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남과 북을 동시에 사로잡은 ‘마스크’
봉염 어머니는 일제의 핍박과 지주의 착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가난과 질병으로 그녀는 결국 아이들마저 모두 잃게 되지만 공산당이 되어 집을 나간 큰아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절망 속에서 소금 밀수에 나서던 그녀는 만주 항일무장대를 만나게 되고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밀수꾼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항일무장대를 향해 결연히 일어서는 그녀의 옆모습이 정지화면으로 잡히고 영화의 끝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간다. 막심 고리키를 연상시키는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풍의 장면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만든 강경애 원작 <소금>(1985)의 마지막 신이다. 그리고 여기서 신념의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봉염 어머니’를 맡은 이가 바로 남과 북에 존재했던 두 개의 ‘신필름’을 대표하는 스타 최은희다.
<상록수>의 한 장면.
연극에서 배우 인생을 시작한 그녀는 일찌감치 스타의 대열에 들어섰지만, 당대의 숱한 여배우들을 제치고 명실상부한 ‘최고 스타’의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던 것은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부터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어느 국회의원의 잃어버린 딸 행세를 하지만, 이후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힘없는 여성들을 도우며 과거를 참회하게 되는 여대생 ‘최소영’을 연기한다.
이 작품을 통한 간판스타로의 발돋움은 이후 그녀가 맡았던 역할들과 그녀가 겪어야 했던 삶의 격랑들을 설명하는 단초가 된다. 최은희는 <열녀문>(1962)이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비련의 과부 역할에도 어울리는 배우였지만, 그녀를 스타로 만든 이 역할은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여성, 근대화와 발전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여성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여배우’를 설명하는 숱한 키워드들, 가령 미모나 연기력, 혹은 성적 매력 등을 뛰어넘는 그 무엇, 좌중을 압도하고 스크린을 장악하는 이를테면 ‘프로파간다’적이라 할 마스크가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심훈의 대표작이자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인 근대화 계몽소설인 <상록수>(1935)를 신필름이 영화화한 1961년작을 떠올려보자. 주인공 박동혁을 추동하는 의지의 여인 채영신(영화 속에서는 ‘최용신’으로 각색)을 맡은 것은 역시 최은희였다. 30년대의 계몽의지를 5·16 직후의 60년대 사회에서 영상화한 이 작품은 대종상, 부일영화상, 아시아영화제 등에서의 큰 성과와 흥행에서의 성공 외에 또 다른 결과를 낳았다. 권력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최은희는 이 작품으로 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영화법을 제정하고 문화영화를 의무 상영케 하는 등 영화를 통한 공보·선전 정책에 힘을 쏟았던 박정희 정권에 있어 <상록수>의 계몽적 이미지들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음직하다. 이후 신필름의 63년작 <쌀>에서도 최은희는 적극적인 성격의 여성 ‘정희’역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산업근대화 프로젝트를 상징하는 얼굴이 된다.
78년 새해 벽두 홍콩에서 그녀가 납북된 사건은 그러한 흡인력 있는 마스크를 북쪽의 권력 역시 흠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신상옥 감독과의 결별, 신필름의 등록 취소 등 남한에서 우여곡절을 겪던 끝에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운영난 문제로 홍콩을 찾았던 그녀는 그 길로 북한으로 납치되었고, 이후 북에서 다시 만난 신상옥 감독과 함께 탈출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탈출기>(1984), <소금>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들 속에서도 그녀의 에너지가 그야말로 ‘분출’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화려한 스타로서의 삶과 분단국가의 배우로서 겪어야 했던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배우 최은희를 알기 위해 좀더 많은 관심과 연구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각자의 기억 속에서 연상되는 최은희의 이미지는 그녀의 변화무쌍한 얼굴들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김한상 | 한국영상자료원 프로그래머>
첫댓글 현대사의 질곡을 살아낸 최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