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반을 넘긴 사무실은 하루 일의 피로가 서서히 밀려와 적당히 나른해진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그런 나른함을 휘젓듯이 긴급 팀장 회의가 소집된다. 5시, 그 시간에 긴급회의가 소집된 적이 없어 회의실로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에는 궁금함과 긴장감이 감돈다. 운영지원 팀장이 운을 뗀다.
“후보님 지시 사항입니다. 지금 태풍 피해가 막심한데, 경선 일정을 따라가느라 민생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크시다고, 우리 캠프에서라도 피해 농가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봉사활동을 계획해 보라고 하십니다. 후보님은 내일 부산 경남 TV토론회 마치고 차편으로 합류하시겠답니다.”
아하, 다들 코앞의 일에 정신이 없어 그런 일은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정작 가장 바쁠 후보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후보를 도와 일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해지면서 민망한 생각이 와락 밀려든다.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 돼서 일의 가닥이 뚝딱 잡혔다. 출발은 31일(금요일) 오전 5시 50분 캠프 앞에서, 목적지 전남 나주 일원, 참가 인원은 다다익선이로되 자원하는 사람 중심으로, 각 팀장은 참가 신청자 파악해서 8시까지 운영지원팀에 명단 통보할 것.
다음날 아침, 출발신간에 맞춰 캠프 앞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 주차해 있고 먼저 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총 39명이 신청했단다. 버스 한 대에 맞춤한 인원이다. 이른 시간에 모여서들 그런지 버스가 출발하자 다들 곯아떨어지고…, 나주시 금천면 오강리에 도착한 시간이 10시 30분.
현지에서 가이드 역할을 맡으신 전남 도의회 이병기 의원께서 설명을 하신다.
“이렇게 멀리서 와주셔서 참말로 감사합니다. 여그 일대가 태풍 피해가 막심한디요, 열분들은 오늘, 긍게, 배 과수원 낙과 줍는 일에 배치가 되겄습니다. 낙과 줍는 일이 가장 시급하기도 하고 또 단순 작업이라 서울 분들이 일 하시기에 적당치 않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광주 현지에서 합류하신 분들은 저그, 비닐하우스 시설 단지에서 일을 하시겠는데 거그는 솔찮이 힘들어요. 그래서 특별히 여러분들은 과수원으로다…. 여튼 매우 감사하게 생각 하고, 수고들 많이 해 주십시요잉.”
배 밭에 당도해 보니 바닥이 온통 하얗게 뒤덮여있다. 배는 일일이 열매를 봉지로 감싸주어야 하나본데, 그게 몽땅 땅에 떨어졌으니 배 밭은 마치 흰 공 뿌려놓은 듯, 봉지들이 빼곡하게 굴러있다. 아이고, 이일을 어쩌나, 바라보는데 기가 찬다. 함께 간 사람 모두 비슷한 심정인지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터져 나온다.
곡식이며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배가 아이 머리통만큼 자라기까지 얼마나 여러 번 손길이 갔을 것인가. 한데 하루아침에 몽땅 떨어져 버린, 자식 같은 배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오죽하랴 싶다.
과수원 주인아저씨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바구니를 나눠들고 밭으로 들어간다. 다들 농사지은 분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전해진 탓인지 묵묵히 배를 주워 담는다. 사람의 손길이 한 데 모이면 이렇게 큰 힘이 나오는 것인지,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일이 금방 끝난다. 밭 하나 해 치우는데 삼십 분 남짓 걸리는 것 같다. 물론 밭 크기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동네 앞 정자에 모여 도시락으로 마련된 점심을 먹고 다른 밭으로 옮겨가 해치우고, 또 해치우고…. 후딱후딱 끝나면서 말갛게 치워지는 밭을 바라보니 보람도 있고 일하는 재미도 있다. 다들 땀범벅에 흙투성이가 되어도 표정들은 밝다.
낙과 줍는 일을 대강 마치고 후보께서 와 계신다는 비닐하우스 시설지구로 이동을 했다. 비닐하우스의 피해 상황이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하다. 후보는 이미 한차례 일을 끝냈는지 연신 땀을 닦으면서 언론사들과 인터뷰를 하는 중이다.
농로 가운데서 밀짚모자에 수건을 목에 두르고 흙 묻은 장화를 신은 그의 모습이 국민들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치게 될까를 생각해 본다. 한 장면의 좋은 그림을 위해 그가 몇 시간을 달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까. 캠프 상근자들에게 봉사활동을 제안하면서 실질적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계획을 잡아보라 당부한 그의 진심이 국민들께 전해지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곧 우리도 비닐하우스를 정비하는 일에 달려들었다. 찢어진 비닐을 걷어내고 쓸모없어진 각종 줄이며 허섭스레기들을 걷어냈다. 비닐하우스 동 사이의 좁은 통로는 온통 진창이 되어 있는데도 몸 사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일을 하는 사람들, 비록 하루의 봉사에 불과 하지만 스스로 알아서 일머리 잡아가며 뒷손 안 가게 매듭짓고자 땀 흘리는 사람들 - 우리는 서로 그러자고 얘기 나눈 적은 없었지만 이심전심이 되어 그런 마음으로 일했다.
해가 뉘엿할 무렵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을 감안해 대강 일을 매듭지었다. 광주 분들이 두부에 묵은 김치, 막걸리를 준비해 오셨다. 우리 모두는 농로에 둘러서서 그 음식을 달게 나눠 먹었다. 음식은 전라도라더니, 김치가 어찌나 시원하고 맛있게 익었던지 큼직큼직하게 썬 두부에 척 걸쳐 한 입 먹었더니 하루의 피로가 싹 걷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