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서청과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으로 단일화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그것은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흡수되었다.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국내의 모든 청년단체가 단일화 되었기 때문이다.
통합 당시의 청년단체는 모두 6개로서, 대동청년단(대청, 지청천), 청년조선총동맹(청총, 유진산), 서북청년회(서청, 문봉제), 독립청년단(독청, 서상천), 국민회청년단(국청, 강낙원), 대한민족청년단(족청, 이범석)이었다. 그 가운데서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은 통합을 거부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로 한 달 늦게 합류했다. 그에 따라 대한청년단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청년단체가 되었다.
서청 간판도 없어졌다. 그렇다고 서청 출신, 서청계라는 딱지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서청에 몸을 담았던 동지들은 서청 출신이란 명예를 가슴에 안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청년단체들이 대한청년단으로 단일화 된 것을 놓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자기의 정치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추진했던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통합 발의는 바로 청년단체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건국이 선포된 다음 달인 1948년 9월 중순부터 민족청년단을 제외한 5개 청년단체(대청, 독청, 서청, 청총, 국청) 대표들은 통합의 필요성을 느꼈다. 미군정 때 조직된 국방경비대에는 좌익이 많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청년단체 출신들로 국군을 재편성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통합문제를 가지고 여러 차례 모임을 가진 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그들의 뜻을 직접 전달하기로 결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8년 10월 15일부터 이성주(대청), 유진산(청총), 문봉제(서청), 서상천(독청), 강낙원(국청)을 차례로 경무대로 불러 의견을 들었다. 각 단체 대표들은 모두 신생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남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미군정 당시 각 기관에 침투해 있는 좌익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는 국방경비대가 그대로 국군으로 전환된 데 대해 강한 우려를 표시했다.
각 청년단체 대표 5명의 접견이 끝나기 하루 전인 1948년 10월 19일, 공교롭게도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의 공산당(남로당) 지하조직이 김지회 중위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날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 중이었으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그리고는 10월 20일 청년단체 대표들을 중앙청(구 총독부) 회의실에 소집했다. 300여 명의 청년단체 간부들은 긴장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여러분이 우려해서 나에게 진언했던 사태가 드디어 여수, 순천에서 터지고 말았다.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을 때 하지 사령관은 국방경비대를 믿을 수 있다고 나에게 장담했는데, 결국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기반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청년단체들을 통합해 애국청년들을 단결시키는 길밖에 없다."라는 취지로 말을 했다.
그러므로 청년단체들의 통합체인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을 탄생시킨 것은 국군반란사건이었던 것이다. 대한청년단은 탄생과 함께 전국의 말단 행정 단위인 면(面), 리(里), 동(洞) 단부는 물론 직장단부까지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3백만이 넘는 강력한 반공망(反共網)이 펼쳐졌다.
돌이켜보면, 미군정 3년 동안에 국방경비대와 서청은 전국 도처에서 충돌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미군정의 중립적인 좌우합작 정책은 공산당을 합법화했고, 그에 따라 국방경비대 모집도 사상검증 없이 전국 주요 도시의 길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공산당(남로당)은 당원들을 조직적으로 입대시킬 수 있었다. 국방경비대가 공산당의 은신처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신생 대한민국이 미군정으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는 과정에서 그러한 국방경비대를 국군으로 받아들인 것이 문제였다. 그 때문에 서청을 비롯한 우익단체들이 그 위험성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을 연장하려는 음모도 있고 해서 국방경비대 인수문제로 시간을 끌어 대한민국의 출범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국방경비대의 정비는 대한민국이 출범하고 나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 우세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그 문제에 손도 대기 전에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뒤이어 대구 제6연대 반란, 나주 주둔군 반란 사건이 연거푸 터졌다. 그러한 좌익 반란은 새로 탄생한 대한민국이 나라로서의 기반을 굳히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