 바꾼다.
어떤 놈 기세가 더 좋은지
어떤 놈이 영역 더 잘 넓히는지
어떤 놈 목숨이 더 질긴지
기록하기로 한다
정원 본 친구 입 떡 벌어진다
와, 너는 잡초를 키우네
신의 영역에 도전하네
나, 신과 맞짱 뜨는 인간
박하
초록색 박하 줄기
길게 자른다
죽은 색들이 정원을 덮기 전
봄, 여름, 가을 내내
박하, 줄기에서
왕성하게 새순 틔웠다
쑥쑥 자랐다
나는 생기가 필요해
박하 잎을 뜯어 하얀 컵에 담고
뜨거운 물 부었다
초록이 점점 선명해진다
내가 갖고 싶은 힘
기죽지 않는 힘
박하, 화병마다 꽂아
볕 잘 드는 창가에 둔다
박하, 박하, 박하
어금니에서
카! 카! 카!
탄성 솟는다
구월정원
시집 한 권 들고
사과나무 밑에 앉는다
태풍
긴 장마
폭염 뒹군
저 붉은 몸들!
새콤 달콤한 몸들!
첫눈 올 때
그 몸
깨물고 싶어
그때 나
다시 시집 펼치리
<산문>
바람을 얻는 방식
가끔 집 근처 초등학교에 간다.
운이 좋을 때는 구球 형태의 빛 덩어리들이 구름 속에서 노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우주의 기를 받으며 밤의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걸을 때 꼭 한 번은 환경의 상태를 알려주는 전광판을 본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풍향과 풍속이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등교하자마자 기상관측용 설비가 든 하얗고 작은 나무집 문을 열고 그날의 기상을 관측했다. 그 백엽상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풍향계였다. 나는 바람의 향방을 예측하는 일이 언제나 재미났다.
여전히 나는 바람이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열광한다.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서 유타주를 향해 갈 때 본 풍력발전기를 잊지 못한다. 바람을 잡느라 내는 거대한 굉음 속에서도 나는 정신이 맑았다. 세도나의 붉은 바위산과 대적해도 모자람 없던 그곳 풍향계들 역시 내 기억 속에서 이색적인 바람을 만든다.
나는 바람을 부르는 도구를 몇 개 가지고 있다. 강철로 만든 내 키보다 큰 풍차, 라다크 산産 오색깃발 타르초tharchog, 이국적인 천에 새겨진 바람의 경전들……. 변화가 필요할 때 나는 폭이 긴 천을 두 개 기둥에 매달아 바람의 통로를 만들며 바람의 길을 본다. 그 길에 의자를 놓고 앉아 눈을 감는다.
내가 이토록 바람을 편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바람만 갖는 역동성 때문이다.
나는 바람결 같은 마음의 움직임에 촉수를 세운다.
이것이 시의 영감을 얻는 나만의 방식이다.
양선희 /경남 함양 출생. 1987년 《문학과 비평》 등단. 시집 『그 인연에 울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