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의식'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예전 한동안 '공동체의식'이라는 말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
사람은 같이 살아야 하는데 같이 살려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그 의식이 있어야겠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삶의 지경을 넓히고 인생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이해와 교양을 통해,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선한 마음을 통해
어울려 적당히 살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 하나가 되지는 못한다.
언제라도 갈등이 생기면 떠나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그것이 당시 무신론자였던 내가 그릴 수 있는 최선의 사회였고, 그나마도 시작하려하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같이 사는 것이 좋긴 하지만 그것을 위해 나를 헌신(獻身)해야 할 이유가 내 속에 없었다.
나는 할 일 없이 카드놀이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게는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이 없었던 것이다.
1999년 대구교회를 만났다.
어느 수요일 저녁, 상도형제의 안내로 정영숙자매가 간증하는 날 처음 교회 집회 모습을 보았다.
일반 교회라면 수요예배를 드리는 시간인데 기도하는 사람도 성경을 보는 사람도, 아니 성경을 가져온 사람도 없었다.
정장을 한 사람도 없었고,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점퍼 입은 사람들, 귤 먹는 사람, 그 귤 달라는 사람, 그리고 귤이 날라다녔다.
돌지는 해맑게 돌아 다니고 정령누이는 뒷짐지고 어슬렁거렸다.
교회라는 정보 없이 왔으면 장애인 권익증진대회나 상가번영을 위한 모임에 온 걸로 생각할 광경이었다.
영숙자매의 간증 내용은 광양에서 지낸 이야기, 주택형제와 결혼한 이야기 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간증이 끝나자 여러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강단 턱에 걸터앉아 간증 차례를 기다려 간증했다.
간증이 길어지면 정령누이가 옆으로 다가와 씩 웃으며 슬쩍 밀쳤다.
그렇게 저렇게 두세 시간이 지나갔다.
그 시간에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정리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보고 온 것이다.
다음 날, 일반 교회 장로인 대구 살던 친구와 내가 본 수요집회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불쑥 눈물이 났다.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눈물 흘리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어린 딸을 일찍 보내고 화장하는 날 눈물 한방울 흘린 것이 기억하는 전부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 눈물이 내가 다른 것을 본 감동인 줄을 알았다.
그리고 무슨 상관관계가 있어서 알게 되었는지 몰라도, 내가 잘못 살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엇을 본 것일까?
곰곰 생각해보니 돌지, 정령누이, 영숙자매 그리고 나와서 간증하고 자리에 앉아서 보고 듣고 있는 그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장애나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와 같이 있던 베다니 사람들처럼 자유스럽게 살고 있었고,
그런 그들과 그들을 있게 한 누군가가 직관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삶의 방식과 다른 삶을 살면서 이런 자유스러운 교회를 조성되게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 수도 있는데 이해와 자유와 사랑을 말하고 황금율을 말하면서도 나는 나 밖에 몰랐던 것이다.
내가 말하던 공동체의식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존경받기 위해 내세우는 내 가면 뒤에서 하는 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사회사업'이라는 그럴 듯 한 명분을 내세운 것처럼......
그 눈물은 이런 교회가 있다는 감동이기도 하고 그렇게 못 산 회한이기도 하고 미리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교회생활이 어언 20년인데 교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여 전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이 교회를 그 자유와 감동을 주는 대구교회이게 하는 무엇인가를 어떻게 말할 지가 그 어려움 중의 하나이다.
신학적 지식을 도입하면,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등의 신학용어로 포장할 수 있겠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님, 그리고 형제들이겠지만 그분들을 지배해 온 의식이 무엇인지가 명료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나인 줄 알아야 한다." 라는 말씀을 하신지는 10년도 훨씬 넘었고,
최근 몇 년은 그 예수가 뛰어내리지 못했다는 말씀을 계속하시고 있다.
그 말씀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가 빠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었다면 십자가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예수.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십자가로 가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
이 예수가 누구지?
문득 세례 요한의 말이 생각났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어린 양...
어린 양은 제물로 쓰인다.
제물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한다.
누군가가 하나님과 연결할 필요가 있을 때 그 중보자로 쓰이는 것이 제물이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어린 양이라고 말한 것은 예수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제물로 드려질 존재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없게 된 사람을 대신해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사단을 할 말 없게 만들고 하나님께 화해의 명분을 열어드린 것이다.
예수가 제물이라고...
예수가 제물이라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나를 봐야 한다"는 말씀이나,
"그 예수가 '나'이고 그 예수와 내가 한 운명"이라는 말씀은 다 내가 예수와 같은 어린양 곧 제물임을 알라는 말씀이겠다
10년 쯤 전 목사님은 말씀 중에 자기정체성을 "어린 양"이라고 하신 적이 있다.
이와 꼭같이 표현하신 것은 아니지만 내용은 그렇다.
특이하고 낯선 말이라 여태까지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 쏙 알아지는 말은 아니었다.
이제야 그 말씀이 자신을 교회를 위해 드려진 제물로 알고 사셨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그 어린양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말씀이시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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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어린 양'이라는 '어린양의식'은 '제물의식(祭物意識)'이라고 해도 될 듯 하다.
내가 제물로 드려질 존재라는 의식을 말한다.
내가 제물로 드려짐으로 사람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고 하나님이 만족하신다.
그러나 누가 어린 양이 되고 제물이 되고 싶겠나?
다 사자가 되어 제물을 받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겠나?
그 사자 중에서도 왕이 되고 싶어 피터지는 싸움을 하는 곳이 세상이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영원한 왕이 되지 못하면서 누구나 왕이 되려고 한다.
경쟁, 다툼, 분열, 결국 살인으로 끝나는 외롭고 두렵고 정처없는 가인의 후손으로 삶을 마감한다.
말씀 안에서 내가 제물을 받을 자가 아니고 제물이 될 자임을 알게 된 자는 복이 있다.
자신의 존재적 위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자기가 할 일을 안다.
어린 양이라는 내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존재적 위치를 순순히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내 앞에서 그 길을 가면서 내 생명이 되신 분들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자유도 그것을 위해 피흘리신 분들에 의해 쟁취되었다.
대구교회의 자유도 잘 보이지 않는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주어졌다.
제물을 받을 분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은 드려짐으로 족하다.
드려짐으로 받는 분과 하나가 되니 원망이 남을 일이 없다.
드려짐으로 족하도록 지어졌는데, 받는 것이 더 좋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니 유혹을 이길 힘이 없었다.
자기가 누군지, 내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유혹을 이길 바탕을 갖게 된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된 사람을 구하려고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매단 놋뱀처럼
쳐다 보면 죽을 사람이 살아나는 그 비밀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보신 것 같다.
예수님처럼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이기게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정체가 아닌가 싶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제물로 쓰이게 함으로 자기도 영광스럽게 하고 제물도 영광스럽게 하신다.
교회는 혼자서 이기지 못했던 사단의 유혹을 연합된 몸으로 이길 수 있게 한다.
아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는것은 내 속에 어린양의식이 조금씩 생기는 것이구나...
우리가 다 어린양이구나.
어린양이어야 하나님께 쓰이는구나...
하나님께 쓰여야 내 존재의 모든 허망함이 사라지는구나...
아직도 낯선 내 정체성이지만 조금도 서운하지 않은 것은 20년 쯤
장대에 달린 놋뱀과 허다한 어린 양들을 보며 지낸 덕분인 듯 하다.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기 위해 스스로 당신이 어린 양이 되어 제물로 내어놓으셨을 것이다.
주께 영광!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 5: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