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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버드나무아래 (http://birdnamoo.com/bbs/board.php?bo_table=figtree&wr_id=116)
아래 내용의 대부분이 김우현 감독님 글입니다. 여기에 저의 생각과 자료들을 조금 추가하였고 문맥에 맞게 오타등을 수정하였습니다. 특히 아직 이스라엘이 열리지 않으신 분이라면 끝까지 정독하여 읽어 주시면 많은 깨달음이 있을거라 자신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읽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셔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셨다.
그리고 그녀에게 뜻밖에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요4:23)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하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사마리아에서 이것을 말씀하셨을까?
이것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가 ‘이방의 교회(사마리아)’에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비밀을 계속 구할 때에 그것이 읽혀지기 시작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사마리아의 여인이 한 이 말은 사실이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에, 사마리아의 사람들은 자기들도 성전 재건에 동참하기를 원했다 (느4:1-3).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에 혼합된 그들이 거룩한 성전의 회복에 동참하는 것을 극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은 주변의 이방 족속들을 동원해 성전을 쳐서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이만큼 이 두 민족은 한 동족이면서도 원수지간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사마리아가 이방에 섞였지만 유다가 큰 그릇으로 받아 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다.
‘만민(all nations)이 기도하는 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 가셨을 때에 거기서 매매하고 환전하는 것을 다 부수고 분노하셨다.
온유하신 주님이 왜 거기서 그렇게 화를 내신 것일까?
그 장소가 바로 ‘이방인의 뜰’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땅 끝의 이방인들도 성전에서 주의 얼굴을 구하고 기도하는 집‘(왕상8:41-43)이 되게 해달라고 구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기도요 예배였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증오하여 ‘이방인의 뜰’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하여 장사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이방인들의 공간을 빼앗은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진정한 ‘영과 진리의 예배’에 상반되는 것이다.
결국 다시 건축된 성전에서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다.
이방에 섞인 사마리아와 갈릴리등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뼈아픈 상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후에 헬라의 알렉산더가 이스라엘을 점령했을 때 산발랏은 자기들에게도 성전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알렉산더는 그것을 들어 주었고 세겜의 ‘그리심산’에 성전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의 조상들은 거기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성전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지만 그리심산의 성전도 3세기도 못되어 무너진 것이다.
나는 이 역사적인 배경들을 탐구하면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진정한 예배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 ‘헬라’가 지은 ‘사마리아의 성전’은 어쩌면 우리 교회를 예표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방인들로 구성된 우리 교회는 헬라의 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복음이 확산된 로마, 그리스 등 유럽은 헬레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지경들이다.
그래서 교회는 초기부터 헬라적인 사상과 접합이 되었고 서구 신학이 그 체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면서 절정에 올라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체계 아래서 발전하였다.
종교개혁이 다시 성경의 근원적 뿌리인 ‘히브리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가지고 일어났지만 그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성경 이해나 예배의 구조는 사실 매우 헬라적인 요소가 강하다.
사마리아의 이 사건이 이방의 교회를 상징한다는 다른 단서가 있다.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4:17,18
우리는 이 말로 여인이 음란한 ‘창녀’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게다가 정오의 시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이니 부정한 여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남편 다섯’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광야생각
*요한복음4:6의 여섯시쯤은 유대시간으로 고쳐 12시가 아니라 이미 고쳐진 로마시간(현대시간) 저녘6시일 것이다: 그 근거로는 요19:14의 6시는 로마시간 그대로인 새벽6시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상번제 제물로서 오전9시에 못 박히시고 오후 3시에 돌아 가셔야 하므로, 새벽6시에 십자가형이 확정지어지고 유대무리들에게 내어져야 9시에 못 박히시는 시간과 자연스럽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다른 공간 복음과 달리 로마시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은 창녀가 아니라 아이를 못낳는 여인이다.
이민족의 침입이나 질병등으로 남편이 죽었고 당시 관습인 형사수취(형이 아이를 못낳고 죽을경우 그 동생이 취하는 일)가 벌어졌을 것이고,(하지만 불행이도 또 다른 이민족의 침입으로 남편이 죽고 또 형사수취가 반복되었을 것. 결국 6섯 남편이 생겼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 보자면 팔자가 사납고 기구한 여인인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은 사무엘을 나은 한나의 이야기를 알고서 하나님께 애통함으로 기도해왔던 여인이었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주님은 그러한 여인을 만나 주신 것이다.)
이 사마리아의 배경을 연구하려면 호세아서를 읽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상을 숭배하여 흩어진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나는 거기서 ‘남편 다섯의’ 비밀을 깨달았다.
호세아는 반복하여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호7:1)을 지적하신다.
그들이 ‘음행’을 하여 ‘이방의 왕들’ 곧 ‘남편들’을 찾아 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에브라임과 사마리아에 찾아간 이방의 남편은 ‘앗수르, 애굽, 페르샤 바벨론, 헬라, 로마‘등 ’다섯 나라‘였다.
그것은 그들을 지배한 나라이고 흩어져 간 ‘이방 지역’을 가리킨다.
특히 사마리아는 이 다섯 나라들의 지배를 받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남편 다섯’이 우리 교회가 지배와 영향을 받을 이방의 체계에 대한 예언적인 예표라고 생각한다.
사마리아처럼 우리 교회가 이방적인, 세상적인 것, 헬라적인 것과 혼합되는 예배가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에 의하여 세워진 ‘사마리아의 성전’은 이방의 교회, 곧 우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금의 ‘유대인’과 연결되어진다.
그러나 아버지가 찾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오직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다.
사마리아의 여정은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계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제자들이 음식을 사가지고 왔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행하신 일이 곧 주님을 생존하게 하는 양식이요 생명의 에너지였다.
사마리아 여정 자체가 주님께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였다.
이것은 ‘저녁 제사 드리는 시간’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는 장면이다.
이것만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나사렛,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 예루살렘에 이르는 모든 주님의 풍경이 아버지가 찾으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온전한 예배자였다.
지금 우리는 매우 현대화 되고 우리의 필요를 따른 예배에 집중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가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그 나라의 본질을 결실하는 예배이다.
누가 가장 경멸하고 꺼리는 사람들에 가고자 하겠는가?
누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는가?
누가 무수한 이들이 왕으로 삼고자 달려오는데 그것을 떨치고 ‘광야(에레모스)’로 가겠는가?
주님은 거기서 오직 ‘아버지의 얼굴’만 구하셨다.
우리의 예배는 나의 만족과 유익을 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내 혼적인 무언가에 충족이 되면 좋은 예배라고 은혜 받았다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배는 다르다.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아버지의 뜻과 언약에 순종하시는 것이다.
이 사마리아를 찾아 오신 것이 그것이다.
당시의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인식, 관습, 체질로는 올 수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오직 이곳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약속, 성령께서 그 진리의 지경으로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오신 것이다.
그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것은 오직 성령에 이끌려 아버지의 사랑과 본질을 살아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오해한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spirit)’이라는 것은 ‘프뉴마’ 곧 우리의 영적인 것에도 적용되지만
성경에서 주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요16:13,14
이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의 본질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 곧 진리 가운데 걸어가는 삶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14:26)이라고 하신 것이다.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본질(essence)'을 의미한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본질, 형상, 그 길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당신의 무엇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참 형상의 본을 알려 주시고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진리의 길, 천국의 풍경으로 데려 가신다.
바로 진리의 본질, 아버지의 뜻과 마음, 그 나라와 의의 진정한 자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순종된 삶, 성령님께 순복되어진 것을 ‘참된 예배’라고 하는 것이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의 여인에게 주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성령충만을 구하고 그것을 느낌으로 감각하며 기름부음이 넘친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그친다.
주님께서 걸어가시고 보여 주신 삶의 모범, 곧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진리의 깊이로 인도함을 받는 ‘영적 예배’가 부재한 것이다.
에덴으로 돌아오는 길 세겜
아브라함의 여정과 세켐: 에덴으로 돌아오는 길(by Rob Skiba): 세겜에 에발산과 그리심산이 있고 거기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바로 여기가 선악과가 있었던 에덴동산 중앙이라는 주장이 들어 있습니다. 저도 같은 입장이라 올리니 참조 바랍니다.)
김우현 감독님 글 계속.....
나는 주께서 다른 곳이 아닌 ‘사마리아’에서 왜 이 ‘영적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무엇보다 예배의 본산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도 모르는 우물가에서 작은 여인에게 그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그것이 무척 궁금하였다.
사마리아에는 지금도 야곱의 우물이 남아 있다.
그 우물의 물을 길어 마시면서 나는 내 의문의 갈증을 풀어 주시기를 구했다.
그러자 성령께서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요셉에게 준 사마리아의 땅은 바로 ‘세겜’(수24:32)이다.
이 세겜은 처음부터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던 땅이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12:6,7
놀랍게도 ‘사마리아(세겜)’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이다.
약속의 땅에서 가장 먼저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사마리아였던 것이다. ‘
당시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배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이 언약적 의미를 중요시 여기셨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유대교, 기독교 이전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예배를 가진 의인이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용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18:2,22:5).
히브리어로 ‘예배’는 ‘샤하’이다. 그것은 ‘엎드려 경배하다’라는 의미이다.
나는 아브라함이 처음 예배한 ‘모레 상수리’에 찾아 갔었다.
이 지역에서 사역하는 메시아닉 유대인인 에브라임 목사를 따라서 사마리아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에 올랐다.
모레 상수리가 있던 지역은 매우 높았고 장대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 왔다.
"'모레'라는 히브리어는 '선생'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이 땅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목사의 유대인 사모가 그렇게 말했다.
그분 역시 신학을 전공한 사역자로 성경의 땅들을 다니며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던 에브라임 부부가 감추인 비밀을 장소라도 보여줄 것 같은 상기된 표정으로 높은
언덕에서 아래를 가리켰다.
“저기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오던 길입니다.
저 아래 요단을 건너 이 계곡을 따라서 세겜에 도착한 것이지요”
에브라임 목사의 말에 아래를 살피니 절로 탄성이 나올만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멀리 요단강과 얍복강을 따라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 온 깊은 계곡과 평원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뜨거운 감동이고 흥분 자체였다.
그리고 내가 서있는 이 모레 상수리 땅에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것이다.
사마리아(세겜)는 최초의 진정한 예배가 시작된 곳이다.
“저 건너편이 에발산인데...저곳이 바로 최근에 발굴된 여호수아의 제단터입니다.”
이어진 에브라임 목사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여호수아의 제단 터가 이 사마리아의 ‘세겜 땅’에 있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언약대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나서 이곳에 처음 제단을 쌓고 율법을 선포하였다(수24:1-28).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길갈, 여리고, 아이 등을 계속 정복하면서도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지 않았다.
길갈에서는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키면서도 제단을 쌓지 않고 이 세겜에 와서야 뒤늦게 예배드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신27:4,5
세겜에는 좌우에 ‘그리심산’과 ‘에발산’이 어깨처럼 받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 가면 반드시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을 이 말씀에 순종하여 세겜을 정복할 때까지 제단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여호수아가 세겜에 쌓은 제단은 아버지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신27:8)고 명령하셨다.
이것이 곧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세겜(사마리아)에 세워진 예배터는 오직 ‘모든 진리’가 새겨진 것이다.
주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라고 하신 것이 바로 그것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성령님의 인도로 ‘모든 진리’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처음 제단을 쌓고 예배드린 그 땅을 중요시 여기셨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을 때 성경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라고 기록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시는 이유가, 예배의 회복 즉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의 회복이라면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거할 장소의 회복, 에덴동산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 후 만물은 죄로 인하여 부패하고 부정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회복을 말씀 하십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일 것이지만 처음 창조하신 에덴의 회복이기도 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사도행전 3장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계시록 21장
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stadia(한 스다디온은 약 192미터임)[(약 2,200킬로미터)]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cubit(헬, 페기스,728m)이니
창세기 15장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 부터 그 큰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제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에덴의 회복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15장의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고 새 예루살렘성이 그 성취라는 것입니다. 애굽 강 부터 유브라데 강 까지가 약 2400km인데 새 예루살렘성이 2200km(일만이천 스다디온)이고 + 성곽을 사방으로 둘러 쌓는다면 2400km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의 땅은 옛 에덴지역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8절의 언약의 성취와 함께 에덴의 회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참고로 저의 깨달음을 같이 나누자는 것일 뿐, 저의 주장이 100%일리 없습니다. 말씀이 진리가 되어 마음판에 새기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입니다.)
당시는 유목민의 시대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그동안 터를 잡고 살던 ‘장막집’을 헐고 나무 기둥들을 짋어지고 이동해야 했다.
이 기둥들을 ‘스타우로스’, 곧 ‘자기 십자가’라고 이미 나누었다.(*성경을 아는 것 (김우현 감독 & 헤븐리 스파..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아브라함의 순종은 진정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의 원형이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 와 처음 드린 예배의 지경이 ‘세겜’이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이곳에서 진정한 영적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말씀하신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이 진정한 예배의 장소라고 믿었다.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던 유대인들은 그것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장소가 진정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도 아브라함의 예배가 있던 곳이다.
예루살렘 성전 터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 곳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종들에게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22:5)고 말했다.
여기서 쓰인 ‘예배’가 히브리어로 ‘샤하’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히 ‘복종’하여 어린 양들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보여 준 예배의 진정한 본질이다.
바로 그 예배가 이루어진 장소가 모리아산이고 그곳에 성전이 지어진 것이다
.
그러나 주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고 하셨다.
그것은 주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진정으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이다.
사마리아는 바로 그런 마지막 때의 진정한 제사장들에 대한 언약이 있는 땅이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렘31:4,5
나는 계속 사마리아를 찾아가 기도하고 영적인 예배의 본질을 탐구하였다.
진리의 층위는 매우 깊다. 한순간에 다 파악하거나 알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에 갈 때마다 성령님께 아버지의 깊은 마음과 뜻 가운데로 인도해 달라고 무던히 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전에 보지 못했던 진리의 구조가 열리기 시작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셔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실 것으로 믿었다.
특별히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은 이전에 알지 못하던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독특하게도 '사마리아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메시아를 구하면서 오직 '예루살렘의 회복'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사야 40장의 시작은 “예루살렘을 위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메시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회복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북이스라엘의 회복과 , ‘에브라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선포하신 것이다.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분명히 들었노니”(렘31:8)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서 반드시 그들을 다시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레미야 31장 전반에 걸쳐 예언되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배역하고 이방에 흩어져버린 ‘탕자’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애통을 받은 이가 있었다.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주님께서 사마리아로 가신 것은 이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리로 가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의 모습이라 믿는다.
나 역시 처음에는 사마리아 땅 조차 쉽게 가지 못했다.
지금 그곳은 팔레스타인의 자치주이고 매우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대부분의 성지 순례자들은 그곳에 가지 않는다.
🔥초강추! 하나님의 시간의 절정, 초막절 계시, "다윗의 열쇠"의 신비(우바울 목사, 이스라엘 교회 개척 사역)
(*십자가가 자기를 부인하고 누룩을 제거하며 고단한 인생의 짐을 지는 나그네로써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이라면
또 다른 의미는 두 막대기가 하나되는 한 새사람이다. 요셉이 형제들과 화해하듯이 우리 이방인 10지파가 유다, 베냐민 지파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이다.
이 것이 12지파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고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세우는 것이다. 모든 지파가 하나되어 비로서 드리는 그 예배야 말로 진정한 예배이며 예배의 완성일 것이다. 예슈아는 그 첫삽을 갈리리지역에서 먼저 시작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예언들을 읽으면서 나는 에브라임의 본산이었던 사마리아에 너무나 가고 싶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들, 야곱의 우물과 풍경들 속에 스민 의미들을 만지고 싶었다.
그래서 다섯 번 째 이스라엘에 갔을 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사마리아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일반적으로 내가 인식한 것보다 더 본원적인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땅이었다.
“지금 예레미야의 예언이 사마리아의 산들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2013년, 오순절에 다시 촬영을 위해 세겜에 찾아 갔을 때 에브라임 목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를 그리심산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작은 유대인 마을을 지나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하고 푸르른 포도원들이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이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세우고 그 열매를 딴 다고 하셨는데...지금 그것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목사와 포도원을 경영하는 유대인 형제의 말을 들으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살아 있구나 하는 감동에 젖었다.
그런데 에브라임 목사는 더 전율하는 말을 전해 주었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렘31:6
이 예언 역시 지금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다는 것이다.
'에브라임 산'은 곧 '사마리아의 산지'를 의미한다.
"이 산위에 파수꾼이 선다고 하셨는데...이것의 히브리어가 바로 노쯔림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그 말은 '기독교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사마리아의 산에 기독교인들이 와서 포도원을 일구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곧 이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에브라임 목사의 말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옆에서 안내하던 후배 진상이에게 히브리어 성경에서 정말 '노쯔림'이라고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했다.
"정말...그렇게 되어 있네요.
파수꾼이 노쯔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상의 말이 끝나자 에브라임 목사는 더 놀라운 말을 해주었다.
"이 지역에 매우 저명한 랍비가 사는데 그가 예레미야를 읽다가 이 '노쯔림'이란 단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땅에 기독교인들이 오는 것이 이미 수 천년 전에 예언이 되어 있음에 놀랐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들에 감사하고 찬양 드렸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열방에서 몰려 온 수많은 제자들을 볼 수가 있다.
이전에는 단순한 성지 순례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올라 오는 것이다.
특히 이전에 찾아 오지 않던 사마리아의 땅에도 많은 이들이 와서 찬양하며 예배하는 모습을 자주 본다.
'사마리아'는 바로 마지막 때의 이방인들이 드릴 영적 예배를 상징했던 것이다.
나는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놀라운 예언을 심장에 새겼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렘31:7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의 산들에 서는 '파수꾼', 즉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예배하고 구할 제목을 이미 주신 것이다.
그것은 '야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다시 돌아 오기를 구하는 것이다.
'남은 자'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진정한 이면적 유대인들이다.
지금 예루살렘과 전 세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그 가운데 진정한 이스라엘이 이 시대에 주님께 돌아 올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에 주시는 '영적 예배'의 비밀이라고 믿는다.
유대인들은 우리 '이방인'을 향한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성전에서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들의 화려하고 엄청난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것이 되지 못했다.
'이방인의 뜰'에서 예수님의 심판은 그들의 잘못된 예배를 책망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그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는 아버지의 언약을 따라서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 오기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의 기장 중요한 '영적 예배'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의 성전에는, 예배에는 '유대인의 뜰'이 없었다.
만일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대단한 예배를 드린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의 마음에 합한 것이 결코 못된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정은 마지막 때 우리를 향한 예언적인 구조를 가진다.
예수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다.
오늘 우리는 진정으로 사마리아의 산들에 서서 외쳐야 한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다음은 에발산에 있는 여호수아 제단터에 관한 글입니다)
출처 :아마겟돈성경연구회&온이스라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 데이비드 김
에발산은 그리심산의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나무는 별로 없고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을 답사하는 성지 팀은 거의 없다. 물론 이 산에 대하여 거의 알려지지 않어서일 것이다.
이 산의 위치가 나블로스 북쪽 그리심 산 건너편에 있다고 하나 이 산을 가는 곳은 세바스티야로 가야만 하고 이스라엘 군 당국이 관리하고 있는 B지역에 있기 때문에 사전 허락이 있어야만 출입할 수가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에발산에 대하여 1986년 8월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교의 한 소강당에서 하이파 대학교 교수이었다가 지금은 작고하신 고고학자 제르탈(A.Zertal) 박사는 자신의 발굴을 토대로 세겜에 있는 에발산 중턱에 여호수아에 의해 건설된 제단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3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국제구약학회의 성경고고학 분과모임에서 제기된 이 폭탄선언은 곧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졌고 유럽 학자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로마 대학의 권위 있는 구약학자인 소진(A.Soggin) 교수는 강단으로 올라가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 후 제르탈의 제단은 다름 아닌 근처의 농부들이 만든 망대라고 주장했다. 그의 너무나도 강한 어조 때문에 한동안 강의실이 술렁거려 더 이상 순서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80년부터 세겜을 중심으로 하는 므낫세 지역의 철저한 고고학적 조사를 진행하던 제르탈 교수는는 해발 940미터 높이의 에발산 중턱에 위치한 한 돌무더기를 주시했었는데 물론 돌이 많은 산지에서 포도밭이나 올리브 밭을 가꾸기 위해 치운 돌을 모아 놓은 많은 돌무더기들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 유난히 에발 산의 것이 이 고고학자의 눈에 띈 이유는 바로 근처에 흩어진 구약시대의 토기 조각들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성경고고학의 달력이라 일컫는 토기 조각들은 그 지역이 곧 어느 시대에 번창했던 주거지였는지를 시사해주기 때문에 주변과 구분되지 않는 흙 언덕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유적지 조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곤 한다.
1982년부터 2년간에 걸친 발굴을 통해 이 돌무더기 아래에서 철기 I시대(서기전 1200-1000)에 건설된 제단 구조물이 발견되었고 한 변의 길이가 8-9미터 정도의 직사각형의 제단은 벽의 두께가 1.4미터나 되는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확인 하게 되었다.
이 제단의 한 가운데 바닥에는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직경 2미터 정도의 원형 화로가 놓여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약 시대의 다른 제단들과 마찬가지로 동쪽에서부터 제단위로 올라가는 경사로도 있었다.
제단 위에서 짐승을 불에 사르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사장들이 올라가는 이 경사로라고 추정되는 길이가 7미터 폭이 1미터 정도였다.
제단 주위로는 거룩한 장소임을 구분하는 돌로 쌓은 울타리가 있고 한쪽에는 출입구까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내부에 채워진 흙과 불에 탄 재 사이에는 여호수아 시대의 토기 조각들과 동물들의 뼈가 많이 출토되었다.
짐승 뼈들에 대한 분석 결과 이들은 대부분 섭씨 400-600도 정도의 불에 태워졌고 소, 양, 염소, 사슴 등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사슴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레위기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희생 제사물들이다.
원래 희생 제사는 가축의 도살권을 가진 제사장이 특정한 장소에서 가축을 잡은 후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잘라서 불에 굽는 행위인데 여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제의적인 요소가 첨가됨으로써 고대 종교의 중심적인 행사로 정착된 것이다.
모세는 요단 건너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에 들어간 후 세겜에 있는 에발 산에 제단을 만들 것을 명령했고(신명기 27:4-8), 이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들로 제단을 쌓았고 열두 지파를 절반으로 나누어 한 부류는 그리심 산 쪽으로 그리고 다른 한 부류는 에발 산을 향하게 한 다음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차례대로 낭독하였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여호수아 8:30-35).
이 제단이 여호수아 시대의 것이라는 증거는 발견된 토기류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목이음 항아리’, 즉 물이 부족한 산악 지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멀리 떨어진 샘으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긷기 위해 대용량의 항아리가 필요했는데 너무 커서 몸통과 아구리를 분리해서 만든 다음 목 부분을 이은 것들이며
정착 시대(서기전 1200-1000)의 특징적인 토기로 분류되는 토기다.
람세스 2세-3세 시대(서기전 1279-1153)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양식의 스캐럽 도장도 발견된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민족적, 종교적 출발지는 예루살렘이라기보다는 세겜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도 세겜이었고 비록 출애굽 후 여리고를 먼저 점령했지만 아직 그 정확한 위치를 제르탈 교수는 길갈를 밝혔지만 학계에서는 인정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도 당시의 법궤가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여리고와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 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점을 제외 하더라도 첫 번째 종교적 중심지는 세겜의 에발산 제단이다.
한편 이 제단을 발굴했던 제르탈교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리적 기원을 요단 건너편의 얍복강이 흐르는 숙곳 평야로 보고 있고, 이곳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 나루터를 건너 파라(Farah) 골짜기를 따라 세겜 분지에 도달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물론 종교적 중심지는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야훼의 상징인 법궤가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온 후 맨 처음에는 여리고 근처인 길갈에서 시작된다.
법궤가 있던 야훼 성소는 세켐의 에발선 제단, 실로의 야훼의 전등으로 이동하다가 주전 1050년 경 에벤 에셀 전투에서 법궤가 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허지만 법궤를 탈취한 블레셋족도 야훼의법궤 때문에 그들이 섬기고 있는 다곤 신전에 있는 신상들이 넘어지고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남으로서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다시 법궤를 이스라엘쪽의 벧세메스로 돌려 보냈다.
그후 예루살렘을 여부스족으로 부터 빼앗은 다윗왕은 야훼의 상징인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셨다.
즉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세켐에서부터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여 예루살렘으로 왔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수가 있다.
세겜지역
축복의 그리심산, 언약의 세겜 땅(19 왕의 대로King's Highway 비전 트립):요셉이 입었던 채색옷은 당시 왕과 귀족만이 입었다고 합니다.(염료가 금보다 비쌌다고 하내요)
[4K] 드론으로 떠나는 이스라엘 순례 4 - 에발산(여호수아의 제단)
10-B 여호수아 8장 에발산의 제단 (1)
샤밭예배 | 어떻게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할 것인가? (4) | 세겜 언약의 의미 | 한명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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