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종교개혁의 제 2세대인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 논쟁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하려는 마틴 부처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영적 임재설"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례전
먼저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는 약속에 대한 인장이며, 언약의 표징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표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고 복음이 선행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성례전에는 반드시 성령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성례전이 정말로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없는 성례전은 아무리 거창하게 거행되어도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성만찬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빵을 받을 때 빵이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 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성찬의 목적과 효과
성찬 제정의 목적에 대해 칼빈은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제정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방법으로 성찬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빵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찬의 효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신자간의 일치의 효과가 있음을 설명한다. 즉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빵은 이 단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과 성령
칼빈은 우선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또한 성령이 동반하지를 않으면 성례는 유익이 없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를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멀리 계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영의 양식이 되도록 결합시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은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화체설을 반대하며, 쯔빙글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재설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만찬에 임재 함을 말한다. 그는 "성찬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거룩한 의식의 효과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며 이적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 참예의 띠가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성만찬 실제
칼빈은 "성찬을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1537년 제네바의 소 의회의 대표로서 제네바에 있어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대한 문서에서 성만찬을 자주 - 일주일에 한 번씩 - 집행하기를 주장했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Straburg에서는 월 1회씩 성찬식을 집행하였다. 그는 1541년에 재차 제네바의 소 의회에 성만찬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다시금 거절되었고 이에 대해 의회는 일 년에 4회의 성만찬 집행을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