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태어난 아이
번역문
의금부에 전지하여, …… 권반(權攀)에게 사급(賜給)한 이식배(李植培)의 딸 귀비(貴非)·귀장(貴莊)·귀금(貴今)과 금년에 낳은 딸을 놓아 보내게 하였다.
원문
傳旨義禁府……權攀賜給李植培女子貴非·貴莊·貴今·今年生, 放送。
- 『성종실록(成宗實錄)』 3년 5월 24일 3번째 기사
해설
단종 2년(1454) 경기 고양(高陽)의 향리(鄕吏) 이식배(李植培)가 참형(斬刑)을 당했다. 바로 직전 해에 역모죄로 죽은 안평대군과 평소 가깝게 지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역모죄의 여파는 참혹했다. 그의 장성한 아들은 교형(絞刑)을 당했고 아내는 남편과 아들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졸지에 부모와 오라버니를 잃은 이식배의 딸들은 관비(官婢)로 전락했고 이후 공신(功臣) 권반(權攀)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러 임금이 세 번 바뀌고 나서야 이식배의 딸들은 종살이를 면하게 된다. 성종 3년(1472)에 역모죄에 연좌된 죄인들의 처벌을 경감 해주라는 왕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성종실록』의 기사는 바로 그날의 기록이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번역하고 있다. 수십 년 전에 완료된 실록 번역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더욱 정확하고 읽기 쉬운 번역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나도 작년부터 이 사업에 투입되어 『성종실록』의 기존 번역을 수정하는 업무를 해오고 있다. 위의 기사는 내가 올해 수정해야 할 기존 번역 중 하나로, 현재 웹 DB에 실린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1년 남짓한 짧은 경력의 연구원에게 번역은 늘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골머리를 앓으며 씨름하다 보면 문득 요행을 바라는 마음도 생기곤 한다. 제발, 이번에 번역하는 기사는 좀 쉬운 내용이길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를 번역할 차례가 되었을 때 100명에 육박하는 사람의 이름이 죽 나열된 것을 보고 나는 드디어 요행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사람 이름은 한자음을 그대로 읽는 것이 곧 번역이므로 당연히 일반 문장의 번역보다 훨씬 쉽다. 더욱이 실록은 기존 번역이 전자 활자로 제공되고 있으므로 이름 같은 부분은 오류가 없는 이상 기존 번역을 그대로 들고 와 형식만 고치면 된다. 쾌재를 부르며 이 선물 같은 기사의 번역을 얼른 해치우기로 했다.
기사의 내용은 ‘죄인 누구·누구·누구 …… 를 어떻게 처리하라.’라는 지시의 반복이라 단순했고, 기존 번역에도 딱히 오역이 없어 보여 예상대로 형식만 수정하는 선에서 순조롭게 일이 진행됐다. 그러다 ‘금년에 낳은 딸[今年生]’이란 대목에 이르러서 신나게 자판을 달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금년에 낳은 딸? 딸아이의 아버지 이식배는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이 아닌가. 이식배 부부는 이미 18년 전에 죽었다. 이 아이가 정말 그해에 태어났다면 부모도 없이 홀로 태어난 셈이 된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나는 올해 태어난 아이에 대한 다른 기록들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 웹 DB를 통해 각종 고전 문헌에서 ‘금년생(今年生)’ 세 글자가 포함된 사례를 검색해 보았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서 여러 사례가 추출됐는데 그 가운데는 ‘올해 태어난 아이[今年生]’가 2살이라는 둥 누구의 아내가 ‘올해 태어났다[今年生]’는 둥 이해되지 않는 말도 있었다. 올해 태어난 아이를 2살로 치는 셈법이 어디 있으며, 올해 태어난 아이를 시집보내는 경우는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깊어지기만 하던 의혹은 노비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노비 매매 문서, 호구단자(戶口單子) 등을 확인하고서야 풀렸다. 보통 이런 종류의 문서는 노비 여러 명의 인적 사항을 일관된 순서로 기재하는데, 이름을 쓸 자리에 ‘금년생’을 써넣은 사례들을 찾은 것이다. 또 그 노비들이 태어난 해는 대체로 문서가 작성된 해보다 십수 년을 앞섰다. 즉 이미 성인이 된 노비들이 금년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 그렇다. 금년생은 바로 이름이었던 것이다.
물론 금년생이 언제나 이름으로 쓰인 것은 아니다. ‘올해 태어남’의 의미로 쓰인 사례 역시 여럿이므로 글의 문맥, 해당 인물에 관한 정보 등을 살펴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 이식배의 딸은 부모가 모두 오래전 사망했으므로 여기서 금년생은 꼭 이름으로 번역해야 한다. 조선 시대에 자식의 이름은 보통 아버지가 지어주었으니 어쩌면 금년생은 유복자로 태어나 언니들처럼 귀한 이름을 얻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미처 굳어지기도 전에 다른 집의 종이 되어 주인이 아무렇게나 부르는 대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난 어느 때 그 막된 이름마저도 잘못 번역되어 한동안 본래 이름을 잃고 무명(無名)으로 기록되어 버렸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참 기구한 처지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금년생은 어쩌다 올해 태어난 아이로 오역되었던 것일까? 이는 번역가 개인의 한문 독해 능력과는 크게 관계없는 문제다. 금년생처럼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말을 이름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독해 능력 밖의 추가적인 정보가 꼭 필요하다. 즉 올해 태어났다는 의미로 결코 번역할 수 없는 구체적인 정황이나 사람의 이름으로 쓰인 분명한 사례를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실록』이 처음 번역된 1980년대의 번역자에게 이런 정보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실록이 종이 문서로만 존재하던 시절에는 찾고자 하는 특정 정보가 과연 실록 내에 존재하긴 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느 왕대 어느 날짜의 기사에 기록돼 있는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자는 자신이 번역하는 기사 혹은 그에 근접한 범위의 기사 내에서 확인되는 정보만으로 번역상의 여러 난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식배의 사망 시점이나 금년생이 이름임을 판단할 수 있는 정보는 위의 기사 내에 존재하지 않기에 당시로서는 금년생을 그저 글자대로 자연스럽게 풀어서 번역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금년생의 오역은 당시 번역의 방식 혹은 수단의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성종실록』의 첫 번역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방식은 획기적으로 발전하였고 이제 번역자는 웹에 구축된 DB를 통해 자신이 찾고자 하는 정보들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그간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인물, 사건, 제도에 대한 정밀하고 전문적인 번역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역사의 주된 시선에서 소외되어 간신히 희미하게 남은 기록까지도 한층 분명히 번역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앞으로 이루어질 새 번역 사업의 과정에서 금년생의 사례처럼 역사의 언저리에 스치듯 기록된 소소한 사람들과 사연들이 더욱 속속들이 밝혀지기를 고대한다. 또 그럼으로써 더욱 촘촘하고 풍부해진 우리말 역사가 선뵐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이제 기존의 번역문을 다음과 같이 고쳐 그녀의 본래 이름을 되돌려준다.
의금부에 전지하였다.
“…… 권반(權攀)에게 사급(賜給)한 이식배(李植培)의 딸 이귀비(李貴非)·이귀장(李貴莊)·이귀금(李貴今)·이금년생(李今年生)을 풀어 주라.”
글쓴이 최소영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