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유격대 제11지대
드디어 서울행이 결정되어 1950년 8월 12일 내가 인솔한 대한유격대 12명은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에서 1박했다. 다음날인 8월 13일에 이창복(李昌福, 서청 총무부차장, 육사 8기생) 소위의 인솔로 대구를 출발했다.
트럭을 타고 영천군 신영 골짜기를 지나 팔공산을 향해 달렸다. 가는 도중에 마주 오는 트럭에서 누가 "손진 형님!"하고 부른다.
쌍방의 트럭이 멈춰 섰다. 저쪽 트럭에서 전의(全義)가 뛰어 내렸다. 전의는 서청 경남훈련부장으로 부산의 깡패 두목 마사이찌를 제압한 혈맹의 동지였다. 나도 차에서 뛰어내려 손을 잡았다.
이때 전두열 중위도 반갑다고 손을 잡았다. 전두열은 전의와 같은 함북 청진 출신으로 서청 초대 조직부장을 역임한 정훈장교 1기생이었다.
전의는, "형! 서울 가는 것을 포기하고 우리 전투부대와 함께 싸웁시다."하고 매달린다. 그 후 전의는 전사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된 것이다.
경북 영천군 신영면 골짜기를 거쳐 팔공산 서북방에 주둔하고 있는 공작과(HID) 소속 유제극(柳濟極) 부대에 도착했다. 여기서 일행은 1박 2일에 걸쳐 적진 내에서의 유격전에 관하여 유제극 부대장(중위)으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았다. 8월 14일 저녁. 출발에 앞서 유제극 부대장은 내가 이끄는 12명의 부대를 '대한유격대 제11지대'로 명명하고, 나를 대장으로 하여 인식표를 수여했다.
인식표란 아군에 대한 극비의 신분증이다. 그것은 명함 절반 정도 크기의 흰색 나일론 천으로 중앙에 태극마크가 천연색으로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태극마크를 둘러싸고 '대한유격대'라고 청색으로 씌어 있었다. 나에게 수여된 인식표에만 말미에 대장인 나의 암호 P1(피원)이 인쇄돼 있었다. 이 시각부터 나는 없고 P1이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문희모를 조직부장, 정명도를 선전부장으로 임명했다.
끝으로 유제극 부대장은 엄숙한 어조로 유격대의 임무를 하달했다. ①서울에 도착하면 '유엔군 서울입성 환영준비위원회'를 만들 것(이것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임무였다). ②후방교란작전을 전개할 것. ③요인을 구출할 것 등 이었다. 무기는 카빈총 2정, 수류탄 각자 2개씩, 식량은 미숫가루 2봉지(대구 애국부인회 기증품), 건빵 2봉지가 전부였다. 그리고 현찰을 각자 2만 원씩 받았다.
빈약한 보급품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희모, 안승범, 이규범을 비롯한 유격대원 대부분이 38선을 넘나들며 적진에서 눈부신 활동을 한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에 최소한 권총 몇 자루는 필수품이 아니냐 하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