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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부터 매주 주의 날에 지켜졌던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었다. 주후 2C 경에 초대교회 교부 저스틴의 증언에 의하며 주의 날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16C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칼빈은 참다운 교회는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성만찬은 기독교가 탄생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로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며 주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전이다. 그런데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은 말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진실되게 선포되고, 마음으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거기에 참된 그리스도의 성례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초기부터 두 가지의 핵심적 부분 즉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예전은 성만찬 중심(미사)의 예배 전통과 복음 선포(설교) 중심의 예배전통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로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교회예배 본질에서 어느 한 쪽을 등한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20 세기에 이르러 예배의 갱신운동이 일어나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외침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들이 성서와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초대교회의 예배가 설교와 성만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케 되었고, 오늘의 현대 교회는 이 둘의 조화와 균형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 선포로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만찬의 교류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계획을 시도하였던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는 그 동안 성례전 없는 예배를 시도해왔고, 오직 말씀만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토록 소중한 성례전을 일년에 일, 이회로 그쳐 한국 개신교회는 어느 나라의 개신교회보다 성례전과의 접촉을 가장 멀리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성만찬이 집례되는 때에도 설교는 설교대로 하고 성만찬 예식은 별개의 예전으로 진행되어 말씀과 성찬이 전혀 연결되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일년에 단 두 번 행해지는 성찬 예배 때에도 설교의 주제가 성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진행되어 도무지 회중들이 성찬을 왜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형식적으로 앉아 있는 경우도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회중들에게 있어서 성만찬이 곁들여진 예배의 경우는 지루하기만 하고 어색한 예배가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생활에 가장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에 있어서 적어도 주일 예배는 설교와 성만찬이 동시에 선포되는 것이 바른 모습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 이 구원의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교류를 베푸시며,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성만찬 가운데서 죄 사함을 보증 받으며(마26:28),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 것이다(요6:51-58). 1. 성부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 항상 말씀과 성찬(떡과 포도주)을 포함하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찬양하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에서 완성된 모든 것에 대하여, 인간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제 교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또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킴으로써 이룩하실 모든 것에 대하여 성부께 드리는 큰 감사인 것이다. 성만찬을 보통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서 성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에 대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늘 성만찬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의 [제1변증서]에서 처음으로 초대교회 성만찬의 개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기도를 마치면 곧 우리는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한다. 그리고 나서 빵과 포도주 섞인 물 한잔을 형제들의 인도자에게 가져간다. 그는 이것을 취하여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그로부터 이것들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기도드린다. 인도자가 감사를 드리고 전 회중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부제로 불리는 자들이 참석한 사람들 각자에게 신성한 빵과 포도주 섞인 물을 나눠주고 또 그들은 불참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간다" 이렇게 초대교회들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칼빈은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고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인 것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의 성만찬 성만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즉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온 인류를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황과 그 희생에 대한 실제의 표징인 것이다. 여기서 '아남네시스'란 말은 과거의 어떤 일을 회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과거의 한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재현함으로써 그 사건으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효력을 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신교에 의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단순한 기념설로서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만찬에 적용된 바 성서에서 말하는 기념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전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의식으로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효용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 교회가 성만찬을 가질 때에 항상 그의 죽으심과 희생만을 강조하고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만찬 예배는 항상 무겁고 장례식 같은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지 살았다가 죽어서 기억을 남겨준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과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 주시는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축제로서 성만찬을 행해야 할 것이다. 3. 성령 임재로서의 성만찬 성령은 성만찬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참으로 임재하게 하시므로 성찬재정의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성취시킨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분명히 그 중심이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성만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신앙공동체에 임하게 하시고 성찬재정의 말씀 안에 포함된 모든 약속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상징이 되도록 하시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새로운 창조의 생명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전체 행위는 하나의 성령 임재의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렇게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시대 이후 성만찬 예전에서 성령초대의 기도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고 이 기도는 빵과 포도주와 공동체에 성령이 임재하기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성만찬 예배시에 성령의 역할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서 성만찬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교회의 생명을 양육시키는 그리스도의 성만찬 때의 교제는 곧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한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을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 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는 것이다. 즉 성만찬의 본질중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독특한 면인 것이다. 성만찬의 또 하나의 명칭인 '커뮤니온 서비스'는 바로 이런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단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서신(고전10:16-17, 11:17-22)등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만찬 가운데서 완전히 나타나진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바로 이런 깊은 뜻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 의식은 항상 전 교회와 관계되면 전 교회는 각 지역의 성만찬 의식과 연관된다. 즉 성만찬 예전은 개 교회 를 중심한 개체적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성만찬을 거행하는 무리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삶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계속적인 도전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성만찬은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고전11:26, 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현현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열어주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종국적 왕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이다. 한스 큉 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아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성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향연의 예견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막14:25, 눅22:16-18)을 알게 되는데 진실로 성만찬은 종말의 기쁨과 영광 중에서 함께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의 예표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성만찬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또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제사요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들의 교제임을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향연이다
이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동안에 다양한 전통과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나, 지난 1982년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위원회'에서 50년 간의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 끝에 [세례, 성만찬, 교역]이라는 소책자를 내어놓음으로써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를 공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