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어사 옛길엔 등나무 삼나무…낙엽 양탄자 푹신하게 깔린 산길 - 새소리 바람소리 풀잎내음 가득…조용조용 걸으면서 자연과 호흡 - 땅과 숲 기운 몸 속으로 빨려들어 어느새 머리 속 잡념은 저멀리로
바스락 바스락~. 산길에 낙엽 양탄자가 깔렸다. 폭신폭신 몸이 가볍다. 찬공기가 가슴 속에 쏴아, 하고 들이닥친다. 속이 다 시원하다. 툭툭 떨어지는 마른 솔잎이 살갗에 침을 놓는다. 따끔따금 정신이 곤두선다. 가만가만 내딪는 발걸음들. 땅과 숲의 기운이 온 몸에 번진다. 아, 행복해!
지난 23일 오후 부산 금정구 범어사 옛길. 이날 새세상여성연합이 마련한 걷기 명상 특별 프로그램은 특별했다. 아침 한때 비가 내렸고, 비가 개자 오후의 산길은 최상의 촉감을 유지했다. 길 걷기의 한 진경(眞境)을 마주한 듯 했다.
■걷는 자의 행복
범어사 90번 버스 종점에서 범어정수장, 경동아파트를 거쳐 산길로 접어든다. 지장암과 계명암으로 이어지는 범어사 옛길이다.
"눈을 감으시고, 마음의 눈으로 호흡을 바라보세요. 편안하게 들이쉬고 내쉽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습니다. 내가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에 있다고 상상 하십시오."
명상지도사인 송영경(여·50) 씨가 일행을 불러 앉힌 뒤 '여는 명상'을 주도한다. 한 5분이 지났을까, 눈을 뜨니 세상이 환해진 듯하다. 명상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마음을 열고 의식을 다잡고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 하면 된다.
다시 아늑한 산길. 직박구리 지저귐이 요란하다. 본격 걷기 명상이 시작됐다. 걷기 명상은 걸으면서 대지의 힘과 숲의 기운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명상이다. 중요한 것은 호흡 조절이다. '들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며 리듬을 타야 한다. 발이 지면에 닿고, 체중이 옮겨 가고, 다른 쪽 발이 들려지는 일련의 동작을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
송 지도사는 "특별한 매뉴얼은 없고 그냥 편안하게, 고요하게 걸으면 된다"고 했다. 실은 그게 쉽지 않았다. 끊임없이 잡념이 생기고 소음이 귓전을 파고든다. 소란스런 등산객이라도 만나게 되면 명상이 깨진다. 송 지도사는 "그래서 장소가 중요하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범어사 옛길의 운치
범어사 옛길은 안온한 길이다. 가끔씩 범어사 일주도로의 차량 소음이 성가시지만 참을 만하다. 도심 가까이에 이런 길이 남아 있다는 게 축복이다. 걷기 명상을 즐기는 이들은 '감춰놓고 싶은 길'이란다.
이 옛길엔 범어사의 역사와 문화가 흐른다. 이 또한 축복이다. 계명봉과 양산 사송리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범어사 방향으로 300여m 오르자, '금어동천(金魚洞天)'이라 새겨진 큼직한 바위가 나타난다. '금어'는 금샘의 물고기, '동천'은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자리를 뜻한다. 누가 새겼을까. 바위면에 '정현덕(鄭顯德) 윤필은(尹弼殷), 김철균(金澈均)'이란 굵직한 각자가 보인다. 동행한 류경희 문화관광해설사는 "동래부와 범어사의 역사, 그 풍류의 현장으로 볼수 있다"며 "도로가 나기 전엔 이 일대가 전부 계곡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얼마 안 가자 비석골이 나온다. '부사 정공현덕영세불망비'(1872년) 등 5기의 비석이 도열해 있다. 정현덕은 바위에 각자된 그 인물이다. 조선 후기 동래부사 등이 피폐한 백성과 사찰에 베푼 은덕과 공을 기려 범어사가 세웠다는데, 은덕의 내용이 뭔지 궁금해진다.
가운데 비석은 경상도 순찰사를 지낸 조엄(趙曮)의 것이다. 조선통신사로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처음 전래했다는 인물이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갖은 잡역에 시달리던 범어사 스님들의 입장을 헤아려준 공을 기려 세운 비석이라 한다. 류 해설사는 "종교색이 스민 전설같은 얘기지만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등운곡 탐방로
사진은 일행들이 잠시 모여 앉아 명상을 하는 모습이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범어사 일주문 앞에서 등운곡(藤雲谷)으로 걸어간다. 봄에 연보랏색 등꽃이 피면 마치 구름처럼 보인다는 계곡이다. 이름이 꽤 시적이다. 등나무 6500여 그루가 얼키설키 섞여 자생한다. 이곳에 금정구청이 만든 멋진 관찰로(길이 825m)가 있다. 걷다 보면 생태공부는 그냥 된다. 등나무는 무엇이든 감아돌린다. 그 등쌀에 고생하는 서어나무며 비목, 팽나무가 안쓰럽지만 그게 자연인 걸 어쩌랴.
등나무 틈에 듬성듬성 칡나무가 섞여 있다. 등나무와 칡넝쿨이 서로 얽히어 풀리지 않는 상태, 즉 '갈등(葛藤)'의 생생한 현장이다. 주로 외국인들을 상대로 범어사의 자연과 문화를 소개해 온 류 해설사는 "범어사에는 잘 다듬으면 보석이 될만한 스토리텔링 소재가 많다"면서 "범어사의 관광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등나무 군락지를 빠져나가자 키다리 삼나무, 편백나무들이 무리지어 기다린다. 등운곡의 선(禪) 쉼터다.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명상이 이어졌다. 송 지도사가 음송하듯 말했다.
"척추를 곧게 펴고, 손은 무릎 위에 올립니다. 미소를 머금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세요. 마음의 문을 열고, 땅과 숲의 기운을 가득 받아들입니다. 맑고 밝고 평화롭게…. 내가 밝아지면 이웃이 밝아집니다."
귓전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상쾌하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가 코끝을 간질인다. 20여 분의 명상이 끝나자 몸이 한결 가볍다.
다시 범어사 일주문. 버스를 타려다 말고 계곡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금정구에서 계곡길을 정비해 놓았으나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남산동 금정산 기슭의 전통다원 '산처럼'에서 따뜻한 대추차 한잔. 이날 프로그램이 끝났다. 범어사 옛길을 따라 약 4㎞, 명상 걷기 3시간이 꿈결처럼 지나갔다. 뭔가에 고마워해야 할 하루였다.
# 부산의 걷기 명상 장소는?
- 성지곡 숲길·범어정수장 주변, 회동·양산 법기수원지 등 제격 - "코스 지정 차별화·특별관리를"
걷기 명상은 길 걷기의 최고 경지에 이르는 한 과정이다. 걷기에 명상이 결합되면 심신이 밝아진다. 인류의 영적 스승으로 불리는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최고의 수련법으로 꼽는 것이 걷기 명상이다.
걷기 명상은 장소가 중요하다. 부산 주변에서 걷기 명상하기 좋은 장소로는 ▷범어사 옛길(범어정수장 주변) ▷초읍동 성지곡 숲길 ▷해운대 장산 둘레길 ▷회동수원지 사색길 ▷양산 법기수원지 등이 꼽힌다. 하지만 어느 곳도 걷기 명상을 위해 행정당국이 별도로 관리하고 있지는 않다.
환경단체와 명상 전문가들은 부산 갈맷길이 고급화, 차별화 되려면 걷기 명상을 위한 코스를 지정해 특별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심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로 쏠린다. 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상수원보호구역 등으로 관리해온 곳들이 지금 걷기 명상의 명소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영경 명상지도사는 "시 상수도사업본부가 관리하는 범어정수장이나 명장정수장은 부지가 넓고 자연미가 살아 있어 선택적으로 개방해 물 교육과 함께 도시인의 피폐한 심성을 정화하는 걷기 명상의 명소로 활용했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먹는 물과 명상, 걷기가 결합되는 의미있는 프로그램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사)걷고싶은부산 이성근 사무처장은 "자연조건이 좋은 양산 법기수원지는 무분별하게 일반에 개방할 게 아니라, 걷기 명상이나 생태학습 등 특별한 목적을 실현하는 장소로 특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맷길 최고의 코스로 꼽히는 회동수원지 사색길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특별 관리 또는 제한적 개방을 통한 차별화 전략이 요구된다. 회동수원지 사색길에는 요즘 주말과 휴일이면 하루 2000명 넘게 찾아와 산책로가 몸살을 앓고 있다. 금정구는 회동댐 상부에 출렁다리까지 놓는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상수원보호구역을 지키고 지속가능한 탐방로가 되게 하려면 걷기 명상의 명소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