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부 대한청년단으로의 통합과 6.25전쟁
건국 직후에 일어난 국군 입대 '붐'
1948년 8월 15일에 건국이 되자 서북청년회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다. 좌익 타도의 역할은 국가가 맡아야 할 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북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은 군대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에 따라 군 입대 '붐'이 일어났다. 군대는 고향을 찾겠다는 의지가 강한 서북청년들에게 가장 적합한 일터인 듯 보였다.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육사 5기와 7기, 그리고 8기에 많았다.
서북청년들 가운데는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다 온 청년들이 많았기 때문에 포병(砲兵) 병과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따라 포병 장교의 대부분이 서북청년회 출신이었다. 김구를 암살했던 안두희도 서북청년회 출신의 포병장교였다.
또한 서북청년들은 첩보부대(諜報部隊)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북한에 대해 관심과 지식이 많았기 때문에 북한정보 수집업무에 적합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일환(평북 신의주), 이영호(황해도), 유제국(황해도), 김동석(함경도), 계훈영(평안북도)이었다. 김인칙(황해도)은 특무부대에서 김창룡을 도와 숙군(肅軍)의 임무를 맡았다.
또한 그들은 반공사상에 투철했기 때문에 정신교육을 담당하는 정훈장교(政訓將校)로도 많이 활동했다. 전두열, 윤하선, 선우휘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여수.순천반란사건과 청년단체들의 통합
건국이 선포된 지 한 달 뒤인 1948년 9월 중순부터 서북청년회의 문봉제를 비롯한 우익청년단체들의 대표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군의 개편을 요구했다. 국군은 미군정의 국방경비대를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에 좌익이 많이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군을 반공사상(反共思想)으로 무장된 우익청년단체 출신들로 재편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들은 독립청년단의 서상천, 국민회청년단의 강낙원, 청년조선총동맹의 유진산, 대동청년단의 이성주 등이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그들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좌익들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여수에는 제주도 좌익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을 기다리던 육군 제14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부대가 제주도로 출발할 것이 알려지자, 제14연대 안의 공산당(남로당) 지하조직이 김지회 중위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좌익 군인들은 반란에 반대하는 군인들을 죽이고 여수 시내의 민간인 좌익들과 협력하여 여수를 그들의 '해방구'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우익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인민재판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반란군의 일부는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가서 그곳을 그들의 '해방구'로 만들고, 여수에서처럼 인민재판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여수.순천반란사건이 터진 것이다.
대한청년단으로의 대통합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막 일본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승만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그리고는 10월 20일 300여 명의 청년단체 대표들을 중앙청 회의실에 소집했다.
"여러분이 우려해 나에게 건의했던 사태가 드디어 여수, 순천에서 터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기반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애국청년들을 단결시키는 길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는 반공청년단체들의 통합을 지시했다.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내로 국내의 모든 청년단체가 통합해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단일화되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청년단체들의 단일화 지시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나왔지만, 통합 발의는 청년단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족청)만은 통합을 거부하였다. 원래 민족청년단은 미군정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지킨다고 전혀 반공투쟁에 가담하지 않아 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좌익들이 그 단체에 파고드는 경우가 많아 다른 우익청년단체들로부터 '좌익의 은신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청년단의 총재인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임명함으로써 우익청년단체들을 당황하게 했다.
민족청년단이 통합을 거부하자 이승만을 이범석에게 강하게 압력을 넣었다. 통합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국무총리를 사퇴하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범석은 굴복하여 민족청년단을 해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1948년 12월 19일에 5개 청년단체가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이 조직되었다. 그것은 면(面), 리(里), 동(洞)의 말단 행정 단부는 물론, 직장단부까지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300만을 자랑하는 반공망(反共網)이 펼쳐지게 되었다.
대북정보 수집을 위한 KLO 부대
1945년 해방으로 한반도가 38도선으로 갈라질 당시 도쿄의 미극동사령부 정보담당 G-2는 서울에서 북한의 소련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월남한 서북청년들을 활용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미극동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orea Liaison Office, KLO)가 설치되었는데, 겉으로는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정의사(正義社)로 불렀다. 책임자는 에포트 소령이었고, 그 밑에 문관인 엔디가 있었다.
1948년 4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넉 달 전에 에포트 소령의 요청에 따라 서북청년회 부위원장 김성주(金聖柱)는 10여 명의 정의사 요원을 선발했다. 그들은 전준, 박태현, 유인국, 전훈 등이었다. 그들은 공작원 훈련을 받은 다음 북한의 6.25남침이 일어날 때까지 북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 상부에 보고했다. 북한에 반공주의자들이 많아 정보 수집이 쉬웠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1950년 6월 25일에 기습남침을 당하자 정의사 요원들은 군 당국이 자기들의 보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분개했다. 6.25 기습남침 당시 국방장관은 신성모, 육군총참모장은 채병덕, 육군본부 정보국장은 장도영이었다.
국군이 북한군에게 밀리자 김성주는 정의사 요원들을 대구로 후퇴시켰다. 그러고는 서북청년회 동지들을 모아 호림부대를 조직한 뒤 김석원 장군의 전투부대에 가담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케 한 팔미도 등대 점화
전쟁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던 국군은 북한군에게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했다. 대한민국의 멸망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러나 북한이 유엔에 의해 침략자로 규정되면서 유엔군이 세계의 경찰로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반격작전으로 1950년 9월 15일에 대규모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키려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륙군의 진로를 유도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 팔미도(八尾島)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게 떠올랐다. 그 중요한 임무를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미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도쿄 미극동사령부 G-2에 근무하던 정보통인 계인주(桂仁珠) 육군대령과 연정(延禎) 해군소령을 끌어들였다. 작전에는 미군장교 3명도 가담했다. KLO(나중에 8240) 부대에 속한 서북청년회 출신 특수임무대원들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永興島)를 전진기지로 삼아 덕적도(德積島), 팔미도 등지를 샅샅이 탐색했다.
계인주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주재 만주국 대사관의 무관(武官)으로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서울에 와서 미군정 경찰에 들어가 동대문경찰서장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그는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그는 도쿄 미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국 HID대장을 지낸 전력 때문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는 9월 15일 전날 밤,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기 위해 계인주 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崔奎峰) 대위와 3명의 미군장교가 필미도에 올랐다. 1950년 9월 15일 0시 등대에 불이 켜지는 것을 신호로 먼 바다에서 대기 중인 261척의 대선단이 인천 항구로 들어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계인주는 미국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영흥도에 남아 있던 서북청년회 출신 KLO 대원 20여 명은 불행히도 북한군과 현지 좌익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6.25전쟁이 계속되면서 KLO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출신지역별로 3개의 대(隊)가 조직되었다. '위스키'대는 황해도 은율 출신의 박태현이 이끌었고, '선'대는 평남 평양 출신의 전훈이 이끌고, '고트'대는 함남 원산 출신의 최규봉이 이끌었다.
정보를 얻기 위한 북한 침투는 해상로를 통하기도 했지만, 주로 낙하산을 이용한 공중투하 방법이 사용되었다. KLO 3개대는 계인주 대령의 지휘 아래 서해의 북쪽 진남포 앞 초도와 그 남쪽의 대청도, 소청도, 강화도 등을 전진기지로 삼아 대북첩보 활동을 벌였다.
백골부대(제3사단 제18연대)
백골부대(白骨部隊)는 3,000명의 서북청년회 대원들로 구성된 육군 제3사단 제18연대였다.
함남 영흥 출신의 한신(韓信) 대령이 제18연대 창설 명령을 받자 그는 서북청년회 백두산지부 이위국 회장을 찾아가 군에 입대할 반공투사들의 추천을 요청했다. 국군 안에는 좌익들이 많기 때문에 제18연대는 서북청년회 대원들로 조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18연대는 전원 단신 월남자로 구성되었다.
그 때문에 제18연대는 가족처럼 유대감이 강했다. 그래서 다른 부대와는 달리 중대장이나 대대장은 '형님'으로 통했다. 6.25전쟁에서 백골부대가 패배하지 않았던 것은 부대원들이 전우이기 이전에 서북청년회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제18연대의 용맹성은 6.25전쟁 초기의 포항, 기계, 영천전투에서 나타났다. 당시 전황은 위급했다. 대구가 적군에게 점령되어 부산으로 가는 길이 열리면 대한민국이 설 땅이 없어질 위기였다. 그러므로 이춘식 연대장 이하 부대원 전원은 옥쇄를 각오하고 역습을 벌였다.
마침내 그들은 안강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대구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에 따라 연대 사병 전원이 2계급 특진을 해 제18연대는 상사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3사단 소속으로 휴전 직전에는 철원, 평강, 김화의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싸웠다.
6.25남침전쟁과 북한의 지하조직
동해안에서 6.25남침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옥계에 상륙한 북한군과의 교전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 호림유격대는 삼척, 영덕, 포항 등지에서 해군과 육군의 작전을 도왔다.
1950년 10월 중순에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하자 조성국 등 500여 명은 국군을 돕기 위해 게릴라전을 벌였다. 조성국이 전사하자 나머지 대원 400여 명이 남하하여 국군과 전경에 입대했다.
안주, 개천, 숙천의 이은섭 등 300여 명은 1950년 10월 19일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고 북진할 때 국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 순안, 숙천에서 북한군을 공격했다.
구월산 지구를 중심으로 한 황해도에서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부터 서북청년회 황해지부 위원장 김인식의 지시를 받은 반공투쟁이 계속 있었다. 그 이후에는 문승룡, 김종벽, 김홍렬, 이경남 등이 투쟁을 이어 왔다. 6.25전쟁 중에는 '동키'부대라는 명칭으로 서해5도인 연평도, 대청도, 소청도에서 무장투쟁을 했다.
국민방위군사건에 휘말리지 않은 서북청년회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사건은 6.25남침 초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예방 차원에서 조직되었지만, 운영의 잘못으로 대한민국 우익청년 운동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1950년의 6.25남침전쟁 초기 3개월 동안에 20만의 남한 청년들이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북한군에 끌려가 상당수가 희생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런데 1950년 10월 하순에 중공군이 개입하여 다시 서울이 점령당할 위험이 발생하자 또다시 남한 청년들이 끌려가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정부는 그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적군에게 내어주기 전에 청장년들을 미리 남쪽으로 후퇴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1950년 12월 중순 황급히 '국민방위군 설치령'이 공포되었다. 그에 따라 만 17세에서 40세에 이르는 50만 명의 장정을 남쪽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후퇴 업무는 우익청년단체들의 통합조직인 대한청년단이 맡았다. 그러나 그 업무는 민간단체가 맡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대한청년단 단장이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함남 출신으로 씨름꾼의 경력을 가진 김윤근(金潤根)이었다. 그는 육군 준장 계급을 받았다. 그러나 실무는 부사령관인 윤익헌(尹益憲)이 맡았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광복군 출신이었다.
후퇴 장정들의 인솔을 맡게 된 대한청년단 간부들은 육군고등군사반과 방위사관학교에서 단기훈련을 받고 방위대령, 방위대위, 방위소위 등으로 임관되었다.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동시에 대거 국군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한청년단과 국민방위군에 참여한 사람이 적었다. 문봉제 방위대령, 반성환 방위소령, 장창원 방위소령 등이 있었지만, 그들은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장정들은 방위소위와 방위중위들의 인솔을 받아 경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방위교육대까지 걸어갔다. 식량(쌀)은 가는 도중에 지방행정기관에서 공급받도록 했다. 잠자리는 민가의 헛간이나 처마 밑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경상도의 교육대에 도착하였을 때는 상당수가 영양실조로 폐인이 되어 있었다.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에 따르면 교육대에 보급되는 식량과 부식비의 상당 부분이 방위사령부에 상납되거나 교육대 간부들에 의해 착복되었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긴 했지만 그 사건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신성모 국방장관이 물러났다. 그리고 김윤근 사령관과 윤익헌 부사령관을 포함한 5명의 국민방위군 고위간부가 총살을 당했다. 다행히도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이 엄청난 사건에 한 사람도 연루되지 않았다.
북한 통치를 둘러싼 의견 충돌
서북청년회 역사에서 또 다른 비극은 재건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을 지낸 김성주의 살해였다. 그는 선우기성, 문봉제와 함께 서북청년회의 3대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다.
김성주는 평북 강계 출신으로 일제시대에 북중국에서 사업을 했다. 해방이 되자 고향인 강계로 돌아왔다가 즉시 월남했다. 그러고는 평안청년회 사업부장으로 좌익들과 싸웠다. 1947년 9월 21일 우익청년단체들이 이청천의 대동청년단으로 통합될 때 김성주는 서북청년회에 그대로 남아 재건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건국 직후인 1948년 12월에 모든 우익청년단체가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으로 단일화할 때 김성주는 통합을 위해 애를 많이 썼다. 하지만, 그는 대한청년단에서 서북청년대장이라는 별 볼일 없는 자리만 받았다. 그 때문에 부위원장 문봉제와 사무국장 윤익헌에 대해 큰 불만을 가졌다.
그러나 6.25남침전쟁이 일어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UN군이 1950년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게 되면서 김성주에게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군이 김성주를 평안남도 도지사 대리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미군은 북한을 유엔이 관리할 점령지역이라고 보고 군정을 펴려고 했다. 그가 미군에게 발탁된 것은 KLO 같은 미군 정보기관과 오랫동안 관련을 맺어 왔기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중순 그는 미군 민사처장 멘스키 대령과 같이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미군과 달랐다. 북한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이므로 한국인이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조선민주당 출신의 김병연을 평안남도 도지사로 임명했다. 그러므로 김성주는 정부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한 결과가 되었다.
평양에서는 서북청년회 출신들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일어났다. 김성주와 고정훈은 서북청년회 세력을 확장하려 했던 데 대해 문봉제와 선우기성은 대한청년단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은 소용이 없게 되었다. 1950년 10월 하순부터 중공군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 밀물처럼 쳐들어왔고, 그에 따라 국군과 UN군은 황급히 후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봉암의 선거운동을 도운 김성주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1951년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다음 대통령을 어떻게 뽑는가 하는 문제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에 따라 서북청년회 주용 인물들에게도 약간의 변화가 일어났다. 문봉제는 내무부 치안국장이 되고, 선우기성은 원내 자유당의 부당수가 되었다. 그러나 김성주는 아무 자리도 맡지 못했다.
1952년 8월 5일 직접선거제 개헌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김성주는 뜻밖에도 혁신계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의 선거사무차장이 되었다. 조봉암은 공산주의 전력을 가졌던 인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내각에서 4개월 동안 농림부장관으로 있었다. 반공단체에 몸담았던 김성주가 혁신계 진영에 가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으로 정부가 피난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김성주에 대해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김성주가 원용덕의 헌병총사령부에 구속된 것이다. 죄목은 국가변란과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였다.
대통령 암살음모의 혐의는 정치적 모사꾼인 김지웅의 조작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김지웅은 그 정보를 부산부두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와빈슨 중장으로부터 들었다고 했지만, 미군에는 그런 장성이 없었다. 김지웅의 음모에 걸린 김성주는 9개월 이상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서북청년회 출신의 선우기성, 왕초산(王超山), 김인식(金仁湜) 등은 김성주 구명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중요한 기관에 김성주의 석방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내는 한편, 원용덕(元容德) 헌병총사령관을 방문하여 김성주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원용덕은 헌병총사령부의 체면도 있으니 형식적인 것이나마 김성주의 반성문을 받아다 주면 선처하겠다고 말했다.
그 길로 선우기성과 왕초산은 서대문형무소로 가서 김성주를 면회하고 서명을 받았다. 그러고는 그 길로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찾아 전달했다. 이제 김성주의 석방은 절차만 남은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후 김성주는 재판도 없이 헌병총사령부의 김모 중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0년의 4.19학생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우익청년 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인 유진산의 노력으로 국회에 김성주사건 조사위원회가 생겼다. 그때서야 김성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졌다.
대한민국건국회로 그 흔적이 남다
대한청년단은 1953년 휴전이 되면서 9월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해산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다가 4.19와 5.16을 거친 다음인 1963년에 청우회(靑友會)로 재건되었다. 지금은 사단법인 대한민국건국회(大韓民國建國會)의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