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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풍수 간산(4월 13일 양평 구정승골, 남양주 정약용 묘소)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25년 풍수지리학 최고위 과정 4월 13일 시행하는 간산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 아홉 명의 정승이 영면하는 구정승골과 남양주시 조안면의 실학자 정약용 유적지에서 실시합니다.
이곳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와 부용리 일대는 예로부터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사후지지(死後之地)로 삼은 이상향의 터다. 그것은 한강 너머로 고축사(誥軸砂)인 예봉산과 관련이 깊다. 구정승 골은 양수리에 있는 양서면사무소에서 진입하는데 긴 골짜기를 이루는 이 골의 명칭은 구정곡(九政谷), 구정골, 구정벼랑, 구정베루(벼루) 등 여러 이름이 등장한다.
이번 답사는 모든 산이 옷을 입기 시작하는 4월 초에 실시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 초(조선 2대왕 정종) 정승을 지내고 상락부원군에 봉해진 김사형과 그의 사위 신효창 음택을 시발점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과 그의 부모 음택,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동고 이준경 묘소, 그리고 실학자로 정조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던 정약용의 유적지를 차례대로 답사할 예정이다.
이번 간산은 풍수의 기초를 중점적으로 설명할 예정이다. 이곳 구정승 골을 일구는 내룡(來龍)은 백두대간룡(白頭大幹龍)이 남쪽으로 진행하여 온 힘을 쏟아내 화성체(火星體)의 설악산(雪嶽山)을 솟구친다. 서쪽으로 방향을 튼 간룡(幹龍)은 오대산(五臺山, 1.563m)에서 그 힘을 재충전하여 한 가지를 서쪽으로 내려보내는 한강기맥(漢江岐脈)으로 진행하다가 구정승골의 조산(祖山)인 용문산(龍門山, 1.157m)과 유명산(有明山, 861m), 소구니산(798m)를 차례로 솟구치면서 큰 몸통을 상하좌우(上下左右)로 전변(轉變)하거나 번신(翻身)과 질단(跌斷)하여 이곳 구정승골에서 영면하는 김사형과 한음의 묘소에 기맥(氣脈)을 공급하는 청계산(淸溪山, 656m)을 솟구친다. 그리고 계속 남서(南西)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이준경의 음택에 기를 공급하는 부용산(芙蓉山, 369m)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한강 넘어 정약용의 묘소와 생가를 일구는 내룡은 추가령에서 맥을 잇는 한북정맥(漢北正脈)이다. 이 정맥은 포천 운악산(935.5m)을 일구고 수원산을 넘기 전 동쪽으로 맥을 뻗어 주금산(813.6m)을 세운다. 여기서 철마산(711m), 천마산(812.4m), 백봉(589.9m)을 차례대로 일구고 수리넘어고개, 먹치고개, 갑산, 적갑산을 지나 한강을 바라보고 구정승골에 고축사(誥軸砂)로 제공하는 예봉산(879m)를 기봉(起峰)한다. 예봉산에서 내려온 주룡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봉덕암 암자 봉우리(202.8m)를 다시 세운다. 여기서 크게 번신(翻身)한 내룡이 한확 묘의 현무정(玄武頂)을 일구고 이곳 한확 묘소를 청룡으로 호종(護從)하다 아래로 내려와 이곳 다산 묘소와 생가를 일구는 주룡(主龍)이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2025년 풍수지리학 최고지도자 과정 간산 안내
1. 간산 일시와 모이는 장소
▶ 일시: 2025년 4월 13일(일요일)
▶ 전체 모이는 장소: 10시까지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 35-1 이준경 묘소 입구에서 합류(묘소 진입하지 않음)
▶ 서울팀 합류: 지하철 1. 2호선, 우이경전철, 신설동역 5번 출구 09시 까지 지하철 신설동역 5번 출구에서 출발합니다.
2. 회비 : 분담(교통비, 중식 등)
3. 답사지 안내(현지 사정에 따라 장소와 순서 등은 바뀔 수 있습니다)
1) 김사형(사위 신효창) 음택(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49번지)
2) 한음 이덕형과 부모 음택(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산153)
3) 영의정 이준경 음택(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산 35-1)
4) 실학자 정약용 음택 및 생가(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1)
1) 상락부원군 김사형과 사위 신효창 음택
김사형의 본관은 구(舊)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자는 평보(平甫)이며 호는
낙포(洛圃)이다. 방경(方慶)의 현손이며 천(蕆)의 아들로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냈으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개성부윤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를 역임하였다.
1390년(공양왕 2) 밀직사로 대사헌을 겸하고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고 윤이(尹彛) 이초(李初)의 옥사를 두고 찬성사 정몽주(鄭夢周)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좌사(三司左使)와 동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로 있다가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에 봉해져 상락백(上洛伯)의 작위를 받았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는 적장자(嫡長子)에게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 1) 등극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고 1401년(태종 1) 좌정승(左政丞)이 되었고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를 지냈으며 상락부원군이 된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안동김씨의 본관은 신구(新舊)로 나뉘는데 모두 경주김씨(慶州金氏)에서 파생된 씨족이다. 구 안동김씨는 경순왕 김부(金傅)의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김숙승(金叔承)이 시조이고 경순왕의 8대손으로 고려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삼는다.
김방경은 고려조에 삼별초를 평정하여 벼슬이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이르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져 구 안동김씨를 일명 상락김씨(上洛金氏) 혹은 선(先) 안동으로 부른다. 그의 후손인 김질(金礩)은 세조 때 우의정에 올랐으며 김수동(金壽童)은 중종 때 영의정, 수동의 동생 김수경은 정국삼등공신 영양군에 봉해졌다. 그 외도 공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아우 김무가 있고 이조판서에 오른 김질의 손자인 김찬이 있다. 그리고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김자점도 그의 후손으로 효종 때 탄핵을 받아 처형되면서 구 안동김씨의 위세가 크게 위축받았으며 근대 이후의 인물로는 백범 김구가 있다. 이곳 묘소를 일으키는 용세(龍勢)는 청계산(淸溪山)에서 봉황(鳳凰)이 날개를 쭉 펴듯 좌우로 여러 겹을 분맥(分脈) 시키면서 북서쪽으로 행도(行度)하다가 이곳 묘소의 청룡 자락을 일구는 용맥에서 남서진하다가 무곡성(武曲星)처럼 보이는 태음금성(太陰金星)을 솟구쳤는데 이곳 묘역에 기를 공급하는 주성(主星)으로 부모봉(父母峰)이다.
여기서 곤두박질치는 강급(强急)한 모습으로 낙맥하여 산자락 중턱에서 급하게 몸통을 곧추세워 나무가 드러누운 모습의 도지목성(倒地木星)의 긴 당판(堂坂)을 일구었는데 혈형(穴形)은 대와(大窩)가 일구는 유목(乳木)이다. 폭이 협소하여 능선처럼 길게 이어지는 당판에 김사형과 그의 사위인 신효창의 묘가 상하장(上下葬)으로 터를 정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등잔대 위에 올려진 호롱불의 모습이라 하여 괘등형(掛燈形)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신효창 묘소가 있는 당판 끝부분에 암석들이 너저분하게 박혀 탈살(脫殺)이 덜된 모습이 마치 종기가 난 부스럼처럼 보인다. 배합수(配合水)는 우선수(右旋水)로 나가 청룡 끝자락의 경유방(庚酉方)으로 출수(出水)하고 입수일절룡(入首一節龍)은 진방(辰方)에 머리를 파묻는 양룡(養龍)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방의 미끈한 안산(案山)으로 향선(向線)이 닿는 을좌신향(乙坐辛向)을 놓아 88향법의 충록소황천(沖祿小黃泉)이고 우선룡(右旋龍)에 우선수(右旋水) 웅룡(雄龍)이 길게 드러누운 도지목(倒地木)의 당판을 이루지만 음양불배합(陰陽不配合)으로 완벽한 혈(穴)로 단정하기가 애매하다. 한편 『담자록(啖蔗錄)』에 《기견극성(忌見尅星) 고서목기금(故西木忌金) 북화기수(北火忌水)》라 하여 “혈형(穴形)이란 극(克)을 받는 위치에서 극(克) 하는 성(星)을 크게 꺼린다 하여 서쪽에 위치한 혈형(穴形)이 목체(木體)라면 금(金)을 꺼리고, 북쪽에 위치한 화체(火體)라면 수(水)를 꺼린다”고 하였다. 이곳 묘역은 정체금성(正體金星)의 주성(主星)에서 낙맥(落脈)하여 서쪽 신방(辛方)에 일군 유목(乳木)으로 기견극성(忌見尅星)에 해당하여 격(格)을 이탈한 묘소다.
또한 물형론자들은 이곳 묘소를 청학포란형(靑鶴抱卵形)이라 주장하지만 하늘을 나는 금조형(禽鳥形)이라면 물형(物形)의 필요 요건인 화성체(火星體)의 사격이 주변에 포진해야 성격(成格)이 되는데 이곳 묘역 주변에는 화체(火體)를 이루는 암산(岩山)이 전무(全無)하고 당판 아래에 박힌 암석과 아래로 떨어지는 급경사 등을 감안하면 괘등형(掛燈形)이 더 가깝다. 그리고 이곳 당판 끝자락에 터를 정한 사위 신효창은 조선 초기 국풍(國風)에 버금가는 풍수사(風水師)로 평가받던 인물로 장인이 운명하자 이곳에 터를 정했다고 볼 수 있지만 어떤 법수를 응용하여 이 터를 점한 것인지 그리고 본인도 굳이 장인의 묘소 가 있는 당판 앞에다 터를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2) 영의정 한음 이덕형과 부모 음택
조선 중기 때 한음(漢陰)으로 더 잘 알려진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중기 문신이면서 학자이고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李爾瞻)은 그와 10촌 간 형제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과 쌍송(雙松), 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과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그와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 평생에 걸친 우정 으로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된다. 선생의 묘소는 4살 아래인 증 정경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합폄(合窆) 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의 장인은 토정(土亭) 선생의 조카이면서 북인의 거두이던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다.
한음의 묘소 뒤 단 위에는 아버지 이민성과 어머니 문화유씨의 합폄 묘가 경사지를 인공적으로 다듬어 용사(用事)하였다. 한음의 묘가 이곳에 터를 정한 연유는 부인인 한산이씨와 관련이 깊다. 임란(壬亂)이 일어나자 한산이씨는 28세의 나이로 둘째와 막내인 여덟 살인 여벽(如璧)과 세 살인 여황(如黃)을 데리고 시아버지가 살던 강원도 안협(安峽)으로 피난 갔다가 순절하게 된다. 이씨는 왜적이 쳐들어 오자 백암산(白岩山)으로 피신했으나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바위 위로 올라가 몸을 던졌다. 이씨가 죽자 그 곳 산기슭에 임시로 묻혔다가 1603년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난이 끝나고 선조는 이씨의 정절을 기리고자 묘 앞에 정려문을 세웠는데 이 정려문은 일본 강점기에 신도비와 함께 유실되었는데, 신도비는 이곳 계곡 아래에서 찾아냈지만, 정려문은 찾지 못했으나, 1981년 후손들이 이곳 묘역 입구에 선생의 영정각과 정려문을 함께 세웠다.
한음이 부인을 먼저 이곳으로 이장했고, 1594년 임란 중 지금의 김포인 통진(通津)에서 작고한 어머니를 부인의 윗자리에 모신 것으로 전한다.
거문토성(巨文土星)처럼 보이는 주성(主星)의 좌측 변(邊)으로 급하게 떨어지는 측뇌(側腦)의 내맥(來脈)이 곤두박질치듯 급하게 떨어지는 산자락에 묘역을 인작(人作)으로 꾸며 터를 정하였다. 그런데 한음 묘소는 전순(氈脣) 아래가 낭떠러지로 급경사를 이루는 절개지(切開地)다. 전방의 외백호(外白虎)가 일군 안산(案山) 뒤를 중중(重重)으로 에워싸는 조산(朝山)의 모습이 아름답고, 수려하지만 조선 중기 일세를 풍미했던 분이 왜 이러한 비혈지(非穴地)에서 영면하고 계시는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풍수적으로 조명한 이곳 묘역의 문제점이다.
첫째는 내맥이 멈추지 못하고 내리쏟는 듯한 급경사지에 당판을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기맥(氣脈)의 증적(證迹)이 빈약하고, 두 번째는 전방의 청룡 자락이 묘역을 보호하는 호종사(護從砂)로 이바지(供)하지 못하고 물을 따라 산수동거(山水同去) 하는 전유요풍(前有凹風)의 모습이고, 세 번째는 양쪽 계곡물이 합수(合水)하는 골짜기 바로 위로 묘역이 위치하다 보니 전방으로 길게 이어지는 계곡(溪谷)에서 불어닥치는 바람 통로에 묘가 위치하여 생기를 산발하는 빈약한 입지이다.
입수룡(入首龍)은 한쪽으로 치우친 측뇌(側腦)에서 낙맥하여 삼절(三節)로 진행하다가 입수일절(入首一節) 목국(木局)의 장생룡(長生龍)이다.
경유방(庚酉方)에서 합수(合水)하는 물은 묘좌유향(卯坐酉向)을 놓아 우선수(右旋水)를 이루어야 88 향법의 태향태류(胎向胎流)를 이루지만 이곳 배합수(配合水)는 좌선(左旋)하는 물이 향선(向線)을 통과 우측의 계곡물과 합수하여 그냥 직거(直去) 하는 당문파(堂門破)의 수세가 되어 실기(失機)하였고, 형세적으로는 물을 갈무리 해야 할 청룡이 순사(順砂)의 무정한 퇴전필(退田筆)로 작용, 후손들이 경제적 발음(發蔭)마저 어려운 청빈(淸貧)한 묘소이다.
3) 영의정 이준경 음택
이준경(1499~1572)의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東皐) 남당(南堂) 홍연거사(紅蓮居士) 등이다. 선생은 어린 시절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화(禍)를 당한 조부와 부친인 수정(守貞)을 따라 충북 괴산(槐山)에서 성장하였다.
1522년(중종 17)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1531년(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부수찬과 사경(司經)이 되었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때 피죄인(被罪人)의 무죄(無罪)를 주장하다 김안노(金安老)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처형되자 다시 복직되어 직제학(直提學) 대사성(大司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대사성(大司成) 평안도관찰사,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병조판서를 지낼 때는 당대의 권력자 이기(李芑)의 뇌물청탁을 거절했다가 윤임(尹任) 일파로 몰려 보은(報恩)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함경도순찰사(咸鏡道巡察使)를 지냈으며 1555년(명종 10)에는 전라도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가 되어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격퇴하여 우찬성(右贊成)과 우의정, 좌의정을 걸쳐 1565년(명종 20)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뒤 신진사류(新進士類)와 기존 사림 사이의 알력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류의 표적이 되어 스스로 사임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죽음을 앞두고 붕당(朋黨)정치의 대두를 예언하면서 이이(李珥) 등 많은 사람들의 규탄을 받았지만 얼마 뒤 선생의 예언대로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일어났다.
또한 명종(明宗)이 후사 없이 일찍 승하하자 그의 고명을 받들어 많은 조카 중에서 하성군(河城君)인 균(鈞, 선조)을 옹립하여 혼란 없이 대통을 이을 수 있도록 한 장본인이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저서로 동고유고(東皐遺稿)가 있다.
계곡 하나를 끼고 지척(咫尺)에 터를 정한 한음 이덕형은 동고 선생보다는 한 세대가 늦은 같은 광주이씨 집안이다. 좌측의 탐랑(貪狼) 주성(主星)을 출발한 내룡(來龍)이 양쪽 계곡을 끼고 높게 치솟은 튼실한 음룡(陰龍)으로 행룡 하다가 양중음혈(陽中陰穴)의 당판을 일구고자 큰 몸통을 지현굴곡(之玄屈曲)으로 진행하여 맥기(脈氣)를 응축시켰다. 그리고 묘역 뒤에서 결인입수(結咽入首)하여 태음금체(太陰金體)의 둥그런 흔적의 도두(到頭)를 일구었다. 그리고 도두의 우측으로 특이한 방지맥(傍枝脈) 하나가 이어져 백호 첩신사(貼身砂)로 매김 된다.
보통 주룡(主龍)을 호종(護從)하는 청룡과 백호는 주산이나 현무봉에서 출맥한 지룡(枝龍)이 되거나, 또는 객산(客山)으로 나온 산줄기가 외산용호(外山龍虎)의 역할을 하는데 이곳 방지맥은 특별하다.
그것은 도두에서 지맥 하나가 뻗어나가 이곳 당판을 우측에서 보호하는 미사(微砂)처럼 보이는 것이 마치 우단제(右單提)와 같은 와혈(窩穴)의 당판을 일군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도두(到頭)에서 광중(壙中)을 잇는 생기 통로인 구(毬)도 보통은 은맥(隱脈)으로 진행하여 육안식별이 어려운데 이곳은 뭉툭한 화생뇌(化生腦)로 연결되는 미사(微砂)가 약 60도 가량 좌측으로 휘어져 강하게 유입되면서 맥기(脈氣)를 혈구(穴口)로 유입시킨다.
입수처(入首處) 뒤에 서서 심안(心眼)하면 도두로 진행하는 입수맥(入首脈)이 S자로 굴곡 하며 변화가 활달한 모습인데 그것은 입수맥이 마지막까지 힘을 싣고 생기를 유입시키려는 옹골찬 혈증(穴證)이다.
전후좌우(前後左右)로 혈장을 감싸고 어우러지는 사격(砂格)들이 유연한 곡선미를 자랑하고 정답고 유순한 형세를 보이면서 묘역과 명당을 빙 두르는데 대체로 편안하면서 안정된 묘소이다. 당판에 서서 사방을 조망하면 마치 중첩(重疊)된 장막 안으로 완벽한 장풍(藏風)의 국세(局勢)를 이루니 참으로 교과서적인 풍수 보국(保局)이다.
혈처와 가까운 거리에는 옥구슬을 꿴 듯한 청룡 연주봉(聯珠峰)이 쾌활하게 이어지는 모습인데 옛 부터 청룡 연주 하나에 문과 급제자가 한 명씩 배출된다 하여 선지자들이 선호하던 사격(砂格)으로 이곳은 무려 5개나 되는 연주체가 되어 자손들이 이를 악물고 학문에 전념하여 소년등과(少年登科) 하는 대물(大物)이다. 또한 연주봉 밖을 두르는 외청룡(外靑龍)은 부드럽게 에워싸고 특히 정승사(政丞砂)인 고축사(誥軸砂)가 천마사 뒤에 자리를 잡으면서 이곳을 답사하는 풍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이곳 묘소는 손좌건향(巽坐乾向)을 놓아 멀리 떨어진 외백호가 일군 나지막한 안산(案山)이 이곳 묘역으로 눈길을 보내면서 배합수는 향선(向線)과 입을 맞추는 좌선수(左旋水)의 입지지만 전반적인 국세는 외용호(外龍虎)가 작국(作局)하는 외수(外水)인 우선수(右旋水)를 용수(用水)로 삼아 외청룡 끝자락 도로 옆 농가 건물을 파구처로 삼으면 신술방(辛戌方)으로 격침된다. 팔십팔향법으로 건향의 신술파는 좌선룡에 우선수가 합법(合法)으로 절처봉생(絶處逢生)하는 자생향(自生向)이다. ‘절처봉생’ 이란 포태법(胞胎法)으로 신술파(辛戌破)의 경우 화국(火局)의 정고(正庫)가 되어 건향(乾向)을 하면 절향(絶向)이 되어 좋지 못한 법수지만 향상포태법(向上胞胎法)을 적용하면 건해(乾亥)는 해묘미(亥卯未) 목국(木局)으로 곤신(坤申)에서 순선(順旋)하면 건해에서 생(生)이 닿아 절처(絶處)가 생(生)으로 바뀌었으므로 절처봉생(絶處逢生)이라 한다. 만약 자생향(自生向)을 놓으면 어려운 처지에서도 살길을 찾아 스스로 일어선다는 길격(吉格)으로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부귀(富貴)를 겸전(兼全) 한다는 길한 향법이다. 또한 이곳 터는 좌선룡(左旋龍)에 우선수(右旋水)를 용수(用水)로 삼아 음(陰)인 용(龍)과 양(陽)인 물이 음양교구(陰陽交媾) 하여 용세와 수세가 모두 합을 이루는 길지(吉地)이다.
4) 정약용 생가 및 묘소(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1)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이자 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의 생가와 묘소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馬峴) 마을에 있다.
이곳 정약용 유적지는 담장을 두른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사당이 있고, 왼쪽에 기념관이 있다. 여유당이란 뜻은 마음가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깨우침을 담은 당호(堂號)이다.
기념관 옆으로 난 돌계단을 타고 오르면, 다산 정약용 선생과 부인 풍산홍씨(豊山洪氏)의 합장묘가 유적지와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다산 선생이 태어나고 죽어 영면에 들어간 이곳은 18년이란 긴 세월을 전라도 땅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이곳 한강 변에서 유유자적 만년을 보낸 뜻깊은 장소이다.
다산 선생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신라 때 당나라 사람인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이 우리나라 서해 남부에 있는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된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歸化)하여 정씨(丁氏)의 시조가 된 것으로 전한다.
나주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 때까지만 해도 압해(押海)를 관향(貫鄕)으로 삼았으나 압해가 나주로 편입되면서 나주로 바뀌었다.
나주정씨는 문행(文行)과 학문(學文)으로 나라 안에 널리 이름을 날리었는데, 적은 수의 씨족임에도 문과 급제자가 64명이나 나왔고, 9대에 걸쳐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의 학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조에 9대에 걸쳐 옥당(玉堂)이 나온 집안은 나주정씨뿐이다. 이를 두고 정조대왕이 말하기를 "옥당(玉堂: 홍문관의 부제학, 校理, 부교리, 修撰, 부수찬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은 정가지세전물(丁家之世傳物)이라" 했는데, 이를 풀이하면 문필을 관장하는 홍문관은 정씨 집안이 대대로 독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다산은 1762(영조 38)년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끔찍한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심이 흉흉하던 시절로, 아버지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을 때다. 위로는 이복형 약현(若鉉)과 동복형 약전(若銓), 약종(若鍾)이 있었으며, 이들 또한 문한(文翰)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들이다.
다산의 대표적 저서인 『목민심서』 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중시한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 가득 담긴 책으로 다산의 정치, 경제, 사상의 집합체이며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과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불후의 명저로써,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유익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풍수지리를 부정했던 다산 선생이 잠든 묘의 주산은 예봉산이다. 한북정맥이 서울을 일구기 전에 포천 운악산(935.5m)에서 수원산을 넘기 전 동쪽으로 용맥 하나를 뻗어 주금산(813.6m)을 세운다. 여기서 철마산(711m), 천마산(812.4m), 마치고개, 백봉(589.9m), 수리너미고개, 먹치고개, 갑산, 적갑산을 지나 한강과 양수리를 바라보고 예봉산(879m)을 기봉(起峰) 하였다.
예봉산에서 내려온 주룡은 팔당 천주교 공원묘지 뒷산을 만들고,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봉덕암 암자의 봉우리(202.8m)를 다시 치올린다. 여기서 크게 낙맥(落脈)한 주룡은 개장천심(開帳穿心)과 과협(過峽), 박환(剝換), 기복(起伏) 등의 기세 있게 행룡하여 능내 마을에 터를 정한 한확 선생의 묘를 일구었다. 이곳 한확 묘의 현무정(玄武頂)에서 개장한 청룡이 길게 뻗어 한확의 묘혈을 감싸고 팔당호까지 내려가는데, 이 청룡 줄기가 다산 묘의 주룡이다.
만약 이 능선이 혈을 결지하고자 하면, 수려하고 단정한 봉우리를 기봉하고 좌우로 청룡과 백호를 뻗어 혈을 감싸는 보국(保局)을 만들어야 하는데, 변화가 없는 사격으로 공(供) 한다. 묘 뒤의 과협처(過峽處)에서 위로 치오르는 능선을 타고 오르다 보면 용이 일자로 축 늘어진 모습으로 마치 죽은 뱀처럼 변화가 없는 무기룡(無氣龍)이며, 더욱이 묘혈을 일구는 주룡의 모습이 백호방 쪽으로 휘어져 혈을 맺는 정정당당(正正堂堂)한 정룡(正龍)의 모습이 아닌 백호사(白虎砂)를 보호하는 호종사(護從砂)로 전락(轉落)한 모습이다.
다산 묘에서 좌우를 살피면 청룡과 백호가 양 곁으로 모두 있어 보호사(保護砂)로 공(拱)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묘혈을 보호하지 못한다. 특히 백호는 반배(反背)와 함께 끝자락이 안으로 감싸지 못하고 밖을 향해 도망가는 모습이고 청룡은 낫처럼 휘어져 묘의 옆구리를 향해 찌르는 모습으로 능침살(陵針殺)의 일종인 청룡찬회(靑龍鑽懷)가 되어 낫처럼 생긴 흉한 청룡 끝자락이 이곳 터의 가슴팍을 치고 들어오는 형세를 이룬다.
2025년 4월 9일 석초 채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