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처럼, 우리는,
육체를 갖고, 육근이 있으니까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청년처럼 잘못을 잘못으로 버려두지 않고,
자기 마음의 본성을 확실하게 갖고,
아욕을 버린 방향으로 행동하여 나아간다면,
누구라도 반드시 신리에 도달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근을 시작으로 하여, 자신의 마음에도,
올바른 도(道)를 확실하게 밟아가는 수행이,
자기 자신을 진보시켜 가게 되는 것이다.
종종 세상 사람들 중에,
나는 자기비판을 했다고 하는 식으로 기사가 신문에 실리는 일이 있다.
그러나 신리(神理)에 맞는 자기비판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반성이어야 한다.
그것을 왜 밖으로 나타내는 것인가.
또 그것은, 특정한 사상 통일을 위한 자기비판이라면,
오히려 무의미하다.
마음은 속박 장애가 없어야 하며,
마음에 사상적인 한계를 만들어 버리면,
그것은 인위적인 조직을 위한 자기비판밖에 되지 않는다.
참된 마음의 반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조직을 위한 자기비판은, 인간성을 잃는다.
인간로봇이 되기 위한 반성밖에 지나지 않는다.
모순이 많은 사상 통일을 위해 세뇌하는 자기비판에는,
엄격한 조직상의 틀이 있어, 마음을 잃는다.
지식만의 반성밖에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근본이 잘못된 자기비판은,
조직의 세포로서의 사고에 지나지 않고,
본래 인간의, 각각의 생명의 자유자재를,
스스로 포기하도록 되는 것이다.
정신적 폭력, 조직폭력이 항상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거의 조직 속에서 자기 보존이 되기 쉽고,
이러한 자기비판은, 마음으로부터가 아니고,
지적(智的)인 이론으로서, 형식적인, 마음을 잃은 반성이다.
이처럼 조직을 위해 만들어 낸 자기비판은,
어느 때인가, 내부로부터 불만이 폭발하여,
조직은 파괴되어 가는 것이다.
조직의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 그 자체를,
잘 바라보고 고쳐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리라.
폭력에 의해 지배했던 자는,
언젠가 폭력에 의해, 멸망되는 것임을,
우리는 마음에 명기해두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입신출세만을 생각하여,
경쟁상대를 추락시켜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한다.
그리고 지위랑 명예를 갖고 권력의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은, 언젠가 스스로의 지(智)에 의해 스스로를 멸망시켜 버린다.
인간은, 한 때의 겉보기만의 화려한 인생을 즐거운 것이라고 하지 말고,
영원의 생명의 자리에 서서,
인생의 도(道)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성은, 어디까지나 행복에의 전제(前提)이다.
자기 자신의 올바른 반성 속으로부터,
신불의 빛은 주어지는 것이다.
반성은,
올바른 이성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다.
이성은, 마음의 올바른 브레이크인 것이다.
이처럼 반성은,
신불로부터 주어진 자비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팔 정 도 ( 八 正 道 )
우리는 전생 윤회(轉生輪廻)하고 있는 생명이며,
신불의 명(命)에 의해 혼의 수행을 하고,
신불의 몸인 이 현상계에 조화된 불국토를 건설할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
그러나 대자연, 만상 만물의 순환 방식이 있어,
어린 나무도 언젠가 노목으로 화(化)한다.
결국에는 노후되어 가도록 정해져 있다.
우리의 육체주(肉體舟)도,
이 정명(定命)처럼, 긴 인생 항로의 결과,
피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는, 노후화한 육체와 이별하고,
새로운 광자체라고 하는 배로 갈아타고,
실재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 초 일 초, 우리는 그 순환의 눈금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다.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에 상관없이 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세에 있어서 후회 없는 생활을 보내야 한다.
생로병사라고 하는 괴로움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에 의해,
마음의 해결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팔정도라고 한다.
이 신리를 깨달아,
매일의 생활 실천에 의해,
깨달음의 제 1 보는 열리는 것이다.
(1) 정견 (正見)
세상을 바르게 본다.
이것이 필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 사람의 행위랑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잘못이다.
현상(現象)을 볼 때도 그렇다.
외견만으로 세상일을 판단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눈은 인생 항로의 타는 배의 부속품으로 생각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본 현상이랑 인상(印象)에 대해서는
올바른 마음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사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다시금 제삼자로서, 자기를 중도에 놓고, 고찰하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또 상대의 마음이 되어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2) 정어 (正語)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언혼(言魂)으로 되어,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다.
표현된 우리의 말은,
상대의 귀를 통해서 부조화든가, 조화든가,
어느 쪽인가의 현상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지나친 아첨이나, 난폭한 언동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그 원인은, 결과로 되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말은, 너무 적어도, 너무 많아도,
자신의 의지를 바르게 남에게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신의 마음에 충분히 물어서,
자기 자신이 상대방의 마음이 되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말은, 상대방의 마음에 부조화를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