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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2016. 11. 6. [16-45] 한우리교회
*제목: 당신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본문: 눅7:11-17
*주제: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그 생명을 살리심으로 사망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14-15) 2.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과 눈물을 보십니다.(11-12) 3. 오직 예수님만이 고통당하는 인생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13)
*생명의 말씀: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들어가는 말) 갈릴리 바닷가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서 하룻길쯤 가면 나오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자리 잡은 나인 성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아름다운 동네에 한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처녀 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을 꼭 빼 닮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재롱부리는 것을 보면서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행복한 앞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부푼 꿈에 가득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했던 이 여인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과는 달리, 당시에는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혹독한 고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럭무럭 자라가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생인 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향해 “청년아”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한 아들을 보며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큰 꿈에 부풀었겠습니까? ‘이제는 가정에 기둥이 생겼구나. 이제는 기대고 살만한 기둥이 생겼어?’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음에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그녀의 모든 꿈이었던 아들마저 잃는 설상가상의 화를 당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그녀는 울고 싶어도 더 짜낼 눈물이 없을 만큼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속으로 ‘이 여자, 무슨 죄가 많길래 이렇게 팔자가 사납담? 남편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떠나 버렸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장례 준비를 거들었을 것입니다. 시체를 마루에 눕혀 놓고 머리를 반듯하게 빗겨 줍니다. 그런 다음 가장 좋은 새 옷을 입히고, 갈대로 정성껏 만든 관에다가 그 시체를 누이고는 두 손을 꼭 모아 놓습니다. 이것이 이 나라의 입관 절차입니다.
장례식은 당일에 치릅니다. 더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룻밤을 더 보내지 않고, 오후 5시나 6시쯤 되면 죽은 자가 누워 있는 관을 메고 나갑니다. 장례 행렬의 맨 앞쪽에는 여자들을 세웁니다.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온 이유는 여자가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들은 관을 메고 그 뒤를 따라 갑니다. 또 그 뒤에는 돈을 주고 불러온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면서 따라 갑니다. 장지라고 해봐야 동네에서 20,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이제 청년의 장례행렬이 지나 성문 밖으로 빠져 나갑니다. 이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서는 죽음의 사신인 사탄이 이끄는 죽음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행령이 마주칩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과연 생명과 죽음의 대결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대결입니까?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 과연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하셨을까요? 아니면 청년의 장례행령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비켜서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관 뒤를 따라오며 우는 과부에게 머물렀습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가장 주목하셨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슬픔을 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실패한 자들입니다. 병든 자들입니다. 4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께서 보셨다’는 말이 한 40번 정도 나옵니다. 그때마다 주님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은 먼저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에게 민감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항상 머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의 아픔을 동참하고,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슬플까.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까. 얼마나 두려울까. 얼마나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까.’ 예수님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과부의 처지를 다 알고 계셨고, 과부의 괴로움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주님이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슬픔을 당한 사람을 불 때, 자기도 모르게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위로입니다. 그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빈말로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어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메고 가던 자들이 그 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관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과부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근본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사건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시는 진리가 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14-15)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은 자가 살아난 사건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켰을까요?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문 앞에서 죽음의 사자들과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사자들 앞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냥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시오,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이 사건의 주된 목적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해서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고 선언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고 외치셨고, 바로 그때에 죽었던 자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14:9)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가)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으니(요계1:18하) 예수님은 친히 스스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사실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찬송가에도 나오듯이 요단강을 건너가는 과정이요 그곳에서 다시 만납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이편에서 저편으로 옮겨가는 짧은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에게 있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믿는 자에게 있어 진정한 죽음은 이미 떠나갔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살아있습니다. 이삭도 살아 있습니다. 모세도 살아있습니다. 다윗도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간 우리 성도들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산자이지, 죽은 자가 아닙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 앞으로 보냈거나 어린 자녀를 하나님 앞에 보낸 분이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로 슬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간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보시고 항상 “죽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일어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 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고 다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찌 남은 인생을 마음 놓고 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분께 우리 인생을 모두 맡기십시오. 이미 죽음을 정복한 그분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과 눈물을 보십니다.(11-12)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나인 성 과부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포합니다. 또한 이 사건은 예수님의 귀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바로 그분의 긍휼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울고 있는 우리도 눈여겨보십니다. 우리 중에 단 한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녀를 두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한 번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동안 몇 번을 우셨습니다. 눈물이란 말문이 턱 막힐 때 터지는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벅찬 감격이나 슬픔에 휩싸일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이 눈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눈물은 그 자체로 완벽한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역할 필요도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 그 자체로 완벽한 표현이 됩니다.
-어떤 분은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인생은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치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어찌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숨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눈물 흘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 이면에는 우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문화입니다.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노력하는 것은 가식이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울고 싶을 때는 맘껏 울어야 합니다. 우는 것은 인생 본연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남모르게 우는 사람들이 참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다 보고 계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나의 눈물을 병에 담으소서“(시56:8) 참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참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많은 수모와 모함과 고통을 당하며 쫓겨 다녔습니다. 그의 삶은 매일 울다시피 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다윗이 우는 장면을 자주 목격합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사람들은 나의 눈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눈물을 반드시 보고 계시고, 관심을 갖고 소중히 여기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주여 나의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아 두소서. 주님의 아들이 울고 있습니다. 내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시고 기억하소서. 내 눈물을 잊지 마소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고, 다윗의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보좌를 움직입니다.
3. 오직 예수님만이 고통당하는 인생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13)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우리 주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 암담한 현실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응답하십시오. 주님의 초청에 응하십시오. 주님의 품에 안기십시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오직 주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과부의 눈물을 씻겨주신 주님은 오늘 우리의 눈물도 씻겨주십니다. 이 세상을 사는 인생, 고통과 시련 속에서 눈물 흘리는 인생에게 동일하게 역사하는 주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두 가지 말씀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1) 항상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히4:16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울고 있는 여러분을 주목하시고,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분이십니다.
2)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으십시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금방 알아 볼 수 없습니다. 구약의 한 사람을 예로 듭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게 하십니다. 인생이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질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영위하는 자는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실패가 없고 오직 승리만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광스런 내일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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