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객전도(主客顚倒)
하영 김국현
집 대문이 열리지 않는다.
분명히 번호키 뚜껑을 열고 외워둔 네 자리 번호를 또박또박 눌렀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 잘못 눌렀나 싶어 다시 누르고 또 눌러보지만 매 마찬가지다. 올리고 내리는 사이에 애꿎은 뚜껑만 힘이 든다. 이젠 번호를 눌러도 번호판에 불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불현듯 오늘 아침 일이 생각났다. 요 며칠 내가 집에 늦게 들어왔더니 아내가 일찍 좀 다니라고 한소리 하길래 일이 있어서 그런 걸 어쩌냐고 역정을 냈었다. 그 일로 혹시 아내가 혼 좀 나보라고 나 몰래 비밀번호를 바꾸어 놓은 건 아닐까. 그때 집안 분위기가 심창치 않았으니. 설령 그랬다면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부부 갈등은 앙금이 생기기 전에 풀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나. 별생각이 다 났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오늘 중에 집 안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느냐가 문제다. 어디 바깥에 잘 데도 마땅치 않은데, 어쩌나 싶다. 내 집에 내가 못 들어가다니. 혹시나 해서 초인종을 연이어 눌러보지만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다. 참다못해 문을 두드리며 “문 좀 열어.” 하니 맞은편 집 강아지가 대신 화답하며 기다렸다는 듯 목청껏 짖어댄다.
복도 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아득한 기억 속의 한 소년과 눈빛이 마주쳤다. 그 애는 자기 집 대문 옆 돌담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집에서 쫓겨났고, 대문은 안에서 잠겨졌다. 쇠꼬챙이가 문고리에 철커덕 걸리는 소리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주위에는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어스름한 달빛만 처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기가 뭘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부모님 말씀 안 듣고 게으름 부린 거 말고는 매몰차게 쫓겨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염없이 울면서 동네 한 바퀴 돌던 중에 자기를 찾던 형과 마주쳤다.
“엄마가 들어오란다. 걱정하지 말고 집으로 가자.”
그땐 형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웠다. 자신을 찾으러 형을 내보낸 건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려는 부모님의 배려였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대문을 열어 보았다. 그런데 번호키를 누를 때마다 “코르륵, 코르륵” 하는 게 배가 고프다는 신호가 아닌가. 건전지, 그래 건전지가 다되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더니 참다못한 기계가 심술을 부린 거다. 무슨 일이든 낌새가 있으면 바로 손을 봐야 하는 건데, 무심했던 내가 한심스럽다. 한참을 수소문해서 밤이 늦었다고 투덜대는 열쇠 가게를 겨우 호출했다. 가져온 장비로 이리저리 만지더니 가까스로 대문이 열리고, 자물통에 건전지를 차례로 꽂자마자 “차르르, 딩동댕!” 하며 철커덕 닫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어디서 몰래 엿보고 있었는지, 아내가 환하게 웃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을 열고 현관으로 폴짝 들어온다.
세상은 연결성이다. 무엇이든 서로 연결되어야 잘 돌아가는 게 세상 이치이다. 부부나 가족 간에도, 이웃 간에도, 단체나 기관, 국가와 국민, 자연과 인간 사이에도 서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어야 좋은 일이 생긴다. 하지만 대문의 번호키와 여닫이 장치가 건전지를 매개로 작동하듯 서로를 맺어주는 이음매가 제 역할을 해야 신명이 난다. 사람과 사람 간에는 사랑과 배려가 매개요, 사회는 소통과 이해, 자연과 인간 간에는 조화와 보존이라는 공유 의식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다.
자물통은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가거나 집안으로 들어서는 통로다. 거기에 더하여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나만의 영역을 지켜준다. 하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오히려 주인인 나를 막아서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건망증 탓인지 승용차를 타고 다니다 차 안에 열쇠를 두고 내려서 낭패를 보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럴 땐 주인인 내가 내 차의 도둑 신세가 된다. 내 차 운전석을 내가 들여다보는데 남의 눈치가 보인다. 집이든 승용차든 아무 탈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오늘도 외출하려고 집 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난데없이 젊은 여인이 경쾌하게 한마디씩 한다. "문이 열렸습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에너지를 빵빵 넣어주니 자물통도 힘이 나는가 보다. 그 안에 든 건전지의 위력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비위도 잘 맞추며 살아야 하지만, 이제부터는 자물쇠 안주인의 안부도 가끔 물어가면서 지내야겠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세상이다.
(2022.10)
첫댓글 지난주 수업시간에 저의 글 <이음의 미학>에 대한 교수님의 합평과 문우님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저의 글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글을 수정하다보니 예전의 수업시간 글제였던 '주객전도'라는 제목이 되었어요. 좋은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이예경 선생님 댓글) 누구나 열쇠 관리로 곤란을 당했던 체험이 있지요. 리얼하게 표현된 글이 공감을 주고 재미있습니다. 방심하면 오히려 주인인 나를 막아서는 괴물이 되기도 한다. 자물쇠의 안부도 가끔 물어가면서 지내야겠다. 로 의인화한 대목이 좋습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가장중요한 현관에 가끔씩이니마 안부를 물어야 했어요
주객 전도가 된 고소한 광경을 지켜봤을 아내가 상상됨니다 참께볶는 냄새요 수고하는 모습이 아침부터 뾰로통 했던
속이 확 풀렸어요 간접 수고가 완벽했을 국현선생님 을 더욱 사랑하며 아내도 사랑을 듬뿍 받는 내일의 맑은 행복이 가득하실거예요
(잘 모르지만)수정해서 올리신 글이 그림 보듯 정겹고 내용도 재미있고, 짜임 아주 좋습니다.
다시읽으니 더재미있고 교훈적인 수필입니다
좋은글 많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꼭 숙제가 아니라도 올려주세요 그림보듯
감상 잘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