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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 3장 16~4장5절
제목 : 성도의 정체성
지난주에는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에 대하여 말씀은 나누었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중생은 했지만 세상과 육신의 것을 끊어 버리지를 못하고,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소유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공동체 내에서 다툼과 시기와 분쟁을 일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은 마치 믿음의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1) 견고해야 하고 2) 아름다움이 있어야하고 3) 실용 면에서 편리해야 합니다.
이러한 집을 지으려면 1) 설계가 좋아야 합니다. 2)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3) 재료가 좋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짓는 집은 시험의 날에 견딜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금, 은, 보석 같은 고급자재로 지은 집은 불이 나도 그대로 있지만,
나무, 풀, 짚으로 지은 하급자재는 불이 나면 타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의 집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 믿음으로 2)말씀에 순종하며 3)성실과 근면으로
4)맡겨진 사명에 최선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은 16~17절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18~23절은 하나님 앞에서의 지혜에 대하여
4장1~5절은 하나님의 일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말씀을 나눌 때 큰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성전(16~17절)
1)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16절).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성막(Tabernacle)의 발전 형태입니다.
성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대로 만들어 졌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습니다.
첫 성전이 솔로몬 성전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지 480년 만인 B.C.966에 착공하여 총 공사기간 7년6개월 만인 B.C.959년, 예루살렘의 모리아산(Mount Moriah)위에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준공 된지 373년만인 B.C.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3차 침공 때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훼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금, 은, 놋 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습니다.
두 번째는 스룹바벨 성전입니다.(B.C.516; 스6:15-18).
스룹바벨이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B.C.586년 솔로몬 성전이 함락된 후 B.C. 516년에 건축한 것으로서 옛 성전에 비해 크게 초라했습니다.
세 번째는 헤롯 성전입니다.(B.C.20-A.D.63).
이방인 이두매(Idumea) 출신인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지만 세부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완공 된지 불과 수년 후인 A.D.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저항하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고 성전을 불타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 속에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해쳐버려 돌 위에 돌이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헤롯 당시 성전의 바깥 벽 중 일부 약450M 정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곳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오스만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 같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헐면 3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이면 삼 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고린도전서 3:9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장소' 즉 '성소'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이라고 부른 것처럼(요 2:19-21),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6:19)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막이나 성전의 지성소에 '쉐키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성도들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임재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내주라고 합니다(고전6:19, 고후6:16, 벧전2:5, 엡2:22, 요2:19).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영원한 성전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막을 만들었을 때, 비록 초라하게 보이는 천막집을 지어도 거기 성령님이 계시니 거룩한 전으로 성막이라고 했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봉헌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여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를 못했던 것입니다.(왕상8:10-11)
거기서 구름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비록 질그릇(고후4:7) 같고 하잘 것 없는 그릇이라도,
우리 몸에 성령이 계실 때 오늘 우리는 바로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이 성전은 항상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17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 그 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을 모시기를 원한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마음을 소유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다는 말은 구별된다는 말이요 성별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고, 성령님을 모신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님을 모시지 못한 자들과 그야말로 구별되어 성별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기도하는 성전에서 돈 바꾸고 짐승을 파는 사람들을 다 몰아 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도 더러운 죄악과 악하고 더러운 것을 다 쫓아내고 거룩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을 더럽힌 자는 사형을 받거나 백성에게 끊기 웠습니다.
*레15:31절 “내 성막을 그들이 더럽히고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도록 할지니라”
*민19:20절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신약 시대에 교회는 성전입니다.
교회에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자는 교회를 더럽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지혜(18~23절)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지혜와 그리고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을 보면 결국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리고, 자기 함정에 빠지는 경우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음을 오늘 본은 말합니다.
1) 자신을 속이지 말고 지혜로운 자가 되라(18절).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바울은 갑자기 주제를 전환하여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자기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그릇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현재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를 세상적인 관점으로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불경건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이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미련한 자가 참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로서는 참으로 진리를 아는 것이 없다고 자처하는 것입니다.스스로 진리를 아는 줄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 곧 계시의 말씀이 임하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을 방해합니다.
바울은 세상에 대한 미련함이 진정한 지혜라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뿐만 아니라 헬라인 모두가 갈망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미련함을 인식해야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지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헬라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도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나(2:14)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1:18-25에서 언급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나 이것이야말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희생과 섬김과 나눔과 베품이라 했습니다.
2) 이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19절).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왜냐하면 바로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의 인간적 지혜를 의존하여 서로 분열과 분쟁을 일으킴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뭉치면 살고 헤지면 죽는다” 분열과 분쟁은 죽음입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는 바울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구약성경의 두 부분을 인용한 것입니다.
욥 5:12,13을 약간 자유스럽게 인용했습니다.
*욥5:12,13 “[12]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13]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14]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바울은 본 구절을 통하여 사람들의 교묘한 속임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뚜렷하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자기들의 구원 계획을 세우나 오히려 그 교묘한 속임수가 그들을 얽어매도록 하여 인간의 지혜가 전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정신에 지배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는 인간적인 욕구 충족을 채우기 위하여 거기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창조자인 하나님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인간 육체의 욕망과 거기서 낙을 얻고, 인간의 이성을 그야말로 신처럼 모시므로 하나님을 그만 등지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보면 차라리 어리석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찾고 의지 할 텐데 너무 똑똑한 것이 그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죄 가운데 살다가 멸망의 수령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3) 아울러 주께서 세상의 지혜를 헛것으로 만듭니다(20절).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이것은 시 94:11의 인용입니다.
*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모두 다 지난 뒤에 회고(回顧)해 보면,
사람은 모르는 것 밖에 없고, 하나님은 아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 때문에 성공을 하지만,
또한 자기의 지혜 때문에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하는 하만을 보십시요......) 에스더6장7~9,에스더7: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는 결국 그에게는 자기 함정에 빠질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4) 세상의 지혜는 자기를 자랑하게 됩니다(21절).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은 여기서 다시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당파를 경계합니다.
그 교회 안에 당파들은 인물(人物) 하나씩 끼고 자랑하였습니다(1:12).
바울은 그들더러 인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5) 자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22~23절).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만물이 다 너희(기독신자들) 것인 까닭이라 합니다.
여기 "만물"이란 말은, 그들이 자랑하는 인물들까지 포함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등 인물들을 각각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야하면 그들은 기독자들의 소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장래 것"도 마찬가지로 그러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씀은, 위에 진술된 대로, 어떻게 만물이 기독자들의 것인 원인(原因)을 알려 줍니다.
곧,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인 만큼,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란 말씀은, 위에 말한 기독자들의 만물 소유가 역시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게 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3. 그리스도의 일꾼(4:1~5절)
우리는 그리스도 일꾼이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이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1~5절).
1) 성도의 자세(1~2절)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1절)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먼저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뼈댑니다. 기둥입니다)
이걸 바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쌓아 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 일 뿐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자기가 무슨 주인이나 되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줄 오해하고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큰 소리하며 주의 교회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가운 일이지요...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 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살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뜻대로 그저 주님의 원대로 사는 것입니다.
롬12:2절에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갈1: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 좋도록 돕는 일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오늘 이 일꾼은 입이 백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일꾼이요,
그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있는 종인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입니다.
이 비밀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께서 믿음과 지혜를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는 복음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입니다. .
복음을 전하는 일꾼 의식은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의 지체로서 각각 사역을 감당합니다.
섬기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모든 섬김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2:28; 엡4:11,12; 딤후1:11; 벧전2:9).
*고전12: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엡4:11,12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딤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아울러 이 종은 충성을 위해 있는 종인 것입니다(2절).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 교회가 필요한 것은 헌신적인 일꾼도 좋고, 돈 많은 일꾼도 좋고,
머리 좋고, 명예 권세를 가진 일꾼 다 좋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꾼이 없다고 주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참으로 충성된 종이 있어야 합니다.
忠誠이란 말은 가운데 “忠”은 中자에 마음 心으로 된 낱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꾼이 일을 할 때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심령에서 하는 종이 진짜 충성된 종인 것입니다.
충성이란 말은 원어에 믿음이란 말과 ‘진실’‘성실’‘신뢰’등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주의 교회 일꾼은 무엇보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충성”은, 일꾼이 그 주인에게서 일을 맡은 대로(그 지시한 대로),
어김없이 윗 어른이 시키는 대로 좇아 행함을 가리킵니다.
충성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판단의 대상(3~5절)
일꾼은 그가 누구이든지 다 하나 같이 판단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의 판단을 가장 인식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는 세 가지 면에서 판단을 받습니다.
(1) 사람의 판단입니다(3절).
“[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나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기 마련입니다.
잘한다, 못한다, 좋다 나쁘다!
그냥 우리는 끊임없이 칭찬 내지는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인간들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정확하지를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지식도 불완전하고,
아울러 그 마음도 심히 편견적이기 때문입니다.
롬2:1에서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릇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남을 판단하는 일, 이건 정말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누가 나를 칭찬하는 것도 너무 좋아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는 사실 나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간의 판단은 조석지변(朝夕地變)입니다.
얼마나 잘 변하는지 모릅니다.
좋다고 했다가, 나쁘다고 했다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를 모릅니다.
바울은 정말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도 비난 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어찌 바울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누가 나를 판단을 해도 그것은 극히 작은 일인 줄 알고 결코 요동치 않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판단입니다(3하반절)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양심이 자기를 판단하는 일을 말합니다.
사실 이 판단은 다른 사람의 판단 보다 더 정확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양심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결코 다 믿을 수도 없는 판단입니다. 왜냐하면 이 양심도 몇 번 거역해 버리면 그만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히틀러, 아이히만 이런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화인 맞은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양심도 사실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의 양심이라는 건 결코 완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4,5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너무도 정확합니다. 무오 합니다. 오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판단만 주목했고, 관심과 신경을 섰으며,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
① 하나님만이 사람의 모든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숨은 비밀을 아십니다.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속까지 보시는 것입니다.
삼상 16:7절에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고 하였습니다.
②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행동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동기를 봅니다. 결과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동기를 봅니다.
목적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도 보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했나...
(4) 어차피 일군은 끊임없는 판단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판단에 너무 문제시 하지 마십시오,
그건 아주 작은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숨통이 다 막히는 것 같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판단과 양심도 그리 문제되는 게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와 교회 공동체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항상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다.
시기와 다툼과 분쟁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18절)
세상 지혜(전문 분야의 지식, 학벌, 사회적 지위, 가문, 재산 등)를 교회 안에서 자랑하지 마십시오. 속이지 마십시오. 공동체에 분열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십니다(19절).
허무하게 만드십니다(20절).
오히려 세상 지혜에 어리석은 자가 되십시오(18절).
하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지도자를 주셨고,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특정한 지도자를 자랑하고 따라가며 헌신하는 것은 주님을 부인하는 것이며 공동체를 깨는 것입니다.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판단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오직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므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이 다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은혜로 우리를 부르셔서 성령이 거하는 전으로 삼아주십니다(16,17절).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은 성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일이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왜곡하여 교회의 기초를 흔들거나 교회의 하나 됨과 거룩함을 훼손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참 성전은 반목과 미움과 소외가 자리 잡을 틈을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샬롬과 일치를 이루어가는 공동체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자신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16~17절).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서 매사에 깨끗한 동기를 가지고 깨끗한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영원한 성전은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시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성전입니다.
비록 질그릇(고후4:7) 같고 하잘 것 없는 그릇이라도,
우리 몸에 성령이 계실 때 오늘 우리는 바로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2)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18절).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적으로는 미련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큰 특징은 십자가의 원리와 방법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라고 했을 때 십자가의 원리를 아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이 주신대로 감사하며 사는 것이 은혜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십자가는 단지 말로만 외칠 뿐이고 그 사고방식은 온통 세상 지혜로 채워져 있는 사람이라면 풍족하게 많은 것을 누리며 아무 일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은혜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도 무턱대고 부지런히 뭔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됩니다.
3) 세상 지식과 논리로는 참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3:18~20).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찰과 수양을 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세상 지혜는 도리어 공허한 ‘자기 꾀’에 빠지게 하며, 자기기만이나 연민에 이르게 할 뿐입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와 감동이 충만하게 임할 때,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회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일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자칫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말씀에 만족한 인생이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누립니다.
4) 세상 만물의 주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3:21~23).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고,
들에 있는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습니다.
온 우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인류 역사는 주님의 오심을 통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 같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 역사를 성취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택되고 결정됩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 속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면 그 길은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일체의 자랑을 버리고 주님만을 의지하면 참된 구원에 이릅니다.
5) 사람을 둘러싼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세속적 지혜에 집착한 결과입니다(18~20절).
세상지혜를 내세워 다투고 갈라서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독히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허망한지도 모른 채 스스로 지혜 있는 자로 자처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요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오만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는 민감하고, 세상의 헛된 지혜에도 둔감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여 화평을 이루는 ‘하늘의 지혜’를 추구하되, 다툼을 일으켜 공동체를 위협하는 세속적인 지혜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 ‘만물의 상속자’인 교회가 세상 지혜와 사람에 기대어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것은 자기모순일 뿐입니다(21~23절).
사역자들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4:1)일 뿐, 성도들이 상전처럼 모시거나 시기하고 다투면서 자랑할 대상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사람에게 종속되지 않는 자유롭고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7) 바울은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판단하실 때까지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맡겨진일에 충성할 뿐이라고 말합니다(4:1~5절).
그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 사람의 판단에 개의치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념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살피시는 주님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기나 성공이 아니라 소명과 충성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사람들의 인정이나 대가에 목말라한 적은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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