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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저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많이 남긴 분이다. 그래서 볼테르적인이라는 말은 볼테르란 작가의 글 스탈일이란 말이 된다.
18세기 프랑스의 작가, 대표적 계몽사상가로서 비극작품으로 17세기 고전주의의 계승자로 인정되고, 오늘날《자디그》,《캉디드》 등의 철학소설, 역사 작품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백과전서 운동을 지원하기도했다.
볼테르 생애
위대한 인물은 종종 그자체로 한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 이 되기도 한다. 볼테르(Francois Marie Arouet de Voltaire, 1694~1778) 역시 예술과 자유, 평등의 나라를 자부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문화상품' 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생전에 이미 30만부이상의 베스트셀러'를 냈던 인기 작가였을 뿐 아니라 그가 머문다는 이유로 한 마을의 인구가 열 배 이상 불어날 만큼 사람을 끄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광신에 사로잡혀 부패한 교회, 왕권이 흔들리고 봉건 영주들의 권력이 무너져 가던 계몽의 시대, 그의 재치 넘치는 신랄한 현실 풍자는 사람들의 가슴을 저항심으로 가득 차게 했다.
그는 새로운 문화 코드가 되어 가고 있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자유와 민주적인 제도들을 대표하는 '시대정신' 이었다. 그래서 후대에 빅토르 위고(V. Hugo, 1802~1885, 프랑스의 극작가․소설가)는 "이탈리아에는 르네상스가 있었고, 독일에 종교 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볼테르가 있었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젖먹이 시절부터 신과 틀어진 사이
볼테르는 1694턴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소문에 따르면 그는 젖먹이 시절부터 하느님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너무 허약하게 태어나서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한 부모는 서둘러 세례를 받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나중에 정식으로 세례를 받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법원 관리였던 아버지는 꽤 부유한데다가 어머니도 '귀족적 취향을 지녔다고 하니,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양과 예술에 익숙한 환경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문학하는 이들은 아무 쓸모없을 뿐더러 친척에게 폐만 끼치다가 결국 굶어 죽을 자들' 이라고 폄(남을 헐뜯어 말함)할 정도로 대단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똑똑한 둘째 아들이 자기처럼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볼테르가 택한 길은 ‘문학’ 이었다. 글재주를 알아본 이웃의 부유한 부인이 책값에 쓰라고 2천 프랑을 물려준 것을 보면 확실히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재능이 있기는 했다.
1711년, 열여섯 살의 볼테르는 그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예수회(16세기 중엽,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신교에 대항해 가톨릭을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한 수도회)학교에 입학한다. 천재들은 종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을 스스로 깨우치곤 하는데, 볼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그는 학교 측이 그토록 강조했던 신앙이 아니라 신을 정밀하게 의심하는 법을 배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쓰였던 정교한 논쟁술을 그는 신을 의심하는 데 썼던 것이다.
또한 볼테르의 생활은 매우 이중적이었다. 그는 박사들과 함께 신에 대해 오랫동안 토론을 벌일 만큼 진지하고 학구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매우 활달했고 심지어 방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 인지 사람들은 그의 ‘방탕’ 에 관대하기만 했다. 뛰어난 재치가 그의 악행마저 유쾌한 사건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궁전의 바보들을 쫓아내라
1715년, 스물한 살의 볼테르는 파리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 낸다.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가 죽고 나자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攝政,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행위나 또는 그 사람을 가리킴)이 다스리던 시기, 어느 면에서도 태양왕의 시대보다 나을 것이 없던 때였다.
권력층에 대한 불만이 나날이 높아지면서 ‘비꼬기의 천재’ 볼테르의 능력도 빛을 내기 시작한다. 온갖 특권을 누리던 귀족들에 대한 시민들의 심정을 적절하고 재치 있는 표현으로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섭정이 예산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왕실 마구간의 말을 절반으로 줄이자, 볼테르는 '차라리 궁전에 가득 찬 바보들(귀족들을 말함)을 반쯤 쫓아내는 것이 나을 것' 이라며 빈정댔다. 젊은 볼테르는 점점 유명 인사가 되었다.
거리를 떠돌던 정부에 대한 비난과 독설은 모두 볼테르가 한 말로 여겨질 정도였다. 권력층이 그런 그를 좋게 보았을 리 없다. 한번은 섭정이 왕권을 넘본다는 소문을 다룬 풍자시가 나돌았는데, 이번에도 볼테르가 그 시의 작가로 지목받았다.
화가난 섭정은 마침내 그를 바스티유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이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볼테르는 이곳에서도 확실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죄수’인 그가 교도소장과 같이 식사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희곡 『오이디푸스』를 쓰는데, '아루에'라는 본명을 버리고 '볼테르' 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부들 학식은 ․․․ 우리들의 소홀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을 믿고 스스로 모든 것을 보자."
권력욕과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를 은근히 조롱하고 우리 자신의 이성과 합리성을 믿으라는 말에서 지극히 '볼테르 다운' 도전적인 분위기가물씬 풍긴다.
그 당시는 신분의 차별이 존재하던시대라, 천재인 그로서도 귀족들과의 사이에서 넘지 말아야 할 분명한 선이 있었다.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던 볼테르는 1721턴 어느 연회에서 높은 직위의 귀족에게 대놓고 말대꾸를 하다가 하인에게 흠씬 얻어맞고 만다. 격분한 볼테르는 다음 날 그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바스티유감옥에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유로 유명 인사를 감옥에 오래 가두는 것은 정치권에서도 부담이 되는 법이다. 결국 그는 프랑스를 떠나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영국으로 추방된다. 그 뒤 볼테르는 3년여 동안 영국에 살면서 크나큰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영국은 왕의 목을 자르고서라도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다.
절대군주가 지배하던 그 당시의 프랑스와 비교해 볼 때 영국은 자유의 나라 그 자체였다. 그는 왕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 영국 의회와 언론에 강한 충격을 받는다. 조나단 스위프트(J. Swift,1667~1745, 아일랜드의 작가)와 뉴턴(T. Newton, 1642~1727, 영국의 물리학자․수학자)을 만난 것도 모두 이 무렵의 일이다 특히 뉴턴은 볼테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엄밀한 논증에 기초한 뉴턴의 자연 과학은 볼테르에게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도 뉴턴을 소개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철학자 만이 역사를 쓸 수 있다.
1729년 섭정이 귀국을 허락하자 볼테르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다. 그는 그 뒤 5년간 다시 ‘파리의 술이 혈관에 흐르고 정신은 붓끝에 넘치는' 생활을 한다. 『찰스 7세의 역사』는 이 시기에 쓴 작품이다. 그는 그 당시 관행과 달리 '신의 뜻이 역사를 이끌고 있다.'는 식으로 글을 써 나가지 않았다.
아울러 왕을 중심으로 써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소설 같은 문체로사실의 전후 관계에 기초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그 뒤에도 『러시아 사』, 『프랑스 사』, 『루이 14세』 등 여러 역사 책을 저술했는데, 이 속에서 그는 '역사 철학' 이라 할 만한 새로운 탐구 방법을 세웠다.
나의 목표는 사소한 사건들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역사를 쓰는 것이다. 나는 위대한 군주들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 인간이 어떤 단계를 밟아 야만 상태에서 문명을 이룩해 왔는지 알고 싶다."
볼테르는 역사를 꿰뚫어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를 '예술과 정신의 진보'에서 찾았다. 그는 이런 원리를 깨달은 철학자만이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울러 그 당시 역사 연구의 관행에서 벗어나, 중국․페르시아․인도의 역사도 역사 속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우리는 신에게 선택받은 자들‘ 이라는 생각으로 유럽의 역사만 다루었던 그 당시 교회의 역사 해석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1734년 볼테르는 마흔의 나이에 또다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한다. '자유의 나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교한『철학서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출간되어 권력자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그는 또다시 파리를 피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의 사트르 공작 부인과 함께 그녀 소유의 시에레 성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볼테르는 시에레 성에서 십수 년을 보낸다. 그는 생전에 99권의 저서와 2만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는데 상당수는 성에서 은둔하던 이시기에 씌어졌다. 하지만 사교계의 인기 스타였던 그는 이곳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지적인 재치와 쾌락적인 생활태도를 즐겼던 그는 이미 수많은 팬들을 거느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치 ‘성지 순레’를 하듯 그를 찾아왔고 편지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이 중에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 대왕(1712~1786),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왕(1729~1796, 독일 태생 러시아의 여제)도 있었다. 여왕은 심지어 그를 ‘쾌락의 신’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엄숙 경건' 이라는 포장 속에서 온갖 악행이 행해지던 시대에 그의 생활태도는 퇴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을 솔직하게 누릴 줄 아는 건강한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화려한 은둔생활’은 1749년 사트르 공작 부인이 죽으면서 끝난다. 그 뒤 볼테르는 그를 마치 ‘신하가 왕을 존경하듯’ 바라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으로 프러시아 궁정으로 간다. 프리드리히는 그를 비롯한 소수의 지식인들과만 저녁 만찬을 즐겼는데, 이것은 볼테르에게도 큰 즐거움이었던 듯하다. 볼테르는 "50년 동안 폭풍우 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항구를 발견한것 같다."라며 기뻐했다.
‘사상의 왕’과 '현실의 왕' 은 둘 다 재치 넘치고 지성적이라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 오해로 이 둘의 관계도 이내 틀어졌다. 볼테르는 황제가 금지한 책을 구입하여 분노를 샀고 황제가 금지한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프러시아에서도 추방되고 말았다. 하지만 조국 프랑스에서도 이미 쫓겨난 그는 갈곳이 없었다.
1758년 예순네 살의 볼테르는 마침내 스위스 국경 지대 시골 마을 '페르네'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늘 이곳에 은둔하며 창작과 저술에 몰두할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가 가는 곳은 어디건 사실상 ‘유럽의 정신적 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온 뒤로 페르네의 인구는 수십 배로 늘어났을 뿐더러 ,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심지어 볼테르가,"하느님, 저를 친구들에게서 구원해 주소서. 내 적은 내가 처치하겠습니다."라고 뇌까릴 정도였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면 볼테르의 삶은 이제 시골 페르네에서 평안하게 끝날 운명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광기(狂氣)는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 무렵에 있었던 신교도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잔인한 탄압, 성상(聖像, 기독교에서 이르는, 그리스도나 성모의 초상) 앞에서 모자를 벗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 채로 청년을 태워 죽이는 무자비한 종교 재판, 리스본(포르투갈의 수도) 대지진을 신이 준 재앙으로 여기고 ‘속죄’를 위해 사람들을 산채로 죽이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시대의 지성' 볼테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는 농담할 때가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격렬하고도 논리적인 비판을 통해, 그 당시 유럽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파렴치를 분쇄하라."라는 유명한 말로 끝나는 비판적인 글, 세상의 모든 악행을 좋게 해석하려는 신학의 교리들을 비꼬는 『캉디드』는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철학자로서는 드물게 이재(理財), 재물을 유리하게 다루어 씀)에도 밝았다. 말년에는 대저택과 2개의 별장, 160여 명의 시종을 거느릴 정도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또 그는 엄청난 재산과 지적인 영향력을 이용해, 사회적으로 탄압받던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도 앞장섰다.
1777년 여든세 살의 볼테르가 파리로 귀환하자,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몰려나왔다고 한다. 아울러 여든 살에 쓴 그의 희극 『아레느』가 상연되기도 했는데 그 당시 극장의 분위기는 꼭 요새 아이들 스타의 콘서트 공연장 분위기였던 것 같다. 관객들은 내용에 상관없이 볼테르에 대한 열광만으로 장면 장면마다 환호성을 질러 댔다고 한다. 그 바람에 극장에 들어오던 외국인들은 정신 병원에 잘못 들어온 줄 알고 뛰쳐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열정과 흥분으로 가득 찬 생활은 80대 노인에게는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볼테르는 파리로 귀환한지 1년 만인 1778년 여든네 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거부했으므로 기독교 의식에 따라 묻힐 수 없었지만, '천재에게는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린 시골 신부의 배려로 성지(로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 신성시되는 땅)에 매장되었다. 뒷날 그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의 주체 세력들에 의해 프랑스의 국가적인 영웅들의 묘지 ‘판테온’으로 옮겨졌다.
볼테르의 명언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운명의 여신이 나누어준 인생의 카드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손 안에 카드가 들어오고 나면 그들은 받은 카드로 어떻게 해야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신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인간은 그가 행하지 않았던 모든 훌륭한 일에 대한 죄를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해보지도 않고 너무 일찍 후회하는 일이다.
모든 일이 무사태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믿음은 믿는 것에 대한 이성의 근거를 무시할 때 믿을 수 있다.
회의는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거품들이 가득하다. 맨 아래에는 찌꺼기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가운데에는 훌륭하다.
신은 너무나 두려워하는 관객들을 웃기기 위해 애쓰며 연기하는 코미디언이다.
우정은 영혼의 결혼이다. 이 결혼은 이혼하기도 쉽다.
정부는 양치기와 도살자 양쪽 모두가 되어야 한다.
가장 올바른 사람은 힘들고, 가장 현명한 사람은 슬프다.
두려움은 범죄를 일으키고 스스로 처벌한다.
신은 큰 부대 곁에 있지 않다. 신은 가장 사격을 잘 하는 사람 곁에 있다.
그가 의문을 가진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무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위대한 애국자이자, 인도주의자이며, 정직한 친구이다. 물론 그가 죽었을 경우에 한해서이다.
일인자에 의해 가려진 이인자는 반짝인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각각의 플레이어는 운명의 여신이 나누어준 인생의 카드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들의 손 안에 카드가 들어오고 나면 그들은 받은 카드로 어떻게 해야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인생에서 정해진 부분도 있고 정해져 있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정해져 있는 것의 대부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집니다. 볼테르는 그런 정해져 있는 부분을 운명의 여신이 나누어주는 카드에 비유했는데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에서 어떤 카드를 쥐고 태어날지는 운명에 의해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그 카드를 가지고 어떤 플레이를 펼칠지는 인간 개인의 스스로의 자유에 의해 정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카드게임에서 카드는 정해져 있는 한도가 작지만 인생에서의 카드는 그 유동 범위가 유연하고 더 광범위하다고 봅니다.
카드게임에서의 카드가 결정하는 승패는 인생에 비유한다면 정해져 있는 범위가 적지만 인생에서의 카드가 결정하는 승패는 카드게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무한한 정도의 경우의 수와 범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인생에서의 다른 부분은 모두 개인의 자유입니다. 다만 그 자유에는 책임감이 따르고 자유의 행위에 의한 결과는 모두 완벽한 원인과 결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인생에서 플레이할 카드를 주는 것은 운명이지만 그 카드로 플레이를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우리 인간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며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태어나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죽지 않습니다.
인생을 사는 목적에 대해 나의 인생은 누군가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나의 것이며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함도 아니며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산다면 그 인생은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고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 훌륭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길을 잃고 헤맨다. 그러나 가장 어리석은 일은 해보지도 않고 너무 일찍 후회하는 일이다."
어떤 일을 후회하려면 그 일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그 일에 대해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해보고나서 후회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은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 않아서 후회할 수도 있지만 했기 때문에 후회하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인생은 후회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안 해서 후회할 일은 해보고 해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일이 무사태평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착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믿음은 믿는 것에 대한 이성의 근거를 무시할 때 믿을 수 있다."
신이 자연과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이 신을 만든 것입니다. 환상과 착각에 빠져서 착각 속에 사는 것은 자유지만 착각 속에 빠져 산다고 해서 진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 자체부터가 오류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계를 가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 신은 한계를 가지는 불완전한 신입니다. 인간은 미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되어 왔습니다. 그 미생물에는 세균도 포함됩니다. 그 진화는 신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진화된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며 인간은 자연과 우주의 한 부분 즉 인간은 신의 한 부분입니다. 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부분이 정서인데 그런 정서라면 저도 많이 느낍니다.
그런 정서라면 저는 어떤 사제나 무당보다도 더 많이 느끼는 편입니다. 그런 정서는 볼테르도 느꼈고 버트런드 러셀도 느꼈고 사르트르도 느끼는 정서입니다. 정서는 인간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동물도 느끼며 미생물도 느낍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 그런 정서를 느끼게 한 것이 아니라 우주가 자연을 만들었고 자연이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이 자연과 우주로 인해 정서를 느꼈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만든 것입니다.
"우정은 영혼의 결혼이다. 이 결혼은 이혼하기도 쉽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우정과도 같은 사랑입니다. 우정과도 같은 사랑이기에 이해하기도 쉬우며 이별하기도 쉬운 사랑입니다.
"가장 올바른 사람은 힘들고, 가장 현명한 사람은 슬프다."
올바른 사람의 힘듦과 현명한 사람의 슬픔은 아름다울지도...
"두려움은 범죄를 일으키고 스스로 처벌한다."
프로이트에 따르자면 범죄는 죄의식에 의해 일어난다고 합니다. 범죄는 죄의식이 축적되고 쌓여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죄의식은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죄의식은 대부분 두려움에 의해 발생합니다. 범죄를 일으키고 스스로를 처벌하게 됩니다. 인간 심리의 미묘한 부분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니 책임감은 가지되 죄의식은 되도록 가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꼭대기에는 거품들이 가득하다. 맨 아래에는 찌꺼기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가운데에는 훌륭하다."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 할 권리를 위해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얼굴보다 더 다르다. -인생은 활동함으로써 값어치가 있으며, 빈곤한 휴식은 죽음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할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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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볼테르에 대하여 잘 배웠습니다.
지금 시대에 태어나도
화려한 선지자 노릇을 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