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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작품〉
유머와 해학, 풍류적 기풍
-정진권의 수필 세계
김국현
1. 겸손과 진솔함, 삶의 이야기
정진권은 일상을 이야기하듯 조근조근 풀어냈던 수필가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다. 여기서 언어는 창조적 언어를 일컫는다. 수필에서 창조적 언어란 현실 체험을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해석하여 궁극적으로는 체험의 객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언어의 속성은 보이는 것을 있는 대로 묘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상상이나 해석을 통해 드러낸다. 정진권의 수필작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다.
‘글이 곧 작가다’라는 말이 있다. 작가의 심성과 인품과 생활이 글 속에 투영된다는 뜻이다. 수필이야말로 이에 가장 합당한 장르다. 수필이 작가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자기 고백과 자기 성찰을 지향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필가 정진권은 글과 똑 닮은 작가이다. 살아온 대로 또 살아가는 대로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묘사하고 있다. 그의 수필을 읽노라면 일일 연속극처럼 소시민의 일상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 글은 정진권 수필의 특징적인 면모를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둔다. 논의의 편리를 위해 그의 선집 《빙긋과 쿡》(좋은수필사, 2012)을 중심 텍스트로 삼았다. 이 선집은 1967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세월 동안 집필한 수필 중에 대표적인 작품을 모은 작품집이다. 이 작품집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과거 회상과 일상의 주변에서 발견된 내용을, 2부는 자녀 사랑과 일과 관련된 소재를, 3부는 한시 인용과 아내 이야기, 4부는 인간과 동물에 대한 사랑을 각각 담고 있다. 이 선집은 긴 세월 수필가로 활동한 정진권의 수필 세계를 총체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한 작가의 세계관이 수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그의 수필이 가진 특별한 지점이 무엇인지 살펴볼 수 있는 텍스트이다.
정진권의 수필은 문학 이론과 고전문학을 바탕으로 한 글이지만 조금도 현학적이지 않다. 교수, 수필가, 애주가로서 단순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소탈한 성품은 수필작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수필가는 흔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아상을 그리는 유혹에 빠져 글 속에 못난 것은 숨기고 잘난 면을 서술하기 쉽다. 하지만 정진권의 글에는 소박한 생활인의 태도가 온전히 투영되어 있다. 심지어는 부끄럽고 한심스러운 모습도 숨기거나 미화하려 들지 않는다. 작가가 수필가로서 치열한 작가정신을 가지고 작품을 썼다는 증거이다.
수필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과 삶의 행적을 반영하는 장르이다. 환경적 요인을 배제하여 삶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수필은 작가의 성장 과정과 가족사, 직업과 사회사에 영향을 받는다. 정진권의 수필 선집 《빙긋과 쿡》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의 궤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특히 생활인 정진권의 삶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다. 교수로서, 가장으로서, 아들과 남편으로 살아온 그의 일상이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수필작품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묵직함이 아니라 비 온 뒤 산책길을 걷는 듯 상쾌하고 유쾌하다. 이처럼 정진권의 수필은 특별한 풍경을 보여준다.
2. 서민적이고 따스한 인간애
인간에 대한 사랑은 순수하고 숭고하다. 인간애는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자 살아가는 이유이다. 수필 문학에서 인간애는 서민의 삶을 눈여겨보며 그들의 고단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을 때 발현된다.
수필 문학은 위대하거나 잘난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삶이라는 실존의 현장을 운명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자화상이자 풍속도이다. 그러기에 수필 문학의 출발지와 종착지는 휴머니즘이다. 정진권은 자신이 펼쳐 놓은 사유의 그물망에 걸리는 건 무엇이든 놓치지 않고 보듬어 작품이라는 옥동자를 하나씩 탄생시킨다. 이러한 작가의 소재 찾기는 서민의 일상에서 느끼는 인간애로 승화한다.
수필에서 소재는 곧 작가의 세계관이다. 작가의 시선이 자주 머무는 자리에서 문학의 싹이 움트기 때문이다. 정진권의 시선은 늘 서민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풍경에 가닿는다. 가족, 모자, 우산, 담배, 고양이, 개미, 버스, 시계 등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소재에서 착상이 시작된다. 이들을 발견하려면 스스로 몸을 낮추어야 한다. 낮은 자리를 향한 겸허한 태도가 정진권 수필 문학이 발아하고 성장하는 터전이다.
가령 〈짜장면〉에서 작가가 짜장면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가 중국집의 허술하고 소박한 분위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짜장면’이라는 대상 자체보다 중국집의 기름때 절은 내부 광경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다른 작품 〈마을버스 이후〉는 소시민의 하루를 그림 그리듯 서술한다. 지하철이 생겨 마을버스가 운행을 중지한 뒤 변화된 주변 정경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한다. 특히 이 작품은 행인들을 바라보며 상상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그리고 있다. 정진권 수필의 기저에는 일상성과 서민성을 눈여겨보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정진권은 아내 사랑이 남다르다. 〈아내론〉에서 분유 한 통을 늘려 먹이려고 멀겋게 타서 어린 남매를 키우던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부부간에 대화 장면은 마치 안동의 전설 ‘원이 엄마’의 애틋한 부부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아내에게 당신이 먼저 가면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고 무덤에 잔디가 파래지면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한다. 이에 아내가 혼자 먼저 가는 게 싫다고 답을 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내 사랑은 〈중전과 시녀〉, 〈일요 드라이브〉, 〈엄처시하〉 등에서도 엿보인다.
〈비닐우산〉에서는 비가 오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한 여인을 바라보며, 몇 차례나 버스를 그냥 보내고 실망감이 가득한 여인에게 동정심을 가진다. 다음 버스에서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꼭 내리기를 바라면서, 그 사람이 우산 속으로 뛰어들면 반가운 마음에 비록 찬비에 젖어도 사랑은 식지 않을 거라 믿는다. 비닐우산이라는 소재와 버스 정류장이라는 배경이 서민의 일상을 상징한다. 〈카트와 트럭〉은 카트를 끌고 다니며 헌 신문지와 병을 주워 살아가는 노인 이야기다. 작가는 트럭이 와서 고물을 손쉽게 가져가는 장면을 보고 그 노인의 생계를 걱정한다. 비가 오면 어쩌나 하면서, 노인의 카트가 하루라도 비는 날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준다. 그가 선택한 수필의 소재는 서민들의 삶과 밀접하다. 무엇보다 소재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소재와 그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를 관찰한다. 이러한 방식은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일조한다.
봄날 민들레가 대지에서 피어나 우주로 꽃씨를 날리듯이, 정진권 수필은 지극히 사소한 소재에서 출발하여 휴머니즘이라는 이상향을 향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방법론을 선택한다. 하나는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리는 서민적 소재, 다른 하나는 그 소재를 둘러싼 인간이나 배경에 주목하면서 따뜻한 휴머니즘을 내세운다. 그의 작품의 바탕에는 보잘것없는 사물과 인간을 향한 측은지심이 깔려 있다. 측은지심이야말로 수필이 지향해야 할 문학적 휴머니즘이다.
3. 형식의 실험성과 수필의 문학성
글의 형식은 주제를 구현하고 형상화하는 틀이고 방식이다. 형식과 내용이 글 속에 조화롭게 반영되면 독자들은 쉽게 감동하고 작가의 의도를 공유한다. 문학에서 형식은 참으로 중요하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작가의 개성과 문학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 주제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은 다양할수록 글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시나 소설 또는 희곡적 요소를 수필에 빌려오는 것도 형식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창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수필의 전형이나 정통성에 머무른다면 순수문학으로서의 수필의 영역은 지킬 수 있겠지만, 구성의 묘미와 긴박감을 통해 수필의 맛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다.
수필은 일인칭 화자 중심의 문학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장르적 특성 탓에 독자는 작가와 작품 속 화자를 동일체로 인식한다. 그래서 수필은 평면적 구성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형식의 파괴를 시도하거나 시나 소설의 요소들을 가져와 수필에 적용한다. 수필의 변신을 위한 장르융합은 단조롭고 평면적인 수필의 구성을 벗어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다. 정진권은 소설적 요소를 수필로 가져와 즐겨 활용한다. 소설의 핵심 요소인 서사와 대화체를 동원하거나 3인칭 서술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마음대로 못 쓴 돈〉은 전체 글이 하나의 작은 이야기이다. 이 글은 서사적 수필의 전형으로서 등장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사건 내용을 세밀하게 기술하고, 시간적 경과에 따른 상황 묘사로 이어진다. 허구가 아닌 작가 자신의 실재 체험을 소재로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 결미까지 시간성을 따라 전개된다. 동네 사람에게 자기 돈을 보태서 몽땅 빌려주는 결미 부분의 반전은 콩트와 유사하다. 이처럼 서사적 요소가 가미된 수필은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끝까지 시선을 붙잡아두는 효과가 있다.
대화체를 가미한 소설적 기법을 동원한 글도 있다. 〈부자녀유친父子女有親〉은 작가와 아들과의 대화가 글의 중심을 이루고, 〈안집에 수돗물이〉는 복덕방 주인과 대화하는 내용으로 글이 구성된다. 수필에서 대화체를 구사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묘사나 설명, 진술 위주로 이루어지는 수필의 특성상 대화체는 글의 흐름을 깨트릴 수도 있다. 고도의 감각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정진권은 적절한 위치에 대화체를 넣는다. 가령 뉴스에서 기자가 사건 현장에 직접 가서 리포터를 하는 것과 같다. 수필에서도 등장인물이 직접 나서서 대화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사실감과 현장감을 높인다. 이처럼 정진권의 수필에서 대화체는 화자의 내면과 상황을 보다 정밀하고 세세하게 제시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일요 드라이브〉에서는 자신을 ‘자네’라는 2인칭으로 설정하여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고백한다. 작가가 화자로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 본인의 감정을 객관적 시각에서 솔직하게 드러낸다. 〈빙긋과 쿡〉은 시점을 3인칭으로 설정한 글로서, 자신을 대신한 김 선생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허물없는 친구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돈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편하게 서술한다. 〈엄처시하嚴妻侍下〉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상하고 사랑스러웠던 아내의 엄격해진 변모를 아쉬워하며, ‘아내’를 ‘엄처’라는 일반명사로 전환하여 객관성을 확보한다. 화자 자신을 2인칭 혹은 3인칭으로 호명하는 것은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을 응용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화자 자신을 대상화하여 또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자아에 매몰되기 쉬운 자신을 분리하여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기 성찰을 가능하게 해준다.
정진권은 일상에서 얻은 어떤 소재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특히 학자로서 공부한 고전문학의 요소들이 그의 수필작품 곳곳에서 솟아오른다. 고전에서 얻은 지혜가 수필 속에 일상의 장면으로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그가 선택한 소재는 현대수필이라는 그릇 안에서 발효되고 농익은 후 형상화 과정을 거쳐 재창조된다. 가령 〈낙엽설〉은 《대동시선大東詩選》과 《송강집》에 수록된 낙엽이 등장하는 시를 인용하여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일상을 풀어낸다. 상상과 해석으로 시인의 마음을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자신의 모습을 글 속에 투영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 〈내 아내는 잘라 팔 머리가 없다〉에서는 《정일당유고靜一堂遺稿》의 한시에 나오는 이야기를 자신의 필체로 전개한다. 가난한 살림에 남편 친구가 와도 잘라 팔 아내의 머리가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위안 삼는다. 우리의 고전을 현대수필로 가져왔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정진권의 실험적 시도는 수필도 문학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작가는 서사성, 대화체, 3인칭 시점 등 소설적 요소를 수필로 끌어들여 성공적으로 안착시킨다. 주제구현을 위한 효과를 유발하는 한편, 서사적 재미와 글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수필의 평면성을 뛰어넘는다. 이러한 전략들은 대상과의 거리 두기를 통해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하고 공감의 여백을 마련해 준다. 이는 수필 문학의 초석을 튼튼히 쌓으려는 작가의 선진적 사고와 실험 정신이 발현한 결과물이다. 소설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진권의 수필은 수필의 문학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4. 해학과 은유, 의미의 확장
책의 제목인 〈빙긋과 쿡〉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정진권의 수필에는 유머와 해학이 강물의 밑바닥처럼 글의 심연에 흐르고 있다. 정진권은 도회지에 사는 멋스러운 중년 신사 같기도 하고, 시골에서 글을 벗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평범한 촌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머와 위트에 대하여 작가는 “우리 수필문학을 위해서는 더없이 소중한 가치이지만, 모든 수필이 지향해야 할 것은 아니다(정진권, 《한국 수필 문학의 이해》, 2010, 35쪽)”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머와 위트는 수필의 독특한 맛(김기림, 〈머리말〉, 《바다와 육체》, 1948)이라는 의견과, 수필에 유머와 위트가 있어야 흥미와 긴장이 유지된다는 관점도 있다(이운경, 〈김기림의 수필론 및 수필 연구〉, 《수필의 감각체계》, 2021).
유머와 위트는 현대수필에서 허약한 부분이다. 일상에서 얻은 체험을 해학으로 풀어나가면 소재의 선택과 의미의 확장을 가져온다. 유머와 해학이 우리 수필의 취약점인 이유는 사회·정치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남북분단과 군사독재, 가부장제 등이 수필에 그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외부의 억압은 사유와 문체에도 영향을 끼친다. 문체란 작가의 몸에서 우러나는 경험과 지식, 문화적 환경, 직업적 요소 등이 결부된 작가의 개성이자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진권의 수필에는 위트와 유머가 넘친다. 감상적인 문체를 바탕으로 서정성을 살릴 수 있듯이, 해학적인 문체와 구성 전략에 따라 수필의 맛이 달라진다. 이는 그의 서민적 인간애의 발로로서, 주제구현의 깊이와도 관련이 있다.
정진권 수필에서 해학적 표현을 자주 본다. 예를 들면 “그는 조금도 외롭지 않게 누구 약 올리듯 맛있게 피워댔다(〈연노설煙奴說〉).”처럼 미소를 머금게 한다. 특히 〈부자녀유친父子女有親〉에 해학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잔말씀 하실 아무개 아저씨도 안 계시는 데니까 안심을 하고”, “일요일은 금싸라기데이(-day)이다.”, “성현 말씀에 부자녀유친이라고 했느니라.” 같은 표현에 저자의 재치 있고 호탕한 성품이 배어 있다. 그의 문체는 무겁거나 진지하지 않다. 그렇다고 가볍거나 경박하지도 않다.
웃음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나 비틀기를 통해 독자의 예상을 빗나갈 때 발생한다. 본래 문학의 언어는 기표와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거나 어긋나면서 오독誤讀과 해학이 발생한다. 오독은 심각한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진권의 문장처럼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한다. 정진권 수필의 해학성은 고전문학과 현대수필이 결합한 지점에서 촉발된다. 좋아하는 한시 중 재미를 유발하는 글귀를 수필로 가져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가령 〈자줏빛 바위 가에/헌화가獻花歌〉에서는 《삼국유사》의 설화에 상상을 보태어 이야기로 엮어낸다. 한 여인이 바위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다고 하자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서 노래와 함께 바쳤다. 하지만 그 여인은 꽃을 받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에 작가는 여인이 노인의 마음을 헤아려 꽃을 받겠다고 화답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결미에서는 밤길의 주정꾼도 노래하면서 걸으면 덜 밉게 보인다며 풍류적 표현을 가미하고 있다.
정진권의 풍류적 기풍은 진솔함을 드러내는 자신감과 세상을 풍자하는 비판의식이 그 힘의 원천이다. 풍류란 전통적인 의미로 ‘풍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일’이라는 뜻이다. 정진권은 옛 선비들의 풍류를 그대로 가져와 그의 수필에서 되살리고 있다. 〈분이 별, 삼돌이 별〉에서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상상하면서, “우리 집 지붕 위에도 별 몇 개가 빛나고 있었다.”라며 자신도 아내와 설레는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심정을 내보인다. 시와 술, 노래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의 핵심 요소이다. 정진권도 수필에서 조선 선비의 풍류를 다채롭게 풀어낸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양반가 출신이라는 점과 고전문학에서 체득한 전통적 해학과 유머를 수필에 자연스럽게 반영한 결과이다.
정진권 수필의 주제구현 방식은 은유적이다. 직접 발화하지 않고 글 밖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암시적으로 기술한다. 여지를 남김으로써 독자의 몫을 기대하는 것이다. 〈작은애를 기다리며〉의 결미에 내일은 맥주를 사다 놓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군에서 제대하는 작은아들을 기다리는 행복감과 자식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닐우산〉에서도 작가는 자신과 비닐우산을 은유적 동일체로 보고 있다. 비록 자신은 비닐우산처럼 값싼 인생을 사는 부실한 사람이지만, 자식들의 머리 위에 찬비를 가려주는 버팀목 같은 가장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작은 운동장의 큰 가르침〉에서는 ‘어떤 아이가 또 그 플라타너스에 기대섰을까.’라며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 보인다. 이처럼 은유적 표현을 통해 소재의 의미를 확장하고 주제가 글 속에 함축적으로 내포됨으로써 글의 문학성을 얻는다.
5. 수필 사랑, 끝이 없는 이야기
문학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자 사랑의 표현이다. 정진권의 수필 문학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 엮어가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이룬다. 수필은 삶을 운명처럼 껴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의 자화상이다. 그러기에 수필 문학이 지향하는 종착지도 평범한 서민의 삶을 통해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진권 수필은 이러한 서민적 인간애가 바탕이 된다.
정진권은 어떤 문학 장르보다 수필을 사랑한 작가이다. 삶에서 느낀 이야기를 폭넓게 풀어내고 싶을 때는 시나 소설보다 형식이 자유로운 수필을 주로 선택하였다. 주변의 친숙한 대상에 시선을 두고 담백한 문체와 따스한 인간애로 세상을 보듬으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고전의 소중한 유산인 유머와 해학을 통해 선비의 풍류를 수필로 풀어냈다. 이로써 독자들에게 수필의 멋과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특히 소설적 요소를 수필에 도입하여 수필의 문학성을 다지고 수필의 영역 확장을 도모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좋은 수필의 요건〉에서 자신이 밝힌 대로 정진권 수필은 쉽고 산뜻한 언어를 사용하고, 짜임새 있는 구성에다, 화자로서 겸손하고 정다운 목소리를 내며 독자에게는 친근한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한 작가이다. 그의 수필에는 수맥이 흐르는 터에 깊이 판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 이야기가 메마를 날이 없다. 풍성한 재미와 소탈한 풍류객의 면모, 장르 관념의 혁파, 겸손과 사랑이 깃든 묘사는 정진권 수필의 대명사이다. 그의 이야기는 서민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고 평안을 주는 안식처이다. 이것이 수필이 문학인 까닭이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