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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평론 2000년 6월호
[반론]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름, 자유인들의 연합체!
송태경·민주노동당 상임정책위원
*주: 벌써 13년 전 글이 되었네요. 그렇지만 13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개인의 개성이 자유로운 발전을 전제로 삼는 자유로운 공동체 사회(자유인들의 연합체 또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는 이해되지 않고 있지요.
투고 전 원문은 파일로 첨부해 둡니다.
1. 논의에 앞서
김성구 교수는 진보평론 여름호에서 소유경영참가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필자와 경제민주모임을 "우리사주 사회주의론자"라고 명명하는 한편, "현대자본주의에서 차선의 대안이 아니라 최선의 대안을 봉쇄하는 최악의 대안"을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김성구 교수는 실천활동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필자의 이론체계가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지독한 왜곡과 혼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정책론적 귀결은" "주식회사 자본주의에 대한 변호론"이라고까지 공언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김성구 교수가 필자의 이론적 정리들에 대해 쟁점화한 사항들과 관련하여 일정하게 해명함으로써 그의 주장과 비판이 기껏해야 낡은 것에 사로잡힌 편견임을 밝히는 한편, 또한 그가 필자의 주장을 왜곡했거나 자신의 해석으로 대체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정정하고자 한다.
2. 누가 기업을 소유할 것인가: 노동자들인가 국가인가?
"우리도 소유자다. 따라서 소유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도 있는 현실의 자연발생적인 흐름에 관한 논의에서 이른바 대안사회가 하나의 쟁점으로 부상되는 이유는 간명하다. 이 흐름자체가 이미 "누가(국가, 법인, 불특정 다수 국민, 자본가 또는 자본가 집단, 또는 노동자 개인 또는 노동자 집단 등등) 생산수단을 소유할 것인가"하는 문제(즉, 소유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소유문제는 사회경제체제의 문제에서 주어진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변수이기 때문이다. 또는 김성구 교수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사주의 문제는 자본주의 소유지배구조를 넘어서 노동자의 자주관리 이념까지 포괄하는 전략적 지위를 갖는"(주1)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의 자연발생적인 흐름인 노동자소유경영참가 운동이 내포하고 있는 소유문제의 해답은 간명하다. "우리도 소유자"라는 이 운동의 변증법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우리도"가 아니라 "노동당사자인 우리가 소유자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주체는 "해당기업에 자유롭게 결합하는 노동자들"이라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해답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운동(엄밀히 하면 국가주의 운동이라고 해야 한다)(주2)에서 금과옥조로 여겨졌던 국가(즉, 국유화)나 또는 이를 비판하면서 나타난 기타 다른 그 무엇(예컨대 기금)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필자와 김성구 교수의 입장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우선 김성구 교수는 이른바 국독자론에 따라 소유주체로 국가를 상정한다. 이것은 김성구 교수가 이른바 "진정한 사회화"는 "국공유부분의 확장과 국가 개입 확대를 통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마르크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유주체로 현실 운동의 자연사적 발전에 따르는 최종적인 결과, 즉 자유롭게 생산과정에 결합하는 생산자들의 소유가 곧 소유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생산과 분배의 실질적인 당사자인 노동자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직접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자율경영하고 생산의 성과를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정한 기준에 의거해서 균등분배하지 않는 한", 경제적 계급질서와 노동착취의 문제 및 이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문제들은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국유화하는 바로 그 순간 소유의 권력은 국가(또는 국가의 인격적 담당자나 대리인)라는 괴물에 귀속되고 노동은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 "우리사주 사회주의" 또는 "주식회사 사회주의"
"우리사주 사회주의라는 그럴듯한 선전구호"(김성구)를 내세우는 사람은 진정 누구인가?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논객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김성구 교수 자신이다. 필자와 경제민주모임이 부르주아 정부와 자본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현행 우리사주제도의 치명적인 결함과 의의를 이해하고, 이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화를 위해 제도를 활용하거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해 제도를 개선·개혁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반면에, "김성구 교수는" 이곳 저곳에서 필자와 경제민주모임이 우리사주 사회주의 또는 주식회사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으며, 또 자신의 이러한 정식화에 기초해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한 일은 김성구 교수가 창안하고 정식화해서 정말 열심히 선전하고 다니는 "우리사주 사회주의" 또는 "주식회사 사회주의"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째로, 특정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이론적 정의에서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순간 '이론적'으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하나의 모순이 발생한다.
즉, 자본주의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계급사회였음이 분명한 낡은 형태의 사회들(소비에트 유형의 사회들)도 사회주의이며, 아직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지만 앞서의 것들과는 분명히 다른 모종의 사회경제체제(이게 우리사주사회주의든 주식회사사회주의든 쿠폰사회주의든 또는 김성구 교수가 생각하는 모종의 사회주의든 관계없이)도 사회주의가 되는 "괴이한 모순"이 그것이다. 정말 최소한 이론적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규정을 이처럼 몰 개념적으로 동일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둘째로, "사회주의"="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즉, 오랜 진통 끝에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라는 등식을 암묵적·편의적으로 정하더라도, 첫 번째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성구 교수가 상상하는 모종의 사회주의나 현실의 사회주의 사회(국가주의 사회)들 어느 것도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특징은 없기 때문이다.
셋째로,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사회경제체제로서가 아니라 계급사회의 질곡을 해소해야 한다는 해방적 의미 또는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우리사주사회주의"나 "주식회사 사회주의"라는 개념도 얼추 성립될 듯하지만, 이 때는 사회주의를 수식하는 "우리사주"나 "주식회사"라는 개념에 발목이 잡히고 만다.
이것은 "우리사주"란 불특정주주의 주식이나 대주주의 주식에 대립하여 "해당기업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소유한 자사주"만을 지칭하는 개념이며 따라서 이 개념의 존재가 이미 자본주의 환경을 전제하고 있다. 더구나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적 소유의 전형적인 형태일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사회의 최종형태"인 주식회사를 사회주의의 수식어로 사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황당하다. 다시 말해 주식회사사회주의를 풀어쓰면 자본주의적 소유(주식회사)에 기초한 사회주의가 되며, 이는 곧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소유에 기초하더라도 성립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4. 말로만 우리회사가 아니라 진짜 우리회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한계 내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기업인 현재의 주식회사가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을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말로만" 우리회사가 아니라 "진짜" 우리회사로 만드는 과정이 된다.
김성구 교수는 바로 이 점을 비판한다. 즉, 필자의 주장에 따를 경우 "우리들만의 기업"이 되며, 다른 기업의 노동자들은 이들의 소유권을 침해할 수 없으며, 이는 부르주아적 권리가 관철되는 것이고 또한 "개별기업수준으로 제한하는 사회화"이며, 전체 사회적인 수준에서의 사회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그러나 김성구 교수의 비판은 부분적으로만 정당하다. 왜냐하면 주식회사를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하는 과정을 "개별기업 수준"에서만 본다면, 김성구 교수의 지적이 옳지만 과정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개별 기업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기업이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되는 경우, 이 경우 사회화되지 않은 기업이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개별기업 수준에서는 제한된 사회화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모든 기업을 사회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개별기업의 수준에서 볼 때 우리들만의 기업이지만, 사회 전체적인 수준에서 보면, 늙어서 어려서 병들어서 기타 불가피한 사유로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노동하는 사회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기업, 즉 사회구성원 모두의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회화 문제와 관련된 김성구 교수의 지금의 비판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5. 마르크스의 노동증서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김성구 교수는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에서 상품생산과 상품교환의 모순은 노동증서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더구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되지 않는 광범한 소상품생산자들까지 고려하면 더 더욱 그렇다고 한다. 과연 타당한가?
자본과 임노동 관계가 직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영역은 개별기업이다. 또한 사회적 총자본이란 상호관련하에 운동하는 개별자본들의 총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천적으로 자본과 임노동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별 기업들을 계급이 존립할 수 없는 기업, 즉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이렇게 하는 것만이 사회적 총자본을 '발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사회적 총자본 수준에서 자본과 임노동관계가 해소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자본관계를 연합된 노동자들의 생산관계로 이제 막 변화시킨 것에 불과하므로 한 가지 주요한 문제가 남는다. 연합된 생산자들 사이의 교류의 형태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우선 이론적으로 "순수하게" 고찰해보면, 각각의 개별 생산과정들을 전체 노동자들이 소유할 경우에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사라지지만,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인 단순상품생산은 남게 된다. 또한 잉여생산물 또는 잉여가치가 더 이상 착취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상품생산이 영구화될 수 있는 토대는 사라지며, 상품생산 자체를 어떻게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만 남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첫째, 아직 상품생산 또는 상품교환이 해소되지 않아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서도 기업간의 교류가 상품의 교환을 매개로 한다고 가정하자. 이러한 가정에서는 이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윤율의 차이도 문제되지 않으며, 자본도 자본가도 존재하지 않는다.(주3) 이제 생산활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전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생산수단과 더불어 노동을 투여해서 생산물을 생산하고 이를 유통에 투입할 것이고, 사회적 등가표현인 화폐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받은 화폐의 일부는 생산수단 보존을 위해 사용하고 일부는 확대재생산이나 사회적 예비자금 등으로 적립할 것이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자율적으로 정한 기준에 따라 분배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단순상품유통에서의 소생산과 비슷하다. 다른 점은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며,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만을 투여해야 한다는 가치법칙이 성립되지 못한 영역과 성립된 영역의 차이 등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전체과정을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에 결합시키고 이에 대한 등가표현인 화폐를 획득하고 이 화폐를 자신들의 소비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을 구매하는 데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나다. 따라서 생산과정에 결합하는 노동자들이 생산활동을 하는 궁극적 목표는 자신들의 다양한 소비욕망의 충족에 있게 된다(자본가들의 궁극적 목표가 더 많은 화폐인 것과 달리!). 또한 이제 기업 내의 어느 누구도 자본가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업에 대한 실질적인 공동소유자인 동시에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소비욕망의 충족만을 목표로 하는 운동의 담당자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보여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생산물의 일부만을 그것도 자본가로부터 임금으로 받지만, 우리가 상정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서는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생산물 전부에 대해 처분권을 가지고 일부는 자신들이 정한 자율적인 기준에 의해서 확대재생산이나 기타 사회적 기금 등을 제외하고 두고 나머지 모두를 화폐로 받고 있는 것이다.
기업간의 교류 자체만을 봐도 사정은 달라진다.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판매자로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제는 자본가나 자본가를 위해서 일하는 대리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일하는 직접적인 생산의 담당자들이다. 즉, 이윤을 위해서 일하는 자본가나 그 이윤을 생산 또는 실현하기 위해 일하고 그럼으로써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생명활동을 위해서만 마주하게 되는 실질적인 자유인들이다. 따라서 교환을 매개로 한 교류라고 하더라도 이윤을 위한 교류가 아니라 생명활동을 위한 교류이며, 그 교류의 사회적 성격은 현저히 바뀌게 된다. 이러한 교류에서는 필연적으로 기업간의 상호작용 과정은 생명활동을 위한 것이 되며, 따라서 그 상호작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품소유자로서의 배타적 성격이 생명활동에 합치되지 않을 때에는 합리적으로 조절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는 오직 큰 위험과 궁지에 빠졌을 때만 나타나는 기업간-산업간 협동과 연대의 원리가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생산의 필연적 성격이 된다.
둘째, 자명한 것은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간-산업간의 교류가 시장에 의해서 매개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나 '사회주의 사회'(국가주의 사회)에 비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생산과정 내의 경제적 계급질서는 해소되며, 노동자들의 노동은 강요된 노동이 아니라 자율적인 노동으로 전환되고 잉여가치의 직접적인 착취모순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정에서의 시장의 잔존은 생명활동을 목표로 하는 기업활동과 상충되며, 크고 작은 모순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각각의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업활동의 목표에 적합하게끔 이들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로,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에서 잔존하는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응하는 마르크스의 해법이 바로 노동증서다. 마르크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그 자체의 토대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를 상정하고, 이렇듯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로부터 방금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의 첫 단계"는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도덕적·정신적인 면에서 그 모체였던 낡은 사회(자주: 자본주의)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있"으며, "각 생산자는(사회적 기금을 위해서 그의 노동을 공제한 뒤에) 그가 사회에 이러이러한 만큼의 노동량을 제공하고 있다는 증서를 받고, 이 증서에 따라 소비재의 사회적 저장분 중에서 같은 양의 노동이 드는 만큼만 돌려 받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논쟁의 지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잔존하는 시장과 관련하여 제시된 마르크스의 해법! 노동증서. 이것이 정말 틀린 것인가? 김성구 교수가 제시한 소상품생산자들의 광범위한 존재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노동증서의 적용은 우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들간의 연대와 협동이 가능한 영역부터 적용될 것이며, 또한 소상품생산자들은 모든 기업들이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협동과 연대의 원리에 따라 재조직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김성구 교수가 제시하지 않았던 사례로 예컨대 레닌과 볼셰비키의 노동증서와 관련된 실천활동(거의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이 기초위에서 농업과 공업부문의 물물교환으로 조직하려던 시도)을 끄집어내더라도 아무런 논거도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레닌과 볼셰비키의 시도는 발달한 상품과 화폐관계를 물물교환으로 되돌리려는 천박한 시도에 불과하며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에, 마르크스의 노동증서는 자신이 특정한 기업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을 얼마나 투여했는가 그리고 그렇게 투여한 노동량의 가치가 얼마인가를 나타내는 증서임과 동시에 생활수단 분배의 기준일 뿐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활용의 토대는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7. 주식회사 = 사회적 소유
일정하게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기업형태인 주식회사에 대해 김성구 교수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특정한 단계가 아니라)에서 그 하나의 필수적 구성요소로서 주식자본과 주식회사를 서술"했다고 하며, "주식자본 하에서 소유의 사회화가 진전된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적 사회화에 의해서도 자본가적 사적 소유는 최종적으로 지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성구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그야말로 황당무계할 뿐이다. 도대체 마르크스가 어디서?. 오히려 사실관계는 정반대이다. 그의 주장과는 전혀 달리 마르크스는 주식회사의 형성 및 이에 상응하는 기능과 소유권의 분리 등을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은 결과"로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식회사에서 사적소유의 폐지를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출발점인 수탈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할 뿐인데 "자본주의체제 그것 안에서 이러한 수탈은 소수인에 의한 사회적 소유의 취득"(주4)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까지 분명히 적시하고 있다.
8. {자본} 제1권 32장의 해석에 대해
김성구 교수는 필자가 자본론 제1권 32장에서의 지적, 즉 "이 부정의 부정은 사적소유를 부활시키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협업 및 토지와 생산수단(노동 그것에 의하여 생산된 것)의 공동점유 - 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를 확립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이 주식회사의 일반적 형성을 의미한다는 해석에 대해서도 비판한다.(주5)
그러나 김성구 교수는 자본론 제1권 32장의 해석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통상적인 견해(우리의 인용구가 공산주의 사회로의 필연적인 이행을 서술한 것이라는 통상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필자의 논거들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도 비판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통상적인 견해에 기초해서 "…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 = 주식회사의 일반적 형성"이라는 필자의 등식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할뿐이며,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적 사회화에 의해서도 자본가적 사적소유는 최종적으로 지양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도대체 마르크스가 어디서!)는 다소 황당한 주장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그러므로 제1권 32장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가 보다 분명해지기 위해서는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그러한가가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선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를 확립한다"는 문장이 '공산주의 사회로의 필연적 이행을 서술한 것'이라고 알려진 이유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관점과 엥겔스와 듀링의 논쟁 덕분이다. 특히 {선언}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문장은 영락없이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지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이는 {선언}에서 "부르주아적인 사적 소유는 계급적 적대, 즉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는 생산물의 생산 및 점유형태 중에서 최종적이고 완전한 표현"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선언}의 관점에 따를 경우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가 폐지된 상태는 분명 공산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언} 등의 관점에서 벗어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이나 {자본론}의 관점을 취할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왜냐하면 {선언}에서의 관점과는 달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부르주아적 소유의 최종형태는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가 아니라 주식회사로 나타나며, 또한 {자본론}에서는 바로 이 부르주아적 소유의 최종형태인 주식회사가 사적 소유가 폐지된 사회적 소유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일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전혀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며 또 둘 중 하나는 분명히 틀린 해석이 된다. 무엇이 옳은가?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첫 번째 시각을 배제한다.
첫째, 초기 저작의 이런 저런 오류들이 성숙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정정·수정되거나 보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자본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둘째, {선언}에서는 "주식회사가 일반화되는 사회상태"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선언}에서 주식회사가 일반화되는 사회상태를 고려할 수 있었다면, 계급적 적대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표현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한계 내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소유형태인 주식회사였을 것이다.
셋째, 소유권과 점유의 분리에 기초해서 운동하고 있는 현실의 주식회사는 마르크스의 제1권 32장의 지적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주식회사는 분명히 주주들(복수!)에 의해 소유되고 있는 공동소유기업이지만, 소유(Property)의 하위범주인 소유권(ownership)과 점유( (possession)의 측면에서 파악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즉, 소유권(ownership)의 측면에 볼 때, 불특정 다수인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생산수단 그 자체가 아니라 배당은 낳는 독특한 상품으로 유통하는 주식(관념적 소유증서)이며, 이 주식에 대한 소유는 일반적으로 개인적 소유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소유권이 주식의 형태로 분산되어 개인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반면에 생산수단은 그렇지 않다. 생산수단은 항상 유기적인 전체로서만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 한계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산수단을 전체 주식소유자들은 어떻게 점유하고 있는가. 명백히도 전체 주주들은 그들의 대표인 이사를 선임해서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다.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필자는 1권 32장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에서 "마르크스가 그린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것이며, 또한 {선언} 등의 관점이 아니라 {자본론} 그 자체가 제공하는 관점에 따라 "마르크스가 그린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주식회사"라는 견해를 제출했던 것이다.
8. 민영화 문제에 대해: "종전의 정부기업들이 사회적 기업으로 된다"
김성구 교수는 "단계론과 이행론을 구성할 때 국공영기업의 지위, 나아가 국가 자체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처럼 단계론과 이행론을 구성할 때 이 문제가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소생산양식이나 협동조합 공장들을 단계론과 이행론을 구성할 때 어떻게 위치지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처럼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사회구성체의 경제적 시기가 어떠한가" 하는 문제는 항상 그 사회에서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필자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현대 사회의 가장 일반적이고 지배적인 기업형태로 등장하고 있는 주식회사를 상정하여 단계론과 이행론을 설명한 것이다.
어쨌든 김성구 교수가 제기한 문제, 즉 "필자의 단계론과 이행론에서 국영기업의 지위는 어떠한가"라는 문제는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주6)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 국영기업은 최초 투하자본이 거대하고 투하자본의 회수가 장시간 걸리며 이자수준 정도의 이윤을 보장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예컨대 도로나 항만, 철도, 통신 등)에 국가가 세금이나 채권의 발행을 통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나타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국영기업은 대자본의 파산이나 부도 등에 대응하여 정부가 국공유기업화 정책을 채택하면서 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출현한 국영기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
이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마르크스의 답과 꼭 같다. 즉, "주식회사의 형성, 이것에 의하여 … 동시에 종전의 정부기업들이 사회적 기업으로 된다"(주7)는 것이 그것이다. 또는 경제외적 변수들을 사상한다면, 주식회사의 일반적 형성과 더불어 국영기업들은 주식회사로의 이행의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 필자의 대답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주식회사의 형성과 더불어 왜 정부기업들이 사회적 기업으로 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다만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첫째, 국영기업의 일정한 성장과 더불어 사회적 필요성이 어느 정도 충족된 후 투하자본 회수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초 투하자본 등은 세금이나 국공채의 발행을 통해 조달한 자금으로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를 회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며, 또한 주식회사로의 전환은 투하자본을 회수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둘째, 국영기업의 일정한 존립과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공기업의 폐해들"이 자체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질곡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특히 모든 국영기업들에 공통적인 현상인 '정부와 노동의 직접적·적대적인 대립'은 정치적·사회적 부담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른바 "공기업의 폐해들"과 정부와 노동의 적대적인 대립은 자신의 존립형태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해결책은 '일반적으로' 국가지분의 매각이 된다(물론 조폐창이나 중앙은행 등 국가의 고유업무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영역은 예외가 된다)
셋째, 주식회사의 일반적인 형성은 자본의 일부가 이자 낳은 자본으로서만 간주되고 또 그러한 것으로만 투자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에 따라 일반적 이윤율보다도 극히 낮은 수준의 이윤율 ― 이자수준 또는 이보다 다소 크든 작든 ―을 낳는 사업분야인 국영기업들도 안정적인 투자처로 인식되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에 따른 자본의 투자영역 확대는 국영기업의 영역까지 포괄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필자가 이상의 이유를 들어 주식회사의 일반적인 형성과 더불어 종전이 국영기업들이 주식회사로 전환되는 경향이 있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다음의 사실 또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즉,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행위주체 또는 국영기업의 소유주체인 정부(정부투자기관과 그 인격적 담당자를 포함한다)가 이러한 경향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국영기업 노동자들의 대응은 어떠한가, 전환시점의 사회환경 등은 어떠한가에 따라 이 경향이 현실적으로 관철되는 양상은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자나 투자영역을 확대하려는 자본가라면 '자본주도의 민영화'를 내세울 것이고, 김성구 교수라면 이러한 경향을 처음부터 부인할 것이며, 필자라면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화(노동자소유기업화)나 또는 이를 지향하는 소유지배구조의 변화를 말할 것이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일정한 견제가 가능한 소유지배구조로의 전환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분을 매각하는 시점이 투하자금의 회수에 불리하거나 행위주체인 정부가 선택한 방식이 사회적 반발을 초래하는 경우 지분매각을 유보하기도 할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의 경향이 현실에서 관철되는 과정은 사회세력들간의 역학관계와 사회환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띌 수 있다.
9. 이행에서 국가의 역할:
노동계급의 정부로서의 경제개입과 국가기구의 변화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연합된 노동의 생산양식으로 이행해 가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필연이다. 비록 자본이 자기 증식할 수 있는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산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존재하며 계속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태내에서 성숙하는 노동자 계급은 그 경험적 자기부정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착취당하지 않으려는 지배당하지 않으려는 일방적으로 사용 당하지 않으려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을 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운동은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를 발전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착취당하지 않으려는, 일방적으로 사용 당하지 않을 사회적 관계를 창조해 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경험적 자기부정 과정에 내맡겨 두는 경우 노동자 계급이 경제적으로 해방된 사회로의 이행은 오직 점진적으로만 진행될 수 있을 뿐이며, 또한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독점을 지키고 영구화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경제적 특권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손쉽게 획득한 정치적 특권까지 언제나 이용하는 현실적 사정은 이러한 점진적 진행조차도 어렵게 하며 심지어 정체나 또는 끊임없는 퇴행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에서 하나의 사회적 필연성인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할 것인가? 일반적인 해답은 분명하다.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들의 경제적 특권에 끊임없이 도전해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정치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부르주아들의 정치적 특권을 폐지하고 이렇게 장악한 정치권력을 활용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노동자 계급이 어떻게 정치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직접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행에서 노동자계급이 장악한 국가의 일반적인 역할을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촉진하기 위한 하나의 강력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이다. 또한 이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사·관료기구가 걸림돌이 된다면 이를 타파해야 하며 구태의연한 법적·제도적 형태가 있다면 폐지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이행을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면 만들어야 하며, 기타 정치적 판단이 필요하다면 판단을 해야한다.
그러나 김성구 교수에게 필자의 이와 같은 일반적인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그는 필자가 이행의 문제에서 노동계급의 정부(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끌어들이고 있음을 보고 "놀랍게도"라고 감탄까지 하고 있으며, "그의 구상(주: 송태경의 구상)에서도 국가기구의 장악과 그 개입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그가 그렇게 부정하는 국가기구를 통해 어떻게 이런 과제를 실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그는 아무 답도 하지 않는다. 또 한 번의 수수께끼다"고 하고 있다. 또한 김성구 교수는 역설적이게도 필자가 "아무 답도 하지 않는다"고 한 부분에 각주를 달고는 필자가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위한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그것을 통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로의 전화 그리고 국가의 소멸을 핵심적인 문제로서 강조하고 있다"고 소개한 후(즉, 본문의 주장과는 달리 필자가 일반적인 해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소개한 후), 대충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보통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경제적 토대는 아직 자본주의 관계이므로" 이 때의 국가는 "독재와 부패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기관"인데, "어떻게 이 기관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공유주식 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상과 같은 김성구 교수의 반문은 우문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반문에서 국가의 역할이란 우선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재편하기 위한 "독특한 제도" 하나를 도입하는 것뿐이며, 김성구 교수처럼 이러한 제도를 어떻게 도입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 것은 마치 '현실의 민주노동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노동자경영참가제도나 토지자본에 반대하는 상가부동산임대차보호법과 그 제도들을 어떻게 도입할 수 있는가 결코 도입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정부가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촉진하는 과정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및 이의 법률적 표현인 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이는 경제적 생활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국가의 경제개입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상 국가의 경제개입과 국가가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정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경제개입이 국가의 본질적 속성(적대적 공동체 내·외부의 공적업무를 담당하는 속성과 국가와 국민대중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하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속성)의 발현에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인 반면에, 국가가 생산을 통제한다는 것은 국가가 개별생산 또는 국가내의 전체 생산에 대한 소유·경영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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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국가를 활용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을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으로 전환하면 국가기구는 어떻게 변화할까? 우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은 노동자공동소유와 직접 민주주주의 원칙에 따른 노동자자율경영 및 생산의 성과를 전체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분배할 것이기 때문에, 기업 내부에 적대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는 법률적 표현, 즉 노동관계법이나 그 기구들, 주식 등과 관련된 법률과 그 기구들, 또는 파생된 법률들과 그 기구들 등등은 불필요하며 소멸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상으로부터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산물이며 물질적 생활관계에 뿌리하고 있는 국가는 그 존립근거가 해소되면서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과도기의 국가, 스스로 자신의 존립근거인 경제적 생활관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면서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국가, 이것이 지구적으로 진행될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정부(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10. 결론에 대신하여 : "20세기는 결코 19세기의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의 논의로부터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사실상 김성구 교수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또 다른 이름인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에 기초한 사회'(즉, 자유인들의 연합체)이며, 또한 이 사회로의 이행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마르크스 사후 무려 117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한 가지 의문은 "왜 지금에야"라는 것이다.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핵심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소유문제가 왜곡되었었기 때문이다. 즉,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 중에서 {공산주의자 선언}에 단 한 번 등장하는 국유화, 그것도 선언이 엥겔스와의 공저임을 감안하면 엥겔스의 것임의 분명하고 또한 이렇다할 근거 없이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했었으나 마르크스 스스로 선언의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선언}의 2절 끝에 제시된 혁명적 방책들(자주: 바로 그 국유화와 관련된 방책들!)은 결코 그 자체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적시했고 심지어 라살레의 국가에 의한 생산통제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하기까지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마르크스의 이름을 빌어 국유화의 망령을 재생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사회엔 국유화에 대한 잔재가 완강히 남아 있다. 예컨대 오직 낡은 이념과 사실관계의 왜곡에 기초할 때만 성립하는 김성구 교수의 편견도 여기에 속한다. 역사상 또 하나의 계급사회에 불과했던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국가주의 사회)가 자체의 내부적인 결함 때문에 그렇게 큰 총성이나 환희도 없이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영기업에 공통된 자체의 적대적 모순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스탈린주의적 폐해'나 '관료주의적 편향' 또는 '서로 화해할 수 없었던 두 개의 적대적인 사회구성체의 적대적 대립과 그 부산물들을 끄집어내어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고 국유화된 사회를 꿈꾸고 고수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틀림없는 사실은 이러한 오류가 지속되는 한, 사회의 모든 기업을 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기업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일한 해악인 자본 그 자체"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건강한 문제의식과 실천은 자라나기 힘들 것이다. 비록 우리 모두가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 해방을 진실로 바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단 자본주의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죽어버린 사회주의에 의해서도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이며, 이런 조건에선 진보는커녕 정체와 퇴행마저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성구 교수처럼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자본주의 변호론"이니 "주식회사 사회주의"니 "우리사주 사회주의"니 하는 '다소 황당한 용어'를 끄집어내어 회피하려고 해선 안 된다. 비록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의구심과 이데올로기적 견해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 문제들까지도 해명해가야 한다는 또 다른 형태의 과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20세기가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19세기의 위대한 발견인 "자유인들의 연합체"에 대해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토대로 공론화시키고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진실로(!) 자본주의 사회의 항구적인 참화와 주기적 불균형과 사적 탐욕에 사로잡히게끔 하는 경제적 계급지배질서를 변혁하고자 한다면!
<미주>
*. 이 글은 본지({진보평론}) 4호에 실렸던, 김성구, [사회주의의 공상과 자본주의의 승인 그리고 '우리사주 사회주의론' ]에 대한 반론이다[편집자 주].
1) 김성구 [우리사주제도 개혁,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민주노총 {우리사주개선방안 토론회}, 1999, 6, 81쪽.
2)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특정한 사회경제체제를 지칭하는 용어로만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특정한 사회경제체제와는 다소 독립적으로 계급사회의 질곡을 해소해야 한다는 해방적 의미 또는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와 같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따라서 엄밀히 정의하면, 자본이 생산을 장악하고 사회의 전면을 지배하고 있는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듯이, 국가가 생산을 장악하고 사회의 전면을 지배하는 사회는 마땅히 "국가주의 사회"라고 해야 옳으며, 이하에서는 이 용어를 채용할 것이다.
3) "잉여가치 생산이 없으면 자본주의적 생산도 없고 그래서 자본이나 자본가도 없다" 마르크스, {경제학 노트}, 이론과 실천, 1988, 77쪽.
4) 마르크스, {자본론} 제3권, 비봉출판사, 540쪽.
5) 김성구 교수는 이 부분의 인용에서 "공동점유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자본론 제1권 제3-4판에서 수정된 내용) 대신에 "공동소유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자본론 제1권 제1판과 제2판에서 수정되기 이전의 내용)를 쓰고 있다.
6) 김성구, [사회주의의 공상과 자본주의의 승인 그리고 '우리사주 사회주의론'], {진보평론} 4호, 231쪽.
7) 마르크스, 같은 책, 536쪽.
첫댓글 참고로, 정승일 박사와 장하준 교수는 이와 같은 제 주장에 대해 "종업원 사회주의"라고 하더군요. 그이들이 저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제 주장에 대해 제3자가 붙인 여러가지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딱지 중에서 정승일 박사와 장하준 교수의 딱지는 그나마 묵인해도 될만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종업원 사회주의"라는 딱지는 북한을 포함한 소비에트 유형의 사회주의(이른바 '국가사회주의' 또는 엄밀히는 국가주의 사회)와는 뚜렷히 구분되니까요. 관련 참조글은 "장하준 교수가 내게 했던 독설들"( http://blog.daum.net/urisaju/8728544 ) 입니다.
김성구 씨 글도 링크를 걸어주시면 좋을 듯..
해서 제가 찾아올립니다.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96&o[at]=s&o[sc]=a&o[st]=a&o[ss]=%B1%E8%BC%BA%B1%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