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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전투
(공지글, "기벌포 위치비정에 관한 논문" 중에서 부분 발췌하여 백강해전을 분석한 글이다.)
※부분이 부연한 글이다.
663년 동아시아 4개국인 나당연합군과 백제왜연합군이 참가한 기벌포(군산) 전투에서 백제왜연합군이 패배함으로서 백제는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나당군의 기벌포 상륙작전후 백제는 실로 어이없게 도성을 함락당한다. 그러나 의자왕과 대신들의 항복으로 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나당연합군의 기습에 의한 도성의 함락과 백제 왕족의 몰락은 모든 백제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무력감에 빠지게 하였으나 사비성과 웅진성에서의 나당연합군의 살육 과 약탈의 만행에 놀라 정신을 차린 백제인들은 각 지방의 토호인 성주들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않아 백제의 전국토는 부흥군의 세력안에 들어가게 되어 도리어 나당군이 웅진과 사비성에 포위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제부흥운동이 이렇듯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나당군의 기습작전으로 사비성과 웅진성 지역 일부는 함락되었지만 이들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제 성곽들이 건재한 상태였다는 것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백제가 망하기전 전체 성곽이 200여 성인 것에 비추어 볼 때 부흥군에 가담한 성이 200개 성이라 한다면 웅진사비의 도성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부흥군의 세력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부흥군의 지도부에 분열이 일어나 부흥군의 양대 우두머리 였던 복신장군이 도침장군을 죽이고 병권을 장악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 백제가 망하기 직전 200여성 이었다는 의미는 행정조직을 가리키는 것이지 개별 성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멸망할 당시 백제는 5부·37군·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萬戶)였다.)
이후 복신마저 일본에서 귀국한 부여풍왕에게 죽음을 당하는데.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기벌포(군산)는 안타깝게도 다시 한번 전쟁의 현장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기벌포(백강)에서 격돌한 양 진영의 당수군과 일본수군에 의한 백촌강 해전은 백제부흥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으로 이 해전 이후 백제는 비로소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싸움은 백제의 풍장왕이 부흥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복신장군을 죽임으로서 시작된다.
그 과정을 보면 백제부흥군에게 웅진성에 포위 당한채 고전을 하던 유인원의 당군은 본국에 구원을 요청한다. 이에 우위위장군 손인사가 웅진도행군총관이 되어 산둥반도의 군사 이만 칠천을 거느리고 웅진에 도착했다. 이후 663년 6월 복신장군이 풍장왕에게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분열을 틈타 전세를 뒤집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웅진성에서의 작전회의 내용을 보면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성흥산성)을 먼저 치자는 계획이 나왔으나 유인궤가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가림성은 너무 험지에 위치하여 함락시키는데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부흥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 다른성들은 스스로 무너지리라"주장하니 이에 주류성 공략을 결정한다.
나당군이 주류성 공격의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 부흥군의 상황을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풍장왕은 적의 계획을 미리 알고 여러장군에게 말하기를 지금 일본 구원장군 이호하라노기미오미가 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중이다. 여러장군들은 미리 대비하기 바란다, 나는 백촌에 나아가서 기다리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신장군을 살해한 후 고구려 일본에 이미 원병을 청한 풍장왕은 나당군의 주류성 공격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또한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본성인 주류성을 떠나 백촌강에 나간다.
여기에서 필자는 한가지 의문에 빠진다. 적의 내습을 미리 간파한 백제왕이 왜 일본군과 합류하기 위해 백촌강에 나갔을까? 「구당서」열전 백제전에는 '인궤가 백강구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났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풍장왕이 백촌강해전때 일본수군과 함께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일본수군의 패전후 백제왕인 풍장왕이 부흥군의 도성인 주류성이 함락되기도 전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이 적이 자신의 왕성을 목표로 공격해 오는데 왕성을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풍장왕의 목표는 주류성 방어가 아니라는 생각이든다. 그 이유는 주류성의 위치 확인시 주류성의 지리적 특징으로 알려진 내용에 의하면 주류성은 산이 험하고 높으며 골짜기는 좁고 깊어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렵다는 내용이 암시하듯 가림성에 못지않게 험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제껏 나당군의 공격에 굳건히 버틸 수 있었으므로 풍장왕이 주류성에서 수성전을 벌이며 가림성이나 임존성 등에 있는 부흥군으로 하여금 나당군 후방공략을 유도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주장은 주류성의 위치에 따라 가능성이 달라진다. 주류성이 부안 우금산성으로 볼때에는 가림성 임존성은 주류성의 후방 성으로 역할 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조의 답설인귀서에는 '백제의 정예기병이 강기슭 언덕에진을 치고 일본수군을 호위하고 있었다'는 내용처럼 주류성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백촌강에 나왔다는 말은 백제일본연합군의 공격 목표가 무엇이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두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는 풍장왕의 백제정예군과 일본수군이 유인궤의 당수군을 만난 곳은 백강구로서 이 곳은 여러나라의 사서에 일명 백촌강, 백강, 기벌포, 웅진강구라 불리우는 곳으로 그 명칭은 다르지만 한 지명임에 분명하며 이제까지의 앞장에서의 확인작업으로 금강하류의 군산 옥구지역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백강은 군산과 금강이나 부안과 동진강처럼 바로 옆에 주류성과 붙어있는 모습이 아니었을 거라는 점이다. 가까운 거리이기는 하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모습은 아니리라는 추정은 백강과 주류성이 군산과 금강처럼 한 지역이었다면 당 소정방군의 기벌포(백강) 상륙작전의 전투내용을 담은 「구당서」 및 「삼국유사」등의 사료에서 소정방의 기벌포(백강) 상륙작전시 도성규모의 큰 성인 주류성 공략에 대한 내용은 왜 한 단어로 안나오느냐 하는 점 때문이다. 당 소정방군의 첫상륙지인 백강(기벌포)는 전략상 당나라군의 백제공격의 교두보이며 본국인 당나라로부터의 보급물자를 수송받는 입구가 되는데, 이곳에 도성규모(3,960m)의 포곡형 산성(우금산성)이 있는데 소정방의 당군이 그 성을 점령하지 않고 지나쳤다면 말이 되지 않는 내용이고 주류성을 점령했다면 그 산성을 점령한 전투내용이 중국의 역사서에 실려있어야 하는데 어떤 중국의 역사서에도 당군의 웅진강구 상륙시 주류성을 점령했다는 내용은 실려있지 않다.
(※ 소정방의 백제 상륙 지역은 금강하구 또는 아산만 무한천 지역 이지 동진강 유역은 아니다. 사비성으로 진격하기 위해 가까운 지역으로 상륙하는 것은 상식이다.)
또한 「구당서」유인궤전에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는 문장에서 보듯이 만약에 동진강과 우금산성이 백강과 주류성이라면 당의 수군은 백강에 도착함으로써 우금산성이 변산반도에 있음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것과 같은데 다시 육군과 주류성으로 항해해서 갔다면 주류성은 백강에서 뱃길로도 갈 수 있는 곳이며 그 거리가 어느정도 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정도 서로 떨어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명문제는 백강해전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내용을 확인함으로서도 알 수 있다. 「구당서」유인궤전을 보면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自熊津江, 往白江以會陸軍同 周留城)"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백강의 위치를 확인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취급되었는데 일부학자들은 위 문장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내용을 웅진강이라는 하나의 강으로부터 백강이라는 또 하나의 강으로 향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백강이 웅진강 즉, 금강하류의 군산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주장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해석 아래 백강을 금강과 멀지않은 곳에 있던 동진강에서 찾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 또한 앞장에서 충분히 설명하였지만 강이 길 경우 통상 강의 이름은 지나는 곳에 따라 달라지는데 옛곰나루 즉 웅진성 인근의 금강은 웅진강이라 불리웠지만 금강이 사비성을 지나면 금강의 하류는 백강혹은 기벌포라 이라 불리웠던 것은 이미 성충, 흥수의 충언에서 한 지명에 대하여 기벌포와 백강이라는 두지명을 사용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 소정방의 사비성 진격에 의자왕은 백제군을 웅진강 어귀에 주둔시켜 방어하게 하였다는 기록은 어떻게 설명하고, 또한 사비성의 유인원을 구원하러 오는 유인궤를 저지하기 위해 부흥군은 웅진강 어귀에 목책을 만들어 싸우다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임존성으로 물러났다는 기록도 설명하기 어렵다.
두 사건 모두 사비성으로 향하는 상황에서 사비성 부근의 금강변을 웅진강 어귀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가지 점이 명확해지면 풍장왕이 백제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주류성으로부터 백강구로 나아가 일본군과 함께 행동한 원인을 가정해 볼 수 있다. 풍장왕의 이러한 행동은 어떤 군사적 목적으로 주류성으로부터 나와 나당군과 대회전을 계획했다는 추정인데 이러했을 경우 왜 주류성으로부터 떨어진 백강구에서 전투가 있었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면 풍장왕이 주변정세의 불리함을 반전시키고 복신장군의 처형으로 흔들리는 부흥군 왕의 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어떤 파격적인 전략적 성공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욕구에서 풍장왕은 적의 주류성 공략을 사전에 알고 여러 장군에게 미리 대비하라는 주류성 방위계획을 전한 후 자신은 부흥군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함께 백강구(웅진강구)로 나아가 당나라 수군 및 신라육군과 일대 혈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러한 앞 뒤 상황을 고려해보면 풍장왕이 백강구에 나아간 이유는 사비성 때문으로 보인다.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서 갖는 정치적 효과는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부흥운동 초기부터 끊임없이 공략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사비성 수복 이라는 도박을 하기 위해 백제의 정예 기병부대와 웅진강을 따라 배를 몰아 같이 진군할 수 있는 일본의 수군이 함께 웅진강구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나당군은 주류성을, 백제 왜군은 사비성을 서로 목표로 하였기에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이전투는 풍장왕의 입장에서는 백제부흥군의 모든 힘을 결집시킨 전투였기에 663년 8월 27일~28일의 전투에서 육군과 수군이 모두 패한 풍장왕은 주류성이 함락되기 10여일 전인데도 본성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 풍장왕이 부흥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주류성을 떠나 왜의 지원군을 맞이하러 나간 이유를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한 주장에 일면 공감하게 된다. 더구나 나당군은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있어 사비성의 수비는 상대적으로 허약할 수 밖에 없기때문에 더더욱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서두루지 않았다면 풍장왕은 왜의 지원군을 어디에 주둔하게 하였을지 의문이다. 왜군의 주둔지를 생각해보면 굶주리는 주류성은 결코 아니라고 보면 자연스럽게 임시 왕성이었던 피성을 생각하게 된다. 왜의 지원군을 피성에 주둔하게 한다면, 그 피성이 당진의 어느곳에 있었다면, 왜군은 아산만으로 올라올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당나라 배들이 정박하고있다면 자연스럽게 해전이 발생되었을 것이다.
풍장왕은 왜의 지원군을 피성에 주둔하게 하여 서북부의 안정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부흥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당군의 배들이 정박되어 있고, 당군이 타고 돌아갈 배들을 쳐부수어 당군의 사기를 꺾고 나당군과 장기전으로 전쟁을 이끌려는 의도로 백강해전이 발생한 것으로도 볼수있다.)
전투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구당서」유인궤전에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 등은 육군을 이끌고 진격했고 유인궤 및 별수, 두삽, 부여륭은 수군과 양선(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같이 주류성으로 향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백촌강 전투를 추정해보면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백강구(군산인근)에서 전투를 한 후에 수륙이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는 뜻이다. 이글은 「일본서기」의 내용과 날짜 진행상 서로 다른 면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8월 17일 신라군은 주류성에 이르러 왕성을 포위하였고 대당군은 전선 170척으로 백촌강에 진열하였다.'라고 한다. 이 기록 때문에 주류성과 백강이 서로 붙어있을거라는 생각들을 해왔다고 본다. 필자는 백강구가 곧 웅진강구 현재의 군산지역으로 볼 때 「구당서」유인궤전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되며 「일본서기」의 내용 또한 나당연합군이 풍장왕의 백제정예부대와 일본수군의 동태를 파악하였다면 신라의 육군은 주류성을 공략하고 당수군은 사비로 가는 백강입구를 차단하고 있었으리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전투상황을 보면 「일본서기」는 8월 27일 첫해전에서 일본수군이 불리해지자 물러났고 당수군은 굳게 진을 지켰다. 8월 28일 일본장수와 백제 풍장왕은 기상을 보지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돌진하면 당의 수군은 물러날 것이라 하면서 전열도 가다듬지 않고 당수군을 향해 공격하였다. 이에 대당군은 좌우에서 일본수군을 포위공격하여 잠깐사이에 일본수군은 패하고 말았다.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았고 뱃머리를 돌릴 겨를조차 없었다. 이 짧은 글에서 1300여년 전의 해전을 묘사함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의문시 되는 내용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不觀氣象)'의 내용이다. 이 내용을 연기군의 김재붕 선생님은 날씨가 좋지 않은데 전투를 서둘렀다고 생각하고 부안 동진강설의 전영래 교수님은 이내용을 밀물과 써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전선들은 썰물에 해수가 빠져나가자 갯벌에 빠졌고 당군은 좌우에서 일본전함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일본전선을 불태우자 일본수군들이 물에 뛰어들어 빠져죽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먼저 전영래 교수님의 밀물썰물의 시간을 고려치 않았다는 생각에는 공감하지만 썰물에 일본전선이 갯벌에 빠졌다는 내용에서는 다른 의견이다. 한두척의 배도 아니고 일본전함 400척, 당군의 전함 170척의 대격돌에서 어떻게 일본수군만 갯벌에 빠질 수 있을까?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의 전선은 일본 전선에 비하여 규모가 아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물이 빠져서 강바닥에 배가 걸리는 상황에서는 적은 규모의 일본전선보다는 대형인 당의 수군이 더 불리해야 함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오는 필자의 생각에서는 백강구를 강의 폭이 좁고 깊이가 얕은 동진강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 전투상황은 왜수군이 당수군을 향하여 공격하는데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어 갯벌에 왜수군이 빠졌다면 상류에 위치한 당수군은 어떻게 이동하여 공격하였다는지 의문이다. 400척 선단의 거리는 1km 이상 긴 대열이다. 몇몇 앞선 배들이 갯벌에 빠졌을지라도 대부분의 배들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왜수군이 패한 이유가 썰물에 인한 갯벌 때문이 아니라는걸 말해준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이전 군산과 장항 사이의 금강하구와 서해의 합류부분은 지금도 썰물 때면 상류에서 빠져나오는 물로 물소용돌이와 거품이 일어 배들의 항해가 쉽지 않다. 이러한 썰물 때의 세찬 물기둥 때문에 바다쪽에서 강구쪽으로 공격하던 소형의 일본전선은 배의 조종이 어려워 뱃머리도 돌릴 수 없었고 반면에 대형 전선인 당의 수군은 썰물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는 강안의 좌우로 봍어 일본수군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도 지형적으로 백촌강 전투는 그 위치가 금강하구임인 군산지역임이 분명하다.
(※ 위 글처럼 바닷물이 만조 후 썰물이 되면 물의 흐름이 그렇게 빠르게 바뀌게 되는지 의문이다. 더욱이 금강하구는 엄청 크고 넓은 곳으로 소용돌이가 생길 만큼 물살이 빠르다는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섬과 섬사이의 병목지형에서 물살의 흐름이 빠르게 변화되지만, 금강하구 같은 지형에서 밀물과 썰물의 물살 조차 헤처나가지 못하는 배라면 일본에서 한반도 서해까지 올 수도 없다. 400척의 배를 4열로 전후10m 좌우5m 간격만으로도 1000m×20m의 공간을 이루는 대형이다.
밀물썰물의 조수, 갯뻘 때문도 아니다. 기록처럼 거친 풍랑 같은 기상 때문이다. 이미 해안가에 정박하고 있던 당수군은 날씨의 영향을 피한 이후에 만신창이 되버린 왜수군의 선단을 협공하여 불태우고 도망하는 왜병을 도살한 것이다.)
기벌포 전투의 원인
이 전투에는 동아시아 4개국 이 참가하는 국제전의 양상을 띠는데 양 진영을 살펴보면 백제의 육군과 일본의 수군이 한편이 되고 신라의 육군과 당나라 수군이 한편이 되어 대격돌을 벌이는 모습이다. 기벌포(군산)에서 격돌한 양 진영중 당 수군과 일본수군에 의한 기벌포(군산) 해전은 백제부흥군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일대 사건으로 이 해전에서 백제일본 연합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는 실질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대규모 전투가 군산지역에서 벌어진 원인을 살펴보면 백제부흥군에게 웅진성에 포위 당한채 고전을 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본국에 구원을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된다.
(※ 백제부흥의 역사에 종말을 내린 전투는 백강해전이다. 그런데 그당시 수군의 존재가 의아스럽다. 당나라 수군도 왜의 수군도 모두 병사를 수송하여 왔던 배들일뿐 해전을 위한 수군은 아니다. 그러한 배들을 가지고 바다에서 어떻게 전투를 하였을지 의아스럽다. 더구나 왜수군의 배에는 백제부흥군을 위한 많은 병기와 식량, 병사를 태우고 온 배들이다. 당연히 어느 장소에서라도 상륙하여 병사와 군수품을 하선시키는게 급선무였을 텐데 그런 기록은 없고 단지 해전의 기록만 보인다.)
이에 당나라는 우위위장군 손인사가 웅진도행군총관이 되어 산둥반도의 군사 이만 칠천을 거느리고 웅진에 도착했다. 이후 663년 6월 복신장군이 풍장왕에게 피살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당군은 부흥군의 분열을 틈타 전세를 뒤집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웅진성에서의 나당군의 작전회의 내용을 보면 수륙의 요충인 가림성(부여군 임천의 성흥산성)을 먼저 치자는 계획이 나왔으나 유인궤가 이에 반대하여 말하기를 "가림성은 너무 험지에 위치하여 함락시키는데 시일이 많이 걸릴 것이니 부흥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 다른성들은 스스로 무너지리라"주장하니 이에 주류성 공략을 결정한다.
이후 나당군은 주류성에 가기 위하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웅진성을 출발하여 금강을 따라 내려와 군산지역에 도착한다. 반면에 백제부흥군의 풍장왕은 백제의 신하국인 일본에서 만여명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백제의 정예기병과 일본의 수군을 이끌고 백제의 도성이었던 사비성을 수복하고자 수군과 육군이 함께 사비성을 공격 할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인 금강의 입구 기벌포(군산)에 도착한다. 결과적으로 나당군은 주류성을, 백제왜군은 사비성을 서로 목표로 하였기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또한 양측군대는 서로 원하는 목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지리적 전략 요충지인 군산지역을 거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군산에서 만난 것이다. 이 전투는 백제 풍장왕의 입장에서는 백제부흥군의 모든 힘을 결집시킨 전투였기에 663년 8월 27일~28일의 전투에서 육군과 수군이 모두 패한 풍장왕은 주류성이 함락되기 10여일전인데도 본성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수군이 전투에서 패한 이유
당시 전투상황을 보면 금강의 하구 쪽인 내항 인근에는 일본의 전함 400여 척이 진을 치고있고 오성산 인근의 상류 쪽에는 당나라의 전함 170척이 진열해 있었으며 일본전함이 있는 강변에는 백제의 정예 기병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신라 기병이 자리하고 이었다. 첫 전투는 신라 기병이 백제의 기병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되었다. 육지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곧바로 강에서도 싸움이 시작되는데 당시 전투를 자세하게 기록한「일본서기」를 보면"8월 27일 첫 해전에서 일본수군이 불리해지자 물러났고 당 수군은 굳게 진을 지켰다. 8월 28일 일본장수와 백제 풍장왕은 기상을 보지않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앞다투어 돌진하면 당의 수군은 물러날 것이라 하면서 전열도 가다듬지 않고 당 수군을 향해 공격하였다.
이에 당나라 전함들은 좌우에서 일본수군을 포위 공격하여 잠깐사이에 일본수군은 패하고 말았다.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았고 뱃머리를 돌릴 겨를조차 없었다." 라고 적고있다. 이 짧은 글에서 1300여년 전의 해전을 묘사함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당시 전투 모습을 추정할 수는 있는데 한가지 의문시되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不觀氣象)'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날씨가 좋지 않은데 공격했다"라고 해석하는데 본인은 이 문장이야말로 이 해전이 군산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임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금강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이전 군산과 장항 사이의 금강하구와 서해의 합류부분은 썰물 때면 상류에서 빠져나오는 물로 물 소용돌이와 거품이 일어 배들의 항해가 쉽지 않다.
이러한 썰물 때의 세찬 물기둥 때문에 바다 쪽에서 강구 쪽으로 공격하던 소형의 일본전선은 배의 조종이 어려워 뱃머리도 돌릴 수 없었고 반면에 대형 전선인 당의 수군은 썰물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는 강안의 좌우로 봍어 일본수군을 공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군산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강변에서는 수천의 기병대가 뒤엉켜 싸우고 바로 옆 강에서는 570척의 전함들이 격돌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오른다. 그러나 그 날의 대규모 전투는 지금 군산에서는 확인 할 길 없다. 세월의 강은 모든 것을 망각시킴을 다시 한번 느낄뿐이다.
앞에서 우리는 나당군의 전략을 알아보며 기벌포가 군산지역인 금강의 서해 합류지역이 두 개의 지류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당군의 첫 상륙지로서의 기벌포 외에도 두 번에 걸쳐 기벌포, 백강에서 벌어진 대전투를 함께 알아봄으로써 군산지역이 기벌포, 백강의 현장임을 알아보겠다.
기벌포(백강)은 역사에 서로 명칭은 다르지만 동일지역인 금강하구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세 번의 대규모 전투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지명이다. 그런데 기벌포(백강)이라는 역사의 무대는 공교롭게도 백제와 관련된 비극의 무대이며 백제멸망후 삼국통일이 완성된 후 우리는 그 어느 자료에서도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고려말 최무선의 진포대첩의 현장으로 지역명칭이 변화된 후 재등장하는데 그 위치는 역시 금강하구 군산지역인 기벌포(백강)이다. 이러한 기벌포(백강)는 근세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통해 백강은 지금의 서천 유역으로 백마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이며 흥수의 이른바 기벌포도 이와 같다,고 하여 이미 그 위치를 금강유역으로 확인하였으나 그후 새로운 학설의 학자들이 많은 지역을 거론해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앞의 조사로 군산지역이 기벌포(백강)의 현장임을 확인하였으나 이 글에서는 기벌포에서 이루어진 세 번의 전투의 연관성을 묶어 기벌포를 찾는 작업을 다시 해보겠다. 그렇다면 세번의 역사의 획을 긋는 전투지역 기벌포, 백강은 어디인가? 그 곳을 알기위해 우리는 먼저 어떤한 전투가 어느 특정지점에서 전개되었을 때 그지역 말고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수 많은 지역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백제지역에서 있었던 중요한 세 번의 전투가 기벌포, 백강이라는 지역에서만 있어야 했는가 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위대한 장군은 전투장소를 먼저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장소에서 적을 섬멸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왜 기벌포(백강)에서 한 번도 아닌 세 번의 전투가 있어야 했는가하는 기벌포 전투의 성격과 함께 전투의 승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양군이 얻고자 한 목표를 찾아보는 방법이 기벌포의 위치를 명확히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기벌포에서의 세 번의 전투
첫 번째 당나라 소정방군의 백제 기습 상륙작전과 두 번째 나당군의 당수군과 백제왜군의 왜수군과의 백제부흥군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은 해전, 그리고 세 번째로 신라의 당 축출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이루는 마지막 전투가 있었다. 모든 결과는 원인에 기인한다. 기벌포(백강)에서 삼국통일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전투가 있을 수 밖에 없는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기벌포가 중요한 전쟁터로서 이용된 원인은 지리적 요인과 전략적 요인, 그리고 정치적 요인이 복합되어있다고 본다.
먼저 각 전투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전투인 당 13만 대군의 기벌포 상륙작전은 앞에서 그 내용을 설명하였으니 과정은 생략하고 결론을 볼 때 당군의 목표는 사비성이었고 기벌포 상륙작전은 백제왕이 있는 사비성에 가장 빠르게 진격할 수 있는 지리적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특히 기벌포는 금강의 하구로서 육군과 수군이 함께 수륙병진함으로써 갖는 전략적 효과가 크다. 또한 당나라군의 백제땅에서의 첫 교두보 확보가 그 전투의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전투 후 수륙이 사비성을 향하여 병진할 수 있는 곳은 금강하구인 군산지역뿐이다. 만약에 기벌포를 부안의 동진강으로 본다면 당나라 소정방 군대의 목숨을 좌우할 첫 교두보이며 병랍기지가(모든 상륙작전에서 첫 상륙지역은 교두보로써 최고의 방어시설을 유지한다.) 나당군의 사비성 함락직후 백제부흥군의 중심역할을 하는 주류성 즉, 변산반도의 우금산성의 지척이 되는데 이것은 무언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둘째 전투인 나당군과 백제왜군의 부흥군 멸망의 고비가 되는 해전이 벌어진 곳도 기벌포이다. 이 전투의 전개과정 또한 앞의 백촌강 해전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하고 기벌포가 전쟁터가 된 원인을 보겠다. 먼저 나당군은 백제부흥군 토벌의 기치를 내걸고 작전을 세우는데 가림성(성흥산성)을 먼저 공략하려했으나 가림성이 너무 험지에 자리하여 공략이 어려울 것 같으므로 부흥군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즉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의 목표이다. 또한 주류성이 어느 곳에 있든 기벌포를 지나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와 왜연합군이 기벌포에서 해전을 치룬 원인은 어디에 있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앞으 백촌강 해전에서도 밝혔다시피 부흥군의 풍방왕 입장에서는 정치적, 심리적 효과가 큰 사비성 재탈환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이다. 백제부흥군이 왜의 수군과 함께 사비성에 이를 수 있는 곳은 금강뿐이며 당수군은 도독부가 있는 웅진을 떠나 백촌강 즉 금강하구에 170척의 배를 배치하였고 왜수군은 서해바다쪽에서 당군이 있는 금강하구로 공격해가는 모습을 상상하면 역시 사비성과 웅진성에 닿을 수 있는 금강하구 기벌포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마직막으로 세 번째 전투인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의 당세력 축출작전 때 당의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전투가 기벌포에서 있었다. 이 전투에서도 우리는 기벌포가 어디인가하는 답을 찾기위하여 나당 양측이 전투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표를 찾아야 한다. 연합국이던 신라와 당은 백제 고구려 멸망후 서로 대립하는데 그 원인은 신라와 당이 군사동맹을 맺을 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에 그 영토를 처리하는데 있어 일종의 약속이 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당장 설인귀의 편지에 대한 문무왕의 답신에 의하면 "신라의 태종무열왕과 당의 태종간에 나눈 밀담이 실려있다. '내가(당 태종)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 내가(당 태종) 두나라를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나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하려 한다.'" 즉 적어도 평양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기로 하였으나 당은 선대의 이러한 약속을 무시하고 "아아!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전에는 사냥개처럼 심부름을 시키더니 들짐승이 없어진 지금에는 도리어 삶아먹히는 사냥개의 박해를 당하고 있도다."라는 신라 문무왕의 글처럼 당이 백제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통치하려했으며 신라를 일방적으로 계림도독부라 칭하며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에 임명하였다.(문무왕 3년 663) 또한 고구려를 멸한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독부를 두어(668)한반도 전체를 직접 통치하려는 행동으로 인하여 양국이 서로 싸우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군을 도와 당을 치게하는 한편 백제의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소부리주(부여)를 설치하여(문무왕 11년 671) 백제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다. 이후 당의 이근행이 20만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으나 신라군이 매초성에서 크게 격파하여 당군의 말을 삼만여필을 빼앗고 많은 무기도 노획했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북에서 내려오는 당육군의 위협은 사라졌다. 다음해 해로를 통하여 설인귀의 군대가 소부리주 기벌포에 도착하자 신라장수 시득이 거느린 해군이 20여회의 전투 끝에 당군 사천여명의 머리를 베고 승리함으로써(672) 한반도 남부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상의 과정을 볼 때 육전에서 패한 당군은 설인귀의 해군으로 사비성 점령을 위하여 기벌포에 왔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변산반도인 부안의 동진강이 기벌포, 백강이라면 주류성 함락후 주류성(우금산성)과 함께 신라군이 지키고 있을 동진강을 설인귀가 와야할 전략적 이유가 무엇일까? 그누가 당군의 장군이라도 아무런 지리적 의미가 없는 동진강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인귀의 수군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역시 전략적, 정치적으로 신라군과의 전투 및 협상에서 유리한 사비성을 목표로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곳 또한 사비성에 이르는 금강의 입구인 군산인근이 되는 것이다. 신라군의 입장에서도 나당연합군의 백제공략 때 당나라군의 전술을 파악한 시득 장군이 백제지역을 수비하기 위하여 당군의 예상 공격로인 백강 즉 기벌포에서 병력을 대기하고 있다가 공격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정월조에 그 근거되는 내용이 있다. 신라군이 웅진도 주부를 공격하는 내용에 "당나라 군사가와서 백제를 구원하여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진공과 아찬을 보내 웅포를 수비하게 하였다."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보듯이 신라는 당이 웅진도독부에 원병을 파견하면서 웅진강구를 거슬러 와야 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웅진강구 즉 군산과 경계 지점인 웅포에 강을 막는 수비군을 파견한 것이다.
또한 이 전투장소를 「삼국사기」문무왕 16년조에서는 당군을 소부리주 기벌포에서 격파했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에서의 소부리주라는 곳은 문무왕 11년 신라가 사비성 즉 부여를 점령한 후 여기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였는데 주(州)의 범위가 오늘날의 도(道)의 개념과 같으므로 소부리주의 기벌포는 사비성에 이르는 강에 기벌포가 있음을 뜻하며 기벌포가 강과 바다의 합류지점이라는 사료의 근거들을 볼 때 금강하구 군산지역이 기벌포임이 재삼확인 된다. 이렇듯 세 번의 전투를거치며 통일이 이루어졌고 기벌포는 사비성의 관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제에게 있어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는 위의 세 전투가 모두 육군과 수군이 함께 참가한 전투로써 육군뿐만 아니라 수군도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에 닿을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기벌포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비성에서 서해로 난 유일한 해로는 금강으로 즉 웅진강의 입구 군산지역이 기벌포임이 분명하다.
첫댓글 글 첫 단락 "백제가 망하기전 전체 성곽이 200여 성인 것에 비추어 볼 때 부흥군에 가담한 성이 200개 성이라 한다면 웅진사비의 도성지역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부흥군의 세력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패망하기 직전 "200여성"은 지방행정 조직 단위를 가리키는 것이지 성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흥군의 본거지 "임존성" 또한 행정조직 임존성과 성곽 인 임존성의 분별이 필요하다.
백제가 망하고 풍달군 "군"을 "성"으로 격하시켜 임존성으로 대체하여 풍달군은 사라지고 갑자기 임존성 만이 등장하는 것이다.
멸망할 당시 백제는 5부·37군·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萬戶)였다.
백강전투의 위치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또다른 한가지를 지적해 본다.
왜는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수백척의 배에 수만의 군사와 군수품을 싣고 백제땅으로 건너왔다. 왜의 수군은 사실상 수송선 역할이 주된 임무였다. 그런데 역사서 어디에도 가득 싣고 온 지원군과 군수품을 상륙시켰다는 내용은 없고 단지 전투 내용만 전해진다.
지원군 군수품이 가득한 배로 전투가 가능할까?
당시 전투에서는 별도의 수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운송수단 이었을뿐이다. 그런데도 해전이 있었다면 어떤 해전이었을지 고민해 볼 일이다.
나당군이 주류성으로 진격하면서 수군도 함께 주류성으로 향한것 처럼 기록하였고, 백강구(백촌강 웅진강구)에서 백제 기병, 왜의 수군과 전투한 내용을 같이 기록하면서 백강과 주류성이 마치 가까이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맞다, 백제부흥운동을 기록한 고서들의 내용은 3년간의 주요한 사건들을 함축하여 기록한 것 이기에 많은부분 시간과 장소들이 뒤섞였을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힘들다.
구당서 유인궤전에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이끌고 진격했고, 유인궤 별수 두삽 부여륭은 수군과 양선(군량선)을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같이 주류성으로 향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근거로 백촌강 전투를 추정해보면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나아가 백강구(군산인근)에서 전투를 한 후에 수륙이 함께 주류성으로 향했다는 뜻이다.
위 주장의 해석을 반론하면
위 주장의 해석을 반론하면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나당군은 육로와 수로로 웅진에서 출발하여 백강에서 강을 건너 주류성으로 떠났다. 그런데, 고서에는 백강어귀에서 부흥군의 무리를 만나 진압하고 이어 백강해전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백강어귀에서 부흥군무리를 물리치고 주류성으로 향한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궁색한 해석이다.
백강어귀의 전투를 벌인 당수군은 웅진에서 출병한 군사가 아닌, 다른 곳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으로 보아야 옳다. 즉 백강구는 백강(금강)이 아닌 다른 지역의 해안포구 이고, 당군이 안전하게 상륙 주둔한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