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종교개혁의 성공 비결들
1)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
로마 교회가 세운 대학이 16세기 종교개혁의 발원지가 되었듯,
13세기의 종교개혁에는 샤를마뉴에 의해서 시작된 학교 건립이 중요한 자극제 구실을 했다.
학교들이 민중들의 지적 능력을 상승시켜 르네상스 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민중들이 무지로 인하여 소문이나 거짓 가르침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시대를 평가할 수 있는 시각을 갖고 있었던 점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계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인지력의 상승에 걸맞게 대중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 주어졌고,
설교자들이 상통하는 대중의 언어로 설교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성경을 바로 알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개혁 운동이 일부 지식층 중심이 아닌 대중 운동으로 번졌기 때문이다.
대중들이 사제들과 수도사들의 절대적 영향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자.
13세기 초반 도미니크회와 프란체스코회는 앞다투어 ‘이단을 억제하는 법령’을 만들었고,
적절하게 훈련받은 대중 설교자들을 내보내기 시작했으며,
로마 교회는 그들을 효과적이고도 적절한 곳에 배치시키고자 전략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을 제대로 알기 지삭한 대중들에게 그런 전략은 더 이상 큰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박해자들로 표변하였고, 고문과 지하 감옥 형, 칼과 불로써 처벌하는 등
다양한 핍박의 기법과 방식을 동원했다.
1233년 한 작가는 “독일의 모든 지역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이교도들이 화형을 당하고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비밀리에 활동을 계속하거나 그들을 친구로 여겨주는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남부 프랑스의 영주들은 교황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 영내의 거주자들을 통하여 얻는 수익 때문에 적극적으로 박해하지 않았으므로’
교황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교황 가운데 가장 편협하며 야만적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단 사냥을 독려하며
특사들을 각 권력자들에게 파견했다. 그럼에도 개혁자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레고리우스 9세는 1233년경에 종교재판소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박해 받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그 참혹함을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다.
첫 법정은 툴루즈에 주둔했다.
헤아릴 수 없는 이름 모를 개혁자들이 일어났다.
한 지역에서 이단으로 박해를 받으면 다른 지역으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켰다.
그들이 머물렀던 곳은 주로, 접근이 쉽지 않은 깊은 산악 지대나 한적한 계곡이었다.
피난처가 될 만한 곳으로 숨어 다니면서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럽 전 지역에서 풍성한 열매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별히 독일 모든 지역을 넘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고,
심지어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먼 동쪽에서도 복음 사역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개혁자들은 박해가 심한 쾰른에서 밀라노에 이르는 거리를
어렵다 하지 않고 이동하여 믿음의 형제들을 찾았으며,
그들의 집에 숙박하면서 끈끈한 교류를 지속하였으므로
독일에서와 동일한 믿음을 가진 하나의 교회가 이탈리아에서도 이루어지고 지속될 수가 있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531-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