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삼팔선 마을 사람들
寅松 황덕중(강원수필 회원)
나는 삼팔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이 어린 나뿐이 아니고 어른들도 그런 것 같았다. 더군다나 우리 마을 송암리 재골 북쪽 안찱이 삼팔선이라는 말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거기는 우리 집에서 북쪽으로 한 10분쯤 걸어 오르면 지당골이 있고, 거기서 조금 오르면 형제봉 옆으로 난 고갯길이 있어서, 그 고개를 넘어서 가일리로 천렵을 가기도 하는 곳인데, 거기가 삼팔선이라니, 거기에 무슨 선線이 있다는 것인지?
그런데 그 때 사실 나는 나의 태가 묻힌 재골에 살지 않고, 가일리를 지나 강(북한강)을 건너서 꽤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신포리에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사십다 후반에 일찍 돌아가시고 채취 할머니를 모신 할아버지가 내 아버지 식구를 신포리로 세간 내 살게하신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내 누님과 남동생 등 우리 삼남매를 거느리고 신포리에 신접살림을 꾸리셨다. 몇 백 평의 텃밭을 가지고 있는 꽤 널찍한 지과 상답(上畓) 아홉 마지기를 아버지는 장남인 내 아버지에게 마련해 주신 것이다.
농사도 잘 되고, 밤이면 동네 사람들과 횃불 들고 강여울에 나가 고기잡아 나누어 먹고 이랬던 몇년이 기억에 새롭다.
어느 날 할아버지에게서 전갈이 왔다. 지체하지 말고 며칠 안으로 중요한 짐만 꾸려가지고 재골로 넘어오라는 말씀이셨다. 그 전갈에 아버지는 무표정이셨다. 어쩌면 아버지가 먼저 그런 생각이셨는지도 모른다. 모진강 다리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로스케(러시아군)가 와 있다는 소문이 돌며, 삼팔선이 굳어지면 그 삼팔선을 넘어서 왕래를 할 수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삿짐 행렬을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 신포리에서 같은 면 송암리로 남하하는 행렬이었다.
나룻배로 강을 건너, 제일 무서운 산골로 알려진 가일리를 거쳐 형제봉 옆 비탈길을 비껴 걸어, 송암리 재골에 사시는 할아버지 댁으로가고 있는 것이었다. 로스케에게 발각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 때문인지 몹시 서두르는 발길들이었다.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모두 숙연하여 바짓가랑이와 등짐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와, 지게에서 나는 삐거덕 소리가 정적을 깰 뿐이었다. 마치 묘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행렬 같았다. 나는 그 행렬에 끼어, 행여 이탈되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하며 열심히 따라 걸었다. 여덟 살이 채 못 된 나의 보폭이, 어두운 비탈길을 어른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자니 등허리가 땀에 흠뻑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물건을 챙겨 지게에 진 아버지가 맨 앞에서 걸었고, 역시 옷 보따리 궤짝, 이불, 곡식 가마니, 항아리 등을 한 짐씩 지게에 진 이웃 남정네들이 그 뒤에 한 줄로 따라 걸었다. 40리라고 하는 그 길을 나는 앞 사람 따라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음력 5월의 밤 공기가 서늘했다.
형제봉을 오른쪽으로 보며 비탈길을 내려가니, 송암리 3반(제골)의 밤 마을이 어둠속에 보였다. 마을이 보인다기에 집집마다의 등잔불 빛이 어렴풋이 여기저기서 껌뻑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제일 먼저 맞은 것은 , 정적을 깨며 끊임없이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 소리였다.
마을로 내려서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어둠속에서 우리를 맞았다. 별 말들이 없이 우리들의 이삿짐 행렬을 인도하며 내처 걸었다. 우리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다. 안채와 바깥채가 북쪽에 ㄱ자, 남쪽에 ㄴ자 하는 식으로 맞물려 배치된 높직하고 꽤 큰 집이었다. 동네의 노른자 같은 위치여서, 온동네 집들이 우리 집을 핵으로하여 빙 둘러선 형국이었다.
우리 일생이 바깥마당을 거쳐 대문을 들어가서 안마당에 지게를 벗어 놓으니, 툇돌 몇 군데에 놓인 관솔불이 우리 들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드러내 주었다. 그제서야 서로 인사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나를 품에 안아주셨다
안마당에는 멍석 위에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옹기자배기에 뜨끈한 술국이 그득했고, 오지항아리에는 막걸리 위에 쪽박이 띄워져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짐을 지고 온 남정네들에게 일일이 막걸리와 술국을 떠서 안겼다.
남정네들은 마른 목을 대충 축이고, 길게 쉬지도 못하고 일어섰다. 그들은 나의 할아버지이ㅘ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께 작별의 인사를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우리들 삼남매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인사하고 돌아서는 그들은 서둘러 각자 자기의 빈 지게를 지고, 재골 지당골을 행해 줄지어 떠났다.
상현달이 설핏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올 때에 어두움을 무릅쓰고 건너온 북한강,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구절양장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넘어온 가일리 골짜기와 형제봉 고갯길 ㅡ. 그들은 이 험한 길을 달빛도 시원치 않은 한밤중에 되짚어 걸어 넘어가야 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희미한 달빛을 등지고 줄지어 산골짜기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에 7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흰바지저고리에 빈 지게를 지고 줄지어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
그때는 그랬다.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우리와 나누며 살아온 정에 얽혀 그 험한 밤길을 한밤중에 무거운 짐을 지고 넘어왔다가 되돌아간 것이다. 농사철이면 함께 품앗이로 밭일을 하고 모를 심고,그리고 논두렁에 앉아 먹걸리 나누며 제누리를 먹고 ,타작과 추수가 얼추 끝나면 먼 산에까지 가서 울력으로 농목(農木)을 해다가 집집마다 가리가리 쌓았고, 복지경이면 강변 산그늘에 모여 천렵도 하고....이런 정들에 얽혀ㅡ. 막걸리 한 두 잔과 술국 한 그릇으로 허기나 면하였는지....
그들과 그렇게 헤어지고는 곧이어 시멘트벽보다 더 굳게 굳어버린 삼팔선으로 해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걸어서 한나절이면 갈 수있는 거리에 살면서도 소식 한마디 듣지 못하며 살아왔고, 그 뒤로는 생사도 모른다.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멍하고 뭉클하다.(끝)
첫댓글 작품을 여기에 옮겨 쓰면서 마치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한밤중에 신포리에서 송암리로 짐을 옮겨주는 동네 사람들-그 먼길을 지게로 밤길에 와서 술국과 막걸리 몇잔을 마시고 다시 그 먼길을 돌아가는 마을사람들-,흰바지저고리에 빈지게를 지고 다시 돌아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5살 글쓴이는 7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며 눈물 짓는다.
87세의 작가 황덕중작가는평생 국어선생님이시다. 95년에 일찍 문단에 나오셔 같이 춘성중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어질고 항상 남을 배려해 지금도 만나고 싶은 분이시다..
이 글은 소설 토지의 축소판과 같다. 다스한 이웃간 정 情- 짧은 수필이지만,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번 읽으신 분들 다시 한번 읽으시면 작가의 마음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일독을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