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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글,과연 세종이 만들었을까? | | | ☆<2>수메르 & 민족사 게시판 |
2011.01.13 10: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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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은 결코 세종이 화장실에서 혼자서,혹은 왕실이나 집현전학사들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시대부터 우리민초들이 널리 써오던 글을 범어와 티벳어,그리고 파스파문자를 참고로 체계화시키고 완성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퍼온 글"참조)
신미대사(信眉大師) 김수성(金守省)은 집현전학사 출신으로 티벳어,범어,파스파문자,중국어등 5개국어에 능통했으며 그가 세종의 명을 받아 십수년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훈민정음의 창제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훈민정음은 당시 민초들이 쓰던 "가림토문"과 불경번역시 주로 쓰던 "구결문"을 바탕으로 범어와 티벳어 그리고 파스파문자를 참고로 해서 만들어졌는데, 세종,문종,수양대군등과 일부 집현전학사들이 참여했지만 음운론에서 세종과 더불어 혹은 세종을 능가할 정도로 풍부한 언어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신미대사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한다.(구결문의 경우는 고려때부터 불경번역시 쓰이던 한자의 파자인데,90년대 일본 NHK에선 무려 15분에 걸쳐서 자신들의 문자인 가나의 기원을 파헤치는 특집방송을 했는데 그 내용의 결론은 고려의 구결문자가 일본으로 "각필"형식으로 건너가 가나문자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이 신미대사로 하여금 집현전학사들에게 "범어"에 대해 직접 강론하도록할 정도였다고 한다.불경은 티벳어와 범어를 모르면 제대로 된 해석을 하기 어려워 그 2개의 문자를 공부하는 것이 고승들에겐 필수적이었다고 한다.
범어(산스크리트어)와 티벳어(범어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문자)는 놀라울 정도로 한글과는 그 자음과 모음체계가 유사해 이 문자를 공부해본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훈민정음이 이 문자들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한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문화적,정치적으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지 수십년밖에 안되어 그 때까지도 파스파문자가 낯설지 않아 지식인층에서 그 문자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훈민정음 창제시 역시 티벳어,범어와 더불어 파스파문자도 참고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범어와 티벳어,파스파문자의 원형은 단군조선시대의 문자 가림토문이라고 하니,결국,한글의 원형은 가림토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과 문종은 대를 이어 신미대사 김수성에게 "존자(불교식으론 스승이란 뜻의 극존칭으로서 "대사"라는 호칭보다 몇단계위의 대우)"의 칭호를 부여하려고 했으나 집현전학사들 대부분과 유학자들의 극력 반대에 부딪혀 단지 "대사"란 호칭만 주는 것으로 후퇴했고 훈민정음 창제도 신미대사가 아닌 "세종"자신이 만든 것으로 반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왜냐면 숭유억불의 유교사회에서 유학자들이 결국 백기를 들고 세종의 훈민정음창제를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훈민정음창제의 실질적인 주역이 "신미대사"였슴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되는 "존자"라는 호칭은 절대 반대했기 때문이다.즉,유교가 불교의 아래에 서게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훈민정음을 세종 혼자서 그냥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세종은 신미대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혼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는데, 후세사람들은 이런 전후맥락을 모르고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 후,용비어천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훈민정음을 사용한 문집들은 불경번역서이며, 말년에 불교에 심취했던 세종과 문종 그리고 세조의 행적은,정치적인 이유도 있지만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십수년동안 그들이 스승처럼 여겼던 "신미대사"의 영향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말하지만 ,훈민정음은 우리 민초들이 단군조선시대부터 사용하던 "가림토문"과 고려시대부터 승려들이 불경번역시 상용하던 "구결문"을 바탕으로, "티벳어"와 "범어(산스크리트어)","파스파문자"를 참고로 하여 만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세종과 문종,수양대군이 지휘 및 참여했으나 실질적으로 주된 역할을 한 분은 5개 국어에 능통했던 집현전 학사 출신의 신미대사 "김수성"이었다는 사실이다.
(http://blog.naver.com/maenam111/90042902597)참조...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에 세종과 문종,그리고 세조가,훈민정음 창제의 숨은 주역 신미대사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없었던 것이 집현전학사들을 비롯한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때문이었는데,현대에도 이 사실을 공론화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이 사실이 공론화되면 개신교(기독교)계통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이 사실을 부정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작년 2008년에 이명박 정부하에서 개신교에 의해 불교가 얼마나 찬밥신세가 되었는지를 잘 생각해보면 ,훈민정음 창제의 실질적인 주역인 신미대사 김수성은 영원히 그 공로가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
훈민정음의 실질적인 주역이 승려였다는 사실을 개신교(기독교)계통에선 아마도 수천년이 지나도 인정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훈민정음,한글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좀 더 공부하고 나서 신중하게 기록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만이 우리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백년 ,수천년 후의 우리 자손들에게 큰 교육자료와 생생한 증거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세종과 신미대사는 한글을 <창제>했다기보다는 <완성>을 한 것이다.
군사정권을 싫어한다는 사람들이 세종을 띄우기위해 세종이 한글을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위해, 가림토문의 존재를 기록한 한단고기도 부정하고,단군조선역사도 부정하는 행태는 정말 매국적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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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은 우리것을 새로이 재창조 한 것이다.
한글은 단군조선의 옛글자에서 비롯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백성들은 이미 한글(언문)을 쓰고 있었다.
고조선때부터 한글이 있었다.
1번이 고대한글인 가림토
2번이 훈민정음
3번이 고대한글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조금 변형된 신대문자
훈민정음(한글)의 우수성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세계적인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1994년 7월호 특집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한글에 대한 전문가의 분석을 실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글의 우수성을 극찬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한마디로 말해서 한글은
"세계 문자역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라는 것이다.
한편 언어학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한글이 어떻게 한 개인의 연구에 의해 단기단에 창제될수 있는가?'
세계 문자 역사상 그런 경우는 단 한건도 없기 때문이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혼자 만들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역사적 배경을 보여준
KBS역사스페셜 [한글은 집현전에서 만들지 않았다](1999.10.9방영)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있다.
조선의 4대 임금이었던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남몰래 자식들과 더불어 한글을 연구한 지 10여년만에
마침내 28자의 정음을 창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한글창제는 세종대왕 혼자만의 비밀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재위 25년(1443년)에 전격적으로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당시 집현전의 실직적인 책임자였던 최만리 등 일곱명의 노장학자들은 반대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의 소장학자들과 더불어 훈민정음 해례본(1446)과 동국정운(1447) 등 한글관련 서적의 편찬사업을 계속 추친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아무 불편없이 언어와 문자를 활용하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군주로서의 의지가 확고하혔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등이 반대하는 글을 올리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언문은 본래 다 예글자 이고 새로운 글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예글자를 모방햇다고 하나 소리를 사용하는 것이나 글자의 조합은 옛글자와 달라서 실로 근거한바가 없사옵니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 전조선(고조선)때 부터 전해오는 언문 을 빌려 쓰신 것이긴 하지만
지금은 한자를 써야 할 때인데 어찌 지나간 것을 따르려 하시오니까?
(借使諺文自前朝有之以今日文明之治變魯至道之意尙肯因循而襲之乎)
* 언문은 한자와는 서로 아무런 상관됨이 없는 시골것들이 쓰는 말일뿐이옵니다.
(諺文與文字誓不干涉專用委巷俚語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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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세종대왕은 한글을 [훈민정음] 이라고 발표했지 [언문]이라고 한 적이 없다.
최만리등의 말에서 보이듯이 [훈민정음창제] 이전에 이미 예로부터 전해오는 [언문]이라는 것이 있었고
백성들이 그 [언문]을 쓰고 있었으며
[훈민정음] 즉 한글은 그 언문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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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께서 상소문을 다 보시고 최만리 들에게 말씀 하셨다.
" 그대들이 말하기를 (훈민정음의) 소리를 사용하는 법이나 글자의 조합 방법이 옛것과 다르다 했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소리가 다르지 않더뇨?"
(上覽& #18429;謂萬里等曰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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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용문자(俗用文字) - 신경준의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 韻解)]에 의하면 동방에는 예로부터 속용문자 (백성들 사이에 쓰이던 문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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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고조선 시대부터 써왔다는 언문 즉 [고대한글]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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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이전 한글 "가림토" 발견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서
ㅅ ㅈ ㅠ 자모 뚜렷 학계 관심
- 부산일보 2003/03/13일자 38면-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 고대 한글 바위]
훈민정음 창제(1443년) 이전의 고(古) 한글로 추정되는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국내 최초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사진)
가림토 문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이암(李巖)이 저술한 단군세기에
제3세 단군 가륵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가로 1.8m,세로 3.4m)에서
가림토로 추정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이 바위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글꼴이나,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돼 있다.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62·경북 경산시 사동)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경산=정철수기자 csjung@
훈민정음은 단군조선의 옛글자에서 비롯되었다.
훈민정음 이전에 이미 한글의 원형 글자가 있었다.
정작 한글을 창제한 당사자인 세종대왕은 “ 옛 글자를 본떴다 ”고 말했다. 또 위 방송에서도 나왔지만,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 운해>(1750년)에는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용하던 속용문자 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한문 외에도 민간에서 사용되던 문자 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백성을 위해서 언어를 연구했던 세종대왕이 세간에서 사용되던 이런 문자들를 참고하였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다.
이는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자 사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양반계급에 속한 최만리는 언문을 왜 새로 만드냐며, 하물며 옛 글자와 똑같은 것을 왜 다시 만들 필요가 있냐고 세종대왕에게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 민족에게는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부터 옛 글자가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글’이나 ‘속용문자’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우리 민족의 고대사와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에 대단히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4000여년 전 단군시대의 가림토 문자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28자)과 단군조선시대의 문자로 알려져 있는 가림토 문자(38자)를 비교해보자. 모음이나 자음의 모양이 두루 비슷하다. 외형적으로 보더라도 가림토 문자는 가히 한글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발음의 원리는 따로 만들었으나 글자는 옛글을 본떴다 ’고 한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말이 실감나지 않는가.
실제로 가림토 문자의 38자 중에서 10자를 빼면 훈민정음 28자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한경대전』(임균택 저, 충효예출판사 2001년)이라는 책에 의하면, 조선 세조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28자의 근본이 『징심록』의 가림토문에서 취해졌다”
가림토 문자는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4184년전 단군시대 때, 제3세 단군이었던 가륵단군께서 BC2181년에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고 이를 ‘가림토’라 불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단군세기」 와 『단기고사』의 기록이 동일하다).
한글과 가림토 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민족사학자의 글 및 언론과 방송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1996년 한글날에 방영된 Q채널의 「한글, 그 비밀의 문」도 그중의 하나)
학자에 따라서는, 가림토 문자 38자 중에 X, M, P, H 및 I, O 등 알파벳과 유사한 글자에 주목하기도 한다(참고로 알파벳의 역사는 3000년이다).
그밖에도 중국의 갑골문자와 일본의 초기 신대문자, 몽고의 파스파문자,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등이 단군시대 가림토 문자와 유사하다는 학설 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참고로 알타이어의 사용범위는 터키, 몽고, 티벳, 만주 퉁구스어, 한국어, 일본어 등이다)
세계문자역사의 종주는 바로 우리 배달민족
앞으로 우리 나라 상고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 우리 한민족이 세계 문자 역사의 종주국이며, 배달국은 세계최초로 문자를 가졌던 일등 문명국이었음이 만천하에 밝혀지는 그날이 올 것이다.
일본에서 한글로 토속신 모신다.
일본 시코쿠 도쿠시바시 야마시로 마을에서 사용하고 있는 토속신 `에비스'의 계시록에 한글이 적혀 있다. 고대 한글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
고대 한국인이 건너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한글도 전한 것으로 추정.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
제558돌 한글날을 나흘 앞둔 가운데 일본에서 한글 부적을 사용하며 토속신을 모시는 신사(神社)와 마을이 다수 있는 것으로 확인돼 눈길을 끌고 있다. 5일 부산외대 김문길(金文吉) 교수에 따르면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시 야마시로라는 마을에는 신사와 집집마다 이 지역의 토속신인 `에비스(エビス)'를 섬기고 찬양하자는 내용의 한글 부적을 붙여놓고 있다. 또 이 마을 주민들은 에비스신 축제와 경조사 때 에비스신이 직접 적어줬다는 이 부적을 일본어로 낭독하고 있으나 한글로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 이 '에비스' 라는 신은 고대한국인으로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을 가르친 사람으로 보임.
일본인들에게 신으로까지 추앙받은 한국인으로 보임. 사실 많은 고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음. 그 시기를 일본에서는 '신대' 즉 '신들의 시대' 라 하고 한글을 '신대 문자' 라 함.)
주민들은 특히 115페이지 분량의 `계시록'을 갖고 있는데 이 계시록의 제목도 `가이ㅣㅏ아(카미야마.神山)의 계시록'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김 교수는 관련자료를 공개했다.
계시록에는 생활법규와 신의 계시 등을 담고 있어 주민들은 이 책을 기독교의 성경처럼 여기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는 이 지역 외에도 오카야마 비전시 가가도와 후쿠오카 히예신사, 나고야신사, 관서지방의 한 역사자료관 등에도 토속신은 다르지만 이들 신을 찬양하는 한글 부적을 붙여놓고 있거나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끝)
이하 일본에 있는 신대문자
-고대한글이 건너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