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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총선을 통한 건국
서북청년회와 하지 장군이 화해하다
하지 장군은 항상 서북청년회를 테러리스트로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늘 적대적(敵對的)이었다. 그의 편견은 서북청년회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욱더 굳어졌다.
1947년 봄부터 좌우익의 충돌이 격렬해지자 하지 장군은 러치 군정장관에게 좌익의 민애청과 함께 서북청년회를 해산시키라고 지시했다. 해산 지시는 3차에 걸쳐 내려졌지만, 미군정 경찰의 책임자였던 반공주의자인 조병옥과 장택상의 불이행으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서북청년회 위원장인 문봉제에게도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번에도 반공주의자인 조병옥과 장택상은 그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부하인 수도경찰청의 사찰과장 최운하와 수사과장 노덕술은 문봉제를 체포해 하지 장군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고 했다. 1947년 11월 20일경 그들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찾는다는 거짓말로 서북청년회의 문봉제와 김성주를 중부경찰서로 불러들이고는 구속했다.
서북청년회는 이 사실을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에게 알렸다. 장택상은 중부경찰서에 지시를 내려 즉시 석방하고 서북청년회에 사과하도록 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미소공동위원회 대신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정부를 세우라는 결의를 했다. 그것은 이승만의 주장을 확인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이승만 노선을 따르는 서북청년회에 대한 하지 중장의 태도도 호의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47년 12월 하순, 하지 중장은 통역 이묘묵 박사를 통해 서북청년회 위원장 문봉제에게 만나자는 요청을 해 왔다. 반도호텔에서의 만남으로 하지 장군은 서북청년회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었다.
하지 중장은 1948년 1월 하순에 다시 반도호텔로 문봉제를 불렀다. 그 자리에서 하지는 서북청년회가 설립하는 평화신문사를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의 총선안을 지지
이승만이 일관되게 주장한 한반도 정부수립 방안은 총선거였다. 그러한 이승만 노선을 지지하기 위해 국민회 중심으로 '애국단체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 조직에서 서북청년회가 행동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서울운동장에서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촉구하는 국민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매일 가두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유엔총회가 1947년 11월 14일 총선안을 가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서북청년회가 매일 총선거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중앙총본부가 광화문통(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부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사람이 모이기 쉬운 장소였다.
서북청년회는 매일 정오 사이렌을 신호로 수천 명씩 떼를 지어 종로 일대와 을지로 일대의 골목에서 시위를 벌이며 중앙청 앞으로 모였다. 그들은 녹색의 머리띠와 완장을 차고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들고 "총선거를 빨리 실시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미군정은 그것을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기마경찰과 미군 헌병을 동원하여 저지했다. 그 때문에 중앙청 앞에서는 늘 몸싸움이 벌어졌다.
또한 서북청년회는 총선거가 실시될 경우 월남민들에게도 일정한 수의 국회 의석을 할당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에 따라 460만 명의 실향민을 위한 특별선거구(特別選擧區)의 설치를 요구하는 이북인대회가 1948년 3월 20일 남산공원에서 수만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대회는 백남홍의 사회, 이윤영의 개회사, 문봉제의 결의문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소련의 거부로 38선 이북지역에서 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월남민에게 일정 수의 의석을 배정하여 북한 동포들의 의사를 대변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날 연사로 단상에 올라온 이승만은 전폭적으로 월남민들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는 특별선거구 설치를 유엔에 건의하겠다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김구는 반대였다.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는 한반도를 영구분단으로 이끌 위험이 있으므로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정부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대회장은 김구의 퇴장을 요구하는 소리로 혼란해졌고, 그 때문에 김구는 연설을 중단하고 대회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엔은 이북인 특별선거구의 설치 요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평화신문」의 5.10선거 홍보전
서북청년회는 홍보활동의 일환으로 일간신문의 발행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48년 초 차종연이 주간지 「서북신문」을 창간했다. 그러자 강무학이 즉시 그것을 인수하여 몇 주 안에 수만 부를 판매할 정도로 키웠다. 그것을 보급하는 데에는 대동강동지회의 공로가 컸다. 그들은 신문의 보급에 앞장서 북한과 일본에까지 신문을 보냈다.
북한 출신 가운데에는 신문 발행의 경험이 많은 인재가 적었으므로 서북청년회는 발행 업무를 경상남도 출신의 양우정(梁又正)에게 맡겼다. 양우정은 민족통일총본부 선전부 차장과 국민회 선전부장을 겸임하면서 이승만을 돕고 있었다. 서북청년회는 양우정과 50대 50의 출자 조건으로 1948년 2월부터 「평화신문(平和新聞)」을 발간했다. 제작은 양우정, 경영은 서북청년회가 맡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발행인인 회장은 문봉제가 맡고, 편집인인 사장은 양우정이 맡았다. 부사장으로는 서북청년회의 홍성준, 김성주, 임상걸이 임명되었다. 편집국장은 경상남도 출신의 정국은, 편집부장은 임원규, 장기봉이 맡았다. 영업국장은 서북청년회의 김이협, 이성수 등이 맡았다.
신문 용지로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대형(大型)의 마카오 갱지를 사용했다. 평화신문이 그처럼 좋은 종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지 장군의 후원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거리에서 필리는 가판 부수는 창간 수일 만에 5만 부로 늘어날 정도로 인기가 있었고, 그에 따라 즉시 흑자경영으로 돌아섰다. 서울과 지방에서 서북청년회 지부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신문사 지국이 설치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보급률이 높았던 것이다.
「국민신문」의 족청 비판
그러나 3개월이 지나면서 편집진과 영업진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문봉제와 양우정은 우정에 금이 갈 것을 염려하여 동업을 그만두고 분리했다. 서북청년회는 「평화신문」의 판권을 양우정과 임상걸에게 넘겨주고 1948년 6월에 「국민신문(國民新聞)」을 새로 창간했다.
양우정은 실업가인 임상걸의 자금 100만원을 출자하여 서북청년회 출자액 150만원과 합하여 250만원의 투자로 「평화신문」 발간을 계속했다.
서북청년회가 새로 창간한 「국민신문」은 사장에 문봉제, 부사장에 홍성준과 김성주를 임명했다. 주필은 평안남도 출신의 문인이며 사업가인 주요한, 편집국장은 장인갑(나중에 변영권, 이성수), 영업국장은 김이협(나중에 장인국)이 맡았다.
「국민신문」은 장기봉 기자의 노력과 하지 장군의 협조로 일제시대 을지로 2가에 있던 조선신문사 건물을 인수했다. 조선신문사는 「중앙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등의 좌익 신문들을 인쇄했던 곳으로, 그 인쇄시설은 바로 1946년 5월에 평안청년회가 습격했던 곳이었다.
「국민신문」도 마카오지와 대형지로 발간했다. 전력이 부족한 것이 큰 문제였으나, 하지 장군의 도움으로 발전기를 공급받아 윤전기를 계속 돌릴 수 있었다. 「국민신문」은 서북청년회 지부가 있는 전국 각지에 지국과 판매소를 설치했다.
「국민신문」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족청)을 비판했다. 공산당과 투쟁은 전혀 하지 않고 국가지상과 민족지상의 명분만을 강조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발한 민족청년단은 「국민신문」과 「평화신문」 불매운동을 벌였다.
지방 차원에서 서북청년회가 발행하는 신문도 있었다. 서북청년회 인천지부의 현송은 일찍이 1947년 3월부터 인천신문사를 인수해 운영했다. 서북청년회 제주지부의 김재능은 1948년 6월 「제주신문」을 발간했다.
남북협상 저지투쟁
서북청년회에서는 이승만, 김구를 똑같이 우익의 영도자로 모셨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황해도 출신의 서북파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 더 큰 애정을 표시했다. 이승만도 황해도 출생이기는 하지만 두 살 때 서울로 와서 성장했기 때문에 독립운동 시기부터 서북파가 아닌 기호파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7년 11월 14일 UN총회가 총선거를 통해 한반도에 정부를 세운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다음부터는 두 지도자를 보는 서북청년들의 눈이 달라졌다. 이승만 지지로 바뀐 것이다.
당시 북한의 소련군과 김일성은 선거를 거부했기 때문에 선거는 남한에서만 실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1948년 2월 26일 유엔소총회(유엔정치위원회)는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승만 노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자 북한과 남한 좌익들은 남한에서 선거를 하지 못하도록 결사적인 반대투쟁을 벌였다. 그런데 바로 김구가 김규식과 함께 좌익들의 선거 반대 주장에 찬성하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서북청년회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이승만 지지로 확실히 노선을 결정하도록 했다.
서북청년들은 북한에 가족들을 두고 38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남북 통일정부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북한의 소련군과 김일성이 자유선거(自由選擧)를 거부함으로써 통일정부가 세워질 가망이 없어진 이상, 우선 남한에서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세워 사회혼란을 막고 난 다음 국제사회에 통일을 호소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북청년회는 이승만과 UN의 노선을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구와 김규식이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남북협상을 한다고 평양으로 가려고 했을 때 서북청년회는 강력히 말렸다. 그들은 경교장 앞에 드러누워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김구는 끝내 북행(北行)을 결행하고 말았다. 김구는 정치가로서 살기보다는 혁명가로서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지막 투쟁지가 된 제주도
좌익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가져 올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폭동을 계속 일으켰다. 그 가운데서 가장 파괴적인 것이 이른바 제주4.3폭동이었다.
제주도가 큰 불행에 빠지게 된 것은 해방으로 일본군이 물러간 뒤 미군의 진주가 늦어 좌익들이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으로부터 제주도로 귀환한 교민들 가운데에는 공산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일본군에 징집되었던 학병(學兵) 출신들이 그러했다. 여기에 덧붙여 제주도민은 육지에 대한 뿌리 깊은 배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이용해 공산당(남로당) 제주도 총책인 김달삼과 제주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이덕구는 500여 명의 반란군 부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다. 이덕구도 학병 출신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좌익들은 12개 경찰지서를 일제히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제주 경찰서까지 점령했다. 그들은 관공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우익인사들, 및 그들의 가족을 학살했다. 앞으로 5.10선거를 치르지 못하게 해서 나라를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우해 국방경비대 제9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진압군 안에는 좌익들이 적지 않았다.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도 반란군과 협상을 해보려는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연대장 자신도 학병 출신이었다. 그 때문에 진압군의 작전계획이 좌익들에게 새어 나갔고, 그에 따라 반란세력에 대한 토벌은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러므로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이 제주도로 가서 연대장 김익렬 중장을 심하게 질책하게 되었다. 연대장도 경남 하동 출신의 박진경(朴珍景) 중령으로 바뀌게 되었다. 새 연대장도 학병 출신이었다.
연대장이 바뀌면서 공비 소탕작전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9연대 안의 좌익 군인들이 그날 승진한 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살해했다. 군인들도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제주도에 700명 파견
그러자 1948년 4월 6일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서북청년회 위원장 문봉제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에게는 사상적으로 믿을만한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김연일(金連一)이 이끄는 서북청년회 경북도본부 소속의 200여 명이 최치환 경감을 따라 제주도로 출발했다. 전투경찰 자격이었다.
6월 초에는 제9연대장으로 새로 부임한 송요찬 중령이 김재능 서북청년회 제주지부장을 앞세우고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다. 그 때문에 500여 명의 대원 추가로 파견되었다. 그리하여 제주도에는 서북청년회 대원 700명으로 구성된 보병대대가 형성되었다.
그때 제9연대가 제주도에서 철수하고 함병선 대령의 제2연대가 새로 배치되었다. 그에 따라 서북청년회 대대는 제2연대 소속이 되었다.
제주도에 투입된 국방경비대의 군인들과 서북청년회의 전투경찰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군인이든 서북청년회 대원이든 간에 모두 기본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들도 행진할 때는 군가(軍歌) 대신 '서북청년행진곡'을 부를 정도였다.
그 때문에 주민들에게 진압군은 모두 서북청년회 대원으로 보였다. 그에 따라 폭동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들도 모두 서북청년회의 책임인 것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다.
서북청년회의 5.10선거 보호투쟁
좌익들은 남한에 정부를 세우게 할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사회혼란을 일으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그들이 '2.7구국투쟁'으로 부른 1948년 2월 7일의 총파업에서 5월 10일의 선거까지 사용한 폭력으로 피해는 막대했다.
그들은 경찰서와 경찰지서를 습격해 파괴하고 총기와 실탄을 빼앗았다. 또한 관공서와 선거사무소들을 파괴하고 우익단체들의 건물과 우익인사들의 집을 불살랐다. 그리고 철도시설을 파괴하고 전화선과 전선을 잘랐다. 사망자도 145명에 이르렀다.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은 제주도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좌익들의 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로운 선거 분위기를 보장한다고 좌익 수감자 600여 명을 석방했다. 남로당원이라 할지라도 형을 받았거나 수감 중이 아니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좌익들의 공세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우익인사들은 출마 자체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북 영천 갑구와 을구에서는 후보등록이 임박할 때까지 출마 희망자를 찾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서북청년회 위원장인 문봉제를 무투표로 당선시킬 터이니 구두로 승인만 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결국 영천에서는 국민회 지부장 정도영 등 2명이 출마해 무투표로 당선되기는 했다.
좌익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48년 5월 10일에 총선거는 무사히 치러졌고, 그 결과로 5월 31일에 제헌국회가 소집되었다. 그에 따라 7월 17일에는 헌법이 제정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