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서청과 6.25사변
적 후방 교란을 계획하다
6.25남침 불과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허무하게도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9월 28일에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되었다. 그 3개월 동안 대한민국 국민이 겪은 고통은 한마디로 생지옥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 3개월 가운데 한 달 반을 부산 피난지에서 보낸 다음, 대한유격대 대장으로 12명의 대원과 함께 북쪽으로 팔공산 전선을 돌파해 적지 천여 리를 걸어 비밀리에 서울로 왔다. 15일이 걸렸다. 그리고는 한 달 동안 서울에 숨어서 활동했다. 이런 관계로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잘 공산 치하의 실정을 경험하고 듣게 되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던 6월 28일, 나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으로 피난 간 나는 자연히 서청(西靑) 출신의 옛 동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피난살이의 의식주 걱정에만 매달려있기에는 서북 건아들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 20대 젊은이들의 이심전심이었다.
이때 서청 총무부 차장 문희모(文犧模)와 서청 중구지부 부위원장 정명도(鄭明道)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철원 출신이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12명의 명단을 제시하며, "형님!" 결사대 명단입니다. 서울에 잠입하여 후방교란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형님을 책임자로 추대하였으니 승낙해 주십시오."라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12명의 명단을 살펴보니 나를 필두로 6명이 서청 출신 철원 후배들이었다. 기타는 황해도 2명, 평남 1명, 함북 2명, 부산 1명이었다. 부산 출신 1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잘 아는 서청 출신이었다. 부산 출신 정 모씨는 무전사로 거사에 꼭 참가시켜 달라고 간청하기 때문에 포함시켰는데, 잘 아는 사이이므로 염려할 것이 없다는 문희모의 대답이었다.
나는 명단을 손에 든 채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할까?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기껏 했다는 것이 일제시대의 중학과 대학 시절에 38식 장총으로 병정놀이한 것이 전부였다. 무슨 수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적진 천 리를 돌파하고 할 수 있을까? 밤새 이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간단했다. 북한의 부모형제는 전쟁 통에 생사를 알길 없고, 혈혈단신인 내가 주변 정리할 것도 없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김일성의 적도(赤徒)들에게 짓밟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인 데,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1950년 8월 12일. 우리 일행 12명은 육군 정보국 공작과 부산파견대장 계훈영(桂勳榮, 평북, 육사 8기생)의 소개로 대구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찾아갔다. 그러나 공작과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우리의 계획이 무모하고 허황하기 그지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작전국장인 장창국(張昌國) 장군을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장 장군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나와는 경기고 동창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장창국은 일언지하에, "미쳤나? 뭐 서울에 가서 후방교란작전을 해? 죽으려면 무슨 짓을 못해!"하며 나무랐다.
"그래 좋은 말 했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죽기는 내가 죽을테니 염려 말고 서울에 가도록 해줘! 생각해 봐. 일제 때 대본영(大本營)발표하는 게 있었지. 전쟁은 늘 이기고 있다고 발표했는데도 결국은 망했어. 지금 매일 비행기가 몇 백 대씩 가서 무엇을 파괴했다고 발표하는데도 적군이 계속 밀려 내려오니 일본군 대본영 발표같이 거짓말 아니냐는 말이 나돌고 있어. 그러니까 적진 내에 들어가서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은 거야."라고 나는 열을 올렸다.
장창국은 단념했는지, "정 그렇다면 좋아. 그러나 무전기는 소용없어. 지금까지의 무전암호는 저 새끼들이 다 알고 있어. 아직 암호가 완전하게 작성되지 못했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