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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원주의의 제 이론과 개혁주의적 평가
신경규 교수
고신대학교
I. 종교다원화 현상
1. 현대의 종교다원화 현상
세계의 종교사를 통해 다양한 종교가 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늘 다종교적 상황 아래서 살아 왔다. 그러면서 때와 장소에 따라 그들 곁에서 존재하고 성장하는 다른 종교 전통들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오늘날의 다원화 사회에 이르러서는 타종교들과 같이 기독교의 종교현상 역시 하나의 독특한 형태를 지닌 다양한 종교흐름 중의 하나라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외적으로 진화론, 계몽주의 등 다양한 철학적 사조의 등장하게 되고, 합리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구조의 복잡화와 다원화 현상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사상적 사조가 기독교 내에 흘러들어 오면서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사조는 성경을 현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사상에 근거하여 인본위적으로 비평하는 성경비평론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려 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인본주의적 성향이 기독교 신학 내부에서 강하게 일어나게 됨으로써 기독교의 진리를 상대화시키려는 시도들이 거세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제한적으로 존재하던 기독교에 대한 반발과는 달리 전체 사회 풍토와 사상적 흐름을 편승한 비기독교세력의 총체적이고도 거대한 힘으로 형성되어 기독교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대항하면서 밀려들어오고 있다.
특히 비합리적 초월성을 근거로 한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사조는 모든 진리를 상대화시키려 하고 있고, 따라서 절대적 진리를 고집하는 기독교에 저항하여 인도의 힌두교, 중국의 도교사상 등을 수용하여 수많은 종교적 운동들이 현대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대의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에 대하여 오직 하나이자 유일한 것이 아닌 여러 것 중의 하나이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울러 각 계층과 집단 간의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종교간의 대화도 시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다원주의 세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아울러 타종교와 대화가 가능한 것인지, 또 가능하다면 그 범위가 어떠한지, 타종교와의 대화가 기독교의 절대성이나 특수성을 파괴하지는 않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나게 된다.
이와 같은 종교다원주의 상황 아래서 본 논문은 종교다원주의의 의의, 발생원인, 그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며 이에 대한 기독교 전통에 입각한 개혁주의의 입장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중심은 그 출발점인 예수 그리스도에 있으므로 다양한 신학적인 주장들도 최종적으로 기독론을 기준으로 고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를 평가하는 데에도 동일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 이라는 니케아-칼세톤 신경의 전제 아래 전개될 것이다.
2. 종교다원화 현상의 원인
전호진 교수는 종교다원화 현상의 원인을 다음 6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서구 사회의 변화, 서구인들의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 제3세계의 반 서구감정, WCC의 종교간 대화, 비 서구세계의 문화적 정체감 회복, 현대의 상대주의와 민주화. 또한 서정운 교수는 종교다원주의의 원인을 생활환경의 급변, Mass Media의 발달, 인문주의 사상의 발달, 타종교들의 부흥과 선교, 인류공존과 일치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위한 주장과 염원, 서구기독교 선교의 과오에 대한 도전, 기독교 선교열의 약화 등을 들고 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종교다원주의의 원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대의 일반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
a. 서구사회의 변화 - 기독교문명에 기초한 서구는 이제 과거에 향유하였던 지배력을 상실하고 기술과 경제면에서 미국, 아시아에 그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 여기서 기독교의 절대성도 포기하는 입장에 있다. 많은 서구인들은 오히려 동양의 신비종교에 영적가치를 더 부여하고 있다.
b. 생활환경의 급변 - 교통과 통신수단의 발달, 사람들의 빈번한 여행 및 교류로 인하여 종교인들이 사회에 섞여 사는 생활이 시작되고 세계도처에 교회, 성당, 회교, 불교, 힌두교사원 등이 공존하게 되어 어디서나 다른 종교의 존재를 쉽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c. Mass Media의 발달 - 신문, 잡지, Radio, TV, Video 산업의 발달로 보급으로 전세계 다른 종교들의 교훈이나 생활과 특징을 서로 알 수 있게 되었고, 도서출판의 발달로 타종교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d. 인문주의 사상의 발달 - 인문주의 사상의 발달과정 속에서 문화와 종교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어 왔는데 현대에 와서는 많은 지식인들이 합리성을 내세워 그 절대성을 거부하고 상대화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시공과 인종, 문화를 초월하여 절대적인 진리로 주장하는데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e. 인류공존과 일치의 필요성과 타당성을 위한 주장과 염원 - 현 시대가 안고 있는 인류생존과 문화 보존에 대한 위협으로 많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로 하여금 인류의 평화적 공존과 연합의 필요성, 당위성을 느끼게 하고 그 시급성을 주장하게 하고 있다. 환경오염과 핵전쟁 등 인류존망의 위기에 대해 인류의 구원과 복지를 추구한다는 종교들이 서로 다른 견해로 반목한다면 종교 본연의 정신이나 교훈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f. 현대의 상대주의와 민주화 - 현대 철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은 진리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상대성을 강조한다. 또한 서구적 민주주의는 가치관과 윤리체계에서 절대를 부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적 기초는 현재의 제도적 교회가 신약의 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 현재의 기독교를 부정하고 상대화한다는 점에서 현대서구의 가치관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2) 서구 기독교 조류의 변화
a. WCC의 종교간 대화 - WCC는 1970년부터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하여 “대화의 신학” (theology of dialogue)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도보다는 타종교와의 평화적 공존을, 나아가 세계평화와 질서라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세속적 대화로 발전하면서, 급기야 타종교에서의 구원가능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양보하고 말았다.
b. 서구 기독교 선교의 과오에 대한 도전(역습) - Pannikkar는 서구 기독교선교가 끼친 과오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선교사들은 자신들만 의롭다는 종교적, 도덕적 의인의식을 가졌었다. (2) 기독교선교는 정치적 제국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3) 선교사들의 서구인 우월감이 현장에서 많은 부정적인 반응을 조성하게 하였다. (4) 기독교의 상이한 교파들의 경쟁과 다른 교파에 대한 비난이 선교사들의 사역을 저해하였다. (5) 서구사회의 기독교신앙약화가 기독교의 문제성을 드러내고 있다.
c. 기독교 선교열의 약화 - 서구 기독교가 상당 기간 자기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겪고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의 사활이 걸린 계시에 대한 확신에 대한 회의와 반론제기가 계속됨으로써 스스로의 신앙을 약화시키려는 자유주의신학의 도전이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d. 서구인들의 동양종교에 대한 관심 -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실망을 느껴 동양종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신학자들 중에서도 동양종교에서 진리와 가치를 ?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종교다원주의를 재촉하는 요인이 되었다.
3) 제3세계의 상황 변화
a. 서구 및 제3세계의 반 서구감정 - 서구의 많은 백인 지식인들 중에는 서구의 식민주의와 양차 대전에 대한 강한 자책감으로 기독교의 선교가 서구 우월주의와 패권주의의 상징이므로 더 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폴 니터(Paul Knitter)는 이제 전통적 서구 기독교가 현대인의 마음과 사상에 말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에서 구원을 위한 기독교선교는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b. 비 서구세계의 문화적 정체감 회복 - 비 서구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서구의 식민주의로 말미암은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침투로 문화적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어 자신들의 문화 유산을 ?자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복원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고, 자신들의 종교는 더 이상 우상이나 미신이 아닌 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동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구종교의 배척과 자신들의 종교의 복원은 종교의 보편구원사상으로 연결되었다.
c. 타종교들의 부흥과 선교 - 제3세계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정치적 독립을 성취한 이후 전통문화와 종교의 부흥이 일어나 이들을 국교화하고 민족정신으로 응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 종교는 배타적이며 선교적인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이슬람교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II. 종교다원주의
1. 종교다원주의의 의의
현대사회를 흔히 ‘다원화 사회’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사회와 가치의 규범뿐만 아니라 사회의 조직과 구조에 있어서도 다원화(pluralization)가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화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같은 기준으로 평가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원화는 기술적이며 객관적인 문제이며, 종교다원주의는 타종교에 있어서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신학적 가치판단이기 때문이다. 원래 다원화란 사회적으로 볼 때 개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적, 의식적 근원이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적 상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란 “다른 종교집단들이 경쟁적 상황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이라고 Peter Berger는 말하고 있다. 전호진 박사는 종교다원주의를 “현시대는 모든 종교가 다양하게 공존하는 종교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어느 특정 종교가 절대적 진리나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는, 종교에서의 가치중립적 태도”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란 문화적 상황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여러 상이한 구원의 종교적 체계가 있다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 즉 절대적 종교란 있을 수 없고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다.
2. 종교다원주의의 신학
종교다원주의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론을 기독론의 다른 해석, 신 중심의 만인구원론, 그리고 그 특유한 타종교관으로 구분된다. 여기서는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 각 항목에 대표되는 신학자들의 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문화와 기독론의 다른 해석
종교다원주의와 전통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유일성’ 문제에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 전통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데에 반하여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의 견해를 관철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은 타문화와의 만남에서 태동, 발전하였는데, 복음주의가 문화와의 단절을 말한다면 종교다원주의는 문화와의 연속성을 강조하여 문화에서 그리스도를 ?을 것을 촉구한다.
a. 칼 라너 (Karl Rahner)
라너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긍정하려는 조직적 노력이다. 제2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 수개월 전, 라너는 바바리아에서 ‘기독교와 비기독교 종교’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여기서 그의 신학의 근간이 되는 네 가지 명제들을 밝히고 있다. (1) 기독교는 스스로 그것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절대 종교라고 이해하고 있고, 따라서 타종교들을 그것과 동등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2) 복음이 개인의 역사적 상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비기독교적 종교는 그 개인을 위해 하나님을 아는 자연적 지식뿐만 아니라 초자연적 은혜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다. (3)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타종교인들을 단순히 비기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s)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야 한다. (4) 교회는 스스로 구원을 독점한 배타적인 배타적 공동체로 생각지 말고 타종교에도 감추어진 실체로 존재하는 기독교적 소망의 역사적 파수병이요 명백한 표현으로 간주해야 한다. 첫 번째 명제는 기독교가 자존적 절대성에 대한 이해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 명제는 비기독교 종교들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온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어서 타종교에서도 하나님의 특수계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명제는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 (Anony- mous Christians)으로 여겨야만 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교회가 스스로 구원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배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다른 종교에 숨어있는 실재로서 나타나 있는 기독교적 희망의 명백한 표현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타종교에 있는 신의 실재를 밝히는 데에 기독교가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이므로 보편구원론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라너의 입장에 대해 많은 비판이 가해져 왔다. 한스 큉(Hans Küng)은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개념은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불쾌한 말이며, 세계 종교들의 도전에 직면(confrontation: 대항)함 없이 대화를 먼저 자청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에 대해 가해야 할 중요한 비판은 그가 성경의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타협시켰다는 것이다.
b. 한스 큉(Hans Küng)
그는 구원을 세계종교들 가운데 있는 “일반적인 구원”의 방식과 교회 내에 있는 “특별한 구원”의 방식으로 구분한다. 큉은 “인간은 그의 역사적 상황 가운데 그에게 유용한 종교 내에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것은 그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 종교 내에서 감추어진 하나님은 이미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실존적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직면할 때까지는 모두 그러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큉은 다른 종교의 약점과 장점을 동시에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최고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올바른 인간다운 방식으로 살게끔 해 주는 참 사람으로서의 ‘역사적 예수’이다. 큉은 나사렛 예수가 교리에 얽매이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하나님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커져 가는 헬라적 영향 하에 있던 교회들뿐이었으며, 결국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의 차이는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유일한 중보자로 믿고 헌신하느냐 않느냐의 차이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결국 이것은 Schleiermacher나 Ritschl의 기독론과 유사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이며 칼세톤 신조상의 기독론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신 중심의 만인구원론
종교다원주의의 가장 중심적이고 공통적인 사상은 기독교외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이다. 보편주의로도 표현되는 만인구원사상은 불신자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힉(Hick)과 니터(Knitter)는, 기독교가 지금까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배타주의에 빠져 있었고, 신에 도달하는 길도 하나뿐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기독교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신 중심으로 모든 종교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a. 존 힉(John Hick)
존 힉(John Hick)은 영국의 종교철학자이자 신학자로서 본래 개혁교회 출신의 복음주의 성향의 신학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오고 있다. 그는 종교적 사고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선언하였는데, 이 혁명이란, 기독교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적 헌신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견해로부터 모든 종교적 신념과 실천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적 실재(one divine reality)가 있으며, 모든 주요 종교들은 이 실재에 대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제약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는 다원론적인 견해에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바가드-기타’(Bhagauad-Gita)에 나오는 ”인간이 어떠한 길을 택하든지 그것은 나에게로 이끄는 길이다“라는 구절을 그의 표제로 택한다. 그는 또한 ”우리는 신앙의 우주가 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혹은 어떤 다른 종교를 중심으로 아님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는 빛과 생명의 창조적 원천인 태양이며, 모든 종교는 그들 나름의 상이한 방식으로 그를 성찰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종교임을 거부하고 신 중심으로 볼 때 모든 종교가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 중의 하나라고 강변하고 있다. 힉은 자신의 신학에 칸트(Kant)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바, 하나님을 인간의 경험에 의해 구조화된 선험적 관념으로 본다. 따라서 힉은 야웨, 알라, 순다야, 브라만, 니르바나는 모두 ”실제의 원래적 현현“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힉의 신은 철학적 관념으로 만들어진 신이지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러한 신은 인간의 조작에 의하여 얼마든지 변화하고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b. 폴 니터 (Paul Knitter)
폴 니터(Paul Knitter)는 그의 신 중심적 모델을 “관계적 유일회성”(relational uniqueness)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바, 특히 그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진화하고 과정적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존재(being)의 상태가 아니라 생성(becoming)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결되지 않은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도 종교의 상호관계성에 입각하여 재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즉, 니터에 의하면, ‘예수는 유일회적’이라는 전통적 기독교의 주장은 다른 종교적 인물들과 관계하는 경우에는 ‘한정된 유일회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 중심적 기독론을 예수에 대한 신약성경 내에 복음의 본래적 의미에 대립되지 않는 비규범적 이해에서 전개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신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예수는 타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자와 다를 바 없는 기독교적 구원자에 지나지 않고 이것은 결코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니터 역시 기독교 고유의 기독론을 제거하고 신중심의 신학적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타종교를 인정하자는 것으로 이는 결국 기독교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특유한 타종교관 - 대화를 통한 접근 방법(Dialogical Approaches)
비록 기독교 신학자들이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했지만 그들의 종교관이 패러다임 전환(Pradigm Shift)을 할만큼 획기적인 것은 다른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타종교관과 전적으로 사상을 달리 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 종교신학이나 종교관를 논한 신학자들은 타종교에 대하여 상당히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더라도 기독교의 유일성이나 우월성을 전제로 하였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유일회성을 부정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는 점에 종교다원주의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a. 라이문도 파니카 (Raimundo Pannikar)
파니카(Pannikar)는 20세기 초 힌두교도인 아버지와 로마 카톨릭교도인 스페인계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카톨릭 사제가 되어 수년간 인도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인도에서 사역 경험을 기초로 모든 종교들은 “순수하게 초월적인 것만도, 순수하게 내재적인 것만도 아닌 그 신비를 풍요하게 하고있다”고 규정한다. 그는 종교들 사이에 다양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의 ‘범세계적 일치운동을 주창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신비에 대한 각각의 파악과 또한 그에 의한 삶을 심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전통적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을 독점하고 있다는 태도를 버려야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종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거나 혹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우월하다고 전제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보편적 그리스도“와 ”특수한 예수“ 사이의 구별을 그리스도의 유일회성과 보편성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로 성육신 하였다는 것은 긍정하나 그 성육신이 예수 안에서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최종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발생하였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그리스도는 예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성육신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철저히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성경해석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보편적 존재가능성을 무기로 들고 일어선다. 즉 타종교의 여러 대표적 인물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기독교의 유일성을 송두리째 흔들려 하고 있다.
b. 스탠리 스마르타 (Stanley J. Samartha)
대화를 통한 접근방법을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 체계를 이룬 사람이 바로 스탠리 스마르타(Stanley J. Samartha)이다. 그는 인도 출신 남인도 장로교회의 장로로서 우리시대의 요청으로서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여 왔다. 스마르타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기반에서 벗어나 신 중심적인 토대에서 대화에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도 아니고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적 형태로서의 기독교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할 진정한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신을 드러내심으로 우리를 ‘우리들의 특수성‘이라는 속박에서 해방시켜 더욱 더 큰 공동체에 속한 우리 이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화를 “우리 자신의 유산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이웃의 정신적인 유산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시도”로 정의한다. 스마르타는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인에게 요구되어 지는 것은 대화의 방법이지 “신학적으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마르타는 파니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절대적 궁극성과 보편적 규범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스도의 궁극성을 제거하고 신중심의 대화만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의 타종교관 -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제 반응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나는 바, 배제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다원주의는 배제주의를 제외한 포괄주의와 다원주의의 제 견해를 일컫는다.
1) 배제주의(exclusivism)
배제주의는 참된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는 기독교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으로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가장 비타협적이고 불 관용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규범성, 궁극성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으로서 “기독교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종래의 개신교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입장이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근본주의자들로부터 칼 바르트(Karl Barth)와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신학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 입장은 한 마디로 말해, “참된 종교는 기독교 하나뿐이며, 나머지 종교는 오류”라고 보는 입장이다. 헨드릭 크레머(Hendrick Kraemer)는 "기독교의 계시는 모든 존재를 이해하려는 많은 인간의 노력을 대치하여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기록이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진리이고, 마귀적이고 죄적인 부조화를 이룬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으로 다른 종교적인 교훈과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고 하였다. 그는 일반 종교와 복음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종교는 인간의 의를 주장하는데 반하여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가르친다고 말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Frankfurt Declaration)과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요지는 기독교를 이해하고 다른 종교들을 평가하는 제1차 적인 창조의 틀은 오직 성경이라는 것, 구원은 단 한 번, 영원히 인류를 위해서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십자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오작 신앙 안에서 참여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비기독교 종교들과 세계관들도 기독교 신앙과 유사한 구원의 길이라는 주장은 거짓된 교훈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잔언약에서는 프랑크푸르트선언과 마찬가지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그리고 그에 따른 복음주의의 절박한 요청 등을 강하게 재확인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신인이며, 신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도 똑 같이 말한다고 하는 것을 함축하는 일종의 절충주의나 대화“를 일체 거부하는 것이다.
2) 포괄주의(inclusivism)
이 입장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그런데 그 구원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신비한 방법으로 다른 종교에도 현존하며 활동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도 진실하게 신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들의 과오로 인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지식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진리를 알 수 없었으나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윌프레드 스미스(Wilfred C. Smith)는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나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이나 우리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anguish)으로 구원받은 것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어떻게 취급하시며 결정하실 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인 단안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Smith는 하나님은 그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이고 교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어떤 방법으로라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신다고 믿기 때문에 결국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을 주장한 칼 라너(Karl Rahner)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은총과 그것에 대한 명백하고도 완전한 기준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동시에 수용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는 우주적이며 모든 곳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과 활동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타 문화권 속에 태어나서 복음을 접할 기화가 없이 사는 사람들은 그 문화권 속에서 신앙할 수 있는 종교를 믿음으로 기독교 문화권의 기독교인과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신의 은총과 접한 개인은 다른 종교의 성원인 익명의 그리스도인보다 구원의 기회다 더 많다고 말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월성을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분수령으로 하여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교회중심주의와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를 포기하고 타종교들과 교회의 관계성을 주장하는 포괄주의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 입장에 속한 학자로는 칼 라너(Karl Rahner), 존 콥(John B. Cobb), 볼프하르트 판넨버그(Wolfhart Pannenberg), 한스 큉(Hans Küng), 폴 틸리히(Paul Tillich) 등을 들 수 있다.
포괄주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복음도 손상시키고 다른 종교로부터 환영받지도 못하는 모호가 입장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들의 무의식중에 모순을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공격하여 기독교 복음의 무용성(無用性)을 주장하면서도 익명의 그리스도를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서정운 교수는 포괄주의에 대하여 “[포괄주의는] 기독교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기독교의 자살을 기도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3) 다원주의(pluralism)
다원주의는 포괄주의의 논리적 모호성을 극복하고 전통적인 그리스도 중심론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는 대표적인 신학적 경향이 다원주의이다. 다원주의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을 떠나서 모든 다른 종교의 타당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배경에는 결국 기독교가 더 이상 독점적인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계시나 인간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전통적인 종교신학이 혁명적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며 신학적 자기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독점적 유일성보다는 상대적 유일성을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곧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인 종교관에서 신 중심적(God-centric) 종교이해로 바뀌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힉(John Hick)은 기독교가 다원종교사회에서 더 이상 다른 종교들에 대하여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다원종교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들이 결국은 절대자를 향하여 부분적으로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사명도 결코 타 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와 사랑으로 공존을 모색하는 것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결국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본질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적 다양성만 인정하게 됨으로서 기독교선교의 목표를 흐리게 하고 기독교인의 선교적 사명을 왜곡시키고 있다.
III. 종교다원주의 비판과 개혁주의적 평가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여 물건을 선택하는 것과 같이 종교도 사람들의 구미에 따라 고를 수 있다는 종교의 상업화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종교심 때문에 모든 종교는 보편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1. 종교다원주의의 성경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들의 논리의 출발점을 성경에 두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관이 원천적으로 성경의 고등비평론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의 종교다원주의가 태동하게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으며 자유주의신학이 종교다원주의의 근거를 제공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제공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현재의 기독교를 서구 문화의 부산물로 간주하고 아울러 성경도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심판 받아야 할 역사적 문서로 본다. 그들이 수용하고 있는 성서비평학은 본문(text)보다 상황(context)이 우선이기 때문에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학과 신앙의 수정이 불가피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의 존립의 여지가 없어진다. 이것은 자유주의적 성경관은 언제든지 그 방향성이 종교다원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크다는 반증이기도 한 셈이며 자유주의의 가장 큰 파괴적인 요소인 성경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유일회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아무리 상황(context)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의 말씀(text)은 변함이 없다”는 개혁주의신학의 기본적인 방향성(sola sciptura)을 잃지 않고 굳게 견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비평학과 상황주의적 성경해석을 한 번 허용하게 되면 그 밀려드는 기세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을 현대 기독교 역사에서 무수히 보아 오고 있다.
2. 종교다원주의의 신관
신중심의 새로운 신학을 모색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신은 결코 인격적인 신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관이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에서 말하는 신이나 타종교(특히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관일 뿐이다. 힉과 니터는 신을 절대적 존재, 궁극적 실재, 초월적 존재 등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철학자들이나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뒤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신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는데 인격적인 신의 관념은 서양신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들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신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노골적으로 힉의 신중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론(다원주의 이론)을 종교에 적용하는 것을 논리적 오류라고 주장한다.
결국 종교다원론자들이 말하는 신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다. 그것은 타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며 그들의 관념에서 도출해 낸 신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 전혀 엉뚱한 종교의 신을 기독교의 신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모순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이 신중심의 종교다원주의 모델을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 고유의 기독론을 약화시켜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상대화시키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직접 ‘신’에게 나아가자는 의도인데 그리하면 타종교 역시 길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음모가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교회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놓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숨은 궤계를 간파하는 시각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3. 종교다원주의의 기독론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기독교에서 가장 거부감을 가지는 부분이 바로 기독론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이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러한 기독론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방해하는 최대의 걸림돌이며 기독교의 배타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신학이라고 주장하고 전통적 기독론으로서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 기독교의 신학에서 기독론을 배제하고 신 중심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내(예수 그리스도)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고 말씀하고 있고, 사도행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종교다원주의는 사도행전 4:12의 “다른 이름은 없다”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사랑의 언어, 혹은 상황적 고백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철저히 부정하며 우주적 그리스도는 모든 종교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전호진 교수는 “다원주의자들은 우주적 그리스도, 혹은 로고스에 대하여 구체적인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고 통렬하게 꼬집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기독론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주가 되심을 부인하는 기독론 부재의 신학이다. 전호진 교수는 “19세기 서구의 자유주의가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심각한 의문점을 제기하였는데 20세기 다원주의는 너무 많은 그리스도와 로고스의 존재를 인정하여 신앙의 혼란과 상대주의를 초래한다(요일 4:1-6)”고 말하고 있다.
4. 종교다원주의의 구원론
종교다원주의의 가장 위험하고도 본질적인 요소는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가능하며, 불신자란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만인 구원론사상은 보편주의(universalism)로도 불리는 것으로 기독교역사 전반에 걸쳐 있어왔던 것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이를 저지해 왔다.
현대의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존 캅(John Cobb), 칼 라너(Karl Rahner), 한스 큉(Hans Küng) 등의 신학에 많이 의존해 왔다. Tillich는 교회 안의 신자를 나타난 신자로, 교회 밖의 신자는 잠재적 신자로 말하고, 선교는 잠재적 신자를 나타난 신자로 바꾸어 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또한 라너는 소위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을 말하면서 불신자는 이름 없는 신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 기본적인 특징(전제) 중 하나는 모든 종교는 상대적이라는 신념이다. 즉 모든 종교는 제 각기 진리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낮다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깊이에서 보면 모든 종교는 동일하며 길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목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여러 상이한 구원의 종교적 체계가 있다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개방하고 있는 신념체계인데, 결국 이러한 생각은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고 각각의 종교는 동일한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서로 다른 길 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신학에 근거하여 기독교구원의 독특성을 부인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궁극적인 진리를 토대로부터 흔들려는 시도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신실한 신앙의 선배들이 이러한 위험한 사상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지켜온 것과 같이 개혁주의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음으로(Sola Fide) 구원을 얻는다”는 개혁자들의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5. 종교다원주의의 성경해석
종교다원주의의 성경관에서 본 바와 같이 다원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여러 책 중의 하나로, 혹은 타 종교경전들과 동일한 종교적 경전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단지 그들이 성경을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인 신학에 대항하여 그들의 견해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할 때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성경 본문과 그 해석을 개혁주의적인 관점에서 조명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아래는 얼 데이비스(Eryl Davies)가 제시하는 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주장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그것을 성경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올바른 해석을 제시한 몇 가지 예이다.
1) 사도행전 17장 22절의 바울의 진술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저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다원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종교성을 인정하고 또한 성경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23절의 진술, 즉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는 구절에서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 대해 무지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참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무지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모든 종교를 성실히 숭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잘 알고 확실히 숭배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르치지도, 암시하고 있지도 않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2) 에베소서 1장 10절의 우주적인 그리스도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만물이 완전히 주님의 권세 아래에 있게될 때에 마침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이 이곳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을 문맥에 따라 해석하지 아니하고 어느 한 구절만의 의미를 가지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에베소서 1:3-14에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찬송하고 있다. 여기서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관심의 대상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1절)이라는 말과 그리스도인들이 선택받고(4절), 예정되었으며(5절), 구속과 죄사함을 받았고(7절), 특별계시를 전달받았고(8-9절), 영광을 기대하며 즐거워한다(13-14절)는 앞의 구절들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함에도 그들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아니한다. 10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물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상이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교훈은 1:20-22에서 강조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구절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에 들어 갈 것이며, 그리스도께 대한 만물의 복종은 세상 끝날에 성취되고 실현될 것임을 알게 된다.
3) 고린도전서 15장 24-28절과 보편주의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라는 구절을 들어 구원의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와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보편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문맥을 들어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사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신다. 일단 세상에서의 모든 사역이 완수되면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될 것이다. 종말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이 완성되었으므로 삼위 하나님의 기능적인 경륜이 필요 없게 되며,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신다.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다스리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종교다원주의자들과 같이 하나의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오류를 낳게 된다.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관에 따라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게된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보면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 이러한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종교 다원주의는 성경의 진리와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원칙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6. 종교다원주의에 직면한 기독교선교
종교다원주의는 전통적인 선교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쳐오고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종교다원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선교에 심각한 도전이 온 것은 타종교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 내부에서였다. 현대 선교운동과정에서 타종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것은 윌리엄 호킹(William Hocking)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평신도 지도자들이었다. 미국과 캐나다의 일곱 교단에서 선발된 각각 다섯 명씩의 평신도들로 35명의 선교현지시찰단이 구성되어 1931년 9월부터 1932년 6월 사이에 인도, 미얀마, 중국 및 일본의 선교실정을 조사, 연구하였는데 선교시찰 후 그들의 소견을 『선교재고: 백년 후 평신도들의 연구』(Rethinking Missions: A Layman's Inquiry After 100 Years)라는 제목으로 1932년 발표되었다. 이 보고서에서 예수는 부처나 마호메트과 같은 위대한 종교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며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더 이상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들의 주장에 뒤이은 W.C.C. 마드라스(Madras)대회(1938)를 계기로 그러한 주장이 조금 수그러들기는 했으나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나 종교다원주의가 선교에 있어서 끊임없는 논란거리가 되어 오다가 드디어 현재에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중심에 자리를 틀게 되었다.
범신론적 보편주의와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의한 선교관은 성경적인 선교관과 판이하게 달라진다. 종교다원주의가 궁극적으로는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선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만일 종교다원주의의 선교가 존재한다면 그 선교의 목적은 인간화이며 세계평화공동체의 형성이므로 우상숭배와 불신앙으로부터의 회개는 요청하지 않는다.
개혁주의 교회는 자유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귀감 삼아 결코 종교다원주의적 선교관을 채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나아가서 모든 종교에 구원을 인정함으로써 절대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한다. 복음증거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독교의 순수성을 변질시켜 우상숭배가 죄가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세상의 우상과 죄, 탐욕과 불신앙과 타협하게 만드는 악한 자의 궤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결 론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이 진리이며 합리적이며 자연스럽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의 밑바닥에는 합리주의가 근간을 이루고 있고 종래의 기독교 승리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깔려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과 합리성을 내 세우고 잘못된 기독교 승리주의를 거부한다는 장점을 내세우더라도 종교다원주의는 브래넌(John P. Brennan)이 말하는 바와 같이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 던져버리는 짓”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부정함으로서 기독교의 특징을 백지화하고 모든 종교를 상대화함으로써 진리를 부정하고 기독교 선교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뿌리 채 제거시키려 하고 있다. 종교적 상대주의에는 암흑의 그늘이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두운 악마의 활동이 역사하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는 자신의 모호성 때문에 상대성과 절대성을 포함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또한 다원주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평성을 강조하고 이론의 합리성을 강조하지만 아직도 종교철학자들이나 ‘일부 소외된 엘리트 신학자들’에 의해서 이론적인 발전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칼 브라튼(Carl Braaten)의 관찰은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현실을 정확히 본 것이다.
최근 인도의 일부의 회교인들은 존 힉(John Hick)과 폴 니터(Paul Knitter)가 공동 편집한 『기독교유일성의 신화』를 지참, 연구하여 기독교를 공격할 목적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영감을 부정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신학이 타종교인들에게 역이용 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절대적인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유일한 진리를 하나의 진리일 뿐이라고 우기는 그들의 신학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타종교를 이해함으로써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관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고 전해야 할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진리를 양보하면서까지 그러한 시도를 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파멸의 길로 달려가는 길 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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