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종각에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굳건히 세워지는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실로 동학농민혁명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그 정신을 이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광경이며 동학농민혁명 124년의 역사가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기념비적인 대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흘 후 우리는 피맺힌 남북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굳게 손을 맞잡고 한반도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남과 북의 국민, 인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언론 그리고 눈과 귀가 열린 모든 세계시민들이 그 장면을 보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곳 황토현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고 후손 만대에 길이 계승해 나갈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적인 정승지입니다. 오직 통치의 대상이기만 하던 이 땅의 백성들은 1860년 창도된 동학을 만나 사람이 곧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동학농민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횃불로 1894년 5월 11일 이곳 황토현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학농민군으로 거둡났습니다.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황토현에서의 전승은 전란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의 전국 팔도를 풍미하였습니다.” 는 동학 – 천도교 이정희 교령은 전봉준 장군을 떠올리면서 절규하는 것이었다.
전주성 무혈입성으로 1차적인 혁명을 완수하고, 국제정세를 관망하던 동학농민군은 예상치못한 일본의 한반도 침탈에 결연히 맞서 궐기하였던 제2차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금치에서 처절한 패전으로 말미암아 동학농민혁명의 거대한 불길은 시산혈해의 희생을 치르며 미완의 혁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 장군의 죽음을 대하면서 지금도 하늘에 돌고있는 전장군의 원한을 만나 보았습니다.
장군님은 일제의 일본군과 조선관군에 의해서 무참하게 사형을 당하는 안타까움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일그러진 우리였습니다!
전/ 당신은 누구시오?
이장군/ 예 저는 미군과 남조선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빨치산 이현상입니다.
전/ 아니 당신은 미완의 통일혁명의 한을 안고 살았던 자랑스런 남부군 빨치산 총사령관 - 통일혁명군 이현상이란 말이오. 현대사의 외로운 사상의 방낭자 이현상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이/ 그렇습니다. 장군님은 일본군과 그의 앞잡이 조선관군에 의해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전봉군 장군님은 미군과 그의 앞잡이에 의해서 처절하게 죽음을... 우리 둘이는 이번 판문점 선언을 통해 미완의 혁명이 드디어 성공을 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지금 조국은 외세에[ 의해서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의 총칼을 들이대고 있는 한심한 바보들의 꼭두각시의 놀음에 장단을 치고 있습니다.
전/ 그렇지 당신은 미군에 의해서 나는 일본군에 의해서... 아~~~ 우리는...
이/ 저는 장군님의 혼을 떠올리면서 빨치산운동으로 조국의 분단을 막겠다고 다했지만 미완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4.27 판문점 선언으로 통일이 될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전/ 그렇지요. 나도 확신합니다. 곧 통일이 될 것임을. 미국은 김정은 장군에게서 두 손을 들고 이땅에서 물러나고 말것입니다. 우리 둘의 한을 결국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장군이 풀어주고 말것입니다.
이/ 오늘은 전장군님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갖고 싶습니다.
전/ 1894년에 내가 살고 있는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부임했지, 그 자는 전형적인 부패 관료로서 봉건주의적인 수탈의 달일이었지. 그리고 당시는 알겠지만 농민사회였는데 그 농민들을 개, 돼지처럼 여기면서 취임하자 그래도 희망을 갖고 살던 농민들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지.
이/ 어떤 일로?
전/ 1894년 겨울은 무척이나 추운 겨울이었네. 당시의 겨울은 지금의 겨울과 달리 무척이나 추웠는데 농민들을 동원해서는 과거에 있던 뚝을 놔두고는 그 앞에 신보하류를 만든다면서 우리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다시 뚝을 만들었지, 우리는 뼈빠지게 일을 하였지. 엄처난 세금을 안내게 해준다는 것이었지. 그러나 그 조병직 군수는 자기에게 주어진 군수직 기간에 더 많은 쌀을 수탈하기 위해서임을 알면서도 우리 농민들은 나가서 언 땅을 일구어 신보를 만들었네.
이/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전/ 그런데 우리의 꿈은 사라지고 11월에 부담할 쌀로의 세금을 보니 과거와 같은 것이었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겠다는 통보이었네. 아니 그렇지 않은가? 겨울을 뼈빠지게 일을 하고 나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가족들이 먹고 살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이었네.
이/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우리는 보세감면을 고부군에 진정을 하였지, 그랬는데 오히려 진정의 반영은 커녕 접수코자 갔던 우리 농민들을 잡아서 개, 돼지처럼 때려서 내보내고 말았지.
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다음해인 1894년 1월 10 우리 농민들이 모여 고부관아 점거하고 우리가 만든 신보를 파괴하고 말았어라.
이/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 한양에 있는 조정에서는 2월 15일 고부군수 조병갑을 파직하고 말았어라.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지? 해서 우리는 다음달인 3월 21일 농민의 권한을 되찾기 위한 동학농민군 백산대회를 가졌지.
이/ 백산대회는 뭣인지요?
전/ 우리 고부군의 중심에 아주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으로 농민들은 모였지. 엄청 많은 농민들이 죽창과 낫과 곡괭이를 들로 모였어라.
이/ 백산의 白은 하얗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전/그렇지. 당신의 우리 농민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죽창을 들었지. 해서 우리의 뜻을 궐기하면서 좀더 내공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일어서서 탐관오리를 엄정할 것과 횡포한 부호를 엄징할 것을 다짐하엿지? 이때 일어서면 하냔 옷의 흰산이 되고 앉으면 주창만의 나무산이 되어 백산이라고 하였지.
이/ 대단하십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전/ 우리는 당시의 신분은 거의가 노비들이었음을 알는지? 해서 우리는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나아가 청상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의 동학혁명군의 12개조 폐정개혁안을 만들었어라.
이/ 그 12개조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전/ 하나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둘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정한다.
셋 횡포한 부호를 엄정한다.
넷 불랑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다섯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여섯 7종의 천인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일곱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여덟 무명의 잡세는 일제 폐지한다.
아홉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인재를 등용한다.
엷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열하나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와의 것은 무효로 한다.
열둘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이/ 이 12개조 폐정개혁안의 공감으로 우리 동학농민군의 정신력은 대단했겠습니다.
전/ 그렇지 이 개혁안에 대한 우리 농민은 드디어 그해 4월 7일 황토현에서 대승하였네.
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승한 것인지요?
전/ 4월 27일 우리 농민군은 전주성을 무혈로 입성하였지.
이/ 그 다음은 어찌됩니까?
전/ 그러면 조정에서는 우리 농민군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어 새로운 농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한심한 것이었지
이/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전/ 5월 5일 청나라 군사가 아산에 착륙하는 일이 벌어졌어라.
이/ 다음은요?
전/ 그러니까 이어서 5월 6일 일본군인들이 인천을 상륙하는 것이었지
이/ 다음은요?
전/ 잘알겠지만 그리하여 7월 1일 청일전쟁이 펼쳐지면서 내가 이끄는 우리의 동학농민군을 일본군과 관군은 조여들어오는 것이었지.
이/ 그리하여 농민군은 어찌 하엿는지요?
전/ 우리는 9월 12일 일본군에 항거하여 삼례에 집결하여 재봉기를 시도했지
이/ 그래서 다음은요?
전/ 급기야 우리 농민군은 11월 9일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최후의 전투를 펼치는데 이 우금치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말았네. 우리 농민군들은 조선 천지 어느 한곳 발붙일 데가 없었지. 공주 우금고개의 패배가 뼈에 사무치네. 관군과 일본군의 추적은 사냥개처럼 질겼지. 나 전봉준(1855~1895)은 전주 모악산 아래 원평에서 흩어진 농민군 1만 명을 다시 불러 모았지. 그리고 그해 12월 21일 조선-일본군 300명과 맞붙었지. 하지만 싸움이 되지 않았지. 구미란 논배미에 시체가 즐비했지. 사람들은 후에 그곳을 ‘송장배비’라고 붙였지. 나는 이틀 뒤인 12월 23일 태인에서 남은 8천명으로 최후의 일전을 벌였지. 하지만 마찬가지였지. 죽창과 약간의 조총과 화승총으로 일본군의 기관총을 막을 순 없었지.
이/ 그 다음은 어찌 되었습니까?
전/ 나는 장사꾼 차림으로 지금의 내장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입암산성으로 스며들었지. 나의 목에는 ‘군수직과 현상금 1000냥’이 걸려있었지. 그 입안산성엔 관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네. 하지만 수비대장 이종록은 나 전봉준을 감쌌지. 오히려 추격대가 포위망을 조여 오자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이종록은 이로 인해 후에 삭탈관직을 당했어라. 나는 12월 28일 다시 옛 부하였던 순창 쌍치 피노리의 김경천 집을 찾았네. 피노리는 조선시대 당파전쟁중에 노론들이 피했던 곳이라 이름이 그렇게 붙었지.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김경천은 그의 대장을 밀고 했고 나는 붙잡혔지. 그 하루 전인 12월 27일 김개남도 피노리에서 8km떨어진 정읍 산내 종성리에서 친구의 밀고로 붙잡혔지.
이/ 아~~
전/ 다음해인 1895년 3월 30일 나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이 서울 종각의 네거리에서 사형되고 말았네.
이/ 그때 장군님은 일본군의 조사를 받으면서 유명한 말씀을 하셧지요?
전/ 그러네. 나를 피곤하게 나와 부하들을 괴롭히는 것이었지 해서 나는 이런 말을 하엿던 것으로 기억하네.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라 일을 바로 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는 나를 죽이는 것뿐이요 다른 말을 묻지 마라”고.
추신/ 한편 이현상의 수첩에는 이런 시가 적혀있었다.
‘지리산에 풍운이 일고 기러기 떼 움직이네.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 왔으니
뜻은 언제나 조국을 걱정하지 않은 적 없어
가슴엔 갑옷덮어 마음 속엔 피가 솟구치네‘
한편 강증산(1871~1909)이란 종교인은 해마다 전봉준의 한을 풀어주는 굿 – 해원공사를 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