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1:25)이 뭔지 모른다면
믿음과 행함의 함수를 풀 수 없는 단편적인 이론만 가진 신앙입니다.
그건 히브리서를 모르므로 십자가를 통해 세상에서 건너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우리에게 오신 사도이시며
우리를 이끌고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제사장이신 그리스도(히3:1)의
동선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생명과 복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신앙입니다.
야곱의 경우라면 벧엘에서 본 사닥다리의 환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먹을 음식과 옷을 주고 평안히 고향에 돌아오게만 하시면
이 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서원에 하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창28:20-22)
야곱은 벧엘의 참 의미와 사닥다리의 비밀이 뭔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얍복강을 건널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뵙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브니엘 곧 하나님을 대면했다고 말합니다.(창32:30)
지금의 기독교 신앙의 수준은 흡사 어린아이에게 전기가 어디서 오냐고
물어보면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아이가 자신 있게 벽에서 온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벽의 콘센트에 코드가 꽂혀 있으니 전기가 거기서 오는 것처럼 알고 있는 거죠.
어린아이는 밖에 있는 변압기나 변전소와 발전소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와 같이 오직 예수, 십자가 또는 모든 것은 하나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진 하늘 문이며
그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모릅니다.(요1:51, 14:6)
따라서 진리의 성령에 의해 아들 안과 아버지 안에서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그 길을 온전하게 파악하여(히3:1)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히브리서를 건너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실상의 믿음으로
실재의 존재가 되고 또 몸의 행함을 이루는 실체가 될 수가 없습니다(히4장)
그래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실천하게 하는 원리 곧 공식이 되는 겁니다.
신앙의 이론이야 왈가왈부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처럼 곧 잊히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에게 실험해 보고 실증이 된 기억은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허벅지가 부르지는 항복의 순간에 이 사닥다리의 비밀을
깨닫고 브니엘의 실체를 보게 되므로 얍복강 이후는 이스라엘의 삶이 된 겁니다.
우리에게도 들은 바 말씀으로 우리 몸이 성전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므로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고 배웁니다.
그러나 이론과 같은 지식을 실제로 실재가 되어 실체가 되도록 하는 데는
많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진리의 성령을
따라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는 영광의 길을 바라보고 간절하게 소망하게 됩니다.
만일 이와 같은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면 좌편에는 세상화가 된
고린도교회가 있고 우편에는 육체의 자랑꾼들이 모인 갈라디아교회가 있습니다.
감성적인 열광주의와 지성적인 경건주의 교회가 양분되어 있듯 말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계시는 몸 성전이 되어 새로운 존재(new creation)가
되었다면 지성소의 법궤 안에 있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만나와 돌비의
위력을 실제로 체험하며 그 안에서 영광이 실재가 되어 가고 몸으로
나타나는 실체화되는 행함의 단계로 나아가겠지요.
이와 같은 발전과 성취가 없는 사람에게 경건은 혀를 재갈 물리는
것(약1:26)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 봐도 그건 개구리 낯짝에 물 끼얹기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그 안에 세팅이 되어 있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있고 입술에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 사람은 영의 생각으로 혀를 길들여 갈 수가 있습니다.
사실 지식만 가진 입술 신앙은 복을 털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공허한 이론은 생명이 유실이 되는 걸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이 외면하시니까요.
따라서 진정한 경건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를 알고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파악하고 그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자신 속에 벧엘이 되어 있고 하늘가는 사닥다리가 놓여 있고
자기를 쳐서 십자가의 도에 복종시키는 경건의 훈련의 코스를 안다면
자기 혀를 재갈 물리고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경건함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약1:27)
말씀 묵상을 통해 영으로 생각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롬8:6)
결국 약1장은 시험을 통한 믿음의 시련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의 대상인 야곱의 신앙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오늘 우리가 받은 새 언약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를 숙고하고 있는 겁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Good Morning and Good breakfast 😋
Hallelujah!!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