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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들도 자신들의 치리하는 권위가 교인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다스리고 치리할 때 주장하는 자세로 교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장로(목사, 장로)의 역할 규정을 보면서 이런 역할규정이 잘 이루어지는 우리용두동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장로가 갖추어야할 내면적 조건을 현대 신학자들은 우선 목사의 목회와 지도를 충실하게 받을 자세가 갖춰져 있어야 하고 동시에 목사의 목회를 올바르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며 나아가서 목사의 동역자로서 같이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용두동교회 장로님들은 장로가 갖추어야할 내면적 조건을 충족할 뿐 아니라 교회에서의 치리할 사명도 겸손하고 본이 되게 하시는 장로님들이심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장로(목사, 장로)의 역할 규정
김동호목사
1. 장로교회의 위기
한국교회의 경우에도 장로교회의 병폐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장로교회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장로교회뿐만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할 것 없이 정치 스타일은 거의 장로교회와 비슷해져 있어서 장로교회의 병폐는 꼭 장로교회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교회에 해당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비단 장로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장로교 정치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목사와 장로의 역할 혼동으로 인한 갈등이고, 둘째는 당회의 전제정치라고 할 수 있다.
2. 장로는 누구인가?
첫째,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이다.
장로교회의 정치원리는 민주주의 정치가 표방하고 있는 대의정치이다.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대표로 선출되어 국민을 대표하고 대신하여 국회에서 일을 하듯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로 선출되어 당회에서 교회의 일을 대신하고 대표한다.
장로는 최소한 세례교인 30명을 대표한다. 세례교인 30명 당 1인의 장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목사와 장로는 그 성격이 다르다. 목사도 물론 교인들의 청빙에 의해 그 교회의 목사가 되지만 목사는 투표로 선임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개인적으로 응답하여 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목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장로는 개인적으로 자기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교인들의 투표 없이도 될 수 있으나 장로는 교인들의 투표가 없이는 어떤 경우에도 될 수가 없다는 점에서 목사와 구별된다.
장로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대표로 세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이다. 그러나 교인들의 대표라는 말과 교회의 대표라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인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것이 곧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장로가 교인의 대표일 수는 있으나 교회의 대표일 수는 없다는 말은 목사에 대한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전문성 문제의 연장선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장로의 직업은 목회가 아니다. 목회가 직업이 아닌 사람이 교회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요 바람직하지 않은 욕심이다. 장로는 교인의 대표요 교회의 대표는 아니다.
둘째, 장로는 목회 전문가가 아니다.
장로는 물론 목사의 시녀도 아니고 목회 조수도 아니다. 그러나 장로는 언제나 자신이 목회의 전문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목사와 동역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언제나 장로로서 정확히 지켜야할 자기의 자리와 위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장로는 목사를 목회 전문가로 인정해주고 그의 전문적인 사역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많은 교회의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장로가 교회 봉사를 직업적으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장로는 자기의 직업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 자기 직업에 뛰어난 전문가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전문 세계를 섬기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 언제나 장로직은 직업이 아니고 봉사가 되어야 한다.
셋째, 장로는 치리자이다.
민주주의에도 ‘통치’(ruling), 즉 다스림의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도 다스리는 것에 대한 말씀들이 있다.
로마서 12:8에는 ‘혹 권유하는 자면 권유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했다.
또 고린도전서 12:28에는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칼빈은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의 ‘다스리는 자’를 교회의 장로로 해석했다. 칼빈은 여기서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 또는 ‘치리하는 장로’를 구별했으며 이와 같은 정신이 장로교회 헌법의 정신이 되었고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장로들도 자신들의 치리하는 권위가 교인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다스리고 치리할 때 주장하는 자세로 교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넷째, 장로는 목사의 협력자이다.
목회는 좀 불편한 듯싶어도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해서 할 때가 가장 안전하다. 협력이 잘 안 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협력의 대상을 무시하고 혼자서 제 마음대로 목회를 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르치는 장로가 다스리는 장로의 역할까지 감당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다스리는 장로가 가르치는 장로의 역할까지 다 감당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사실을 목사와 장로는 인정해야 한다. 여기서 ‘구별’과 ‘협력’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목사와 장로는 서로 구별된 영역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함께 협력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좋은 교회를 함께 섬겨나갈 수 있다.
장로는 목사의 목회 동역자이다. 장로는 목사의 단순한 목회 협력자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목사의 목회 시녀도 아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장로들을 마치 자신의 시녀처럼 부리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성공적인 목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옳은 정신이나 자세가 아니다.
장로가 목사의 시녀가 되면 목사는 자연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타락한 교주가 될 수밖에 없다. 목사와 장로는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동역하는 관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하고 건실한 목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말씀과 행정’은 교회에서 둘 다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말씀과 행정을 놓고 볼 때 그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행정의 원칙 하에서 말씀이 전해져야 하는가?’ 아니면 ‘말씀의 원칙 하에서 행정이 시행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교회에서 말씀을 앞서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말씀을 제한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행정은 말씀을 위한 것이므로 행정이 말씀을 앞서서도 안 되고 말씀을 제한해서도 안 된다. 행정의 역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행정이 말씀을 앞서고 말씀을 제한하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장로인 목사는 이를 악용하여 자기 생각과 고집, 그리고 욕심을 말씀을 통하여 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스르는 중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그처럼 무서운 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다스리는 장로들과 교인들은 목사의 그와 같은 오류를 막으려고 할 때 조심해야 한다. 목사의 오류를 막는다고 하다가 조심성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장로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는 것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과 같은 범죄에 속한다. 그러므로 그 일에 대해서도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목사는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고 장로는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다. 다스림을 위한 가르침이냐, 가르침을 위한 다스림이냐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다스림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가르침을 위한 다스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역할 구별 속에서 장로가 목사의 협력자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다섯째, 장로는 봉사자이다.
목사도 마찬가지이지만 장로도 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는 봉사자일 뿐 교인들의 섬김을 받는 특권층은 아니다. 목사와 장로들에게 하나님께서 더 중한 역할을 맡겨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교인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면서 목사와 장로들은 점점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말은 봉사 직 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의 직분과 직위가 점점 귀족화되고 있음을 감출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선민의식에 빠지면서 잘못되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채찍을 맞았듯이 오늘날 한국교회는 목사와 장로의 선민의식 때문에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목사와 장로는 교인과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이지 섬김을 받아야 하는 특권충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장로는 ‘세상’이라는 선교지에 부름을 받은 선교사이다.
장로에게는 교회에서의 장로 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장로 개개인 가지고 있는 직업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직업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직업은 소명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교회에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교회보다 세상에 더 깊은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 안과 같고 세상은 우리 밖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을 섬기기 위해 목사를 전문적으로 부르셨고, 우리 밖을 섬기기 위해 교인들을 부르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목사가 세상을 섬기고 장로가 교회를 섬긴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가!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글은 모든 교인 등이 읽었으면 싶습니다.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