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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 2일 박정주 등 7인에 대하여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3.1운동 관련되어 유죄를 선고한다는 판결문이다. 판결문 번호는 대정8년 형공 제129호이다. |
박정주(朴政柱,朴和容) - 1871. 1.29~1921.10.24
- 애족장(90)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대성리 출생)이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山西面桐花里) 장날을 이용하여, 안성섭(安成燮)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1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호현(丁豪鉉) 1890. 4.11~1940. 7.15
애족장(90)
전북 장수(長水) 사람(하월리 출생)이다.
1919년 당시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山西面 下月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산간지대인 장수군에도 자유와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가 일찍이 전달되었다. 3월 2일 오후에 독립선언서 백여 장이 천도교 계통을 통해 전달되어 그날 밤으로 각 면사무소의 게시판등 10여개소에 붙여지자 독립운동의 소식은 군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읍내보다 먼저 각 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3월 19일 동화리(桐花里) 장날, 사전에 마련한 태극기를 긴 장대에 매달아 박정주(朴政柱)·정봉수(丁奉洙) 등에게 들도록 하고 많은 시위군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장터를 돌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과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봉수(丁奉洙) 1887.12.28~1933. 1.26
애족장(90)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사계리 출생)이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 동화리(山西面桐花里) 장날을 이용하여 박정주(朴政柱)·정호현(丁豪鉉)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형택(金炯澤) 이화백(李化伯,李奉圭) 이길선(李吉善,李相善) 이상욱(李相煜) 유동렬(柳東烈)
□ 건립취지 : 장수 산서지역 3.1만세운동을 기리고 희생자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건립
□ 건립개요
〇 현충시설 관리번호 : 52-1-27
〇 위 치 : 전북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257-1(괴정마을)
〇 건립주체 : 산서면( 산서면민 성금)
〇 건립일자 : 1995년 12월
〇 시설규모 : 기단높이 1.7m, 탑높이 2.5m
〇 관 리 자 : 장수군수
□ 관련행사 : 3.1절 기념식(산서면)
국운의 불행으로 왜구의 침략을 당하여 국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잔학한 폭정이 민생을 조육(俎肉)하니 국인이 다 원망하여 마침내 기미의거(己未義擧)를 분발하여 만국의 이목을 경동하니 실로 천고의 장렬함이다.
우리 면에도 애국지사 15인이 있으니 충주인 박정주, 창원인 정호현, 창원인 정봉수, 부안인 김형택, 인천인 이화백, 경주인 이길동, 경주인 이상욱, 문화인 유동렬, 경주인 이상일, 경주인 이규섭, 흥덕인 장화삼, 창원인 정대화, 옥천인 육상룡, 안동인 권봉옥, 경주인 이종호 (○○인은 본관을 말함)가 본부에 연락하고 각 부락을 선동하여 산서장날에 수백 인을 규합하여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니 일경(日警)의 총압으로 부상자가 많이 나자 군중이 해산되고 15인이 주모자로 대구감옥에 체수(逮囚)되어 6개월부터 1년 6개월까지 형을 받아 복역하였다.
지사들을 심문함에 박정주가 높은 소리로 크게 꾸짖어 이르되 백주(白晝)에 도적이 우리 집에 들어 물건을 약취한 즉 누가 큰 소리로 꾸짖고 축출치 않으리? 왜관이 말이 막혀 다시 묻지 아니하고 감옥에 투입하여 고형을 받아 수년 후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광복된 후 38년이 되었으나 이와 같은 의행이 요료(蓼蓼)함을 본 면 제위께서 걱정하여 1983년 경로당 앞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96년 군의 지원으로 괴정마을 앞으로 이건하였다.
산서면 동화리는 기미년 당시 박정주 열사를 중심으로 15명의 애국 열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곳으로 장수군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