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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일정도 중반에 들어섰다.
토요일부터 시작된 여름휴가가 벌써 5일째다. 아직 몸이 뻐근하지만
그래도 근사한 노동을 한 뒤에 오는 피로감이 나를 상쾌하게 한다.
휴대폰으로 사무실에서 음성메시지가 와 있었는데 전화하지 않았다. 휴가기간은 철저히 격리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금요일 밤에 출발하여 월요일에 마친 그동안의 산행이 머리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설악산과 그 안에서 세상을 잊고 동화한 사람들, 山 에너지가 우리에게 전이되었고 우린 이를 이롭게 활용한다.
비는 우리의 산행이 시작된 금요일 밤부터 하산하던 월요일 아침까지 우리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비!!
「산과 비와 우리들의 여름 계곡 등반 이야기」2000년 8월 4~8일
2000. 8. 4. 금요일
마음이 급해졌다.
업무를 아직 끝내지 못했는데 그와 겹쳐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내 마음 바쁜 줄 알아주는 동료는 한 명도 없다.
업무를 마무리 짓고 홀가분하게 설악산으로 출발하려고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데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할 통계가 영 엉망이다.
지금쯤은 저녁 식사를 하고 집에서 배낭을 메고 나와야 약속시각에 맞출 수가 있다.
몇 가지 마무리 덜 된 일을 선배에게 부탁하고 간신히 사무실을 떠날 수 있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꾸려둔 배낭이 나를 기다린다. 냉장고에 넣어 둔 김치를 배낭에 담고 더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하였다.
하산 후 사용할 공동장비 텐트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요 며칠 비가 제법 왔는데도 도무지 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악산 만은 이렇지 않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집결장소로 나갔다.
함께 등반할 대원인 등산학교 동문을 만나 날씨 얘기를 하는데 다들 우중산행이 당연한 표정들이다. 와! 질렸다…
배낭에 더 넣을 공간이 없어 그라운드시트(펀쵸)마저 가져올 것을 포기했던 나는 진한 낭패감에 빠져들었다.
강원도 쪽으로 비가 계속 온다고 했고 태풍도 올라온다고 한다.
“그래도 산행을 시작할 무렵엔 비가 그치겠지! ‘내가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
20:00 정각. 오늘 함께 출발하는 14명이 다 모이고 버스는 서서히 출발한다.
이제 드디어 간다. 근 한 달여를 설악산 등반할 생각으로 가슴 부풀게 기다렸다.
설악 등반이 포함된 내 여름휴가가 사무실 일로 망쳐지지는 않을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설악동에 도착한 시간이 다음날 새벽 01:00.
우리보다 앞서 설악산에 들어온 전두성 선생님과 노동환 동문이 설악동 B 지구 국립공원 관리공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설악의 품속으로 조금씩 안기고 있다.
애초 계획된 등산로는 둔전골로 가서 둔전 저수지 상류 지점에서 1박, 대청봉으로 이어진 둔전계곡을 따라 계속 오른다.
대청봉 조금 못미처 화채 능선 안부로 올라선 후 다시 반대편 염주골로 내려서서 적당한 곳에서 2박 한다.
양폭산장을 지나 천불동을 따라 하산하다 칠선골로 들어선다.
계속 계곡을 올라 칠성봉을 지난 후 피골로 내려오는 것이다.
등반 전 예비모임에 늦은 관계로 등산로의 상세한 개요에 대해 잘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 계획서상에 나온 일정이 그랬다.
비는 어느덧 폭우로 변해 있다. 한국산악회 설악산구조대원으로 자원봉사하는 김승언 님과
오진관광 노영수 님이(전두성 선생님 산악 후배) 새벽의 폭우 속을 마다치 않고 우리를 도와주러 나와 있었다.
두 분의 승합차에 분승하여 폭우 속의 둔전골 초입으로 이동했다.
창이 없는 승합차 적재함에 8명이 배낭과 함께 포개지니 시큼한 땀 내음과 함께 열기가 치솟는다.
폭우가 퍼붓지만 차 문을 열어 개방하였다. 바퀴에 갈라지는 물보라가 마치 보트를 타고 달리는 듯 느껴진다.
폭우 속에 문을 열어 재치고 달리는 차량 속에서 배낭에 헤드 랜턴을 머리에 쓴 대원들의 표정은 마치 전장에 투입되는 병사의 모습이다.
(누군가 “특수수색대대원 같아! 특명은 뭐야?”라고 지껄였는데 계속해서 내리는 비 때문에 걱정이 되던 나는 그 특명이 “비박이다!”라고 나직이 외쳤다.
생각해보니 비박은 -bivouac- viva였고 viva 하느라고 우린 밤새 두 팔 들고 비를 막아야만 했다. )
나와 함께 간 대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산이 좋아서 한국산악회 등산학교에 입교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등산학교는 나이 제한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런 제약이 없었던 한국산악회 등산학교는
개방의 폭이 넓어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고 각양각색의 직업과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작년 8월부터 10월까지 등산학교에 다녔다.
등산을 체계적으로 배워 내 여가생활의 근원으로 만들자는 욕구로 산을 다니기 시작한 때가 작년 6월 말부터니 벌써 15개월째다.
다행히 조사계에 근무했던 터라 조금은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지금도 돌이켜 보면 즐겁고 유쾌한 기억들이다.
(전두성 선생님께서 내가 재학했던 경찰대학 산악부 창설 강사님이셨기에 등산학교 입교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둔전계곡은 아무리 보아도 누군가의 손길, 발길도 허용치 않은 생생한 자연 그대로였다.
폭우가 쏟아지는 계곡을 따라 비박 장소를 찾아 새벽 1시 30분부터 03시까지 덤불을 헤치며 올라갔다.
어둠과 비와 짙은 숲 내음으로 덮인 둔전계곡은 마치 우리를 아마존 정글을 헤쳐나가는 탐험대로 착각게 한다.
선두그룹과 조금 떨어진 중간그룹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앞장서 가던 선두와 연결이 끊긴 것이다.
후미 쪽에 있던 나는 앞쪽 계곡 근처 불빛이 선두 일행의 것으로 생각했는데 중간그룹은 위쪽으로 계속 올라간다.
아니다 싶었지만 좀 더 쫓아갔다.
얼핏 보였던 선두 불빛과 너무 떨어져 능선 쪽으로 붙는다는 생각에 멈추라고 했고 내가 먼저 올라가 등반로를 확인하였다.
깜깜한 밤에 폭우마저 쏟아지는 숲길을 100여 미터쯤 올라갔을까, 더 위쪽으로는 일행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 돌아선다.
다행스럽게도 선두 그룹 중에 한 분이 우리를 찾아 나서 나머지 일행을 선두 쪽으로 이끌고 나아갔다.
아무튼, 산속에 빠뜨려 놓으면 어느 사람도 쉽사리 자기 위치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성환균 님이 이번 등반의 등반대장이다. 이 분은 예전 대학산악부 멤버로 다년간 산에 다닌 경험과 관록 있으신 분이다.
나와는 등산학교 4기 동기인데 내가 활동이 부진했던 일 년 동안 산에 열심히 다녀서 그런지 실력이 엄청나게 발전한 것 같았다.
거기다가 등산학교 강사과정까지 마치면서 더욱 경력이 붙었다.
성환균, 이인섭 님이 앞장서 걸으면서 마땅한 비박 장소를 찾고자 했던 시각이 새벽 3시가 가까워져 갈 무렵이었다.
결정한 비박 장소는 계곡 물가에서 10여 미터 위쪽 지점이었다.
편성한 조별로 적절한 장소를 찾아 플라이 시트로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가리고 휴식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갑자기 오른쪽 눈 아래 부위가 몹시 따갑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다.
잠시 후 서너 명의 동문이 여기저기에서 “벌이다. 벌에 쏘였다, 조심해!”라고 외친다.
비박 준비 중에 누군가 벌집을 잘못 건드린 모양이다.
벌에 쏘이는 것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원 참 세상에, 벌에도 쏘여보고… 에구구 좋은 경험 한다?
플라이 시트로 지붕을 만들 때는, 시트 고리에 코드 슬링을 걸고 적당한 나무나 지형지물에 터벅매듭으로(Tarbuck knot) 고정해야 한다.
경험이 없었던 나는 계속 버벅댔다. 팀장 이인섭 님이 진한 경상도 억양으로 “어, 이 친구 뭐 하는 거야!”라고 한마디 한다.
힐난하는 소리 같아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비는 계속 내렸다.
계곡을 흘러내려 가는 물소리는 어느새 위협적인 소음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모두 젖은 신발과 옷 때문에 떨어야 했다.
처음엔 모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앉아 있기를 30여 분, 박하연 님이 자리가 불편하단다.
우리 조의 여자 대원인 변영선, 박하연 님 사이에 내가 등을 대고 자리를 잡았는데 내 뼈가 너무 딱딱하여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누님도 참, 별것 다 가려! 그냥 있지.’
새벽이 가까워 지면서 비에 젓은 몸은 체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추워진다.
어차피 뜬 눈으로 샐 것이 뻔한데 따뜻하게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스토브를 켜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룬다.
이인섭 팀장은 내 재킷을 빌려 입은 뒤로 벗을 줄을 모른다.
나는 고작 반소매 티에 체크 남방을 입었을 뿐인데
이인섭 님은 자기 옷이 배낭 안쪽에 들어있어 꺼내기 귀찮다며 재킷을 벗어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렇게 춥나? 추우면 옷 빼입어라”
가스스토브 불빛 주위로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날이 밝아지기를 기다렸다.
다섯 시가 넘을 무렵 동이 터오기 시작하였고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동해 쪽 하늘을 쳐다보며 우린 기쁨의 탄성을 올렸다.
다른 조는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나가는가 싶어 다른 조의 비박 사이트로 가보았더니
찰리 조는 원형으로 쌓인 돌 울타리 안에서 침낭 커버를 뒤집어쓰고 잘 주무시고(?) 있다.
마치 창고에 쌓아둔 소금포댓자루처럼 보인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났다.
모차르트는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포댓자루에 넣어져 그렇게 세상을…, ㅋㅋ
뜬눈으로 밤을 새운 우리 조는 살며시 걱정되었다.
오늘 산행도 만만치가 않을 텐데 제대로 자지 못한 우리는 어떻게 산행을 해야 할는지.
빨리 출발하여 휴식 도중에 다른 조가 도착할 때까지 잠을 자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별로 실행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기에 다른 조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아침 준비를 하고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다른 조가 내심 부러웠다.
제때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은 누구나의 원초적 욕구다. 이것이 적시에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행동이 원활할 수가 없다.
2000. 8. 5. 토요일 06:00
비는 여전히 내렸고 우리의 본격적인 계곡 등반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찍 준비가 끝난 우리 조가 선두에 섰다.
우리 회장님은 연세가 회갑에 가까운데 후배들을 잘 챙겨준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힘찬 발걸음에 우리도 절로 힘이 나는 듯하다.
여성대원 박하연 누님. 그녀는 40대 골드 미스로(gold miss) 체력이 남들보다 떨어지는 분이다.
가끔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 듯싶다. (나중에는 상당히 자주 피웠다.)
이인섭 님이 선두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간밤에 비와 어둠 때문에 둘러보지 못한 둔전골만의 신비가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한다.
둔전골 하류 계곡을 옆으로 끼고 서서히 산자락 거슬러 상류 쪽으로 접근하면서 희뿌연 안개가 다가왔다. 따뜻한 안개 지대였다.
더불어 진한 야생초의 내음이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조용히 눈을 감아보았다. 나는 신선이 되었다. 구름 위를 거닐고 있었다.
많은 비가 만든 힘찬 계곡 물소리도, 자주 들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도 내 귀를 스쳐 갈 뿐,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다리를 감싼다. 냉기류로구나.
잠시 뒤 얼굴로까지 상승한 차가운 안개에, 젖었던 몸이 더욱 촉촉해지는 듯싶다.
지도를 꺼내놓고 위치 확인을 한 뒤 출발했지만, 솔직히 난 우리 루트를 정확히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비모임에도 늦게 갔고 조의 리더도 아니어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끄는 대로 가면 되겠다 싶었지만 이런 소극적인 사고방식은 내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겨 두질 못했다.
둔전골에서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 쪽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서
이런 계곡에 나만 홀로 남겨진다면 어떤 이정표에 따라 산을 오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일단 봉우리가 보이는 곳에서는 봉우리를 목표 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최고다.
문채식 팀장이 ‘남자가 목적하는 봉우리는 두 개봉(?)’ 이라고 했다. 그러려니 싶다.
대학 1학년 때 워낙 고생스럽게 여름산행을 했던 나는 당시 산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만의 감흥 속으로 빠져들기에는 여러모로 여건이 받쳐주지 않았었다.
이후 산행을 하면 눈을 치켜들어 여기저기 관망하면서(땅바닥만을 보고 걷지 않고) 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일행이 보지 못하는 경치를 나만은 보겠다는 심정이었지만 너무도 힘들 때는 그런 생각조차 버겁다.
설악산에 오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소나무가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를 닮은 듯이 부드럽게 공간을 둘러 돌아가는 소나무가 있는 한편,
어느 기운 센 장정의 허벅다리처럼 올곧게 땅에 뿌리를 박고 굳건히 서 있는 나무도 있으며
세월의 지혜가 알알이 박혀 산화된 듯 옅은 황톳빛 자태를 드러낸 나이 든 소나무도 있다.
또 설악의 절벽지대 한 줌 터에 몸을 지탱하며 외로이 세월을 지키는 키 작은 소나무도 있다.
앞장서 가던 등산학교 동문회 회장님이 뼈대 굵은 소나무를 보시면서 “야, 이놈 곧다!”라고 탄성을 외친다. 뒤따르던 나도 쳐다보았다.
소나무를 지나치며 사람이 세상에 나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에 깨끗한 발자취를 남기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시류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고 자기만의 신조를 굳건히 지켜가면서 사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어떤 것이 지혜로운 선택인지, 나는 어떤 부류인지,
이 소나무가 여느 소나무처럼 굴곡이 심했다면 갈길 바쁜 회장님이나 내가 눈길을 주며 잠시 인간 세상을 생각했을 것인지…
둔전골 계곡을 가로지르기를 네댓 차례. 물살이 빠르고 깊다.
박철규 님이 함께하고 있기에 계곡을 건널 때는 편한 길목을 찾아야 한다.
박철규 님은 젊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좌측 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본인의 엄청난 노력으로 등산학교 5기로 수료했는데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려운 등반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단순한 산행이야 지팡이에 의지해 정해진 길로 오르내리면 된다지만
길 흔적도 보기 어렵고 암반지대가 많은 이런 곳에서는 홀로 산행이 어렵다.
두 팔, 두 다리를 사용해도 이동하기 쉽지 않은 지대가 수없이 나타나는 설악산인데 이런 곳을 박철규 님이 함께 왔다.
이런 분과 함께 산행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실 나는 이분과 산행을 해본 적이 한 번밖에 없다.
물속에 들어가기 싫어서 계곡을 지나쳐 갈 때도 되도록 물속에 머리를 드러낸 바위만을 찾아다녔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내가 이렇게 장난스럽게 다니는 것이 어려 보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리더가 된다면 이런 길을 찾아다닐까? 한 걸음 더 움직여서 길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오른쪽 신발 밑창의 앞부분이 몇 달 전부터 떨어져 나가 입 벌린 하마가 되어 보기 싫었고
이런 신발에 물 묻히는 것은 더욱 싫어 토끼처럼 바위 위를 요리조리 뛰어다녔는데
하여튼 발에 물을 묻히지 않으려다가 난 끝내 산행 마지막에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계곡이 끝났구나 싶더니 이내 45~50도 경사로 오르기가 시작되었다.
능선을 타고 대청봉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주 가팔랐다.
이런 능선을 타고 오르기를 4시간여. 우리 조의 박하연 님과 charly 조의 박철규 님이 뒤로 쳐지기를 거듭한다.
가파른 산행길에 앞선 이가 늦어지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뒤에서 기다려주는 것도 “일”이라는 것을 이번에 여실히 체험했다.
박하연 님이 몹시 힘들어하며 자주 발걸음을 멈춘다.
이런 분을 뒤에 둔 채 걷다 보면 전체 팀의 산행이 늦어지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은근히 걱정되었지만, 박하연 님을 돕고 격려할 만한 사람이 달리 없다.
팀장인 이인섭 님은 선두를 리드하느라 앞쪽으로 나아가 있는 상황이다. 내가 뒤에서 박하연 님을 채근한다.
가다 멈추고, 쉬었다가 또 두세 발자국을 가다 멈췄다. 빨리 가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쉬면 더 늦어지고 여기서 뒤처지면 일행을 놓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해서 그런지 열심히 쫓아 오려고 한다.
간혹 도저히 안 되겠다면서 내일은 혼자 하산하겠다는 말도 한다.
박하연 님이 하산할까 안 할까? 내기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내기할 만한 사람이 없다.
오후 두 시가 가까워져 오는데 비는 더욱 세차게 온다. 이인섭 님의 재킷을 꺼내 입었다.
내 재킷보다 1~2년 늦은 버전인데 그리 튼튼해 보이지도 방수성이 뛰어날 것 같지도 않다. (투덜투덜)
정상부근의 능선에 가까워지자 경사가 조금 완만해진다.
난 지형과 등반로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냥 앞서 가는 사람 발만 뒤쫓아 가는 형국이었다.
점심은 어디에서 먹고 오늘은 어디까지 갈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더욱 힘이 든다.
전두성 선생님께서 앞에서 기다리신다.
약 백 미터만 내려가면 비박 사이트가 있고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고 말씀하신다. 이게 웬 횡재냐??
선생님의 배낭을 들고 약 오십 미터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과연 천혜의 요새가 나타난다.
마치 미국 요세미테 국립공원의 Half Dome처럼 하늘을 반쯤 가렸는데
안쪽으로 약 십여 미터가량 들어갈 정도로 깊었고 안쪽 깊은 곳에서는 약수가 흘렀다.
우리 일행 17명이 하룻밤 묵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캠프사이트였다.
설악산 심마니들이 둔전골 지역을 돌아다니다 날이 저물면 숙소로 이용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비에 흠뻑 젖은 우리 일행이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땔감을 쌓아 두었다는 것이다.
간밤에 비와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 일행은 가장 먼저 땔감에 불을 붙여 모닥불을 만들었다.
하루의 산행이 이처럼 빨리 끝난 적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김인식 님 말씀대로 너무 “해피” 했다.
등산화를 말리기 위해 모닥불 주위에 가져다 놓은 뒤 식사준비를 했다.
이인섭 님과 회장님이 준비한 듯한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는데 다른 조는 이런 고기를 준비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글지글 구워 먹는 삼겹살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뻐꾸기”. 두꺼비도 아니고 왜 뻐꾸기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이인섭 님이 뻐꾸기라고 그랬다. 남의 독특한 작명에 이의다는 것도 별로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냥 듣고 넘기기로 했다.
이인섭 님이 우리 조 대원 모두에게 선물을 준단다.
포장용기가 그럴싸하다. 선물은 직사각형의 롯데백화점 포장지에 담겨 있었다.
‘과연 리더답다. 이런 장기산행의 와중에서도 배려를 아끼지 않는구나.’
속으로 감탄하면서 어떤 선물이 나올까 기대에 차있었다.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 오지에서 무슨 선물을 바라느냐? 속없는 사람들아!
선물은 바로 뻐꾸기. ‘뻐꾸기 몸으로 울었다, 산속에서 꺼이 꺼이…’ 여행용 참이슬 팩이 예쁘게 싸져 있었다.
덕분에 해발 1,300미터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알코올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저렇게 민생고를 해결하니 벌써 4시다.
어젯밤에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옆의 누군가가 발 좀 닦으라고 한다. 젖은 신발이라 한번 벗으니 다시 신기 힘들었다.
맨발로 여기저기 다녔더니 마치 점묘 수채화 하듯 발바닥에 흙들이 점점이 묻힌 모양이다.
그래도 그것이 편하다. 자연으로 돌아가면 무언들 내 몸을 귀찮게 하리오.
한 주먹 흙이 나를 피곤하게 하리오, 한 아름 풀이 나를 괴롭히리오.
5시가 가까워지며 졸린다. 침낭을 폈다. 변영선 님이 준 청결 액으로 간단히 입안을 헹군 뒤 잠에 빠져들었다.
주변에서 들썩이는 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다음날 새벽인 것으로 착각하였다.
날은 적당히 깜깜했고 분위기가 고즈넉하여 새벽과 흡사하다.
그러나 다행히 날은 그렇게 빨리 지나지 않아 이제 겨우 저녁 6시다.
잠시 눈을 붙였던 다른 조의 동문은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며 스토브에 그릇을 올리고 있었는데
4시경 잠들 때 계속 뻐꾸기와 함께하던 이인섭, 문채식 님은 그때까지도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대단하다. 피곤하지도 않은 모양이다.
잠만 잤는데도 시장하다며 신호를 보내는 나의 밥통에 정말 위대하다는 찬사를 보낸다.
뭐 먹을 것이 없는가 하고 주변을 훑어 보았다.
밥을 먹고 싶었지만 혼자 궁상떨기도 뭐했고 그냥 빵, 초코파이, 기타 간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 와중에서도 옆자리에서는 뻐꾸기 잡는 남성들의 모임이 계속되었고 김인식, 김재호 님까지 가세한다.
김인식 님은 연신 “해피하다, 정말 해피해, 난 이렇게 물에 흠뻑 젖고 싶었어.”라고 하시던데 정말 해피한 건지 어쩐 지 잘 수긍이 안 가더라.
사실 난 밤에 비를 맞으며 출발할 때부터 그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그렇게 별러 왔던 휴가를 비로 시작한 것이 못내 아쉬워 어쩔 수 없는 그 날씨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8시가 넘어가고 있다. 모닥불도 서서히 잦아들었고 부산했던 주변도 정리되어 가고 있다.
떨어지는 빗물을 피해 그라운드시트를 깔 장소를 물색하던 일행들도 불편하나마 자리를 잡고 침낭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록 비로 온몸이 젖었지만, 대원 모두의 가슴에는 모닥불의 따뜻한 온기가 지펴 올라가고 있었다.
모닥불 바로 위쪽에 자리를 잡았던 우리 조는 이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회장님, 김인식 님, 새근새근 잘도 자는 박하연 님, 역시 피곤함에 못 이겨 고단한 잠을 자는 이인섭 님,
모두 잠들고 변영선 님과 나만 깨어 있다.
침낭 위로 간혹 떨어지는 빗물에 잠깐씩 주위를 환기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변영선 님은 자기 고향이 지금은 개발되어 몰라볼 정도가 되었지만 어렸을 때는 완연한 시골이었다고 했다.
저녁 때쯤이면 하얀 안개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고 이는 시골 아궁이에서 나온 연기에 다름없다고 했다.
“그럼, 새벽녘에 마을을 감싸는 것도 밥 지으며 피워올린 연기냐?” “아마, 그럴 거야.”
변영선 님은 누가 봐도 참 마음씨 고운 아가씨다. 차분하고 눈치도 꽤 있는 편이다. 얼굴도 귀엽게 생겼다.
“머리를 마지막으로 한 번 길러 보려고 하는데 어쩔는지 몰라. 같이 일하는 언니들은 머리가 짧은 것이 더 어울린다고 하는데…”
“글쎄, 한번 길러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사실 난 긴 머리가 변영선 님에게는 안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쯤은 변화를 시도해 보아도 재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잠을 잤는가 싶을 정도로 다시 피로가 닥쳐온다. 잠을 잘 잘 것 같다.
2000. 8. 6. 일요일. 05:30 분쯤
등산학교 동문의 아침은 항상 부산하고 분주하다.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버릇처럼 익숙해져 버린 탓에 인수봉도 가장 먼저 오른다.
여름엔 더운 햇볕을 피해 가장 시원할 때 번잡하지 않은 상태에서 등반을 끝낼 수 있어 좋다.
오늘 아침은 내가 준비하려고 움직였다. 라면에 햇반을 말아먹는 개밥 방식을 취했는데 물이 조금 많다 싶었다.
라면 수프를 푼 뒤에도 컵으로 서너 컵을 더 떠냈다. 은근슬쩍 걱정되었는데 회장님이 맛을 한번 보자고 한다.
손님의 평가를 겸손히 기다리는 주방장의 마음처럼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싱거운 것을 좋아하시는 지(?) 맛이 괜찮다고 하신다.
소금을 넣을 계획을 접고 우리 조의 자리로 음식을 가져다 놓았다. 모두 잘 먹는다.
요리든 천막을 치는 것이든, 경험 이상인 것이 없다. 뭐든 해보고 겪어보지 않으면 어렵다.
아침 7시경 우리의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동굴을 떠나 산등성이로 다시 접어들며 내가 선두에 섰다.
부지런히 가다가 바로 뒤에 쫓아오던 변영선 님이 기다려 보란다.
대청봉 정상으로 가다가 화채 능선에 올라 염주골 쪽으로 빠져서 양폭산장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대청봉 아래 화채 능선에 올라서 나는 우리 일행의 후미가 되었고 조금 쉬었다가 계곡 밑으로 쳐내려 가기로 했다.
조망공간이 좋은 바위에서 사진을 찍고 쉬게 되었는데 설악산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마등령과 공룡능선이 보였고 울산바위는 언제나 그렇듯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첨탑을 자랑하는 천화대의 범봉, 칠형제봉 능선,
옆쪽으로 신선대가 새침데기 색시가 토라져 있는 것 마냥 뾰조름하게 돌아앉아 있다.
만경대가 뒤질세라 근위병처럼 우리 일행을 호위하며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인섭, 성환균 님이 앞장섰다. 계곡 물이 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물이 귀했던 능선과는 달리 물이 많아지면서 내려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뒤쪽 박하연, 박철규 님이 속한 그룹은 상당히 늦어지고 있다. 잠시 후미를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하여 인섭 형과 성환균 님이 “곰취”를 땄다. 쌈밥 해 먹거나 삼겹살 구워먹을 때 싸서 먹으면 좋다고들 한다.
한 번 먹어 보았는데 신선초처럼 쌈쓰름한게 싱싱한 자연의 맛 그대로다.
계속해서 내려간다. 계곡 물이 모이면서 크고 작은 沼가 생기고 있었다.
계곡 물을 옆에 끼고 15미터 정도 하강한 지점에서 점심을 먹는다. 벌써 1시 30분, 계획보다 상당히 늦어 있다.
가지고 있는 라면, 햇반 등으로 식사를 마치고 다시 로프 하강을 계속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염주폭포로 생각되는 최장 50미터 이상 되어 보이는 폭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하강점이 부실하고 아래쪽 상황을 알 수 없어 더는 계곡으로 내려갈 수가 없게 되었다. 누군가 탈출(?)해야 한다고 했다.
옆 능선을 넘어야 했다. 돌이 아닌 나무와 풀, 흙으로 된 사면이라 다행이었다.
잠시 경치를 관망하고 일행을 뒤쫓아갔더니 이선화 님이 또 폭포가 있다고 약간 울먹이며 막막한 듯 소리를 쳤다.
전두성 선생님이 부리나케 내려갔으나 폭포가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
처음 듣던 바처럼 염주 계곡의 폭포와 소는 염주처럼 줄줄이 이어져 있구나.
선생님과 이인섭 님이 앞장서 로프를 설치했다.
나는 몇 명의 대원이 내려간 뒤 하강했는데 상당히 긴장되는 하강 루트가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너무나도 거센 폭포의 물살을 따라 소로 직접 빠져 들어가는 하강을 해야 했다.
물살에 몸이 떠내려가는 듯했고 소로 빠져 들어갈 때는 섬뜩하게 와 닿는 찬물이 두려웠다.
가슴까지 차오는 물을 헤쳐 가며 3~4미터를 전진하면서 비로소 소에서 빠져나왔는데
이 소를 처음에 들어가는 사람의 심정을 그땐 이해하지 못했지만 정말 어려웠겠구나 싶었다.
누군들 선구자의 마음을 이해하리오! 당신이라면 그렇게 나설 수 있겠소?
로프를 설치하고 하강 루트를 먼저 내려온 두 분이 존경스러워졌다.
두 번째 소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다른 대원들의 원활한 진행을 돕는다.
계곡 바위틈에 누구의 손길도 용납지 않은 채 피어있는 금강초롱을 보았다.
고개 숙인 세 개의 금강초롱 꽃이 가녀린 여인네의 희디흰 목덜미처럼 지그시 소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로프가 이 여인네의 흰 목 주위를 왔다 갔다 하며 위협하는 것을 보면서도 딱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꽃잎 하나가 바로 아래에 떨어져 있었는데 로프나 하강하는 누군가의 발에 고개를 떨궜으리라.
대원 모두 하강을 마치고 계곡 아래로 계속 하산한다.
나는 이인섭, 성환균, 변영선 님과 함께 로프 회수하는 작업을 도왔다.
폭포의 물살에 따른 장력과 물에 젖은 로프가 너무 무겁다. 열심히 밑에서 당겼는데 이런!! 야단났다.
한 동의 로프가(아래쪽) 거의 다 내려오고 연결된 두 번째 로프가(위쪽) 내려올 무렵
이 두 번째 로프의 어느 부위가 계곡의 바위틈에 끼었는지 도무지 내려오질 않았다.
누군가 다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계곡 측면의 바위길로 올라 계곡 상단으로 다시 올라가야만 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로프를 잡고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
우리의 호프 이인섭 님이 계곡 옆으로 나 있는 바위 지대로 한 30여 미터 정도 올라간다.
이인섭 님의 생각은 어느 정도 회수한 여분의 로프로 계곡을 끼고 있는 바위로 올라가서 적당한 하강점을 만든 뒤
내려오면서 어딘가 꼬여 끼어있는 로프를 회수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인섭 님이 요청한 바를 들어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로프의 연결 매듭을 풀어줘야 생각대로 전개하는데 그것이 어렵게 된 것이다.
이때, 나선 사람이 노련미에 빛나는 성환균 님이다.
매듭 부위 바로 아래로는 거센 계곡 물살이 바위를 뚫듯이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고 누가 봐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성환균 님이 스톡을 익숙하게 사용하며 조심스럽게 폭포가 내리쏟는 옆 바위를 따라 접근한다.
급류를 발 사이에 두고 로프를 거세게 당겨가며 아슬아슬하게 로프의 매듭 부위까지 몸을 붙였다.
줄 잘 탄다는 광대도 그렇게까지 바위를 잘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면 오버한 건가!
이후 이인섭 님이 아무런 문제 없이 로프를 회수해서 내려왔다.
어렵사리 로프를 회수하여 일행을 뒤따랐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양폭산장이 아니라 또 다른 계곡이었다.
참 끝도 없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모두 헤드 랜턴을 꺼내 머리에 둘렀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이다.
이제 후미의 11명은 앞서 길을 개척한 전두성 선생님이 찾아놓은 비박지까지 어둠을 헤치고 가야만 했다.
비박지는 어딘지 모르지, 우리 정신적 지주인 선생님과는 떨어져 있지…
계곡 물은 쉼 없이 거친 숨소리를 품어댔고 몸은 지칠 대로 지쳐갔다.
이인섭 님이 정확한 숫자 파악 및 주의 환기를 위해 “뒤로 번호!”를 외쳤다. 모두 11명이었고 모두 조금씩 긴장하고 있었다.
산이 주는 즐거움 대신 이제는 두려움이 서서히 독버섯처럼 자라가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 했고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밤 9시가 넘어 10가 되어가는 듯싶었다.
일단 뭐든 먹자고 제안했다. 이인섭 님 배낭에서 보통 때는 눈에 두지 않던 식빵이 나왔다.
목마른 사람이 애타게 찾던 물을 벌컥벌컥 마시듯 대원들은 순식간에 빵을 먹어치운다.
건포도도 한 움큼씩 집어 드는데 역시 악조건에서 생존의 욕구는 더욱 힘차게(?) 솟아오르나 보다.
나름대로 간단히 요기를 마친 뒤 다시 출발했다.
나는 성환균 님과 함께 뒤에서 후미를 맡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는데
캄캄한 어둠 속을, 그것도 미끄러운 계곡을 허벅지까지 빠져가며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박 장소로 정한 곳이 가까워짐을 안 것은 앞서 갔던 문채식 님이 박철규 님을 돕는다며 우리 후미 쪽으로 다시 돌아오면서였다.
박철규 님도 지칠 대로 지쳤지만 문채식 님도 많이 피곤했을 텐데 돕겠다고 또 계곡 바위를 헤치고 올라왔다.
문채식 님은 일명 “문 porter(성이 문 씨다)”라고 불리듯 대단한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
깡마른 몸집이지만 말 그대로 ‘용가리 통뼈’다.
학교 다닐 때 야구선수를 해서 그런지 기초체력이 상당한 것 같다.
계속 야구를 했으면 지금쯤 프로야구 코치 정도는 하고 있을 체력이다(?).
아무튼, 자신의 배낭을 가져다 놓고 나서도 다시 올라와서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배낭을 짊어지고 내려간다.
박철규 님이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운 지형이라 일일이 발 딛는 지점을 가리키고 이끌어 간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다. 정말…
겨우겨우 도착한 비박지, 17명이 비박하기에는 너무도 좁은 장소다.
다들 어제 그 동굴도 돌아가자고 한다. 진심으로(?) 말이다.
비박 장소에 자리를 틀고 배낭 깊숙이 들어가 있던 햇반 등 먹거리를 모조리 꺼내어 요리를 시작했다.
밥 한 톨까지 남김없이 먹고 잠을 청한 시간이 자정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좁은 사이트에 17명이 들어가다 보니 등이 편할 리가 없다.
내 등은 밤새 바위 위에 걸쳐 난파된 선박처럼 삐져나온 돌무덤 위에 그렇게 시소를 탔고
오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했건만 비는 새벽까지 조금씩, 때론 굵게 따라다녔다. 참 끈질긴 놈이다. 지겹다.
2000. 8. 7. 월요일 07:00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예정대로 산행을 진행하여 원래 목적지대로 가느냐, 또는 루트를 변경하여 만경대 릿지를 더 하느냐?
아니면 모두 지쳐 있으니 이대로 천불동으로 하산하느냐…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해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 회장님이 맨 처음 제안하였다.
“모두 지쳐 있는 상황에서 더 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지금까지의 속도로 간다면 자정이 되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 대원의 생각을 정확히 짚어 시의적절하게 표현해 주셨다.
대부분이 찬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너무 지쳐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애초에 목표한 산행 중 칠선골과 피골을 포기하고 천불동으로 하산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속도로의 기점이라 할 수 있는 양폭까지는 아직도 난관이 가로막혀있다. 마지막 남은 폭포 음폭이 그것이다.
마땅한 하강점이 없다. 계곡의 소를 통해 하강하는 것이 어려워 다시 사면을 올랐다.
이번에도 박철규 님과 박하연 님이 가장 뒤쪽으로 쳐졌다.
이분들이 능선까지 오르는 것을 지켜보니 다른 대원에 비해 거의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그렇게 능선을 넘어 다시 숲을 헤치고 산자락 쪽으로 내려가니 드디어 다 왔단다. 양폭산장이 보인다고 한다.
박철규, 박하연 님을 위하여 내려오는 루트에 로프를 설치했다.
대원 모두가 내려오는 것을 선생님과 함께 확인한 뒤 로프를 사리고 마지막 하강을 준비한다.
그제야 하늘은 우리 팀을 반갑게 맞이하려는 듯 햇살을 비춰줬고, 온화한 설악의 한 단면을 보며 산행을 마감하였다.
인도의 수도자들은 성지까지 자신의 몸을 굴리며 여행하는 것을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수양방법으로 친다.
수천 km를 마다치 않고 몸을 구르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간다. 그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행이더냐.
산행도 이와 같지 않을까. 몸이 힘들고 고생스럽다고 하여 쉽게 하산해선 안 된다. 계속 올라야만 한다.
묵묵히 무언가를 위해 쉼 없이, 겸허히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행에는 고통만 있고 육체의 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선한 자연이 있고 나무가 있고 물이 있다. 무엇보다도 즐거운 사람들과 이들과의 대화, 노래, 낭만이 있다.
그리고 자신만의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공간이 있다.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떠나 자기를 찾고자 하는 자들이여 산으로 오라, 자연으로 오라.
「The quest for certainty blocks the search for meaning. Uncertainty is the very condition to impel man to unfold his powers.
확실성만을 쫓는 것은 무언가를 구하려 하는 우리를 가로막을 뿐이다, 불확실성만이 우리의 능력을 펼치게 하는 가장 최상의 조건이다.」
-Erich Fro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