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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金)나라 서기1115년 금태조는 안동권씨후손
금나라시조 아골타는 신라김씨(김알지) 김행의 후손 지금의 안동권씨의 아들중에 김준金俊 이며 만주식으로 김함보(金函普)의 8대손이 금나라 시조 완안 아골타이다.
1636년 일본통신사 김세렴의 해사록에 김행은 경순왕의 외손이고 완안 아골타는 권행의 후예라고 기록되어있다.
베이징의 수도도서관에 고문헌자료 송막기문에 여진추장은 신라김씨로 적혀있다.
금나라정사 금서에도 김함보의 9대손이 (아골타) 금나라 시조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사에는 금나라시조 아골타는 안동권씨 권행의 후손이라고 적혀있다.
청나라 역사서 흠정만주원류고 에서도 금나라는 김씨성을 따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후금(1616년)의 누루하치 청나라(1636년) 시조 홍타이 의 성씨도 만주어 아이신줘러(愛新覺羅) 김씨 즉 안동권씨 이다.
김행이 왕건으로부터 권씨를 하사받을때 삼태사 중에서 나이가 많았고 아들 인행 외에도 아들이 여럿 있었을거라 짐작되고 손자 책, 윤, 외에도 있으리라고 본다.
만주로 떠난 자손은 권행의 아들 중에서 이름이 준 이며 만주식으로 완안함보 라고 추정한다.
완안아골타가 금나라 를 1115년에 건국하였다.
현재 발견된 고려시대 (권정평, 권적) 묘지명에는 시조로부터 4대손 부터 표시되어 있다.
개성에서 발견된 권정평의 (1084년 ~ 1160년) 묘지명(진주 토지박물관소장)을 보면 증조부4대손 호장 한렴이고 조부 5대손 호장 융이고 부는 6대손 호장동정으로 추봉정조 경이다.
권정평은 7대손이고 부인은 손복후의 딸이며 8대손(아들2 딸1) 장남은 안국이며 차남은 정국이다. 딸은 이원열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으나 부부가 권군 보다 면저 세상을 하직하였다.
대금 정풍 오년 정월28일(의종14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하줄임
같은 동시대 인물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권적(1094 ~ 1146)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소장)
에는 4대손 균한 5대손 좌섬 6대손 덕여 7대손 적 8대손(아들5 딸4) 대방, 발진, 돈례, 돈신,가□,장녀(최윤인), 차녀(황보서), 나머지 두딸은 아직 비녀를 꽂지 않았다. 이하줄임
1476년 안동에서 발행된 안동권씨족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이며 930년 안동권씨역사로
부터 546년 후에 성화보를 발간하면서 그사이 자손을 파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조공파는
1605년 을사보에 가첩에 의하여 한겸으로 기록되었다가 후일에 겸한으로 수정하였으나 권정평묘지명(1085 ~ 1160) 에는 한렴으로 기록 되어있다.
정조공파종회에서는 족보에 4대손 겸한 을 한렴으로 5대손 이융 을 융으로 6대손 안굉 을 경으로 추정하고 7대손 정평 8대손 안국 정국은 유추할 기록은 없으나 학자들의 고증을 거쳐 정조공파 직계로 편입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고려초기 권행의 또 다른 아들 중에서 망해버린 천년신라를 재건하거나 망국의 한을 달래며 멀리 만주 땅으로 가서 노력 했을 것으로 본다.
(글쓴이 : 2023년 9월 21일 안동권씨 정조공파종회 회장 권순복)
아래글은 kbs역사스폐셜 만주대탐사 2편 아골타는 신라인의 후예였다 에서 스크랩하였습니다.
◼︎ 금태조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
중원에서 최초로 한족을 밀어낸 금태조 아골타, 그의 시조는 놀랍게도 신라인 함보였다. 이것은 전설이나 야사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와 금 건국 시 송나라에서 씌어진 송막기문에 명확히 나오고 있다.“금시조 이름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온 신분이다”(금사본기 제1권, 세기)“여진의 추장은 신라인이고 완안씨는 중국말 왕과같다” (송막기문)고려에서 온 신분이며 신라인인 금시조. 아골타의 출생년도를 고려해 계산해보면 금시조 함보가 여진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말, 고려 초다. 당시 신라와 고려의 왕권교체기였던 한반도의 사정을 생각하면 두 사서는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골타의 조상 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
◼︎ 함보, 그는 누구인가?
동명해사록에 함보의 9대손 아골타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김부(경순왕敬順王)가 비록 항복하여 고려왕이 합병하였으나 김부의 외손 완안아골타는 곧 권행의 후예로서 능히 중국을 갈라 다스려 백년동안 대를 이었으니..." (동명해사록 1636년)조선의 유학자 김세렴은 여진족의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며 조선최고가문 권행의 후예라고 하고 있다.그런데 권행의 본래 성은 金(김)씨였다.김행의 아들이며 경순왕의 외손인 금의 시조.당시 족내혼을 했던 신라왕실의 관습을 고려하면,그의 성이 金(덧말:김)이며 신라의 후예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동명해사록의 금시조와 금사의 함보는 과연 동일인인가?
◼︎ 신라 후예인 왕족과 발해 후손의 왕비족이 세운 나라, 금 함보를 시조로 둔 금 황실은 발해인을 왕비로 맞는다. 금나라의 성군 세종의 어머니, 4대 황제 해릉왕의 어머니는 모두 발해 여인이었다. 또한 아골타는 발해인을 신뢰하여 발해유민 장호를 새로운 수도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한다. 발해는 대제국을 경영해본 경험이 있었다.금나라는 이런 발해의 경험을 이용해 국가체제를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
◼︎ 청 황실의 성씨도 김씨였다 금 멸망 후 1606년, 여진은 다시 중원을 장악했다.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이다. 그런데 청나라 황제 성은 아이신 줘러 였다. 아이신이란 금, 줘러란 겨레부족 씨 등을 뜻한다. 결국 금 부족, 김씨들이라는 뜻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그의 후예인 금 황실, 청 황실까지 그들은 모두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던 것이다.
◼︎ 만주역사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금나라, 청나라로 이어지는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한족의 영토,중원을 만주대륙에 합병하여 오늘의 중국을 완성한 여진족, 그들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국수주의적 우월감을 주장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반역사적인 동북공정 논리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우리 역사를 지켜내어 향후 동아시아와 한반도 지역에 평화의 논리적 근거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신역사스페셜 9회 – 만주대탐사 2편, 금태조 아골타 신라인의 후예였다 (2009.9.5.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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