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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롭게 정비한 춘천 청평사 홈페이지 자료(1/2)를 옮겨왔습니다.
해설 활동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21년 11월28일 현재)
■ 청평사 ■
□ 인사말
천년 우리의 숨결! 고려선원 청평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청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新興寺)의 말사(末寺)이며 춘천을 대표하는 사찰입니다.
소양호 한쪽에 우뚝 솟아 있는 오봉산(과거 청평산ㆍ경운산) 기슭에 자리했으며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창건되었으며 세 번의 중창과 조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중건하여 대사찰이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거의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전각들을 다시 짓고 회전문을 보수하고 범종각과 요사채를 앉혔습니다.
천년이 넘은 고려선원(高麗禪園)의 정취와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청평사를 포함한 주변 일대가 명승 제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 영지(影池)는 일본이 자랑하는 교토(京都)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년이나 앞선 정원입니다.
청평사의 현존건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보전, 삼성각, 회전문(廻轉門, 보불 제164호), 극락전, 나한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문화유산으로는 공주와 상사뱀 설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8호인 삼층석탑(공주탑)을 비롯하여 문수원기, 진락공 부도(眞樂 公浮屠), 환적당 부도(幻寂 堂浮屠), 세향원 등이 있습니다.
다양한 교통수단 중 특히, 소양강댐에서 배를 타고 방문할 수 있어 일명 ‘섬 속의 절’이라고도 불리며 춘천의 필수 여행 코스 중 하나입니다.
천년의 숨결이 느껴지는 고려선원 청평사에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께 부처님의 가피가 항상 두루하시길 기원합니다.
□ 역사와 연혁
* 역사 歷史
청평사는 영현(永玄)선사에 의하여 973년(광종24)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된 사찰로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文殊院)으로 절 이름을 고치고 중창하여 고려 중·후기에 불교계의 한 축으로 활동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스님이 아닌 일반 속세의 남자)의 요람이 되었다.
이후 이암(李嵒)이 은거하여 또다시 거사불교의 맥을 이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설잠(雪岑) 김시습이 스님이 되어 이곳에서 수행하였다. 이처럼 거사불교가 번창하던 시기에 대감(大鑑)국 사 탄연(坦然)이 쓴 진락공중수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와 이암이 쓴 문수사장경비(文殊院藏經碑)가 건립되었고, 이는 후대에 한국의 거사불교와 더불어 서예사적으로 주목받는 사찰이 되었다.
또한 이자현은 청평사에 37 년간 주석하면서 굴산문의 혜소(慧炤)국사와 그의 제자였던 대감국사 탄연과 교유하였고, 원진국사 승형(承逈)에게도 영향을 주어 굴산문의 법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청평사의 10여 곳에 건물을 짓고 영지(影池)를 조성하여 고려시대 별서문화(別墅文化)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고려 후기에는 태정황후의 지원으로 중흥기를 맞이하면서 원(元)나라 황실의 원찰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우(普雨)가 주석하면서 명종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가람배치에도 영향을 주어 산지중정형의 기본 가람형태를 띠면서도 조선시대 원찰들이 갖는 「□」자형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다.
법맥(法脈)을 보면 보우가 폐지되었던 승과를 부활하고 이를 통하여 등장한 휴정의 법맥을 이은 고승들이 주석하게 된다. 즉, 부용영관(芙蓉靈觀)의 법맥인 부휴선수(浮休善修)와 청허휴정(淸虛休靜)계에서 환적의천(幻寂義天)은 청허휴정-편양언기-환적의천으로 이어지는 법계도를 보여주고, 환성지안은 청허휴정-편양언기-풍담의심-월담 설제-환성지안의 법맥을 가지고 있다. 이는 휴정의 수제자로 각기 편양언기와 월담설제의 법을 이어 청평사를 사상사적으로 한층 승격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가람 역시 보우에 의하여 일신 중건된 후 임진왜란 당시에도 소실되지 않 았으며, 지안(志安)에 의하여 대대적인 보수를 이루어져 법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출가승과 거사의 주석은 청평사가 폐사되지 않고 존속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거사불교의 중심지와 탄연의 진적이 남아 있 는 사찰로, 고려말에는 원나라의 원찰로서 기능하면서 이암의 진적이 남는 사찰이 되었다.
이러한 면을 볼 때 청평사는 영서지역에 가장 오래된 고찰일 뿐 아니라 사상사와 서예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또한 거사불교 와 굴산문의 법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조선시대의 원찰형 가람배치를 유구를 통해 살필 수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중기에 예종이 차(茶)를 여러 차례 이자현에게 하사하여 현대에서는 이자현과 차 문화를 재조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청평사는 춘천과 강원도를 넘어 한국불교문화사에서 주목을 받는 사찰이다.
춘천문화원(춘천학연구소) 『춘천 정체성 확립을 위한 역사문화 아카이브 불교문화』 를 기초로 하였습니다.
* 연혁 沿革
• 935년 태조18 영현(永玄)선사가 후당(後唐)에서 입국
• 973년 광종24 영현선사가 백암선원 창건
• 1068년 문종22 춘주도 감창사 이의(李顗)가 보현원으로 중건
• 1089년 선종6 이자현(李資玄)이 문수원으로 삼창
• 1125년 인종3 이자현 입적
• 1130년 인종8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건립
• 1197∼1208년 명종28∼희종5 원진(圓眞)국사가 문성암 주석
• 1215년 고종2 원진국사는 문수원기 읽고 깨우침
• 1327년 고종24 문수사장경비 건립
• 1353∼1358년 공민왕2∼7 이암(李嵒)이 은거
• 1367년 공민왕16 나옹(懶翁)화상이 주석. 지공(指空)화상의 가사와 편지 받음
• 1466년 세조11 설잠(雪岑) 김시습이 청평사 주석
• 1555∼1562년 명종10∼17 보우(普雨)대사가 주석. 가람을 중창하고 능인보전은 수선
• 1562년 명종17 지장보살도 봉안
• 1650년 효종1 환적당 의천(義天)선사가 주석. 양신암 중건
• 1657년 효종8 환적당 의천이 다시 주석
• 1728년 숙종37 환성당 지안(志安)대사가 법당과 승방을 모두 고쳐 지음
• 1772년 영조4 각선(覺禪)스님이 삼존불상 봉안
• 1130년 영조48 극락보전 중수
• 1861년 철종12 대웅전 소실
• 1862년 철종13 대웅전 터에 요사 건립
• 1880년 고종17 요사 소실, 중건
• 1889년 고종26 극락보전 중수
• 1900년 익랑 10칸 지음
• 1912년 유점사의 말사로 편입
• 1915년 『청평사지』 발간
• 1932년 청암(靑庵)스님이 개금불사와 가사불사
• 1936∼1937년 삼산신삼(杉山信三)이 극락전 및 회전문 보수
• 1950년 강충이(姜忠伊)가 극락전 방화로 소실
• 1963년 회전문 기와 교체
• 1969년 회전문을 부분적으로 보수
• 1977년 향봉(香峯)스님이 극락전 중건
• 1979년 향봉스님이 해탈문·5층석탑·적멸보궁 건립
• 1984∼1985년 서호(西昊)스님이 요사·청평루·세향원 신축. 청평사 주변을 조사하여 보고서 발간
• 1990년 석진(石眞)스님이 대웅전 중건
• 1994년 제원(濟願)스님이 범종각 신축, 범종 주성
• 2000년대 청화(靑華)스님이 요사 2동, 누각·회전문·행각 중건
• 2006년 현 주지인 홍진(弘進)스님이 청평사 주지로 주석(駐錫)
• 2008년 한국전쟁으로 파손된 문수원기(진락공중수 청평산 문수원기) 복원
• 2010년 현재의 요사로 개축
• 2013~2014년 청평사 불교대학 개원 및 조계종 포교원 정식 인가
• 2015년 해탈문, 적멸보궁을 지붕 퇴락 등의 위험으로 해체
□ 인물
* 영현(永玄, 생몰년대 미상)
청평사를 창건한 당나라 [후당:後唐 923(경명왕7)∼936(태조19)]의 승려로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935년, 당나라에서 입국하여 973년에 백암선원(白巖禪院)으로 창건하였다. 자료에 따라 승현(承玄)이나 승현(承賢)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영현(永玄)이 옳다.
* 이의(李顗, 생몰년대 미상)
경원 이씨(현 인천 이씨)로 이자현의 아버지이다. 춘천의 감창사(監倉使)로 부임하여 백암선원을 보현원(普賢院)으로 중창하였다. 이 때 보현원은 이의에 별서(別墅) 즉, 개인의 원당사찰이었다.
* 이자현(李資玄, 1061∼1125)
고려 중기 학자로 자는 진정(眞靖), 호는 식암(息庵)·청평거사(淸平居士)·희이자(希夷子)이고 시호는 진락(眞樂)이다.
고려시대 최대의 문벌귀족이었던 경원 이씨(현 인천 이씨) 집안에서 태어나 벼슬이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올랐으나 부인이 죽자 아버지가 중창한 보현원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고치고 견성암(見性庵)·양신암(養神庵)·칠성암(七星庵)·등운암(騰雲庵)·복희암(福禧庵)·지장암 (地藏庵)·식암(息庵)·선동암(仙洞庵) 등 8암자를 짓고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예종과 인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고려 중기에 승려가 아니면서도 승려와 같이 생활한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중심 인물로 주목되는 사람이다.
그의 일생을 기록한 문수원기가 청평사에 건립되었는데 앞면의 글은 이제현이 짓고 뒷면은 혜소가 지었으며 글씨는 앞면과 뒷면 모두 신품사현(神品四賢)의 한사람으 로 추앙받는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이 썼다.
청평사에 여러 암자를 짓고 참선수행을 하였으며 능엄경(楞嚴經)을 수행의 기본 경전으로 삼아 능엄경을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 탄연(坦然, 1070∼1159)
고려 전기 승려이다. 호는 묵암(黙庵), 휘는 탄연, 시호는 대감국사(大鑑國師)이다. 고려 전기의 굴산산문에 속하였던 승려로 1070년(문종24)에 태어나 1159년(의종13)에 입적하였다.
혜소국사를 스승으로 삼아 수학하였고 이자현의 일대기를 기록하여 청평사에 세운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의 앞면과 뒷면의 글씨를 썼다. 왕희지의 필법에 능해 신품사현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신품사현(神品四賢) : 신라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4명의 서예가들로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탄연(坦然), 최우(崔瑀), 유신(柳伸)을 가리킨다.
* 승형(承逈, 1171∼1221)
고려 중기 승려이다. 자는 영회(永廻), 휘가 承逈, 속성은 신씨(申氏), 시호는 원진국사(圓眞國師)이다. 경북 문경시 산양 출신이다.
1200년경 청평사의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首楞嚴 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 이로써 모든 상(相)이 망상임을 통연히 깨닫고 자기 마음의 광대함을 알아 불법 을 선양할 때에는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다고 발원하였다.
『능엄경』이 한국 선종에서 숭상되게 된 연유는 이자현이 문을 열고 승형이 다시 천명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1215년에 청평사와 한계사의 주지를 맡을 것을 제안 받았으나 사양하고 보경사(寶鏡寺)로 자리를 옮겼다.
* 이암(李嵒, 1297∼1364)
고려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로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이다.
초명은 군해(君侅), 자는 익지(翼之)였으나, 뒤에 흉한 사람의 이름을 피하여 이름을 암(嵒)으로 바꾸고 자도 고운(古雲)으로 고쳤다고 한다.
1353(공민왕2)∼1358(공민왕7)년까지 청평사에 머물렀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묵죽(墨竹)에 뛰어났고 특히 예서와 초서에 능했다. 필법은 조맹부(趙孟頫) 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제현이 글을 짓고 이암이 쓴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가 1327년 청평사에 건립되었다.
* 설잠 김시습(雪岑 金時習, 1435∼1493)
조선 전기 승려이자 문인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하였다.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 世翁) 등 이다. 설잠(雪岑)은 그의 법명이고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466(세조11)년에 청평사에 머물렀고 이때에 학매를 가르쳤다. 『매월당집』에 청평산, 청평사, 세향원을 비롯한 일대에 관련된 여러 수의 시가 실려 있다.
* 보우(普雨, 1509∼1565)
조선 중기의 승려로 호는 허응(虛應)·나암(懶庵)이다.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도첩제도(度牒制度)와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중흥을 위해 힘썼다. 이 때 실시한 승과제도를 통하여 서산휴정 과 사명당 유정이 등과하여 임진왜란 시기에 승병을 결성하여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우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문집인 『허응당집』과 『나암잡저』를 보면 청평사에 1534년과 1555년(명종10)∼1562년(명종17) 두차례 머물렀다. 그의 문집에 청평사에 와서 쓴 시와 여러 기문들이 전한다.
특히 1558년에는 제석탱화와 아미타불탱화 2점을 수선하고 1562년에는 청평사 지장보살도를 봉안하 였다. 이 지장보살도는 일본의 고메이사(光明寺)에 소장되어 있다. 청평사 경내에 현존하는 석조계단과 석축 그리고 회전문 등은 이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의천(義天, 1603∼1690)
조선 후기 승려로 자는 지경(智鏡), 호는 환적(幻寂)이다. 경상북도 선산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 선승으로서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었다.
1650년에 양신암을 중수하고 머물렀으며 1657년에 청평사를 다시 찾아 수행하였다. 화장을 하고 나온 사리를 여러 곳에 나누어 분장하였는데 의성 대곡사·문경 봉암사·춘천 청평사·충 주 덕주사·대구 용연사·태백산 각화사·거창 연수사·합천 해인사 홍제암·칠곡 대흥사에 사리를 각 1매씩 봉안하였다. 이중에서 봉암사·청평사·덕주사·용연사·홍제암·대흥사에 부도가 현존하며 초상화는 상주 남장사와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 봉안되었으나 1990년대에 모두 도난당하고 현재는 사진을 바탕으로 복제된 진영이 남아 있다. 해인사 진영은 1749년(숙종 16)에 혜식(慧式)이 고쳐 그렸다고 한다.
의천 스님의 진영은 제7대 종정을 지낸 성철큰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서 소장하고 계셨는데 어느 날 이를 도둑맞고 종정 스님께서 크게 상심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전각 안내
전각(殿閣)이란 전당합각(殿堂闔閣)의 줄임말로 주로 한국의 전통 건축물을 지칭한다.
조선시대의 건물은 지을때부터 용도와 권위가 있어 전,당,합,각,제,헌,루,정(殿, 堂,闔,閣,齋,軒,樓,亭)의 순서로 서열에 매겨졌다.
* 청평사지(淸平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광종 24년(973)에 당나라 승려인 영현선사가 이곳에 절을 세우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얼마 뒤 문을 닫았는데 문종 22년(1068)에 이 지역에서 벼슬을 살던 이의가 절을 고치고 새로 열면서 이름을 보현원(普賢院)이라고 바꾸었다. 선종 6년(1089)에는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많은 건물을 새로 짓고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고 하였다. 이후 조 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절을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淸平寺)로 바꾼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청평사는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 건물과 고려 최고의 명필가인 탄연이 쓴 문수원기가 전해 내려왔는 데 한국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들은 1975년과 2008년에 각각 복원되었다. 그 밖에도 회전문(보물 제164호),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진락공 이자현 부도, 환적당 부도 등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또 절 주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고려시대의 정원 양식을 보여준다. 직사각형의 연못인 영지,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에 이끌려 이제현, 김시습 등 많인 문인이 찾아 머무 르거나 글을 남기기도 했다.
*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4호
1557년경 보우대사가 청평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할 당시에 세운 사찰의 중문(中門)으로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의 형태로 대들보가 3개인 3량식 가구(架構)이며 주심포(柱心包)계의 익공 건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매우 귀중한 건축물이다.
회전문의 중앙부 위쪽에는 홍살을 첨가해서 홍살문의 기능도 함께 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영암 도갑사의 해탈문과 같은 양식이다. 사찰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가운데 칸을 출입문으로 좌우 한 칸씩은 사천왕의 조각상을 세우거나 그림을 걸도록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름은 청평사 창건설화인 공주설화와 연계되어 윤회를 한다는 의미로 회전문이라고 불린다. 또한 불교의 경전을 두었던 윤장대(輪藏臺)를 돌린다 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 경운루(慶雲樓)
회전문을 지나 회랑과 동일한 축선인 동-서로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춘 2층 누각(樓閣)이다.
보통 산지 사찰에서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누각의 아랫부분을 지나 법당 앞마당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누하진입 (樓下進入)으로 회전문-경운루-대웅전으로 연결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강선루(降仙樓)라고 불렀는데 복원하면서 경운루로 고쳤다 누각의 옆으로는 회전문과 같이 회랑으로 복원되었다. 경운루를 중심 으로 동-서로 각 4칸씩 건축되었다.
* 관음전(觀音殿)
관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 두루 걸림이 없다는 뜻)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은 모든 환란을 구제할 뿐 아니라 중 생의 안락을 불가사의한 인연과 신력으로 돕기 때문에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기도 하다. 관음전 내에는 감로병을 얹힌 연꽃을 들고 연화좌(蓮華座) 위에 앉은 관음상과 후불탱화로 관음보살과 협시(脇侍) 인 남순동자(南巡童子)를 묘사한 관음탱화(觀音幀畵)를 봉안하였다.
관음전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전면의 1칸은 퇴칸(좁은 칸)으로 향교에서 대성전처럼 실내가 아니 라 실외로 건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음전이 향적당(香積堂)이고 나한전이 사성전(四聖殿)이었으며 사성전 구역에 구광전(九光殿)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 나한전(羅漢殿)
석가모니불과 이 세상에 머물며 정법(正法)과 중생을 수호한다는 집단으로서의 부처님의 열여섯 제자인 십육나한(十六羅漢)을 모신 곳으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 에게 설법한 모임을 간략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였다.
나한전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전면의 1칸은 퇴칸(좁은 칸)으로 향교에서 대성전처럼 실내 가 아니라 실외로 건축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음전이 향적당(香積堂)이고 나한전이 사성전(四聖殿)이었으며 사성전 구역에 구광전(九光殿)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봉안하므로 사찰에서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며 가장 중요한 곳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셨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행을 실천'하는 보살이며 두 보살의 손에 든 연꽃 위에는 문수 동자와 보현동자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일반사찰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불단 좌우로 모든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다불사상에 근거하여 천불을 묘사한 천불탱화(千佛幀畵),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의식에 사용된 감로탱화(甘露幀畵),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중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주축으로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봉안하였다.
1990년대 초에 중건된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1980년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활주가 확인되었다는 것으로 보면 팔 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을 오르는 7단의 대형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옆을 마무리한 소맷돌에는 태극문양과 연화문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는 양주 회암사지의 계단과 매우 유사하다. 이 는 청평사와 회암사를 중창한 보우대사의 설계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극문양은 왕실과 관련 있는 건축물에서만 새기는 것을 감안하면 청평사는 왕실과 연관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에는 대웅 전과 의미는 같지만 능인보전(能仁寶殿)이라고 불렀다.
* 주련(柱聯)
•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편시방중
부처님 몸은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하시네
•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도 이와 한가지시네
•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크고도 넓은 원력구름은 항상 다함 없어라
• 汪洋覺海玅難窮 왕양각해묘난궁
한 없이 넓은 깨달음바다 끝도 아득하여라
* 극락보전(極樂寶殿)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며 관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한다.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한다.
후불탱화로는 아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 대웅전과는 다른 유형으로 제석천(帝釋天)과 대범천(大梵天), 동진보살(童眞 菩薩)을 중심으로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봉안하였다.
보우대사가 회전문과 함께 1555년경에 지었고 상량문을 1772년에 중수, 1889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극락전은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 궁 궐 못지않게 화려한 건물로 국보(구 국보 115호)로 지정되기도 했었다. 이후, 한국전쟁 직전에 극락전이 불에 타고, 1977년에 새로 지어졌다. 불타기 전에는 전면 1칸, 측면 1칸이 실외로 설계되었다. 이 는 향교의 대성전과 같은 양식이다. 현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 모두 실내로 새롭게 복원되었다.
* 주련(柱聯)
•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전만월용
극락전 앞에 보름달 같은 아미타불의 모습
• 玉毫金色照虛空 옥호금색조허공
옥호의 금빛은 허공 가득 비추나니
• 若人一念稱名號 약인일념칭명호
만약 누구든 명호를 일념 다해 부른다면
•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잠깐 사이 깨달아 한없이 큰 공덕 이루리라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함께 모시고 있는 곳이며 나누어 모셨을 때는 '칠성각(七星閣), 독성각(獨星閣), 산신각(山神閣)'이라 한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 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산신'은 산에 있는 신을 의미하며, '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 것으로 별나라의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과 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하며,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는데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인연을 혼자서 깨달아 성인의 위치에 올라서 말세의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내부는 칠성을 불교의 호법선신으로 수용하고 이를 의인화하여 묘사한 칠성탱화(七星幀畵)를 중심으로 좌우로 석가모니의 제자들인 십육나한 중 첫 번째 존자인 독성존자를 단독으로 그린 독성탱화(獨聖 幀畵), 산의 신령이라고 믿었던 호랑이를 신격화시켜 그린 산신탱화(山神幀畵)를 봉안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극락전과 함께1977년에 건립되었는데 불타기 이전의 명칭은 산신각이다.
* 주련(柱聯)
• 靈山昔日如來囑 영산석일여래촉
영산에서 과거 부처님께서 부촉하셨으니
• 威鎭江山度衆生 위진강산도중생
위세가 강산에 떨치고 중생을 제도하시니라
* 범종각(梵鐘閣)
불전사물(佛殿四物) 가운데 범종(梵鐘)만을 봉안하여 범종각이라 부른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1994년에 범종각 신축과 범종을 주성하였다.
* 요사채(寮舍)
스님과 일반대중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승당(僧堂)이라고도 부른다.
요사채가 지어지기 전에는 밭으로 이용되었으나 1984년에 ⌟ 자 형태의 승당이 완성되었다. 2010년대에 다시 ㄇ자 형태의 건물로 개축하여 식당과 종무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자 형태의 2개 건물은 대중과 스님의 숙소로 활용하고 있다.
* 문수원기(文殊院記)
문수원기는 1125년에 이자현이 세상을 뜨고 5년이 지난 1130년 8월 고려 인종으로부터 진락공이란 시호를 받았는데, 그 3개월 후인 같은 해 11월에 세워진 비이다.
비의 앞면은 청평사 창건과 중창, 이자현의 행적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고려 중기 문장가인 김부철(金富轍)이 짓고 대감국사 탄연(坦然)이 썼다. 비의 뒷면은 이자현을 추모하는 제문(祭文)으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제자인 혜소(慧素)가 짓고 역시 탄연이 썼다. 이 비문은 간화선(看話禪)과 굴산문(崛山門)의 법맥 등 고려시대 불교사, 사상사, 서예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편찬된 『춘천읍지』에 의하면 문수원기는 글자가 벗겨지고 떨 어진 채로 절 앞에 서 있다고 되어 있다. 1914년 훼손이 심하자 극락전으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비문의 절반 이상이 멸실된 상태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는 청평사가 북위 38°선의 경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주지승이 남한과 북한에 의하여 자주 연행되어 사상 조사를 받는 사태가 발생하자 부인이 부처님의 가피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극락전을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다시 피해를 입은 문수원기는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 있던 요사에 옮겨 보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요사가 다시 불에 타면서 문수원기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1968년 현재의 대웅전 자리에서 문수원기의 비편이 발견됨으로써 문 수원기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고 1985년 5월 25일에는 대웅전 터를 발굴하던 중 일부의 비편이 새로 확인되었다. 그 후 문헌, 탁본 등의 비교 분석 작업을 통해 2008년에 복원되었다.
* 문수사장경비(文殊寺藏經碑)
문수사장경비는 1327년(충숙왕14)에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대장경과 돈을 보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해에 이제현이 글을 짓고 이암(李嵒)이 써서 청평사에 건립한 비문이다.
비의 앞면을 이제현이, 비의 뒷면을 승려 성징(性澄)이 지었다. 글씨는 비의 뒷면은 자료가 전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앞면은 이암이 쓴 2면비이며, 1327년 5월에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에 파손되어 전하지 않으나 탁본이 남아 있어서 현재 복원 작업 중에 있다. 조선 순조년간(1801∼1834)에 편찬된 『춘천읍지』에 의하면, 장경비는 절단되어 자획도 보기 어렵다고 서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미 파손 이 심각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청평사 중창비(淸平寺 重創碑)
석진스님과 제원스님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청평사의 중창을 기념하여 불기2535년(서기1991)에 건립한 비이다.
대웅전 동쪽에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