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의 국군 입대 '붐'
대한민국이 건국되면서 서북청년회는 지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당장 수많은 동지들의 의식주가 문제였다. 그래서 너도나도 군대에 들어갔다. 군대는 고향을 찾겠다는 북한 출신들의 의지와 맞는 일터였다.
포병부대의 경우, 장교의 대부분이 서청 출신이었다. 김구를 암살한 문제의 안두희도 포병장교였다. 나와 친한 김문식, 이경일, 장천용 등은 대령으로 예편했다.
첩보부대 장교들도 대부분 서청 출신이었다. 김일환(신의주), 이영호(황해도), 유제극(황해도), 김동석(함경도), 계훈영(평안도) 등도 대령으로 예편했다. 정훈장교인 전두열, 윤하선, 선우휘는 대령 예편 후에 대학교수, 언론사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김인칙(황해)은 특무부대에서 김창룡과 더불어 숙군(肅軍)작업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여수.순천반란 당시 서청 출신은 500여 명의 전투경찰과 700여 명의 군인 신분으로 제주4.3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한라산에서 공비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사건에 큰 충격을 받은 서청 대원들은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현역 군인이든 문관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당시의 초대 국방장관은 이범석(李範奭)이었다. 이범석은 광복군 참모장 출신으로 해방 후 귀국하여 민족청년단(족청)을 창설했다. 족청은 비군사(非軍事), 비정치(非政治)의 구호를 내걸고 시흥에 훈련소를 설치하야 단원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만 주력했다. 그 때문에 반공투쟁에서는 공로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이범석은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가 되어 국방장관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족청 출신들이 적지 않게 정계로 진출했다. 이범석 밑의 국방부 제4국장 자리에는 족청 출신인 김근찬(金根燦)이 앉았는데, 그는 족청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른 청년단체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경도 출신인 관계로 반공청년단체에 대한 이해가 많았다. 서청위원장 문봉제는 국방부 고문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서청 회원들은 국방부 제4국에 많이 들어가 대북공작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청 회원들은 전부가 고향을 등지고 38선을 넘어온 사람들인 만큼, 자기 업무가 위험하든 성향에 맞지 않든 따지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나의 고향 철원 출신 후배 서청회원들은 국방부 4국 요원으로 38선 넘어 고향 출입을 많이 했다. 철원은 서울에서 가까워 출입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가친천과 친지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그 후에도 대북문제는 북한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서북청년들이 맡게 되었다. 이 사업은 평시, 전시의 구별 없이 생명을 던지는 위험한 것이었다.
여러 해 전에 북파공작원 예우문제로 사회에 큰 파문이 인 적이 있었는데, 특히 그 대상자가 대부분 이북출신이란 점에서 더 가슴이 아팠다. 국가는 지금까지 이들의 존재를 외면한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서청 출신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떠한 고통을 받고 어떠한 고난에 처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록 나이는 들었어도 기백(氣魄)만은 살아있는 것이 서청 출신의 특징이다. 이런 점은 20대나 90대나 마찬가지다.
서청 출신들에게는 우직한 면도 많았다. 예를 들면 당시 육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용산고등학교 뒤의 후암동 숙소에서 태릉의 육군사관학교까지 가야 했다. 그러나 돈이 없기 때문에 새벽부터 걸어서 간 경우들도 있었다. 그것도 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50리는 넘는 거리였을 것이다. 요사이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지만,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육사 8기에 서청 출신들이 많았다. 6.25남침이 시작되자 그들은 일선 소대장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때문에 북한군에 들어간 고향 친구들, 선후배들과 총부리를 맞대고 죽이고 죽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형제간에 총을 맞대고 싸운 예도 허다했다. 나의 친구인 평남 출신의 모 사단장은 자기 부하들이 북한군 포로를 많이 잡아왔다고 하기에 나가보니 30여 명의 포로가 앉아 있는데 그 중에서 갑자기 "형님"하며 일어서는 자가 있었다. 친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