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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결론 –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 22:6~21)
A. 본문의 이해
1.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 (22:6~13)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시록의 결론부(22:6~13)는 그 도입부(1:1~8)와 여러 가지 표현과 주제 면에서 상응한다. 이런 기법은 작품 전체의 근본적인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히브리 문학에서 흔히 사용되었던 것(인클루지오 inclusio)이다. 그러므로 도입부와 결론부의 핵심 주제는 곧 요한계시록 전체가 강조하고자했던 가장 중요한 진리가 되는 셈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도입부가 강조하는 바는 (1) “반드시 속히 될 일(1절)=재림을 향한 과정” (2) “때가 가까움이라=재림의 때”(3절) (3)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재림”(7절). 한편 결론부가 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속히 될 일”(6절) (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7절) (3) “때가 가까우니라”(10절). 이와 같이 핵심주제는 바로 주님의 재림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차이점은 도입부(1:1~10)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장차 오실 이,” “[그가] 오시리라”라는 3인칭으로 강조한 반면, 결론부 22장은 “내가 오리라”는 1인칭으로 재림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이런 문법적 대조는 재림이 이제 개인적이고 직접적이 된 것을 시사한다. 이제 그 오시는 분이 자신의 강림과 그 때가 가까움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고 당부한다(10절). 또한 결론부에서 강조하는 다른 진리는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6절)이다. 왜냐하면 (1) 계시의 기원이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마 24:35)이시기 때문이다(도입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절). (2) 그래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7절)고 이 예언의 말씀을 더하거나 제하면 저주를 받을 것(18절)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책에서 예언된 모든 것은 확실히 성취될 것이다. 재림과 함께 반드시 성취될 것은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결론부에서 재림과 연관지어서 강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내가 속히 오리라 (2)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3) 때가 가까우니 요한계시록을 인봉하지 말라 (4)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 (5) 각 사람에게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마 16:27; 롬 2:6; 14:12; 고후 5:10 -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인 반면, 심판은 행위에 따른 것이다. 행위는 개인의 구원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리스도를 만나고자하는 우리의 염원은 바른 삶을 살도록 자극할 것이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인자가 빨리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생애의 일상적인 일을 부주의하거나 등한시하도록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히 오심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게으르지 않고 사업에 있어서 부지런할 것이다. 그들의 사업은 부주의하거나 부정직하게 행해지지 않을 것이며, 신뢰할 만하고, 신속하고, 완전하게 행해질 것이다. 이생의 일에 대한 부주의한 무관심이 그들의 영성과, 세상과의 분리에 대한 증거라고 스스로 아첨하는 자들은 큰 기만에 빠져 있다. 그들의 성실성, 신실함과 고결함은 현세적인 사물에 의해 검증되고 입증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작은 것에 신실하다면 그들은 큰 것에도 신실할 것이다.” (교회증언 4, 309)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므로(13절) 바울의 말처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빌 1:6)할 수 있다. 그분 때문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미래에 소망이 있다.
2.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초청과 약속 (22:14~21)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은 두 요소로 구성되었다. 주님의 ‘초청’(오라)과 ‘약속’(오리라)이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요소는 “오다”라는 한 동사로 표현되었다. 사실 이 두 요소는 성경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기둥이나 마찬가지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오심”(약속)과 인간이 “오는 것”(반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약속)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반응)”(20절)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성경절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지구와 인류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오심”을 수없이 시도하셨고 마침내 모든 것을 끝내고, 성취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최후로 “오심”의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그것이 “진실로 속히 오”실 재림이다. 동시에 “오심”을 수없이 시도하신 하나님은 그 때마다 “오라”고 사람들을 초청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오는 것”는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반응이다.
하나님의 “오라”는 초청에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새 예루살렘의 입성이 좌우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께 “오는 것”의 복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님은 “두루마기를 빠는”(14절)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개의 축복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중 마지막 축복이다. 그리스도의 피에 빤 두루마기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기 위한 조건이다. 이런 개념은 신약 전체뿐만 아니라 계시록의 가르침에 잘 들어맞는다. 빛나고 깨끗한 두루마기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음녀 바벨론의 불의와 대조-18:5/19:8)이다. 이사야는 외쳤다: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시도다(사 61:10). 두루마기를 빠는 것과 그것을 희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계 7:14). 어린양의 피에 씻은 자들만이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으며 문들을 통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행한 일의 결과라기보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의 결과이다. 그래서 주님은 17절에서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신다. 아울러 신앙의 결론, 성경의 결론이 은혜임을 알기에 요한은 다음과 같이 그의 계시를 끝맺는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21절).
이제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열거하신다. 두개의 유사한 목록이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미 일찍이 언급되었다(계 21:8, 27). 배제된 자들로 파악된 것은 개들[부정한 자들/빌 3:2]과 복술자들과 음행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을 좋아하고 행하는 자들이다. 복음과 반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계명을 어기는 모든 자들은 하늘 도성에서 배제된다. 이 놀라운 초청과 약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런 의심을 남기지 않으시려고 계시록 5장의 언어로 다시 한 번 자신을 밝히신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6절).
B. 본문의 결론과 적용
계시록은 이 책이 시작할 때와 같은 주제로써 끝을 맺는다. 결어는 서언에서 천명되었던 것을 확증한다. 즉 계시록은 독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계시록은 전 역사를 통하여 역사의 바로 막판까지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보증으로써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결론적으로, 계시록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즉 그들이 압제와 고난을 직면할 때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지 말고 그들의 유일한 소망이신 분에게 그 눈을 고정시키라는 것이다. 계시록은 단순히 역사의 진로나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과정과 마지막 사건들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충성된 백성과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것이다. 계시록의 그리스도는 인생의 수수께끼와 불확실성의 와중에서 모든 인간의 소망과 염원에 대한 해답이다. 그는 미래를 붙들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제 계시록의 책장에서 뛰어나와 행동으로 반응하자. 단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복(福)은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임한다(1:3; 22:7). 계시록을 읽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신명기를 읽을 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실제 모든 삶에서 몸으로 그것을 구현하여야 한다(신 4:2; 12:32). 단지 입술로 “아멘! 할렐루야!”만 외치서는 안 된다. ‘오라’는 초청에 매일 매순간 행동으로 ‘반응’해야 한다. 반응하는 행동의 에너지원은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계 1:8), 곧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2014.8.12
Crossabbath Gospel Ministry
안식일복음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