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살이 모습이나 삶의 과정을 모두 다 객관화된 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면 참 편리할텐데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을 서로 비교해 가며 취사선택을 하고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상당한 기회비용도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이치란 참으로 오묘하고 그 깊이도 저 심연의 연옥(지옥과 천국의 중간 부분)보다는 더 깊다는 나름대로의 체험적 생각이 스쳐왔다.
사람은 살면서 무수한 관계를 형성해 가고 자기 역할과 직분을 수행하면서 사람으로서의 가치와 보람을 찾게 된다.
가족간의 사랑은 물론 친구와의 우정이나 연인간의 간절함에 있어서도 그 느낌이나 마음이 오고 가는게 우선이고 그 본연의 가치라고 본다.
이를 수치화해서 비교해 본다면 제삼자적이거나 방관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에겐 재미가 있을지 몰라도 정작 관련된 본인들에겐 재미는커녕 정말로 삭막하게 느껴질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그 때마다 하나의 선택이 과연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었는가는 선택 당시에는 도저히 알기 어렵다.
삶의 연륜이 좀 쌓인다거나 이것도 아니라면 그 당시의 선택 대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회비용이라도 한번쯤 정확히 계산해 보는 게 맞을듯 하다.
경제적 측면의 선택에 있어서는 이런 기회비용의 셈법이 사용될 수 있지만, 사랑과우정, 봉사와 희생 같은 추상적 명제에 대해선 기회비용의 계산법이 적합지 않다고 누구나 느낀다.
십수년이 지났지만 감동적인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한번 떠올려 본다.
전쟁 중 적진인지 어딘엔가 낙오되어 있는 일병 한명을 구하기 위해 나선 수십명의 동료 부대원들이 엄청난 희생을 했다. 한명의 생명과 수십명의 생명은 숫자로 보면 수십명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생명이라는 가치를 보면 하나의 생명이나 수십의 생명이나 모두 다 소중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맥락에서 사랑에 있어서도 그 수치셈법이 작용할 여지는 거의 없다.
수치로 표현된 사랑은 이미 그 가치가 반감된다.
부모와 가족간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이 참다운 것이라면 숫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된다.
이해타산적 목적이나 기회비용의 개념이 내재된 사랑이라면 이미 파국을 향해가는 중이다.
사랑이란 그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스스로의 가슴으로 그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간혹 산이나 들을 찾을 때마다 이름모를 산속의 꽃들과 들녘의 꽃들을 마주하게 된다.
두 종류의 꽃 모두 아름다움은 한껏 가져다 준다.
산속의 꽃에선 은은한 수목향이 배어나오는 느낌이 들고, 들녘의 꽃에선 청초한 내음이 풍기는 듯 하다.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대상을 보고 이를 그대로 느껴보는 건 그 순간적 심성만큼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듯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 느낌의 의미는 다소 다를지라도 맑고 순수한 마음이 본 바탕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그 이름을 수 만번 불러도 가슴속에 아쉬움의 여지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아쉬움을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보면 욕심의 이기심이 극단적인 선택을 부르게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채워도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고, 취할수록 그 느낌과 욕망이 체증하는 현상을 나타내기 십상이다.
재화란 소비할 수록 그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게 당연한 이치이고 이는 경제학에 한계효용이론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 사랑이란 한 단위씩 취해가면 오히려 그 한계효용은 증가하기만 한다. 물론 한계점이나 변곡점이 있고 때로는 파국점도 있을 테지만.
사랑이란 주고 받기식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게 아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지고한 사랑, 연인들간의 순수한 사랑이나 마음을 주고 받을 정도의 우정관계에서 이기적 셈법은 존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성철스님이 하신 말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어절에서 있는 자체로서의 본질을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으면 족하다는 것이다.
이름모를 꽃들을 보거나 마주치는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을 바라보면서 가져보는 아름다움도 좋아 보이고,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수줍움으로 가득한 가슴속의 콩닥거리는 소리라도 듣게 된다면 이도 좋고,
의미있고 뜻깊은 사랑을 하고 싶으면 철학자나 심리학자가 돼보는 것도 좋다.
상대의 마음을 분석하고 헤아리는 지혜를 가져야 하니 요모조모 사랑을 구하려는 기묘한 방법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은 살면서 서로간에 부대끼고 옥신각신하게 마련이다.
저마다의 이해관계가 있고 자기식의 셈법이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 셈법은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재단하려 하든가 평가하려는 척도로는 쓰지는 말아야겠다.
그리하면 각박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그 마음까지도 황폐해진다.
우리네 사는 세상은 어차피 경쟁과 이해관계가 숨막히게 전개되는 각축장 같은 느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같은 첨예함이 세상살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정화시키고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순수하고 맑은 가슴을 통해 살아가는 의미도 느끼게 된다.
사랑과 베푸는 마음은 기회비용의 개념도 선택비용의 여지도 없다고 한다.
그만큼 아름답고 소중하니까 당연한 말이다.
만약 우리에게 이같은 아름다움마저 기회비용으로 수치화하고 셈하려는 이기심이 있다면,
기회비용의 개념 창안자인 경제학자 비저가 저편 세상에서 이를 보고 얼마나 씁쓸한 표정을 지을까.
첫댓글 테우스님 좋은글 감사드리며건시간 되세요,
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