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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는 말씀 스크랩 대구사직단 복원 등 활용방안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36 08.06.28 07: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사직단 복원 등 활용방안

1, 들어가는 말

1,연구의 배경


조선시대의 고을 형태 즉 도시의 구조를 살펴보면 대체로 읍치(邑治)의 서쪽에 사직단(社稷壇)을, 동쪽에 성황당(城隍堂, 혹은 서낭당)을, 북쪽에 여제단을 설치했다. 최근 복원되어 문화재로 지정된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 역시 경산 고을에 속해 있던 것으로 그 지역의 읍치에서 서쪽이다. 각 고을의 사직단은 국왕이 직접 의례를 집전하던 서울과 달리 고을의 수령이 지역을 수호하고,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도록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와 달리 성황당은 민족의 전통 신앙인 성황신(城隍神)을 모신 곳이고, 여제단은 돌림병으로부터 고을 사람들을 지켜 주기를 바라며 빌던 곳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시설물들이나 예년과 다른 심한 가뭄이나 천재지변으로 농사를 망치거나 이름모를 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으나 고칠 약이 없던 시절에는 이 모든 것들이 신의 노여움과 본인이 정성이 모자랐거나 주인 없는 귀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을 다스리고 신에게 간절히 빌면 재앙이 사라지고 복이 올 것 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神)이 재난을 막아주고 질병을 치료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것 밖에 없었으니 그러한 의식을 통해 스스로 위안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성황당이나 여제단은 가난한 백성들의 정신적 의지 처였다. 따라서 조정이 고을마다 설치하도록 권장하고방위까지 지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직단은 서구 평산에, 성황당은 중구 연구산(일제강점기 정오를 알리는 대포(大砲)를 쏘던 산이라 하여 일명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하고, 정월 대보름 달맞이 하던 곳이라 하여 월견산(月見山)아라고도 하였으며 지금은 제일중학이 자리 잡고 있다.)에 여제단(厲祭壇)은 북구 침산에 있었다.

이들 중 성황당이나 여제단은 주로 개인적인 일로 발복(發福)과 치병을 빌던 시설물이었지만 사직단은 달랐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국왕을 대신해 수령이 바른 자세를 가지고 주민을 위해 봉사하고, 신에게 고을의 수호와 풍년을 기원했다.

따라서 비록 지난 일이라 하드라도 이러한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 중 주민의 안위(安危)에 관련된 사직단만은 그 흔적을 찾아서 훌륭한 정신을 이어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편에 역사에 사라져 지금까지 그 흔적조차 드러내지 아니하였던 사직단의 위치를 최근 확인하게 되었다. 그동안 대구의 정체성 찾기에 노력하고 있던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는 이제 그 활용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2. 현지 확인

                        사진 1: 1970년대 사직단 부근의 항공사진 공도묘지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 모임에서는 ‘연구산거북바위바로놓기’ ‘팔공산제천단표석설치 및 쇠말뚝 뽑기’ 등 정사(正史)에서 빠졌거나 혹은 소홀히 취급해 왔으나 대구시민의 안전이나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 있으면 애써 노력해 왔다. 특히, 광역시로 편입되기 이전 경산시역으로 그들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수성구 노변동의 사직단을 시비를 들여 복원하였을 뿐 아니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을 보면서 매우 착잡해 했었다.


대구시 안에 있는 돌멩이 한 점, 나무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지만 본디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주민의 무사함과 안녕 그리고 생활이 풍요로움을 기원하던 사직단을 찾아 복원하려는 노력은 생략한 채 도로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엄밀히 말하면 경산시민의 사직단(社稷壇)을 복원한 것에 가슴이 아팠다.

우리 모임에서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만들었던 본디 사직단 찾기에 나섰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있었던 유적인데 비해 도시화가 급히 진행되면서 허물어지고 망가져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일제강점기 초에 작성된 지도 한 장과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 몇 점, 그리고 현장 확인을 통해 1세기 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사직단 옛 터를 확인 (2008년 5월 23일)할 수 있었다.


Ⅱ. 사직단(社稷壇)에 대한 고찰


1. 연혁과 규모


나라의 근본이자 백성들의 삶의 터전인 토지신(土地神)과 생명의 근원인 곡물신(穀物神)을 아울러 사직(社稷)이라고 하며 이는 곧 국가를 대신하는 말로 쓰였다. 사직단이란 이 두 신에 나라를 대표해서는 왕이, 고을을 대표해서는 수령이 경건히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다.

따라서 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檀)으로 마련되는데, 기본적으로 사단은 동쪽에 직단은 서쪽에 배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신라 선덕왕(宣德王) 4년(783)에 세웠고, 조선 시대에는 태조(太祖) 4년(1395) 1월에 사직단 세워서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권32권1장 잡지(雜誌) "제37대 선덕왕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으며, 사전(祀典)에 “보이는 것은 다 국내의 산천뿐이요, 천신지기에는 미치지 아니했으니(至第三十七代宣德王立社稷壇又見於祀典皆境內山川而不及天地者)"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서울 사직단1)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에 종묘(宗廟), 서 쪽에

사직단을 설치하였다. 1395년(태조 4)설단(設壇)이 완성되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신실(神室)과 신문(神門)을 세웠다. 사직단은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의 동·서 양단(東西兩壇)을 설치하였는데 동단에는 국사(國社:正位土神), 서단에는 국직(國稷:正位穀神)을 모셨다.

단(壇)은 네모반듯하며 세벌장대석을 높이 3자(尺)가 되게 하고 한 변이 2장 5척의 크기로 평면을 설정하고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 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혔는데, 이는 기둥을 세우고 차일(遮日)을 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직단에서는 중춘(仲春)이라 하여 봄이 한 창인 음력 2월과 중추(仲秋)라 하여 가을이 한 창인 8월에, 동지 뒤 셋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사(大祀)를, 정월 첫 번째 신일(辛日)에는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를 지냈으며 가뭄이 들 때에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다.

 

 사진2, 사직단


사진 3 :대구부지에 나온 사직단

2, 대구 사직단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 대구는 역사가 오랜 도시이자 큰 도시이기 때문에 사직단 역시 선초에 이미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그 것을 밝히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도호부 사묘(四廟) 조에 “부의 서쪽에 있다” 하였을 뿐 구체적으로 서쪽의 어디를 직시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대구읍지(大邱邑誌)에 “대구부(현 경상감영)에서 서쪽으로 7리(약 2.7km) 떨어진 평산(坪山)에 있다. 재실을 만들어 승려로 하여금 지키고 보호하게 하였다.”는 보다 자세한 기록이 있었다.2).


  사진 4 ; 네모 비슷한 붉은 점선 안이 사직단이 있던 곳이고 희미한 글자가 오늘의 지번이다.

 

 이러한 가운데 또 다른 대구읍지(大邱邑誌)에는 “부(府)에서 서쪽으로 7리 평산에 사직단 재실을 설치하여 승려로 하여금 지키며 보호하게 하고, 신실은 임자 년에 창건하였다(在府西七里坪山, 設齊舍使僧守護,神室壬子創建).”라는 보다 구체적인 정보가 수록되어 신기루 같았던 사직단 찾기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임자(壬子)년 즉 1792년 (정조16년)에 사직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3). 그러나 향교와 마찬가지로 주로 조선조 초에 각 고을에 설치한 것이 상례인 것으로 볼 때 이 때 신실(神室)을 창건했다는 것은 보수한 것이거나 사직단의 부속 시설 중 신실만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서지적 자료를 바탕으로 현지를 찾기 위하여 지적자료를 검색한 결과 1910년에 제작한 일제강점기의 지적도에서 서구 평리동 1313번지 302평으로 지목은 “社寺地(사직단 터였다는 뜻? )4)”로 되어 있었다. 1975년도에 구획 정리되었으며 소유자는 공용시설답게 나라(國)였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1976년 동구 상동 모 씨로 이전되었다.

MSL(Mean Sea Level)에는 표고 39.5m~40.5m로 평산의 정상부에 해당했으며 현 토지대장상에는 평리동 1327-7, 1339-1, 1341-10, 1341-17 , 1341-19, 1342-18 1621-21 등 7필지로 분할되었다5).

주변이 워낙 바뀌어 아쉽게도 이렇다할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주택, 신평리아파트재건축부지와 “사직당(社稷堂)끝길”에 나눠 포함되었다.


Ⅲ. 활용방안 제안


대구광역시 안에는 현재 달성군 현풍면의 ‘현풍사직단’과 수성구 노변동의 ‘경산사직단’ 등 2개소가 있다. 이들은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모두 최근에 복원되었다. 달성군 현풍 사직단은 그 지역이 현풍현이었을 때 세워진 것이고, 노변동의 사직단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옛 경산사람들이 사용하던 사직단이다. 따라서 실제로 대구도호부 본디의 사직단은 금번 확인한 평리동 소재 사직단이 유일하다. 무려 1세기 만에 어렵게 현장을 확인한 이 사직단 옛 터를 두고 우리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활용되기를 제안한다.


1. 복원 및 문화재 지정

사진 5 : 복구하기 전의 노변동 사직단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은 사실 본디 대구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50일간 용역과 시비 9억5천만 원으로 복원되었으며  2007년 4월 우리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는 옛 경산사람들이 사용하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 평리동 사직단은 이와 상응하거나 상회하는 수준에서 복원 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나 구가 자체적으로 복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일대가 주택, 도로로 활용되고 있어 복원 시 선형의 변경과 주변 주택 몇 채를 매입해야하는 난제가 많다.

다행인 것은 비록 많은 면적이 포함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신평리아파트를 재건축하고 있어 법으로 정해진 공원조성면적을 공제해 주고 조합으로 하여금 공원형태로 복원케 허용하거나, 아니면 법에 정해진 공원조성예정지에 시나 자치구가 복원한다면 부지매입자금은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어느 방법을 채택하드라도 사직단의 규모와 내용은 본래대로 하거나 고증이 어려우면 노변동이나, 현풍사직단 복원사례를 따라야 한다.


2. 동명, 거리 명, 아파트 명 활용


사직단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고 사적을 기념하기 위해 동명(사직동), 거리 명(사직로 ) 아파트 명 ( ㅇㅇ사직아파트) 주요시설 및 공원 명 (부산사직야구장, 서울, 광주사직공원)등으로 활용되었으면 한다.


사진 6 : 서울 사직단에서 행하는 의례

3. 의례용으로 활용


기초단체장이 주체가 되는 행사를 여기서 거행 해 옛 의례를 되살리는 것도 의미가 있다. 

누군가 역사는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새로운 가치를 부여함으로 더욱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자기 지역을 빛내기 위하여 소설에 몇 구절만 나와도 이야기를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고 한다. 특히 문화의 불모지(?)로 알려진 서구에 대구를 대표하는 시설인 사직단을 복원해 의례(儀禮) 등을 행한다면 구의 정체성이 높아질 뿐이 아니라 관광자원도 될 수 있다. 왕조시대의 유산이자 미신적인 요소가 있어 비과학적이라 하드라도 생명의 근원인 먹을거리, 삶의 터전인 토지의 중요성과 단체장이 지역주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힘써야 하는 책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사직단의 복원은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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