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0:1~17 내가 왔나이다 2021. 2. 24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6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7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9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0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 11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12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14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 15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 16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표제어가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다윗이 작사하고 작곡은 지난주에 본 대로 아삽, 헤만, 여두둔과 같은 사람들이 합니다. 그런데 찬양지휘자들의 시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선견자로 불렸듯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딤후3:16).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읽고 이해하는 것도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여야 합니다(엡1:17).
베드로전서 1:10~12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모든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요5:39). 그러면 구약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입증하였을까에 대한 답변이 베드로전서의 이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후에 받으실 영광과 때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서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이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성령이 임한 신약의 사도들도 이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천사들도 알지 못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기도의 응답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합니까? 수많은 간증들을 들어보면 자신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는데 기도하였더니 응답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가 막힐 웅덩이가 어떤 것들입니까? 대부분 삶의 환경을 말합니다. 질병의 고통, 물질의 고통, 인간관계의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이 일제 강점기에 고생한 사람들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한국전쟁 때 당한 고통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고생을 많이 한 분들은 자기들의 고생담을 책으로 써도 몇 권을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편 90편을 보면 칠팔십 년 인생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는 것이기에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이게 고생 총량 일정의 법칙이라는 겁니다. 어느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만 최고로 고생한다고 합니다. 자기만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가 막힐 웅덩이가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입니다.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나이다” 표준 새 번역입니다.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재앙이 나를 에워쌌고, 나의 죄가 나를 덮쳤습니다. 눈앞이 캄캄합니다. 나의 죄가 내 머리털보다도 더 많기에, 내가 낙심하였습니다.” 다윗의 기가 막힐 웅덩이가 무엇입니까? 죄악의 웅덩이입니다. 나의 죄악이 나를 덮쳤습니다. 그 죄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눈앞이 캄캄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낙심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기가 막힐 웅덩이를 아십니까?
지금 교회 성경 읽기가 욥기입니다. 욥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친구들이 죄로 인하여 그런 고난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이 말한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겁니다. 누가 이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구원하여 줄 것인가 하면서 탄식합니다. 자기는 이런 고난을 받을 만큼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말한 죄를 회개합니다. 그러므로 욥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결국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 죄란 자기 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기적을 보면서 자신은 죄인이기에 나에게서 떠나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그 죄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그 고민이 로마서 7장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한 문제들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죄악의 수렁에서 끌어올려 달라고 간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은 것이 반석 위에 서는 겁니다.
2절을 다시 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은 죄악의 웅덩이와 수렁입니다. 이 죄악의 웅덩이와 수렁에서 스스로 나올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시편 65:3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이런 자들은 죄악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반석 위에 세워진 자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저갱과 같습니다. 밑이 없어서 끊임없이 떨어져 내려가는 우리를 반석 위에 세우시기 위하여 누가 오셨습니까? 만세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인보다 더 낮은 자리로 가셔서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우리를 끌어올려 자기 위에 세우십니다.
3절입니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새 노래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기가 막힐 죄악의 수렁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노래합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노래하는 겁니다. 그 새 노래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께 있다고 찬양하는 겁니다(계7:10). 이렇게 새 노래는 하는 자들을 사람들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게 하는 겁니다.
4~5절입니다. 새 노래의 내용이 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교만하고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거나 자기들의 의를 믿기에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복이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며 다윗이 받은 복입니다.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그 죄가 가려짐을 받는 자들이 받는 복입니다. 그것도 일한 것도 없이 은혜로 받는 복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의 머리털보다도 많다고 하지만 우리 주님의 용서는 영원하시기에 그 놀라운 기적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1~5절을 다윗의 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앞에서 본 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이기에 이 내용도 그리스도께서 하실 내용으로 봐도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묶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하는 말씀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는 말씀도 머리털보다 더 많은 죄라고 하는 이런 내용도 그리스도의 일로 봐야 합니다. 이렇게 봐야 할 이유를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히브리서 5:7~10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이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고 응답을 받는 겁니까?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 곧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길이 그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어제 14살 되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전화 문자로 질문이 왔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태어나는 것이 죄인가요? 태어나는 것이 죄라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는 왜 하셨나요? 고린도후서의 이 말씀으로 답을 하면서 죄도 예수님을 위한 도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답변이 왔는데 ‘죄인이 태어나 죄를 짓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만이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군요! 예수님을 더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심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당하시는 그 저주를 오롯이 받아 내시는 일이 성육신과 그 생애와 십자가입니다.
본문 11~13절을 먼저 봅니다.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여 달라고 합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이런 기도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대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온전히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그 육체에 죄를 정하시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총을 구하며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다윗의 이런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읽어지는 겁니다.
14~15절입니다. 11~13절의 길로 가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함하는 일들을 하지만 그 일들이 오히려 그들이 심판을 받는 길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며 비웃는 자들을 이런 시편에서 미리 볼 수 있습니다.
16~17절입니다. 그러나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를 찾는 자는 어디서 주를 찾아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주의 구원을 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가난함과 궁핍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의에 대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기도합니다.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며 나를 건지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이 예언을 하고 예수님께서 이 예언을 이루셨기에 오늘도 성도는 이런 간구를 하게 됩니다.
본문 6~10절입니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셨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시대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율법이 엄연히 살아있는 시대에 율법을 받은 사람으로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다윗이 이런 시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라고 합니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다고 합니다. 다윗 시대의 두루마리란 모세오경입니다. 물론 여호수아서도 포함이 되겠지만 율법에서 제사가 아니라 한 사람을 지목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내가 왔다고 하는 다윗의 시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리스도가 왔다는 말을 다윗이 대신하는 겁니다. 그리고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그 사람이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긴다고 합니다.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는 이유는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요4:34). 결국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일을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겁니다(요6:40).
히브리서 10:1~4절입니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율법으로 명한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이어지는 5~10절입니다.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ㄱ)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시편 40편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단번에 영원히(히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