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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따로 나 따로
분명 죄 사함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부활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리고 부활절 행사로 나눠주는 달걀을 볼 때마다
“맞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일까?”
“예수님이 부활하셨으니까 나도 부활했다고 말씀하시는데 내가 진짜 부활했을까?”
“이렇게 맨날 죄 짓는 내가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게 맞는 거야?”
“왜? 구원 받았는데 내 마음에선 부활이 이뤄지지 않은 거 같을까?”
“부활해서 기쁘다고 말하는 저 형제자매들 진짜로 부활했다고 믿어지는 걸까?”
이런 생각이 늘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도 부활했다는 사실은 분명 이해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지 못했고 항상 예수님 부활 따로 나 따로
이었습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고 또 깊게 알려고 파고 들어가지도 않았었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그 생각을 그냥 품고만 있었습니다.
“복음 전해주신 형제님이 해결해 주시겠지...”
“교회에서 어떻게 해주겠지...”
“종(목사)이 풀어주시겠지...”
종교생활의 여정─장로교회
저는 1993년 9월 26일 저녁 8시쯤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개역성경)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서 죄 사함을 받아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저는 하나님과의 연결된 끈을 느낄 수 없었고
죄로 인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황 속에 있다가 죄 사함을 받으니까
죄의 무게에서 벗어난 것만큼 너무 가볍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습니다. 그 당시 죄 사함 받는 것이 구원 받은 것이고
거듭난 것이며 성령을 받은 것이고 부활 한 것이라고 복음을 전해준 교회로부터 늘 듣고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오직 죄 사함만이 참된 구원의 전부 인줄 알았습니다.
저의 종교생활 교회 이력을 잠깐 살펴보면
장로교회 ─> 구원파선교회 ─> 회복교회(지방교회) ─> 킹제임스교회 의 과정을 거쳤는데요
이 교회의 순서를 밟으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내가 죽음의 공포를 한 번 맛본 다음부터는 항상
절대로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늘 목마르며 구원에 대해 뭔가 보완을 해야 할 것 같고
계속 “뭔가 이건 아닌 거 같은데”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땅히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이 있었고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행동도 하지 않는 앞뒤 없는
미적지근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막연히 해결되기를 바라는 기도만 해오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흔히 “종”이라고 하는 사역자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든 문제는 저에게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생각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저절로 이뤄지길 원하는 양심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죠.
저는 제가 그렇게 양심 없고 생각도 없고 멍청하고 사악한 인간인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집안 전체가 천주교 집안이었지만 그런 종교적인 내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와
남묘호렌게교를 믿고 열심히 공들이던 할머니를 두었으면서도 시골교회에서 피아노 반사로
(그러나 신앙은 뒷전이고 오로지 피아노 치는 것만 관심 있었던) 처녀 시절을 보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는 어릴 때부터 적을 두고 다닌 교회는 없었지만 부모님이 어린 나에게
교회를 강요하거나 나가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연한 기회로 주일학교에 간
이후로 나름 꾸준히 주일학교를 나가고 있었고 여름에는 여름방학을 여름성경학교에서
보내는 그런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공부하러 스터디 그룹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으로 종교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스터디 장으로 있었던 친구가
집안의 형제자매와 친인척들이 전부 교회 요직에 있었던지라 그 친구와 친해진
덕에 한 교회에 꾸준히 다니면서 재미를 붙이게 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똘똘 잘 뭉쳤던 청소년들과 대학부 덕분에 매일 그리고 주말마다 성경공부와 그에 대한 종교 활동을
하면서 점점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고 봉사활동이 늘어가면서 외형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즈음에 찬양 선교단에서 봉사활동도 하게 되면서 매주 금요일 저녁엔 시내에 있는 큰 대형교회의
찬양집회에 참석해 다른 교회들에서 활동하는 많은 청소년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갔습니다.
또래 아이들과는 달리 세상 노래를 별로라고 여겼던 내게 세상 적이라고 생각했던 드럼과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키보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도 쓰이는 가스펠 찬양을 보면서
흔히 은혜라고 하는 몽환적인 최면으로 들어가는 걸 느끼게 되고 거기에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생활과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방언을 시작하고 있던 스터디 친구 때문에
학교─교회─학교─교회로 이어지는 생활패턴이 되면서 본격적인 종교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면서 십계명과 구약이 인식이 되었고
죄라는 것이 평소와는 다르게 더 실감나게 생각되면서 통성기도를 통해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는 다르게 학년이 올라가면서 수련회와 기도원 코스를
밟아나가면서 더 진지하게 죄에 대한 회개와 기도에 나름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깊어져 가는 죄에 대한 인식
고등학생이 되고나서 어느 날부턴가는 주여 삼창하고 통성기도를 통해 죄를 회개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죄를 회개 할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더 진실 되게 정확하게 회개 해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죄의 목록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학교생활을 하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가까운 교회에 들러서는 그날 지은 죄를
회개하는 삶을 꾸준히 살아갔는데요. 이런 삶을 살다보니 죄 노트에 있는 죄가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는 게 아니고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해서 지으면서 다른 죄들이 추가되다보니 오히려 죄가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노트 한 권을 채우고 나서는 금방 두 권,
세 권, 네 권으로 불어나고 불어나는 만큼 내 마음에서 느껴지는 죄의 무게가 상당해지면서
“아! 죄의 무게가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극히 평범한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착한 인생을 사는 제게 눈에 띄는 죄는 없었고 그저 날마다 반복되는 소소한 죄들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다보니 노트에 기록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주로 나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죄들이 반복되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거짓말, 간음
다른 죄들은 다 피해갈 수 있었는데 이 두 죄만은 항상 날 걸려 넘어지게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한심하고 무식하고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지 통제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고
죄를 지적하는 말씀을 앞에 두고 깊이깊이 묵상하는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은 죄고 어떤 것은 죄가 아니고 내가 이런 죄는 짓고 이런 죄는 짓지 않을 수 있다고
다른 죄들은 피해 갈 수 있다고 그 당시 그렇게 저 혼자만의 착각을 하던 한심하고 비양심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입만 열면 자동으로 진실 되게 나오는 거짓말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가 왜 이러는 걸까?”
“어쩜 내가 내 거짓말에 감동 될 수 있을 정도로 진실 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누구한테 배워본 적도 없는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나 잘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고 이쁘거나 내 스타일의 여자를 보면 마음이 저절로
음란으로 가득 차는 게 참으로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음란한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멀리서
여자가 보이면 땅만 보고 걷고 다녔고 애써 눈길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노력과
달리 남자인 나는 근본적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고 몸은 성숙하기 시작하면서 여자를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라서 상당히 머릿속이 복잡하고
더욱더 저를 잡아 누르고 억압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간음죄는 더 늘어만 갔습니다.
계속 늘어만 가고 쌓여서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죄와 멀어지고자
교회생활을 해나가면서 새벽기도회도 주중에 계속 나가고 금요철야예배도 나가고
때 되면 기도원과 수련회에 가서 주여 삼창을 외치며 죄를 회개하고 성령 받고 방언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나를 두고 어린 학생이 신앙심이 깊다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번은 아무도 없던 교회당 빈 시간에
강대상 뒤에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꼭 만나주세요”
“저 하나님 아버지 만나고 싶습니다. 제발 저 좀 만나주세요”
그 기도 며칠 후에 같은 반 친구가 자기가 학생회장으로 있는 교회의 학생부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도와 달라는 말에 계속 다니던 교회와 이별하고 집에 가까이 있던 친구의 작은
교회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게 친구의 학생회장직을 대신
맡게 되면서 학생회장이었던 친구의 어려움이 저의 현실이 되었고 그 친구는 아주 홀가분하게
방관자로 돌아서서 저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더 괴롭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
학생회장은 학생부와 주일학교 유치부까지 맡아서 관리해야 하는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뭔가
맡겨지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끝까지 해내려고 하는 책임감 강한 저로서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학생부와 주일학교 아이들 심지어 유치부까지 갈등이
발생되고 더욱더 골이 깊어지면서 나중에는 급기야 내 자신이 나가떨어지는 상황까지 가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생활을 게을리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괴로운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청년형제님과의 만남─앞뒤 안 맞는 대화
어느 새 고 3이 되었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여느 때처럼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막차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와서 탔는데 다른 때는 정말 사람들로 북적 북적한 버스가 ‘이게 왠 횡재냐’
싶을 정도로 한산해서 자리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기사님 뒤 두 번째 자리에 앉아서 한 두
정거장 갔을 때 스포츠머리를 한 안경 쓴 청년이 올라타더니 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정거장을 지나고 나서 뒤로 돌아 저를 보더니 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 교회 다니세요?
나: 예 (아! 이분도 교회 다니시는 분이구나)
청년: 예수님 믿으세요?
나: 예
청년: 그러면 천국에 가실 수 있나요?
나: 네 그럼요 (확신에 차서 대답)
청년: 지금 죄가 있나요? 없나요?
나: 죄가 있지요
청년: 죄가 있는 사람은 죄인이고 죄 없는 사람은 의인이죠?
나: 네 맞아요.
청년: 그러면 학생은 죄인인가요? 의인인가요?
나: 죄인입니다
청년: 천국은 죄 있는 죄인이 가나요? 죄 없는 의인이 가나요?
나: 당연히 죄 없는 의인이 가지요
청년: 그러면 학생은 죄 있는 죄인인데 천국에 가나요? 지옥에 가나요?
나: ???
대화 마지막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 내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 깨닫고 바로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을 때 청년이
그랬습니다. 죄 없는 의인이 되어야 천국에 갈 수 있는데 학생은 아직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은 거
같다고 이 부분을 도와 줄 수 있는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더 만날 수 있느냐고 그래서 꼭 배우고
싶다고 그리고 우리 학생부에도 전해주고 싶다고 언제부터 만날 수 있느냐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에 그 청년은 다른 청년 하나와 같이 저를 만나러 저녁 자율학습 시작 전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한 달 동안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버스 안에서 나를 전도했던 청년 형제님을 만난 후에 제게는 한 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괴롭히던 죄를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하지만 빛을 보기 전까지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야 하는 걸 몰랐습니다. 그 청년 형제님과 보름 정도 교제를 하면서 저는 죄인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며 하나님 앞에 죄인이 어떤 모습이고 그의 결말이 무엇인지 보면서 그게 다름 아닌 저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심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참 희한하게도 예전에 다니던 장로교회에서
배우던 성경 말씀과 공과들 그리고 같은 학생들과 대학부 그리고 전도사와 나눴던 교제들과
내용면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는데 그 형제님과의 교제는 나를 말씀들 앞에 실제로
1:1로 세우게 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말씀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그동안 내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까지 이것이 전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며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제가 성경을 읽지 않았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정말 무지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하찮은 저의 기준에서나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많이 무지했었습니다.
지옥에 이르는 깊은 절망
보름동안 말씀으로 인해 그동안 깊이 숨겨져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게 겉으로 확 드러난
저의 죄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절망가운데 들어가게 되었는데 저를 인도해준 형제님은 군에
입대하기 위해 저를 저의 집과 가까운 다른 교회로 인도해주고 꼭 구원받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저를 맡겨놓고 떠나버렸습니다. 새로 옮겨진 교회에서도 복음은 쉽게 전해주지 않았고 계속 죄에
대한 교제를 로마서 말씀을 가지고 이어나가게 되었는데 무슨 말씀인지 도통 깨닫지를 못해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저는 제가 착하고 순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저만의 착각이었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또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 이유가 제가 마음이 아주 교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름에서 또 보름이 지나 거의 한 달가량 됐을 무렵 저는 너무나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악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바로 나구나!”
“다른 사람이 지옥 가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지옥 가는 거구나!”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마귀 자식이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시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지옥갈 수 있는 거구나!”
“이 지옥 형벌을 내가 피할 수 없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깨달음이 밀려오며 제가 지옥에 가는 것이 분명하게 인식되면서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때는 공부도 손에서 놓고 말씀만 들었는데 이제는 공부도 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죽으면 지옥에 가는 데 도대체 공부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기 때문이었죠. 교제를 시작한
이후로는 다니던 장로교회도 스스로 딱 끊고 일절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말씀을 들어도 다른 이들과 교제를 해봐도 늘 하던 똑같은 소리의 반복이고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한 대답은 저를 설득할 수 있고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오히려 저급한 수준의 답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놀라웠던 것은 저의 여러 질문에 당황하면서 대답하지 못하고
이성과 논리와 진리 없이 답 안 나오는 대화만 이끌어 가는 목사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목사에 대한 저의 생각은 굉장히 지식수준이 높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해서
믿을 수 있으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나 실망스러웠고 내가 이런
사람을 목사라고 따랐구나 싶었습니다.
내가 여태껏 이런 질 낮은 수준에서 무조건 복종하고 살았단 생각에 분노가 이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박차고 나와서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학생회장으로서 정말 잘하고 싶은
마음에 할 수 있는 대로 애쓰고 노력했던 모든 책임을 내동댕이치면서 아주 홀가분하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나 말 안 듣던 학생회와 주일학교 유치부를 던져버리고 나오니 일주일 내내
집에 전화가 빗발쳤는데 다 받고 냉정하게 끊어냈습니다. 아직 구원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지옥가게 된 저의 본 모습을 보니까 내가 이런 인간들에게 여태껏 정성을 쏟았구나 싶은 생각에
화가 나고 죄인이 어떤 결과를 맞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정확하게 일러주지 않는 교회와
목사가 실제로는 교회가 아니며 거짓 선지자인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보면 그럴 수 없었지만 천국을 정으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잘라내야 했습니다.
제가 지옥 간다는 것을 안 날부터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오직 지옥만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옥 가게 됐는데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그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철저하게 1:1 이라는
사실과 나의 구원에 있어서는 내가 의지하는 부모님도 나의 형제도 그렇게나 가깝게 지내는
친척들도 친구도 아무 도움도 줄 수도 없고 도와 줄 능력도 없으며 그걸 바라도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이들을 마음에서 아주 쉽게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거꾸로 나 또한 그들을 도와 줄 수도
없는 걸 알게 되면서 이것은 철저하게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고 더욱 더 하나님
앞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더 매달려도 내가 지옥 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이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으며 저는 깊은 절망으로 들어가서 나중에는 포기에 이르러
“에라.. 나도 모르겠다. 그래 지옥 간다면 가자 무서워도 어쩔 수 없자나!”
“그 지옥이 너무나도 두렵고 무섭지만 피할 수가 없자나”
마음에서 죄를 깨끗이 씻어내게 하는 말씀의 체험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리면서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마음도 놓아버리게 되었습니다.
아예 마음을 놓아버리니깐 전에는 살려달라고 기도라도 했는데 기도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이 지경까지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제하던 형제님이 복음을 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장로교회에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제사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서
“어? 나는 그동안 왜 이런 걸 교회에서나 그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아니 내가 들었어도 제대로 관심이 없어서 들어보지 못했다고 느낀 걸까?”
“아.... 죄가 이렇게 씻어지는 거구나” 하고 성경지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개역성경)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어? 어?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다고?”
“세상 죄가 뭐지? 아! 세상 시작부터 마지막 끝날 때까지가 세상이구나!”
“어? 그러면 내 죄도 지고 가신다는 말인가? 어? 진짜? 진짜 그렇다고?”
하는 생각이 순간 번쩍 들면서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들려오는 말씀
골 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개역성경)
“어!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사하셨구나! 그러면 내 죄도 사하셨겠네?!”
“어!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가 없네? 아! 그러면 내 죄도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 순식간에 들어왔고 그 후에
사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개역성경)
“아! 내 죄가 깨끗이 씻어져서 눈과 같이 희어졌구나.!” 하는 깨달음에
그동안 죄로 인해 검디검은 내 마음이 새하얘지는 체험을 하게 되고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개역성경)
“아! 하나님께서 이제는 내 죄를 기억하시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구나!”
“내 죄를 기록했던 노트도 이제 버릴 수 있겠구나!” 하고 큰 위로를 얻었고
사 44: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개역성경)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개역성경)
“아!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죄에서 건져 내셨구나!”
“나를 그 무서운 지옥에서 이미 건져 내셨구나!”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제 죽어도 천국을 가는구나!” 하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내 대신 속죄하신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살리셨으며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게
깨달아져 예수님께 너무나 죄송했고 그분이 너무나 불쌍하고 가여웠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돌아가셨구나!”
“아 예수님이 너무 가엾구나.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구나!”
라는 깨달음이 그 당시에는 정말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깨달음이 저를 죄 사함에는 이르게 해주었지만 죄에서, 율법에서, 내 자신에게서,
이 세상에서, 마귀에게서는 벗어나게 해주진 않았으며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생명을 소유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 대신 죽으셨구나!” 이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구나! 내가 죽었구나!” 가 되어야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둘 다 같은 이야기 같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앞에서는 내가 죽었어야
하는 존재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고 뒤에서는 내가 아예 확실히 죽어서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의 기쁨
죄 사함의 말씀을 깨닫고 저는 너무나도 감사하고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밝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옥자식이 아니고 천국 백성이고 천국 열차를 탔다는 기쁨에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죽어도 난 천국이구나!” 하는 자신감에 이 세상을 떠나도 아무 미련도 없었습니다.
이 죄 사함 복음을 깨닫고 난 후 정말 신이 나서 집에 돌아가 어머니한테 소리쳤습니다.
“엄마 저 구원받았어요! 저 이제 천국에 가요!” 그동안 어머니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우울하거나 짜증을 부린 적이 잘 없었던 제가 구원 문제에 관해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우울해하던 저를 보았던 어머니는 제 말이 무슨 소리인지는 몰라도 아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우리 아들이 이제 살아났네?” 하시면서 좋아하셨습니다.
그 후 주일날 오전 예배가 시작되고 전도사님이 저를 불러 세우셔서 간증을 시키셨는데
정말 너무나도 신이 나서 아무런 준비 없던 간증을 한 시간 가까이 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모였던 형제자매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진짜 내 형제자매와 같았으며 이들이
하나님 앞에 진짜 내 형제 자매라는 사실에 감격했고 그날 불렀던 찬송가가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이 되었으며 말씀이 죽죽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어린 형제 하나가 새로 탄생한 것에 다들 기뻐하고 축복하며 기특해 했고 교회의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자매님들은 손자같이 이쁘게 보셨고 특히나 청년형제님들은
저를 굉장히 살갑고 사랑스럽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만큼 학생 형제와 자매들이 거의 없어서
귀했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전하게 되는 죄 사함 복음
죄 사함을 받은 후로 저는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학교에 가서 저절로 죄 사함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죄 사함을 몰라서 지옥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너무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엔 이미 죄 사함에 관한 프로세스가 저절로 들어와 있었고 거기에 따른 말씀은
즉각 찾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놓기만 하면 되니까 기회가 되는대로 막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나를 힘들게 했던 교회의 전 학생회장에게 전했고 그 전에 있었던 교회 학생부 애들을
만나서 전하고 또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반 아이들에게도 계속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하다보니 전에는 몰랐지만 정말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 이런 죄 사함의 관한 말씀을 장로교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단으로
얘기한다는 것과 또한 교회를 다니는 많은 학생들이 이런 복음에 대해서는 아예
무지하다는 것,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저 재미로 이성을 사귀는 곳 취미
활동하는 곳 만남의 장소로 생각하며 성경말씀을 그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교훈으로 생각한다는 것, 예수님을 사대성인쯤으로 생각한다는 것, 세상이 중요하고 교회와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과 또한 학교에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이단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과 함께 학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강제적으로 넓어져버렸습니다
몰론 저 또한 오로지 말씀이 사실이고 하나님만 유일하신 분이라고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애들처럼 마찬가지로 복음에 대해서 아예 무지했고 교회에 다니는 재미도 찾고
있었고 교회에서 보는 이성들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교회활동을 취미 삼고 있었고
성경 말씀을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하지만 저부터도 복음에 대해서 무지할 정도로
말씀에 소홀해도 별 느낌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세상이 중요했고 교회도
어느 정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저도 제게 충격을 준 사람들처럼
한 치도 다름없는 똑같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만한 양심이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애들과 달랐던 유일한 것은 참으로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들려진 말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잡았고 그 말씀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고통
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말씀이 제게 실제가 되는 것을 경험해 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니까 제 자신이 남들과 남다른 면이 있어서 한 것처럼
처음엔 생각이 되었으나 돌이켜보니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처음엔 신기해 하다가 이상한 의심으로 바뀌는 교회 다니는 애들을
보면서 복음 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지만 쉽게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제가 다녔던 교회의 학생부 애들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다고 말하며 회유하고
윽박질러도 그런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아주 간단하게 비웃어 줬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제가 그들을 회유하려고 노력 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와 전도사와 대학부와 학생부의 말씀
수준이 어떠함을 분명하게 보았고 그들이 저를 죄에서 건져 줄 수 있는 실력도 없는 밑바닥이며
죄의 자백으로 절대로 죄가 씻어지지 않음을 성실한 죄 자백 생활을 통해서 정확하게 경험했고
이런 죄의 문제는 그 누구도 도와 줄 수 없고 철저하게 내 문제이며 마지막으로 성경 말씀이
내 마음에서 어떻게 내용 그대로 이뤄지는지 체험했고 그들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또 다른
새로운 형제자매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위로가 되는 걸 처음으로 느껴봤습니다.
구원파선교회 생활─복음 전도
본격적으로 구원파선교회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년형제가 되면서 교회가 한참 성장하던 시기라 교회에 몸담고
있었던 저 또한 덩달아 많은 일들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같이 월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교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몸담고 있던 교회가 대표 지역교회가 있었고
각 구마다 교회가 있으며 이런 교회들이 각 시도에 있었고 중앙교회가 있었습니다. 1년 마다
매해 여름과 겨울에 전국교회 형제자매들이 모이는 수양회가 있었고 상반기 하반기에는 크고
작은 복음전도 집회들로 교회가 아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식사와 청소를 마치고는 오후에 저녁식사 전까지 항상 전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냥 노방전도나 일반 가정집을 방문하면서 전도하거나 병원에 들러서 일반병동에 있는
다인실에서 전도하거나 했는데 이게 상당히 부담스러우면서도 재밌었습니다. 교회에서
사역자가 되려고 훈련 받고 있었던 형제님이 늘 저를 데리고 전도를 다녔는데 일단 어떻게
하는지 시범을 한 번 보여주고는 그 다음부터는 저보고 보여준 방식대로 하면서 하고 싶은
말씀을 전하며 전도해보라고 바로 시켜서 너무나 긴장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막상
입을 떼면 입에서 줄줄 나오는 것을 보고 제 자신도 깜짝 놀라고 그 형제님도 대견해 하시며
많이 이뻐해 주셨습니다.
한 번은 대학병원의 일반 6인실에 들어가서 한 참 TV를 보고 있던 환자들 앞에 서게 됐습니다.
그 형제님은 가서 당당하게 TV를 끄고는 곧바로 인사하면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왜 왔고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례하게 TV를 끄게 됐는지 말하면서 말씀을 짧으면서도 강력하게 전했는데
그게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렇게 끝이 나고 나서 병상을 하나씩 돌아 방문하면서 신앙상담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상담카드를 몇 장씩 받는 걸 보고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앙상담
카드를 작성했던 사람들 중 한 청년이 연결이 되어서 죄 사함 복음을 듣고 죄 사함 받은 후
형제가 되어 교회에 나오면서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 형제님의 부담을 뛰어 넘는 용기로
전하는 말씀이 사람 하나를 살리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저렇게 해야겠구나. 저렇게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고 그 다음 병실에 가서는 그 형제님이
저보고 아까 본 것처럼 하라고 시키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예 못할 줄 알았는데 그
형제님처럼 똑같이 하는 날 보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가 이렇게 전도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에 참 좋았습니다. 신앙상담 카드를 받진 못했지만 부담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기쁨이 무엇인지 느껴보니 마음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일들을 하는 중간에 끼어든다는 것이 아무래도 무례하고 그게 그 사람들에게도
내게도 부담이 된다는 것은 늘 마음에 무거웠습니다.
저는 이 형제님 덕분에 다른 형제들보다도 전도하고 복음 전하는 것에 많이 담대해졌고
부담 앞에서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구원 받은 후로
저의 또래들이 하나 둘씩 구원받아 더해지게 되었는데 그 형제자매들은 전도시간이 되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하면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분위기여서 전도하는 분위기가 나지 않아
2인 1조로 전도할 때도 내가 전도하면서 말씀을 전하면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도움을
요청해도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복음을 전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오히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고 거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또래들과
같이 전도를 나가지 않고 항상 저보다 나이 많은 위에 형제자매님들과 나갔습니다.
확실히 배울 것도 많고 말씀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유익했습니다.
구원파선교회와의 갈등─나의 진로
부모님께서는 공부 외엔 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예나 지금이나 착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늘 말 잘 듣는 아들이었고 아들이 구원 받아서 집에서 복음 전하는 것도
교회 다니는 이라면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잘 듣지 않으시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고3때 죄 사함 복음을
듣고 오로지 복음과 교회생활에만 매진해서 학교공부에 아예 손을 뗐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의지였기도 했지만 교회의 인도가 이것을 권장하던 시대이기도 했었습니다. 부모님은 이 부분에
아주 크게 화를 내셨고 이 문제로 교회의 사역자와 형제자매들과 굉장히 큰 언성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졸업하고는 바로 직업훈련소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면서 교회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당시 제게 해결되지 않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직업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내 진로는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문제로 나중에는 자살까지 생각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지만 길게 깊게 넓게 생각해 보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려 생각해보는 게 없다보니까
해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 부분에 나름 그 당시
내 수준에서는 치열하게 생각해 본 것이기 때문에 해결되지 않자 자살까지 생각했던 것이죠.
그 시절 교회에서는 저의 이런 진로문제를 그렇게 크게 생각해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교회의 사역자인 목사와 상의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 구원 받은 형제자매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저 또한 저의 진로 문제에 대해서 상의해봤지만
이 부분은 상의할 때마다 제 자신이 설득당하고 잠깐의 위로를 얻고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가 다시 문제가 불거져 올라와 또 다시 상의하고 설득당하고 위로받고 또 다시 문제가
올라오는 그런 악순환의 반복이었습니다. 나의 진로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당시
교회 사역자로 있었던 전도사님이 저를 사역자로 세우시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잠깐 세상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훈련 받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선교학교에 들어가서 제대로 훈련받고 사역자로 파송되면 저의 진로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굳이 “형제는 무슨 일을 하는 게 좋겠다.“ 하는 말을 해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청년 형제자매들의 소망은 교회의 사역자로 세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는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역자로
부르시는지 아니면 그냥 평범하게 형제로 있으면서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 여부를 묻는
기도에는 전혀 응답이 없으셨습니다. 저는 남들이 볼 때는 범상치 않은 면도 있었지만
내 자신 스스로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교회생활 하는 것 말고는 도대체
내가 무슨 능력이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고개를 쳐드는 나의 교만함─형제자매들과의 갈등
죄 사함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당시엔 다 죽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 낮은 곳에 있던
마음이 전도를 굉장히 부담스러워하는 또래 형제자매들을 보면서 또 장년 형제자매님들의
약한 허물을 하나 둘씩 보면서 점점 높아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나 같음 안 그럴 거
같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 너무 자제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생각과 달리 점점 높아지는 게 내 스스로도 보였고 그것이
말로 행동으로 조금씩 나오게 되면서 급기야는 어떤 장년 형제님 한 분이 간증시간에 자신의
허물을 말씀하면서 형제자매님들은 자신의 이런 허물을 보면 전혀 개의치 말고 자신을 진짜
마구 나무라달라고 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는 그 형제님을 저의 간증시간에 대놓고
나무라는 일이 벌어져 버렸습니다. 저도 전혀 생각지 못하다가 간증의 흐름상 그 형제님이
한 번 언급되었다가 허물을 비판하는 것 까지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기 때문에 저는 더 과감히 나가버렸습니다. 그 일 이후로 평생 동안
그 형제님과 부인 자매님은 저와 항상 거리를 두고 대면 대면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형제님이 그렇게 저를 대하는 것을 보고 너무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대면해진 것이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너무 어리석은 생각이었습니다.
제자신이 교만한 줄 몰랐으니까요
저는 제가 죄 사함을 받을 정도로만 마음이 낮아진 것뿐이었지 저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사악하고 추잡하며 악마적인지 정확하게 본 적이 없고 깨달아 본 적이 없어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극히 평범하고 착하고 순진하게 살았던 19살 청년이 죄를 알면 얼마나 깊게 알겠으며
사람을 겪어보면 얼마를 겪어봤을 것이고 거기에서 자신을 비춰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찌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겠습니까? 그 형제님은 저를 통해서 오히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배울
수 있었을 테지만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저는 저대로 판단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갓 구원 받았을 때는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님들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영원을 함께
할 내 피붙이처럼 느껴졌지만 마음에서 교만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형제자매들을
판단하고 허물만 보이며 못나 보이는 형제자매를 아래로 보고 또한 저절로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대놓고 다 드러내놓지는 않고 간간히 드러내며 마음에서만 갈등이 심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한 번은 저와 거의 같은 달에 구원 받아 이제 저처럼 갓 태어난 장년 형제님이
건축현장 소장으로 있는 곳의 현장사무소에서 일하며 방범 일을 좀 도와주면서 돈도 벌면
어떻겠느냐는 전도사님의 말씀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 형제님을 도와 일을 하러 갔습니다.
유치원 공사를 하는 현장이었는데 이제 땅 기초 다지고 뼈대를 올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재를 현장에 쌓아놓고 있었는데 그것을 저녁에 도난당하지 않도록 밤에 지키고
낮에는 같이 현장에서 목수 일을 하는 게 저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갓 20살이 된 저는 처음
해보는 힘든 노동이었는데 그래도 형제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허투루 일하지 않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있었고 얼른 일을 꿰고 있어서 일이 잘 진행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성실하게
일하니 어느 정도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인정도 받고 그 형제님도 처음엔 좋아하셨습니다.
그 형제님은 원래 해양대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배를 타던 형제님이셨는데 술 담배를 늘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일을 할 때도 담배를 물고 일을 하고 있었고 휴식 시간에는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늘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구원 받은 얘기도 하며 복음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들과 술 담배를 같이 즐기면서 일해도 교회 다니고 구원 받았다고
입으로 복음을 말하는 사람의 말씀을 잘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님을 코웃음치며 비웃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같이 쉬는 시간마다 그러한 광경을 목격했고 현장 노동자들에게 저도 같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형제님이 소개를 하는 바람에 그 아저씨들이 저에게 교회 다니고 구원
받은 사람은 다들 저런 모양이냐고 구원 받아도 별거 없네? 하며 은근한 따돌림을 받게 됐습니다.
사실 죄 사함 받은 것이 참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 싶으니 속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원래 구원받기 전부터 술 담배를
하셨던 분이고 구원 받은 지 며칠 차이도 나지 않은 분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이 저에게 일을 시키실 때 가까운 사이고 어리다는 이유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잔소리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건설현장이 처음이라서 이런 일을
하다가 보니 서투른 게 많고 목수용어도 잘 모르고 연장 이름도 잘 몰라서 제가 몇 번씩 재차
묻고 또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안 되기 때문에 연장들도 잘 정리해서 도구함에 진열해서 놓으면
그냥 가져다 쓰시고는 아무렇게나 던져놔 어질러놔서 다시 정리하는 데 한참 걸리게 만들고
무슨 일을 시키실 때 “알겠습니다.” 하고 나서 이 일 다음에 무슨 일을 준비해야 하는지 물으면
너는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무슨 말이 많고 관심이 많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노동 현장일이 몸으로 하는 일이라서 힘들고 또 정해진 일이 없이 온갖 잡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머릿속에 거리 계산이 전혀 서지 않고 일을 하다가 보니 목표가
서지 않아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고 너무나 쉽게 지치면서 “언제 일이 끝나나?” 하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또한 야간에 자재를 잘 지키려면 정리정돈이 잘 되어서 마무리가
되어야 용이한데 그 형제님은 일만 끝나면 정리 정돈은 대충 해놓고 제가 야간 당직 설 때마다
정리정돈 해놓는 사무실도 마구 어질러 놓으니 점점 더 제 마음에 화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선한 이는 오직 한 분─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착각
그러다가 한 번은 또 여느 때처럼 쉬는 시간에 현장 노동자들과 함께 쉴 때 형제님이 담배를
입에 물고 술을 기울이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늘 그랬던 것처럼 아저씨들이
먼 산 쳐다보면서 도대체 뭐라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말을 하면서 형제님을
무시하기에 노동자 아저씨들한테 그래도 한 번은 꼭 들어보세요. 흔히 보통 교회에서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니고 잘 들어보시면 죄가 씻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하니 형제님이 형제가 뭐 하러 끼어들어서 더 일을 망치냐고 막 나무라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엔 좋게 말하면서 도와 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 그랬다고 하니 형제가 뭔데
나서서 도와 주냐고 네 일이나 잘하라고 하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동안
쌓여왔던 마음의 화를 다 쏟아내서 들이받았습니다. 형제님이 복음 전할 때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술 마시니깐 현장 아저씨들이 형제님과 교회와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안다고
이 아저씨들 복음을 듣기는커녕 우릴 비웃고 우리가 오히려 안 좋은 모습만 심어주는데
이건 어떡할 거냐고 하면서 이제는 전부 끝이라는 생각에 형제고 뭐고 없고 다 팽개치겠다는
마음에 화를 내면서 따지니깐 어디서 버르장머리가 없이 대들어 하기에 나중에는 존칭도 없이
같은 나이 대하듯 막 대해버리니 형제님이 길길이 날뛰면서 죽이네 살리네 하는 소리까지 나오고
저와 형제님 둘을 아저씨들이 뜯어 말리는 지경까지 가벼렸습니다. 오전에 잠깐 쉬는 시간에 이런
난리가 나버린 것인데 저는 오히려 잘 됐다 싶어서 일을 때려 치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동안 낮에 형제님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서 일하는 거나 밤에 자재 지키느라고 잠을 잘
못자는 것도 그렇고 그것 때문에 낮에 일하는 데 지장이 많았는데 오히려 때려 치니까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저는 사실 형제님을 도와서 일을 하려고 갔기 때문에 마음에 부담을 지고 일을
했었고 정말 마음을 쏟아서 일을 했는데 형제님은 그런 태도가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큰 싸움을 하고 저는 현장 일을 내팽겨 치고 그길로 집으로 돌아갔고 형제님은
분을 삭이고 현장에서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교회로 전화해서 전도사님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일을 때려 친 김에 교회도 때려 칠거라고 이런 게 교회라면
안 나가겠다고 하고 끊어버렸습니다. 교회에선 이 일로 인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고 저는 3일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날 형제님은 전도사님에게 불려가서 교제를 하셨고 저는 교회에서
오는 전화를 계속 받지 않다가 정리는 해야겠다 싶어서 받은 전화에 교회로 불려가게 됐습니다.
그날 저녁 늘 온화하셨던 전도사님은 저를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형제가 무슨 화가 그렇게 많이
쌓였기에 화를 냈느냐고 잘했다고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무슨 일이 있었던 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제가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일을 했고 그 형제님은 어떤 식으로 일하면서
어떤 태도로 복음을 전했는지 상세히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말을 다 들은 전도사님은 저의
억울함을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형제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그 형제님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그리고 보호하면서 일을 하고 말을 했을지 안 봐도 다 안다. 형제는 형제가 말한 그 마음으로
진실하게 일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씀에서도 말씀하셨듯이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있어?
이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제 자신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죄 사함을 받았으면서도 제 자신이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악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 교제에서 저는 말씀에서 분명 모든 인간이 악하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한 사람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내가 말씀보다
내 자신을 믿는 사람임을 발견하면서 내 선함이 한 번 무너져 내리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내가
선하다고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형제님은 구원받았으면서
일평생동안 끊지 못했던 술 담배를 한 번에 끊게 되었으며 자신의 악함도 아시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주일날 교회에서 봤을 때 먼저 다가와 미안하다고 말하는 형제님께 참 죄송했고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지만 이것으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이 일어났고 둘 모두에게
좋은 약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간증을 쓰는 시점에 이 형제님은 제게 너무나 마음 아픈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지 형제님에게 전해주고 싶었지만
지난 달 4월 제가 구원 받은 이주일 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하는지 참 힘들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 의심
이 일을 겪고 난 후 제 마음은 한 동안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깊은 통찰력이 생기지 않았고 그렇게 된 이유는
말씀을 깊이 묵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님과의 일 이후로 저는 드러내 놓고 판단하고 교만하진 않았지만 속에서는 형제자매들의
인간적인 실수와 허물을 보면 판단하고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만큼 제 자신은 깨끗하고 끈기
있고 변화할 만 하다고 순전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저에게 구원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이유가 혹시 내가 구원 받지 않아서가 아닐까? 이 생각이 한 번 마음에 파고들어오니까
처음에 작았던 이 생각이 점점 커져버려서 내 마음을 꽉 채우고는 그때부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괴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형제님과 사역자에게 찾아가서 말씀드렸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는
얘기만 듣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그분들 입장에서는 제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죄 사함
복음을 들었는지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분명하게 내가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 경험했고 말씀이 어떻게 저에게 실제가 되는지
그 명확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저의 구원에 대해서 분명 확신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는 아무런 해결이 되지 않는가? 구원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도 무게를 두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다시 복음교제를 하게 되었고 제 마음은 다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다시 의심이 일기 시작했고 또 다시 복음 듣고
교제하고 안정되고 또 의심 들면 다시 교제하고 복음 듣고 안정되는 악순환이 시작됐습니다.
제가 구원 받았던 과정들을 다시 쭉 곱씹어 보고 나를 죄에서 건져주셨던 말씀들을 기록했던
노트를 보면서 계속 묵상 해봐도 딱 그때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에 희한한 증상이 하나
시작되었는데 죄 사함 받은 깨끗하고 하얀 마음에 미세한 검은 점 하나가 찍히는 이미지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미세한 검은 점의 죄는 제가 아무리 깨끗하게 덧씌우는 상상을 해도
또 다시 살포시 찍히면서 저를 더 나락으로 몰아갔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나중에는
포기했습니다. 과정을 거쳐서 죄의 생명을 폐기처분하고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생명을
소유하는 이 공정을 지나오면서 왜 지난날 구원을 의심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굉장한 능력자이시면서도 낮고 겸손하신 분이라
그분의 말씀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며 그분보다 더 낮은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그 말씀이
마음 안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고 유지될 수 있는데 마음이 높아지면 그 말씀이 담겨 있을 수
없게 되다보니 죄 사함의 말씀이 능력이 되지 않고 단순한 지식이 되며 의심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나의 진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아서고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내가 혹시 구원받지 않아서가 아닌가? 하고 구원을 의심했지만
실상은 내가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을 알 길이 없었고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마음만 괴로웠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응답 받으면 구원의심 문제도
저절로 해결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에만 몰두 했지만 그 당시 저는 답이 나올 때까지 사고하는
법을 모르고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얕은 수준에서 생각하다보니 진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진로
한 번은 여름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내가 진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진짜 죽자 싶어서
어머니께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여행 하면서 생각해보고 싶다고 만약에 이번에
찾지 못하면 집에 돌아오지 않고 죽겠다고 말하고는 70만원의 경비를 달라고 진지하게 말하니
어머니께서 펑펑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며 손에 돈을 쥐어 주셨는데
목 메이는 걸 느꼈습니다. 어머니께 건네받은 경비를 가지고 저는 난생 처음으로 저의 진로를
찾아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집을 떠나오기 전에 저는 하도 답답하여 사주팔자와 점을 제대로
보는 곳을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일단 그곳에서 구체적인 말을 좀 들어보고 여행을 더 하기로
생각했습니다. 막상 이 막연한 여행을 하려고 집을 나서다 보니 참으로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더군다나 진짜 내 할 일을 찾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너무나 우울하고 내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목사님에게는 진로 문제 때문에 여행을
간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탐탁치 않아하면서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개인의 진로가 심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는데 이제 곧 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에 뭘 그런 거에
목을 메는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쉽게 그렇게 되지 않을 거 같았기 때문에 진로를
빨리 해결해야 했습니다. 마음 한 편에서는 예수님이 오시든 오시지 않든 일상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진로 문제 하나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교회가 원망스럽고 이상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
결국 이런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에 기대어 해결하려는 것에 대한 자괴감 또한 컸습니다.
사실 저의 진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여행을 진즉에 떠났어야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해라 하고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고 또 성경에서도 말씀해
주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나서는 찾을 때까지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했었고 부모님께서 어떤 능력이 있는지 살펴도 보고 진로 전문가도 알아봐서 검사도 받아보고
구체적인 조언을 통해 분명하게 길을 뚫었어야 했는데 20 초의 어린 저에게 이런 조언 하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도 목사도 전도사도 형제자매들도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알아듣지 못하게 그저 기도하라는
말만 들었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구원파선교회가 저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알게 하고 경험하게
인도해줬으나 딱 거기서 멈춰 죄 사함 이외에는 찾을 수도 찾아서도 안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의 진로를 찾는 여행의 여정은 의외로 쉽게 끝났습니다.
자괴감에 가득 차게 만들었던 세상적인 방법인 사주와 관상과 손금을 보러 서울의 미사리까지
갔던 곳에서 의외로 따뜻한 위로와 함께 아주 구체적이진 않았지만 큰 틀과 작은 틀 안에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느 분야 쪽으로 가야 하는지 그래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어느 정도 거리 계산이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제가 평소에도 관심과 능력이
있었던 분야고 그 분야라면 제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 그 자체만으로도 내겐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정말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여행길에 오른 저는
결국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적인 수단으로 저의 앞길을 열었고 그렇게 저는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기고 2박 3일의 일정으로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모님이 정말 반갑게 맞아주셨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시고 저를
그냥 품어만 주셨습니다.
율법의 은헤
저의 진로 문제가 해결이 되었지만 여전히 구원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과 교제해 보고 복음 잘 전하는 형제자매님들과 교제도 해보고 수양회에 가서
복음반, 재복음반 말씀도 들어보고 또 테이프를 사서 계속 듣고 복음전도 집회에서 또 듣고
해도 교제하고 말씀 듣고 마음에서 해결됐다고 깨달았다고 느낌에도 불구하고 의심은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의심이 들 때 여태껏 다른 사람에게 의지했는데 안됐으니까 이제 내 자신 스스로
진지하게 끝까지 생각해보자 어차피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안 될 것 같으니 혼자 해보자 하는
생각에 집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펴놓고 묵상하는 시간을 구원 받은 이후로 처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을 때 교제 했었던 말씀들을 쭉 살펴보다가 로마서 말씀을 보게 됐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개역성경)
이 말씀을 보는 데 자꾸 “죄의 삯은 사망이나” 이 구절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놓고 하나님께 저의 구원에 대한 의심이 자꾸 일어나는 비참한 상황을
말씀드리고 이 구절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나서는 계속 곱씹어 생각하게 됐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
“죄의 삯은 사망”
“죄의 삯은 사망...”
그러다가 삯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다가 “삯은 대가지” 라는 생각이 스치더니
“아! 죄가 대가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깨달아졌습니다. 이게 굉장히 우스운 얘긴데
저는 그동안 죄는 대가가 있다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어도 어렸을 때나 사춘기 때에는
반성한 후 용서해 달라고 하면 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대가가 있다고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죄는 대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죄에도
대가라는 값어치가 존재한다는 게 깨달아지면서 바로 뒤이어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죄는 지으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끝이 나는 거구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요구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계산이 끝나는 거지
요구에 맞는 대가가 지불되지 않으면 절대 끝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는 대가로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면 생명의 사망을 요구했습니다.
“아! 죄는 지으면 반드시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죄가 끝이 나는 거구나!”
“죄는 다른 대가를 지불하면 끝이 나지 않지만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면 끝나는구나!”
“이건 법칙인거구나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무조건 입력하면 출력되는 법칙이구나!”
이 깨달음이 오면서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지!”
“아!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의 죄에 대한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신 거구나!“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으니까 이미 계산이 끝이 난거네?”
“아! 나는 죄가 없구나!” 하면서 바로 죄에 대한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교제하고 말씀을 들어봐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니까 해결되어버렸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구원에
대한 의심이 사라져버렸습니다만 나중에 다시 또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교만 때문이었는데요 교만해지면 저절로 구원 받았던 실제가 지식으로 바뀐다는 걸
과정을 통과하게 되면서 깨우치게 됐습니다.
적성에 맞는 직업
저의 진로와 직업을 찾아 세상으로 달려가려는 저를 교회는 그렇게 쉽게 놔주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한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사람이 굉장히 귀하고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붙잡아 두고 있었지만 실제적인 목적은 일꾼이었습니다.
저 또한 교회를 등지고 살아갈 순 없고 그렇다고 진로와 직업사이에 교회가 차지하는
비중과 시간이 상당해서 교회 생활을 유지하면서 직장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청년형제자매님들이 겪던 일이었는데 저 또한 그런 갈등에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직장을 가지려면 그냥 일하다가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는 그런 쉬운
직업을 가져야 했는데 이제 곧 있으면 자매를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 하는 시기가 오는
청년에게는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습니다. 다른 형제자매님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다들 어떻게든 직업을 선택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답답한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를 맨 처음 전도했던 형제님이 있었던 교회에서 저를 굉장히 귀엽고 이쁘게
보시던 한 형제님이 저를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자동차 무역업을
하던 형제님이셨는데 현재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자기랑 일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자기가
계속 사람을 두고 기도하고 있었는데 널 보자마자 느낌이 오더라. 이 일은 가정을 꾸릴 수
있고 교회 생활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테니까 외국어도 네가 할 줄 아니 같이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진로가 해외 무역업이었고 교회 생활도 할 수 있으면서 가정도 꾸릴
수 있다는 말에 흔쾌히 허락했고 바로 그 날부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굉장히 명랑 쾌활하고 머리가 비상하며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희한하게도 저는 이 형제님 덕분에 세상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세상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신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외에 여러 방면에
걸쳐서 아버지에게 배워야 할 것을 이 형제님에게 배우게 되면서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남자로서 갖춰야 할 여러 가지 일처리 능력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탑재하면서
그동안 내가 교회 사역자들한테 적절하게 이용당하고 있었다는 느낌 아닌 느낌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는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무조건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적절히 밀고 당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대로 된 개념으로 인해서 사회생활이 참으로 쉬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에게는 유일한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엄청 급한 성격이었습니다. 이 급한 성격으로
인해서 일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장점이 있었지만 세상 모든 일이 장단점이 있듯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면 굵직굵직하게 일한 표시는 나는데 마무리와 세세하게 채워져야
할 일들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제가 채워주고 깔끔하게 처리하니
형제님에게 다른 직원들보다 굉장히 이쁨을 많이 받았고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얘기를
저한테는 늘 데리고 다니면서 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누구보다 잘 따랐고 잘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의 성격 급함이 훗날 저를 죽음으로 몰고 가버렸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한 번은 거래처에 들려서 서류처리를 하고 그 처리된 서류를 들고 다시 회사로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급하게 이 사장 형제님에게서 전화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서류를 처리하지
말고 다시 원래 서류를 회수해야 한다고 한시가 급하니깐 절대 늦으면 안 된다고 해서 급히
다시 차를 돌려서 유턴을 하다가 적재함에 목재를 가득 실은 5t 트럭에 조수석 옆면을 받쳐서
100미터를 밀려가며 주차해 놓은 차량 6대를 받아버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유턴 할 때 바로 유턴해서 조금만 가면 거래처로 갈 수 있었기에 재빨리 내리려는 생각으로
안전벨트도 미리 풀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그렇게 급하지 않은 일도 말로 엄청 급한 것처럼 말하는 습성이 있었는데
저는 반대로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행동에 옮기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두르다가
사고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 평소 운전습관으로 미뤄
볼 때 절대 사고 날 상황이 아니었는데 사고가 나버렸습니다. 지금도 이 부분에 대한 기억이
머리에서 삭제 돼서 떠오르지 않지만 저는 그날 죽었습니다. 차가 5t 트럭, 그것도 목재를 가득
실어 하중이 최고치로 달한 차에 제 업무용 차가 받쳤기 때문에 차가 완전히 찌그러져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고 그 당시 사고를 목격한 주위 거래처 사람들이 말을 해줬습니다.
한결 같이 모두다 그 지점에서 사고가 잘 나는 곳이었는데 제가 사고가 났고 분명 죽었을
거라고 했답니다. 저는 그 당시 안전벨트를 미리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트럭에 받히면서
차가 찌그러짐으로 인해 몸은 꼼짝없이 갇힌 채로 있었고 그 대신 머리가 핸들에 부딪히고
자동차 지붕과 양쪽 찌그러진 문짝에 정신없이 부딪혀 머리에 뇌출혈이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응급실에서 깨어보니 머리 아래로는 다친데 하나 없이 멀쩡하고 왼쪽 아래턱이 쪼개져 덜렁거리고
있었고 머리 오른쪽 이마에서는 피가 철철 넘쳐흐르며 썼던 안경은 깨져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이
구겨지고 그 덕분에 눈이 크게 부어올랐으나 천만다행으로 유리파편은 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난생 처음 기절하다가 깨어났는데 일어나보니 얼굴은 출혈로 풍선처럼 부풀어 괴물이 되어 있었고
뇌출혈이 있었지만 오른쪽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와서 천만다행으로 뇌사로 이어지지 않고 극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턱이 쪼개져서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었고 소중한 아래턱 왼쪽 어금니 앞쪽
이빨과 오른쪽 위 사랑니가 충격으로 뽑히고 납작해져서 입 안에서 씹다가 납작하게 된 딱딱한 껌처럼
맴돌고 있었습니다.
머리는 터질듯 한 두통으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고 뇌가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머리를
가누려면 정말 천천히 움직여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턱이 쪼개져 발음이 어눌해지고 의사전달을
충분히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 경찰은 교통사고 취조를 하는 데 정말 정신이
없어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침대에 눕혀져서 어디론가 막 옮겨지는 와중에 정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머니는 같이 달리시면서 펑펑 우시고 있었고 아버지는 정신없는 표정이셨습니다.
그 와중에 저는 제가 아픈 건 하나도 인지되지 않았고 전날 저의 죄만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내가 이런 징계를 받는구나 생각이 계속 되었습니다. 사고 당하기 전날 저는 어머니와
큰 말다툼이 있었고 어머니에게 대들다가 뺨을 맞고 다툼이 끝난 일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턱과
입과 치아와 이마에만 재난이 닥치고 몸은 아주 멀쩡했습니다. 그 생각이 번뜩 스치자 어머니께 바로
죄송하다고 말을 하는데 말이 너무나 어눌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용케 알아들으시고는 아니라고
엄마가 너무나 미안하다고 말하시는 걸 보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응급수술을 해야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곳저곳으로 검사를
받으러 다녀야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바로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머리에
있었던 출혈이 밖으로 터져나와줘서 뇌사로 이어지지 않았고 더군다나 머리와 얼굴이 너무 많이
부어 있어서 수술을 바로 할 수가 없었고 쪼개진 턱은 나중에 성형하면 됐기 때문입니다. 수술은
얼굴 붓기가 빠진 사고 당일 일주일 후에 할 수 있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생사를 오고가고 나서 중환자가 되어보니 도대체 내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아무 생각이 없고 그냥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당한 현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왔는데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그 와중에
생리현상은 정상적으로 일어나다보니 아픈 몸임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서 도저히 소변을 볼 수
없어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때 너무나 절망적이었습니다.
도저히 예전 얼굴로 돌아갈 것 같지가 않을 정도로 얼굴이 선풍기처럼 부풀어 있었고 턱은 쪼개져
덜렁거리고 있었고 눈은 부어올라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절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일을 당한 것은 저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 살려주세요. 예전처럼 다시 그 얼굴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절 살려주시면 하나님께서 하시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저를 이 죽음에서 건져주세요.”
죽음의 공포
저는 그날 응급실에서 고통으로 인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고통을 당하며 뜬 눈으로 밤새 지새야 했는데 아프니까 아픈 것에만 집중하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간간히 내가 왜 오늘 이런 교통사고를 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스쳐갔습니다. 그리고 사고 전날 밤에 있었던 어머니와 말다툼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했던 행동들을 하나님이 보시고 계셨고 그것을 분명히 징계하셨단 느낌이 계속 나를 파고들었고
그것이 지나자 “내가 오늘 죽었었구나. 이미 내가 사망했구나.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하는 인식이 분명하게 들기 시작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아주 실감나게 체험한
날이었습니다. 죽음이 내게 닥칠 때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전조도 없이 닥치며 닥칠 때 순식간에
닥친다는 것도 그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 그 어떤 것도 내가 할 수가 없으며 내가
좋든 싫든 죽음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않든 그냥 닥치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냥 아무렇지 않은 날에 너무도 태연하게 가족과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과 순식간에 단절되는
게 죽음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느낌은 내가 지옥 가는 그 죽음과 다른 차원의 가장 실질적인 죽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 앞에 진짜 한 번 서보고 선을 넘어 한 번 갔다 와 보니까 죽음이 이론이 아니라는 느낌이
확 들면서 내가 죽으면 진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내가 분명히
구원 받았다고 확신했고 의심에서도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이 죽음에서
나를 건져내지 못한다는 것을 내 스스로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구원이 한 순간에 순식간에
날라 가는 것을 느끼고는 공포가 배가 되었고 그동안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이 없으셨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구원이 아닐 수 있겠다”
“내가 실제적으로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인데 구원 받았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받은 구원은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구원이었구나!”
“아 죄 사함이 구원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것이 구원일까?”
“정말 큰일 났구나 어떻게 하면 좋지?”
아무런 대책도 없고 방법도 없는 불쌍한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자마자 하나님과 내가 연결된 끈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저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날은 현실적인 체험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하나님과 연결된 끈조차 발견할 수 없던 그때부터 저는 저의 구원에 대해
구원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확실한 심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구원에 대해서 정확한 보강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말 지옥에 가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사고처리는 부모님과
사장 형제님 덕분에 다 제대로 마무리가 되었고 그 후에 사장 형제님이 목사님을 모시고 와서
수술이 끝나고 나서 회복할 때에 구원교제를 해주셨는데. 이미 내가 다 알고 있었던 내용이고
다 아멘 할 수 있었지만 그리고 또 믿었지만 내가 지옥 갈 수 있다는 느낌은 절대 지워지지
않고 더 커졌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에 대해선 목사님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물어봐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대답만 할 것 같고 오히려 더 답답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구원 문제에 대해선 이제 누구에게 기대지 말고 내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힘든 숨 못 쉬는 고통
사고로 인한 얼굴 붓기가 일주일이 지나 거의 사라지자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한 번도 수술이라는 것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을 하면 금방 괜찮아지고
바로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 8시에 밝게 웃고 들어가서 시작된
첫 수술이 저녁 6시가 돼서 끝나는 10시간에 가까운 대수술을 받고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서
수술실을 나오게 됐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깨어 보니 입은 쪼개진 턱을 성형해서
봉합해놔서 열지를 못하고 코에는 장시간 수술로 인해 폐로 연결되는 호흡관이 심겨져 있었고
몸에는 소변 줄이 달려있고 장시간 수술로 인해 발뒤꿈치가 부풀어 올라서 다 까져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입은 치아와 턱을 성형하고 봉합하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작은 입이 다 부르트고
찢어져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의식이 돌아오고 나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입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막아놨기 때문에 코로 호흡을
해야 하는데 코에 삽입된 호흡관이 코로 숨 쉬는데 너무나 방해가 되었고 기도로 피가 계속
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숨 못 쉬는 엄청난 고통을 겨우 겨우 숨 쉬어가며 검사를 받으러
다니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두 주먹으로 연신 침대 바닥을 치고 있었습니다. 겨울철 코 막힘
때문에 코로 숨을 못 쉴 때 겨우 겨우 코로 숨 쉬는 고통의 10배에 가까운 호흡곤란이 오니까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약간 인내와 끈기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숨 못 쉬는 고통은
이건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검사를 끝마치고 중환자실로 돌아와서도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있으니까 중환자실 간호사가 입을 봉합한 제게 어디가 아프냐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순간 너무나도 어이없음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는데 대신 울부짖으면서 손으로 쓰는 시늉을
했습니다. 눈치 빠른 어머니께서 볼펜과 노트를 가져다 주셔서 코로 숨 쉬는 게 너무 힘드니까
석션 좀 해달라는 글을 보고 재빨리 조치를 취해 주셨습니다. 주기적으로 석션을 하니깐 숨을
쉬는데 약간 편해짐을 느꼈습니다. 수술 받기 전에도 붓기 빠지는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는데
수술 당일 날 고통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희한하게도 수술한 부위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는데 숨 못 쉬는 고통이 심했고 온 몸은 두드려 맞은 것 같이 너무나 쑤시고 아팠습니다.
마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몸이 많이 움직였는지 팔고 다리를 묶어 놓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죽음에서 건져주지 못하는 죄 사함
병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 환자들은 다 울었습니다. 자신들도 저런 고통을 당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밤새 아픈 저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졸음과 싸워가며 주무르고 계셨고
저는 고통을 인내해가면서 견뎌나갔고 그 와중에 마음 속 깊이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사고
났을 때보다 배가 되는 것을 분명하고 뼈저리게 느끼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내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 그날 다시 한 번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너무나 힘듭니다. 살려주세요!”
“내가 구원이 아니구나!”
“내가 지옥 가겠구나!”
“죄 사함이 구원이 아니구나!”
“죄 사함이 날 죽음에서 건져내 주지 못 하는구나”
수술 이후 저는 기적처럼 아주 빠른 속도로 회복했습니다.
교통사고 나서 완전히 죽은 사람이었는데 대형사고 후 정확히 3주 만에 퇴원한 것입니다
사고 후에 일주일 동안 붓기 때문에 수술을 못하다가 수술 후에 2주 동안 완전히 회복해서
누워서 입원하고 제 발로 걸어서 퇴원했습니다. 이건 순전히 하나님 은혜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주위에서도 그리고 저를 수술했던 의사와 간호하던 병원 간호사들도 전부다 다 놀랐습니다.
같은 병실에서는 저보다 빨리 들어왔던 분들보다 제가 먼저 퇴원하는 것을 보고 부러워했습니다.
수술하고 나서도 사고 난 것처럼 얼굴이 많이 부었지만 금방 금방 붓기가 빠지기 시작했었는데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울을 보면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그리고 얼굴을 돌려달라고 저의 구원을
제대로 점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때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교통사고였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그 교통사고를 당해야 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피하지 않고 다시 당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끔찍한
교통사고로 인해서 실제적인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하나님 앞에 저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으며 죄 사함이 구원이 아님을 죄 사함은 큰 죄를 지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가는 것임을 알았으니까요
구원파선교회의 부정부패
사고 이후 교회도 쉬고 직장도 쉬고 그냥 회복하는 기간을 한 일 년 동안 갖으면서 저의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명확한 것은 죄 사함만으로는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건 확신의 개념이 아니라 분명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회 담임목사가 교회 형제자매들을 대상으로 설교시간에 늘
선전하던 교회 기업에서 판매하는 물건과 그 주식 사건에 대한 부정이 고발 프로그램에
방송되면서 교회의 부정 사건이 터졌습니다. 한 바탕 교회에서 난리가 났을 때 그 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뭔가 이상하다 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
“내가 그들의 열매니까 나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왜 그들이 하자고 하는 대로 해도 신앙이 이 모양인가?”
“여태껏 이것을 나의 믿음 없음으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는데”
“왜 나는 믿음이 어렵고 그들은 믿음이 너무도 쉽고 신앙생활이 재미있다고 하지?
“그런데 신앙이 그렇게 쉽고 재밌어서 왜 다들 목사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고서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더군다나 돈을 위해 형제자매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친다고???“
나중에 이 선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며 다른 교회를 알아보던
형제님을 통해서 선교회의 대표 담임목사와 담임목사 주변의 가까운 목사들의 알고 나면 놀랄
더러운 일들과 돈에 관한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음과 교회 또한 담임목사가 지난날 여러 종교단체를
거치면서 이런저런 이론들을 많이 가져왔다는 사실을 듣고 이런 교회에 더 이상 몸담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교회를 알아보다가 형제님을 통해서 지방교회(회복교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막상 지방교회에 들어가 보니 이미 구원파선교회에서 넘어오신 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구원파선교회에서는 죄 사함으로 시작해서 죄 사함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죄 사함 외에
더 이상 들어볼 수도 없고 들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교회생활을 해보니 기본적인
한 지방의 교회 안에 여러 가정교회들이 모여 가정 모임과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죄 사함
외에 거듭나고 거룩하고 새롭게 되고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영화롭게 되고
고열과 고압을 통과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이기는 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밟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정이 너무 복잡하다고 느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구원
받은 후 성화과정을 거쳐 영화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지방교회 생활
교회에 출석하니까 많은 형제자매들이 진심으로 환영해 주면서 정말 친 형제처럼 잘해줬습니다.
이미 저와는 다른 구원파선교회에서 넘어오신 형제님들이 많아서 이야기가 잘 통했고 그분들이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잘 양육해주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사역자가 없고 대신에 책임형제가
있고 그 옆으로 장로형제님들이 도와서 교회를 꾸려나가며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평등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집회소라는 교회에서 모여 주의 만찬과 함께 예배를 드렸고
그 외에는 늘 모이는 가정 교회에서 주중에 청년 모임과 지체를 양육하는 과정들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두 달에 한 번꼴로 다른 지방의 지방교회와 모이는 섞임 집회가 있었습니다. 집회소와
가정교회 그리고 형제자매들과 교제에서 말씀을 들을 때 예전 교회생활과 달리 전혀 생소한
개념의 용어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지방교회 형제자매들은 그것이 굉장히 수준이 높은
하늘의 언어라고 하면서 익숙해지면 그 말뜻이 더 깊이 전해진다고 했지만 이해하기 힘든
개념의 말이 하늘의 언어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고 누구나가 평등하게
발언하고 교회 일에 참여하는 덕분에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로
일처리가 굉장히 답답하고 쓸모없는 거 빼고는 교회 생활은 괜찮았습니다.
매주 마다 양육 모임, 청년 모임, 복음 사무실 모임, 소그룹 모임, 가정 집회를
빠짐없이 나가면서 구원파선교회 생활과 다름없이 바쁘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성실하고 꾸준하고 인내하는 게 저의 장점이었는데 여기서도 그 장점이 발휘되어
교회생활은 금방 적응하면서 교회에서 양육하는 성경모임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성경모임에서 특히 제 마음을 사로잡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기는 자”였습니다.
구원파선교회에서는 한 번도 이기는 자에 대해서 본적도 들어본 적도 또한 생각해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 생소했지만 분명 계시록 말씀에서는 “이기는 자”라는 단어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기는 자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말씀하고 있었지만
계 21:7~8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개역성경)
지방교회 교리에서는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바깥 어두움으로 쫓겨나서 주 예수님과 이기는
자들의 천년왕국의 기간 동안 슬피 울고 후회하며 그 시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는
훈련을 받고 천년이 지나면 훈련에서 벗어나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깥 어두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개역성경)
마 22:12~13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개역성경)
마 24:50~51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 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개역성경)
마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개역성경)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과 바깥 어두움에 쫓겨나는 말씀이 전혀 다르다고 느꼈지만
내가 말씀에 대해서 깊이 몰라서 그렇겠거니 다른 말씀을 더 찾아보면 저런 결론이
나오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지 그 과정에 저절로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고
저를 이끌어주고 양육해주는 책임 형제님과 그 형제님의 아들처럼 양육 받는 형제님에게 어떻게
이기는 자가 될 수 있는지 과정을 설명해 달라고 여러 번 부탁을 했었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려면
교회생활을 통해서 고열과 고압을 통과해야 새 예루살렘의 보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고열과 고압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교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교회생활은 말씀을 먹고 양육을 받아
자라며 신언과 봉사와 다른 어린 자들을 양육하고 섬기고 전도하는 과정에서 오는 고열과 고압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고 그러더군요. 이기는 자에 대한
몇 번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보석이 만들어지는 이치는 고열과 고압이 가해져야만 보석이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고열과 고압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을 통해서만 맛볼 수가 있어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고열과 고압을 통과하는 과정이 없기 때문에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교회생활을 통해서 고생하라는 얘기였습니다.
회복역과 라이프 스터디
제가 몇 번씩이나 부탁해서 이야기를 종합한 것은 말씀해 주는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
또 말씀해주시는 형제님들 또한 정확하고 명확하게 콕콕 집어서 얘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교회생활 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기는 자에 대한 희한한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성경에서는 분명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계속 말씀하고 있었지만
지방교회에서는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천년동안 바깥 어두움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들어서 바깥
어두움이 오히려 안전지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생전에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정말 너무나 안타깝고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천년동안 바깥 어두움에서 훈련 받으면 다시 복귀할
수 있어서 이기면 좋지만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하는 마음속의 안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천주교에서 흔히 말하는 연옥이라는 개념과 정말 비슷했습니다. 한 마디로 내 노력의 여부와
강도에 따라 이기는 자로 얼마든지 자라날 수가 있으니 안심해요 라는 말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바깥 어두움이 어떤 곳 인지도
모르는 성경지식의 부족과 진리의 부족함과 교만으로 뭉쳐져 있던 저에게는 그것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음에도 끝까지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위트리스 리가 변개한 성경인 회복역과 성격의 해석본에 해당하는 라이프 스터디에서 비롯된
개념이었습니다.
회복역과 라이프 스터디를 처음 접했을 때 이런 게 정말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개역성경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이뤄져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고
성경이 풀리지 않는 말씀들이 많아 그것의 정확한 해석본이 있어서 제대로 이해하고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순전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음을 과정을 통과하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풀어내주는 목사라는 사역자에게 의지해서 이해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성경은 성령께서 직접 풀어주셔야 정확하며
그런 깨달음은 목사와 같은 사역자가 아닌 하나님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달라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낮은 마음으로 묵상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깨달음을 주신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개역성경을 이해하기 쉽게 다시
재구성한 회복역을 무료로 나눠주는 그 일에 시간을 내어서 적극 동참하고 지지했습니다.
진실 된 거짓 신언
두 달에 한 번꼴로 있었던 다른 지역 교회와 섞임을 가면 구원파선교회에서 지방교회로
넘어온 저에게 집회 전에 신언, 즉 간증을 시키곤 했는데 할 때마다 인기가 참 좋았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구원을 받고 지방교회로 오게 되었는지 형제자매들에게 말씀드리면 다들
얼마나 집중해서 듣고 재밌어하고 흥미로워 하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간증을 다른 교회와 섞임을
가질 때마다 하니까 똑같은 이야기를 더 맛깔나게 하는 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사실에 근거한 약간의 허구가 저도 모르게 들어간다는 걸 느껴 자제하면서도 그럴 때마다 전에 저의
간증을 들었었던 같은 교회 형제자매님들도 더 새롭게 듣는 것을 보고 정말 수많은 형제자매님들이
모인 큰 집회에서 말할 때 정말 아주 진실 되게 자신도 속아 넘어가는 진실 된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으면서 하나님께 영광도 돌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깨달음이 밀려오자
지난날 구원파선교회에서 왜 사역자들이 그렇게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를 하고 간증을 하고나서도
형제자매들을 대상으로 사기 치고 더러운 일을 일으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는지 한순간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교회에서는 매년 2회 미국교회 리빙 스트림에서 전해오는 동영상 말씀을 가지고 교회의
전 가정교회가 모여서 신언집회를 하는데 나눠준 교재를 가지고 비디오를 시청하고 난 후 한
사람씩 전부 돌아가면서 말씀을 통해서 받았던 깨달음이나 느낌과 생각을 자유로이 신언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다들 직장에 다니시고 바삐 사시는 분들도 이 주간만큼은 빠지지 않고 다들
참석하시는데 신언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저 짧은 시간에 저런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너무
신기하고 깊이 있는 깨달음에 감탄하면서 감동했습니다. 한 번 집회가 시작되면 일주일 내내
하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몇 번씩 신언을 하게 됩니다. 제 차례도 돌아왔기 때문에 저는 정말
최대한 제가 말씀을 보면서 깨달았던 바를 짜내고 짜내서 겨우 신언을 했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너무나 쉽게 기막힌 깨달음을 마구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다 교회생활 연수의 차이겠거니 생각했지만 답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의
깨달음은 교재에 적혀있는 깨달음을 짜깁기해서 자신의 방식대로 풀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어쩐지
그렇게 바쁜 직장 생활인데도 불구하고 같은 비디오를 시청했는데 언제 저런 깨달음을 금방 나올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쉬운 방법을 두고 저는 너무나 돌아가는 느낌이어서 다음부턴 저도
그대로 따라 했더니 매번 신언하는 게 부담되지 않고 쉽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들의
호응도 전보다 더 놀라움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더욱 힘을 얻어 신언을 했는데 계속 이렇게 하니까
이것도 금방 싫증이 나고 대충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게 아니고
남의 것을 단순 짜깁기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는 짜깁기 하는 것도 귀찮아서 대충 라이프스터디에 있는 주석과 회복역 말씀과 전에
구원파선교회에서 깨달았던 것들과 저의 생각을 적절히 섞어서 신언하니까 다들 아멘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이 반응을 보고 너무 당혹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대충했고 또
말씀이 아닌 저의 생각을 말하면서 말씀처럼 위장한 것이었는데 아멘이라뇨. 뭔가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 이 비디오집회가 끝나고 나서 가정교회 집회와 집회소 신언에서
남모르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대충 회복역과 라이프스터디의 주석을 가져다가 저의 깨달음인양
말하거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닌 성경과 비슷한 저의 생각을 말하며 그것이 맞다고 증명하기
위해서 라이프 스터디에서 그렇게 말하더라 또는 위트리스 리 형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 하고
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다들 너무나 반응이 좋았고 형제자매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정말로 이상하고 약간의 공포와 충격으로 내게 다가왔던 이유는 지방교회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개역성경, 회복역, 라이프스터디와 복음서원에서 발행하는 책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확하게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는다는 것이었고 성경 말씀이 최종
권위가 아니라 위트리스 리가 하는 말이 최종권위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낌새를 날 양육해주는 책임형제님과 그 형제님의 아들로 양육 받는 형제님도 눈치를 못
챈다는 것이 더 경악스러웠습니다. “아! 분명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지난날
구원파선교회에서도 이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걸 추억하면서 “여기도 결국 아니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과 실제가 없는 껍데기뿐인 지방교회
지방교회에는 겉으론 보기엔 거듭나고 거룩하고 새롭게 되고 변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영화롭게 되고 고열과 고압을 통과해서 이기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을 밟아 나가는 제대로
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개념대로 교회 생활을 해나갈 수 있도록 서로 격려하고 있었지만 실제
그들의 삶의 이론과 개념은 정말 하늘의 언어처럼 거창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고 그 갈망을 신언집회로 그리고 각 가정교회에서
봉사로 다른 지역교회와 섞임으로 표현하면서 몸으로 말로 때우고 있었을 뿐 실제적으로 마음에서
성화와 영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그 단계를 밟아나가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은 아예 있지도 않았습니다. 다들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적어도 책임형제님 같은 분들은
되어 있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겪었던 날 양육해줬던 책임형제님은 그 귀하다는
회복역 성경을 무료로 나눠주는 행사를 거리에 나가서 수고할 때 이런 일은 잘 안 해봐서 부끄럽다고
엄청 부담스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고 기어이 빠져서 회복역을 나눠줄 수 있도록 파라솔 아래서 회복역
챙겨만 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엔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다 말씀이
마음에서 실제가 되지 않은 껍데기여서 그렇다는 사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구원파선교회에서 시도도 해보지 않았던 성화와 영화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지방교회에서라면 누구나 시도해 보는 주의 이름 하루에 1,000번을 부르는 일을
실제로 생활에 적용해서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막상 해보고 그것을 유지시켜 나가보니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일 하면서 주의 이름을 틈틈이 하루에 1,000번을 부르며 집중하는 게
결코 쉽지 않았으며 하루 종일 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시간을 내어서 따로 집중력 있게
1,000번을 부르면 3시간이 걸리고 보통의 집중으로는 6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하루 종일 부르니까 주의 이름에 신경은 집중이 되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내게 별 의미가
없었고 내 마음에 어떤 변화도 오지 않았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집중할 때 대충 할 수
없고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하는데도 어떠한 마음의 변화도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한 번 시작했으니까 계속 꾸준히 인내하면서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말씀 먹는 것을 해봤는데 그 중에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이 말씀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먹는 것이 회복역 가지고는 절대 되지 않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해야 효과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회복역이 성경말씀을 쉽게 풀어놓다 보니까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양육 받는 것도 복음 사무실에 나가서 과정이 끝날 때까지 꾸준히 계속 이어나가서
끝을 봤습니다. 해보고 제 마음에 내린 결론은 아.... 이렇게 해서는 성화와 영화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도대체 언제 어느 세월에 주님과 한 몸이 되어 이기는 자가 될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지방교회에서 말하는 이론대로 절대로 이뤄질 수 없음을 끝까지
해보니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에서 실제로 이뤄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이론들을 유지하고 해나갈 수 있었던 그 이유는 끝까지 해보면서
유지시키지 않고 생각 날 때마다 그리고 자극 받을 때마다 하고 중간에 느슨하게 하다가 포기
하니까 미련을 갖게 되어서였습니다. 내 육체를 가지고 절대로 성화와 영화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지방교회에 깊숙이 뿌리박힌 율법주의
그래서 교회형제자매들은 영을 사용해서 이 과정을 이루는 거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영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몰랐고 영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육을 사용하면서도
그저 이론으로 집회에서 한 영, 한 혼, 한 몸, 한 마음만 주구장창 신언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온전한 회개를 하는 것, 죄 사함을 받는 것, 성화, 영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
그리고 온전한 구원을 받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것들이 아니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고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다 끝내 놓은 것인데 이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 그대로 마음에서 이뤄지지 않다보니 마음의 세계에서 현실이 되지 않아 거기서
오는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말씀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었죠.
그런데 여러 지방에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고 그 교회의 지체들과 한 몸이라고 그렇게
교회 섞임 집회에서 소리 높여 외치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다른 교회에서 교회 방문을 자주 오니까
너무 귀찮고 지겹고 힘들다는 말을 자매님들이 일하는 주방에서 들었을 때 상당히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거역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한 몸 되기를 싫어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게 현실인데
그런 현실을 부정하면서 한 몸을 이루었다고 말 하지만 마음에선 이뤄지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부다 성경에서 이기는 자가 되면 누리는 혜택과 이기는 자가 되지 못했을 때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닌 바깥 어두운 곳의 훈련 장소에 간다는 위트리스 리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자신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구원 받은 사람에게 이기는 자가 되라는 요구가 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신의 혼과 몸을 사용해서 이 육체로 성화를 이뤄보고 영화를 이뤄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후 이기는 자가 되려고 노력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육체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율법주의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이게 율법주의인줄 전혀 몰랐지만 하나님 생명을 소유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성실하게 교회생활을 하자 청년이었던 제게 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통해 저는 드디어 그렇게 찾고 싶고 얻고 싶어서 매번 수양회에서 구원파선교회
수양관 뒷산에 올라 매번 하나님께 기도했었던 이쁘고 사랑스럽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장로교회에서는 죄인의 모습을 구원파선교회에서는 죄 사함을 그리고
지방교회에서는 육은 영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습니다.
아내를 맞이하면서 한 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아내도 구원파선교회의 출신인 아버님 덕분에
주일학교 때부터 일찌감치 죄 사함을 깨우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당시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아내를 주시지 않을까?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어서 내게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너무나 가까웠던 곳에 있었습니다만 시간을 멀리 돌아서 만났던 것이었습니다.
지방교회에서 킹제임스교회로
성경에서 말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그대로 내 마음의 세계에서 현실이 되지 못하는 것과
위트리스 리가 말하는 한 영, 한 혼, 한 몸, 그리스도와 한 마음이 이미 이뤄졌다고 그렇게 매번
신언하면서도 마음에서 이뤄지지 않음과 실제로는 육체를 사용하면서도 영을 사용해서 이기는 자가
되려고 되지도 않는 노력을 하는 교회 생활은 어느덧 아무 능력 없는 종교생활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 부분에 계속 의문을 가지고 있는 저와 그것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아내가 먼저 교회에
나가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저 또한 아무 생각 없이 이어져 나가는 종교생활을 그만 둬버려야겠다는
생각에 교회를 나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 형제자매들은
시간 될 때마다 전화를 걸어왔지만 어떤 대화도 이미 결과가 뻔하고 아무런 능력도 안 되고 현실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느새 부터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화를 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방교회생활이 흐지부지 끝이 났습니다.
지방교회에서 나오게 되자 저를 지방교회로 이끌어줬던 형제님이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이번엔 킹제임스교회로 이끌어 줬습니다. 킹제임스교회는 개역성경을 쓰지 않고 영국 왕
킹제임스의 명령으로 만든 성경을 사용하는 교회였습니다. 알아보니 개역성경이 많은 오류가 있고
“없음”이라고 적혀있던 구절이 사실은 “없음”이 아니고 누락시켜서 성경을 의도적으로 변개했음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으로 구원이 불가능 한 것이 절대 아니고 당연히 가능하며
신앙생활의 기초를 닦을 순 있으나 “없음”이 없는 정확한 성경을 기초로 해서 정확히 구원받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출발이라고 말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킹제임스교회도
여러 갈래로 많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님과 여러 군데의 킹제임스교회를 직접 다녀보고
얘기를 나눠 본 결과 여기다 싶은 교회를 하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학자가 담임목사로 있으면서 킹제임스 성경을 기반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 성경을 기반으로 강해설교를 하고 있었고 성경의 신학과정을 직접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었으며
킹제임스 성경을 직접번역해서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읽어보니 개역성경보다 단어의
개념이 훨씬 분명하고 정확한 걸 보았고 그래서 아내와 저의 성경을 킹제임스 성경으로 바꿨습니다.
교회는 나름 투명한 절차를 통해서 운영되고 있었고 그 곳 교회의 형제자매님들은 이미 일반교회와
구원파선교회와 지방교회나 다른 교회들을 다 거치고 왔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막상 실제로 교회
방문을 해보니 구원파선교회의 수양관에서 늘 봤던 형제자매님들 모습이 꽤 많이 보였습니다.
일반 형제자매님들도 있었지만 사역하던 목사들도 보였습니다. 거기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직접
빠져나와 올바른 신앙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역자들이 달갑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교회에 있었을 때 담임 목사가 어떤지 분명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나 많은
찬양을 했었던 사람들이고 그 담임목사를 위해 많은 희생을 강요했었으며 그들이 그 담임 목사
눈 밖에 나서 잠시 목사 신분에서 밀려나 일반 형제신분으로 있었을 때 그들의 성경지식 수준이
거의 밑바닥인 것을 알고 상당히 충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성경강해
킹제임스교회의 형제자매님들은 기존 교회의 부정부패를 많이 경험했던 분들이라 그런지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정확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 설교에 감동을 받아 유투브를 통해 듣고
또 들었다, 1,000번을 들었다, 몇 백번 듣고 아! 이게 진리구나! 하고 오셨다는 분들이 꽤 많았고
그런 간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교회를 가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풀어서 강해하는 설교는 쉽게 들을 수 없었는데 실제로 그런 설교를 하고 있었고 또한 교회를
건축함에 있어서도 다른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제도를 통해 교회가 형제자매들의 돈을 빌리고
건축을 한 후에 다시 건축헌금을 돌려주고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여기저기 소문이 나서 올바른
말씀과 깨끗하고 건강한 교회운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회에 등록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여기가 저의 마지막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아내와 같이 직접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린 후에 목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었습니다. 특히나 목사님이
기존의 장로교회가 자신들이 진리에 속한 집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단교리에 묶여있는 걸
전혀 알지 못하고 실제를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맞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날 돌이켜보면 장로교회는 정말 항상 문제가 많았습니다. 늘 돈에 얽힌 각종 비리가 너무나
많이 일어났고 간음 사건과 권력다툼도 그와 비례해서 벌어졌으며 같은 교인들 사이에서도 시기와
질투 미움 고소고발이 참 많았습니다. 특히나 제 학창시절의 기억에 남았던 건 목사와 장로 자녀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어떤 가정의 자녀들보다 항상 몇 배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대우를 받았고 항상 교인들이 자신들을 희생해서 그렇게 대접해 줬으며 본인들은 그걸
아주 당연하게 알고 당연히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그것을 요구했고 그러면서도
세상 사람도 하지 않을 양심에 어긋나는 죄 짓는 건 아주 서슴없이 하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목사 장로 자식들이 그런 경우가 아주 많았고 소수의 애들만 바르고 심성이 고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처음에 이런 애들을 보면서 도대체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교회의 사역자인데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는 게 부끄럽지 않나? 싶었지만 나중에 성장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교회의
교인들 앞에서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거룩하고 진실 되게 보이려고 행동하지만 집에서는 자신의
거짓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도 그대로 행동했을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곧 부모와 자식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열매였습니다.
성경에서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시는 말씀은 세상 살면서 많은 것을 바르게 구분하게 해줬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지 하지 않게 된 나의 구원 문제
이제 제대로 된 교회도 찾았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 교회를 출석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양시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그동안 일을 해오면서 쌓여왔던 피로와 과로 그리고
심리적 압박 때문에 일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앓게 되면서 집에 누워
지내는 시간을 한 달 동안 보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맛본 후 구원파선교회를 빠져나오고
지방교회를 지나오면서 저는 계속 저의 구원을 다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병이
생기면 늘 죽음의 공포가 저를 짓눌렀기 때문에 구원 문제를 진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 복음에 대해서 정확하게 들으며 내
스스로 구원을 제대로 점검해보자는 생각에 킹제임스교회에서 발행한 여러 책들과 동영상 그리고
복음강해를 들었습니다. 복된 귀한 소식이 정말 귀한 소식의 복음이 되려면 마음이 먼저 제대로
된 회개가 필요하단 생각에 온전한 회개부터 꼼꼼히 듣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은 참 좋았습니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말씀의 증거와 회개의 개념으로 인해
마음이 점점 내려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이러한 말씀이 더 깊이 들어갈
줄 알고 마음의 가난함을 더 느껴보고자 그 다음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죄가 없다는 복음으로 갑자기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어? 내가 순서를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정확하게 순서를 찾아서 들어봤지만 역시나 회개 후에 내가 다 아는 복음이 전해지고 있었고
다른 동영상을 봐도 그리고 복음서적을 봐도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저의 구원에
대한 의심을 제대로 해결하려면 저의 마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자각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못 미치는 수준을 경험하니까 허탈하면서 구원에 대한
의심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죽음의 공포에 억눌리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는 막막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내 구원 문제는 내 자신이 해결해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어서 이제는 구원 문제를 남에게 기대선 안 되겠다는 의지가 섰습니다.
지하철 전도자와의 만남
어느 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서울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전도자 한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교통사고를 통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오고 예수님의 환상을 본 후
자신이 걷지 못하는 불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복음을 계속 전하기 시작하자 이렇게 두 발로
당당하게 설 수 있었다는 간증을 하면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걸 보고 그동안 지하철에서 복음 전하는
마귀들을 여럿 보았지만 이 사람은 좀 다르구나 싶어서 지나가면서 건네주는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그 전도지에는 자신이 어떻게 교통사고를 당했는지 어떻게 불구가 되었는지 그리고 교회에 다닌 적도
없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환상을 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는지
그것에 대한 스토리가 적혀있었고 자신이 늘 복음을 전하면서 기록한 일기가 있는 까페의 주소가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아내와 식사 하면서 그 지하철 전도자를 만난 얘기를 해주며
그 까페에 들어가 봤습니다. 나름 잘나갔던 젊은 시절의 죄 많은 부끄러운 일들을 담담하게 기록한
글을 보면서 현재 이 사람이 배운 게 없어 다른 일은 할 수 없어서 마사지 일을 하고 있고 그런데
같이 마사지 일을 하고 있는 아내도 일감이 잘 없고 자기도 요즈음 일감이 없어서 벌이가 시원찮아
먹는 게 부실한데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도 덩달아 먹을 게 없어서 못 먹는다는 이런 저런
얘기를 날마다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별 감흥 없이 죽 읽어 내려가다가 하루 이틀 읽어 가다보니 정말 돈이 없어서 굶어
죽을 것만 같은 현실이 제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글로 묘사를 계속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몰라도 아이들이 굶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커져가다 보니 애들이 너무 안쓰러워
복음 전하는 사람이 굶으면 안 되지 하는 생각에 일을 할 수 있게 해서 아이들을 먹여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눈물이 핑 돌아서 까페에 있던 후원계좌로 아내에게 무작정
입금을 하게하고 이런 저런 얘기는 전혀 없이 다짜고짜 마사지를 받겠다고 전화 연락을 했습니다.
이 분은 전화 연락을 받고는 어안이 벙벙해서 안내를 해주고는 다음날 하나님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통해서 자신과 아이들을 보살피셨다는 일기를 써서 올렸습니다.
빵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지하철 전도자
그분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그 일기를 보고 내 마음이 높아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그 사람의 전략이었습니다. 신종 앵벌이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기술과
지식이 없다보니 이렇게 먹고 살기 위해서 지하철에서 나름 계산된 감동 멘트를 하고 자신의
불쌍한 처지와 전도 상황을 (기독교인들은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것을 용기 있다고 생각하기에
때때로 전도하는 사람에게 돈을 쥐어주기도 함) 기록하는 일기와 후원계좌가 있는 까페주소가
적힌 전도지를 배포했습니다. 그러다보면 대부분은 받지 않지만 그 사람이 하는 말과 전도하는
행동에 감동한 분들은 전도지를 받고 까페에 가입한 후 몇 번의 글을 읽고 돈을 정기적으로 꼭
후원하거나 마사지를 받거나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을 돕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사람에게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죠. 이 사람은 후원이 많이 들어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글을
올리다가 후원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으면 자신의 일감이 하나도 없다 요즘 정말 생계비가 없어
막막하다 애들이 못 먹는 게 안쓰럽다는 글을 꼭 올리고 글을 올리고 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이 채워주셨다는 글을 올리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꾸준히 까페를 들여다보니까 패턴이
파악이 되더군요. 그래서 이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빵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지하철전도자의 까페를 한 이주일 빠짐없이 드나들던 동안 까페에 게시글이 하나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까페 주인은 저처럼 자신을 파악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글이나 댓글을 달지
못하도록 막아 놓고 삭제하고 있어서 글과 댓글을 올릴 수가 없었는데 기독교인과 관련된 글이
하나가 올라 온 것이었습니다. 제목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고 다만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믿는다면서도 양심 속에 죄로 인한 거리낌이 남아있는지 (죄 사함복음)
날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으나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은 믿어지는지 (십자가복음)
내 속에 새 생명이 있는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었는지 (부활 승천복음)
믿음은 아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되고 실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참복음 형제님이 전도자 까페에 올린 복음 글이었습니다.
참소리선교 까페와의 만남
저는 구원파선교회에서 분명히 죄로 인한 고통과 그것으로 인해 바닥까지 내려가 죽음을 맛보고
죄 사함 복음으로 인해 죄가 깨끗이 사해지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죄 사함 복음이라는 내용은
쉽게 이해하고 인정이 됐지만 그 다음 문장이 마음에 턱 하고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부활에
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이 그 문장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부활절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부활 하신 것이 왜 내 기쁨이 되는지 왜 내가 부활
되었다고 하는데 내 마음 속에서는 실제가 되지 않는지 이상함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 이거 다른 복음 전하는 글과 다르네? 뭔가 다르다! 뭔가 있는 것 같다 가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고 바로 그 글의 링크를 타고 참소리 선교 까페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참소리 까페도 다른 어느 까페나 대부분 그렇듯이 여러 가지 메뉴들이 잔뜩 있었고 얼핏 봐선
어느 것을 봐야 할지 거리계산이 서지 않을 정도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까페
대문에 있는 참복음 형제님의 간단한 간증을 곁들인 글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까페를 어느
순서로 이용해야하는지 잘 일러주고 있었습니다.
일단은 메인 글에서 본대로 죄 사함에 관한 코너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메뉴까지
일단 죽 훑어보았는데 그런데 보면 볼수록 아! 구원은 이런 과정을 거쳐야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는 게 점점 마음속에서 확고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죄 사함 이후에 무언가 어떤
과정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실체가 바로 까페에서 안내하는 메뉴들이었던 것이죠.
아! 신앙에 대해서 제대로 된 까페를 만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서 까페를 제대로 파야겠다는
생각에 글들을 하나씩 정독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참복음 형제님과 비둘기 자매님 이 두 분의
간증을 보니 저는 죄 사함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고 죄 사함 이후의 과정들에 대해서는
들어 본 건 같으나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서 개념을 세워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두 운영자님의 간증문을 읽고 난 후에 아내와 대화하면서 죄 사함이 구원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죄 사함 이후에 여러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와 한 몸까지 이뤄야 진정한 구원을 이루는 것 같다.
아무래도 지금 시점에서 확실하진 않지만 내가 구원이 아닌 것 같다는 내용을 가지고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저도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는데 구원이 이렇게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받는 것이라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으며 이렇게 어렵고 힘들다면 구원은 누구나가 쉽게
다 받을 수 있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였습니다. 이 생각을 하면 그래 맞아 이건 뭔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노아의 시대 때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물에 수장되고 구원 받은 사람이 겨우
8명인 것을 보면 이것은 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올바른 선택과 분명한 결론
구원을 누구나가 다 쉽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이 글을 무시하든가, 구원은 복잡하고 어렵지만 이렇게 명확한 단계를 거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정말 성경적이라면 이 운영자 말대로 고생스럽지만 과정을 거치든가
전자는 이미 죄 사함으로 이뤄서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니까 너무나 쉬웠지만 후자는 한 번도
과정을 거쳐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내가 구원에 대해서 모르는 과정이 더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고 내 손에 쥐어진 게 아니어서 너무나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해보니까 그렇잖아도 요즘 교회 다니는 사람들 누구나가 다 예수님을 믿는다 말하고
다 구원받았다고 하고 다 천국 간다고 하고 다 죄 사함 받았다고 하고 다 의롭다고 말을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죄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기독교인인데 내가 받은
구원이 그들과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게 지금 내게 있는가? 물어 봤을 때 솔직히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참복음 형제님과 비둘기 자매님의 글들을 봤을 때부터 나는 구원이 아니구나!
구원은 이렇게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구나! 하는 생각이
이미 마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내가 전에 받은 죄 사함 구원이 있으니까
안심 할 수 있지만 아니라면 이건 정말 큰일인 것이었습니다. 아니라면 지옥가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전에 장로교회 있었을 때 이런 죄 사람의 과정이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그냥 웃어 넘겨버렸으면 내 죄가 흰 눈처럼 씻어지는 죄 사함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까 더더욱 이 글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까페의 글을 더 주의 깊게 읽어보고는 분명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아! 나는 구원이 아니구나! 나는 죽으면 바로 지옥이구나! 하나님은 나를 진짜 모르시는구나!”
“내가 위선자고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이구나! 구원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는 사람이구나!”
왜냐하면 참복음 형제님과 비둘기 자매님의 간증과 까페에서 안내되어 있는 모든 글들이 온전한
회개와 죄 사함과 죄 해방과 율법 해방과 십자가 죽음과 장사과정을 거치고 그 후에 부활 승천과
하늘보좌와 성령 충만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서 이기는 자가 되는 과정을 계속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저는 죄 사함은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통과했지만
죄 사함 외에는 전부 너무나도 생소했고 개념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념이 서 있지 않았다는 건
한 번도 이런 과정을 통과하고 깨달아 본 적이 없다는 반증이니까요. 만약 이런 과정들에 대해 제가
분명한 경험을 했더라면 죄 사함 과정처럼 정확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인데 저에겐 이런
과정에 대한 간증은 제 마음에선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구원이 아니라고 결론이 내려지니까 한 편으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이제 다시 구원을 위해서 정확한 길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온전한 회개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거치기로 맘먹고 실행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누구에게도 나의 구원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내 스스로 이 과정을 끝까지 헤쳐 나간 후에 그때 참복음 형제님과 교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정을 하고 나서는 각 과정들을 죽 적어보고 일단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있게끔 해주는 말씀들을
찾아서 다 기록했고 그렇게 기록한 말씀들을 가지고 아침 출근하는 지하철에서부터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계속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말씀에 집중하기 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말씀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깨닫게 해달라고 은혜와 긍휼을 구한 후에 말씀을 먼저 입에 붙이고 마음 판에 새긴 후에
한 구절씩 계속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떤 주석의 도움도 받지 않고
어떤 신앙 서적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께 은혜만 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걸
반복했습니다. 과정을 통과하기도 전에 휴거가 이뤄지면 그때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조바심이
나긴 했지만 조바심이 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그냥 나아갔습니다. 마음이 절박해지다보니까
출퇴근 하는 지하철에서 말씀을 입에 붙이고 마음 판에 새기는 일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는데
그 복잡하고 답답한 지하철에서도 그것을 하고 또 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면서
경험한 결론은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묵상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면 실제로 하나님께서
제대로 깨닫게 해주시고 그 깨달음이 내게 적용이 될 때 저절로 믿어지고 후에 그 믿음이 몇 번의
증명을 더 거치게 되면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가운데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악할 뿐인 마귀인 나
혼자만의 힘으로 과정을 통과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게 있었습니다.
온전한 회개의 과정에 해당 하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 하나를 가지고
무려 3개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창 6: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크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킹제임스 흠정역)
분명히 말은 한국말이기 때문에 보고 이해 할 순 있었지만 결코 속으로 들어갈 순 없었습니다.
말씀의 결론은 내가 악하다는 것이었는데 분명 악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항상 악할 뿐이라는
말에는 마음에서 동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구절의 앞 뒤 구절을 봐도
왜 항상 악하다고 하시는 지에 대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아무리 봐도 생각의 확장이
이뤄지지 않고 계속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돌 뿐이었습니다. 3개월 동안 이것만 생각하는데도
이 말씀이 제 마음 속에서 명확하게 깨달아져 아멘이 되질 않아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을 그저 계속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과정에 해당하는 말씀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말씀들이 있었는데 말씀 하나를 깨닫지 못하면 그 다음 말씀으로 넘기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서 진도를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전철에서도 일하면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데도 왜 내가 항상 악할 수밖에 없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냥 악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왜 항상 악한 것은 이해가 되질 않을까?”
이 말도 사실 정확하게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린데 저는 정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렇게 생각이 돌아가질 않는 이유가 제가
양심이 없고 양심의 기준이 제 수준으로 낮기 때문이며 또한 저의 마음이 겸손하신 하나님
말씀께서 들어올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지지 않고 교만해져서 높아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서도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어휘력이
상당히 모지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한국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어휘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너무나도 부족했습니다. 사악함이 무엇인지, 큰 것이 무엇인지, 마음, 생각,
상상하다, 항상, 악하다 이런 단어들을 설명해보라고 제 자신에게 말했을 때 제대로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한심했습니다. 내가 여태껏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고
생각하고 살았구나. 내가 이렇게 형편없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저절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국어사전을 옆에 놓고 제가 모르는 어휘에
대해서 하나씩 찾아 개념을 알기 쉽게 바꿔 정리하면서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악함: 이익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방법도 거침없이 쓰려는 악한 마음
크다: 꽉 차있다, 충만하다, 오직 그것만 있다
마음, 생각, 상상: 마음에서 생각이 이뤄지고 생각에서 상상이 이뤄진다 [마음=생각=상상]
항상: 모든 시간 범위에 걸쳐서 달라짐이 없는 상태 (과거-현재-미래)
악하다: 기준에서 벗어나다
그러다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깨닫게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길
계속 반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제 마음에서 깨달음이 마구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사악함이 땅에서 크다’는 말은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하다’는
말과 같구나! 그러면 도대체 왜 사악함이 땅에서 클까? 왜 이익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한 마음이 땅에 꽉 차 있을까? 땅에 꽉 차있다는 말은 온 세상에 꽉 차있다는 말이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 마음에 꽉 차있다는 것인데 꽉 차있게 되면 오직 그것 밖에 없어서 그것
자체가 된다는 말이다 아! 내가 사악함 그 자체고 땅을 채우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도 사악함
그 자체니까 땅에 사악함이 꽉 차 있는 상태가 되는 거구나!! 온 세상이 사악함 그 자체구나!!
그렇다면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한 이유도 내 마음이 곧 내 혼이 악
그 자체라서 그런 것이구나! 아! 나는 죄 밖에 없는 죄 그 자체구나! 나는 곧 마귀구나!
나는 반드시 죽여야 할 죄 그 자체
창 6:5절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 때 마침 집에 있었는데 이 깨달음들이 오자마자 저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원수인 죄 그자체인
마귀입니다. 제발 저를 살려두지 마시고 반드시 죽여주시길 원합니다! 죽고 싶습니다. 하나님!“
전에는 지옥가기 싫어서 그리고 죽기 싫어서 그렇게 발버둥치고 살려달라고 기도 했었는데
창 6:5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보니 저는 살아서는 안 되고 반드시 죽여야 할 마귀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악할 때가 있고 악하지 않을 때가 있으며 죄를 지을 때가 있고 죄를 짓지
않을 때가 있으며 선을 행할 때가 있고 행하지 않을 때가 있다고 악이 한 80% 선이 한 20%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전히 나는 100% 죄 밖에 없다고 하는 그 말씀이 절대로 들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80%의 악 때문에 지옥가지 않기 위해서 매달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온전히 100%로 사악한 인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살 가치가 없는
그런 벌레였습니다. “너 벌레 같은 야곱아” 라는 그 말씀이 바로 저를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깨달아지자 자발적으로 죽기를 바라고 반드시 죽여 버려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면서
저는 일평생동안 그 어떤 선한 것을 입력해도 오로지 죄만 생산하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는
죄의 생명 그 자체인 죄인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탁 박혀버렸고 왜 십자가 죽음과 장사과정이
있는지 일순간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와 장사가 제게 가장 복된 것이며 죄인인
저 스스로 절대로 죽을 수 없기에 예수님을 통해서 그것을 준비해주신 하나님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말씀을 깨달은 후에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눈 감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그리고 꿈속에서
제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선한 것이라고는 단 1%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악해빠진 100% 죄인인 내가 어떻게 선한 것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내가 내 자신을 속일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습니다. 내게 나오는 모든 것이 죄라서
저의 숨 쉬는 것도 생각해보니까 죄를 들이쉬고 죄를 내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내가
선이라고 행하고 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그것은 선이 아니라 위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위선이었기 때문에 항상 선을 행하고 나면 그것이 선으로 끝나지 않고 내 마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교만으로 끝났던 것이었다는 게 보여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분리 수거해서 쓰레기장에 분리해 버리는 데 환경오염 시키는
쓰레기들이 너무 많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재활용은 되지만 환경을 파괴시키는 1회용 플라스틱
쓰레기가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내가 이렇게 세상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벌레였구나 싶은 생각에
깊은 자괴감이 들며 내가 죽어야겠구나. 빨리 없어져야겠구나 하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참복음 형제님과의 교제 시작
창 6:5 말씀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온전한 회개에 관한 말씀들이 입에 착착 달라붙었고 핵심이
깨달아지니까 그 다음 말씀들도 덩달아 막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깨달음을 스마트폰에
기록 하느라고 그 답답했던 지하철의 상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다른
과정과 그 과정에 관한 말씀도 하나씩 욕심 부리지 않고 차근히 해나가면서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묵상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갔습니다. 진행하면서 느꼈던 건 제가 너무나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제 스스로 밟고 있는 과정에 어쩔 수 없는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올바르게
이끌어 주는 사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온전한 회개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스스로 밟아 나가 본 후에 참복음 형제님과 교제를 이어나가는
원칙을 고수한 채 계속 여정을 이어나가 마쳐보니 어느새 까페 가입한 후에 2년이 살짝 못 미치는
시간이 지나있었습니다. 까페에 올려진 다른 분들이 참복음 형제님과 교제했던 음성파일은 온전한
회개 하나만 듣고는 더 이상 듣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스스로 과정을 밟아 나갈 때 그 지식이
오히려 독이 될 거 같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온전한 회개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까지 제 스스로 다 하나씩 거쳤다는 결과가
나온 후 드디어 2020년 1월 2일에 참복음 형제님께 전화를 걸어 교제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시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잠깐 한 후에 그 다음날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참복음 형제님은 약간은 알아듣기 어려운 부산 사투리와 억양을 가지고 있었고 굉장히 직설적이며
성격이 급하셨는데 일단 전체 과정을 설명하시고는 한 보름 안에 교제가 끝날 것처럼 그리고 끝나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날 온전한 회개에 대한 교제는 순조로웠습니다. 일단 먼저 깨닫고
교제를 진행해서 그런지 말씀이 죽죽 잘 들어왔고 이해되며 들으면서 깨달아졌습니다.
겉사람과 속사람, 하나님의 과녁, 나의 근본 모습
항상 악하다는 내용의 구체적인 증거 ─ 과거
현재의식과 무의식 그 자체가 죄 ─ 현재,
복음 십자가 부활 예배가 육신을 변화시키지 못함 ─ 미래
육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죄 ─ 미래
육신이 변화되었을 때 받는 저주 ─ 거짓 선지자, 권능을 받은 사람, 바리새인의 정체
온전한 회개를 한 사람의 모습 ─ 전신의 문둥병자, 간음 중에 잡힌 여자
이 내용들을 가지고 교제를 했는데 놀라웠던 몇 가지 사실들은 하나님의 복음도 십자가도 부활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육신을 절대 변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과 거짓 선지자와 권능을 받은 사람
그리고 바리새인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이며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인 육신임을 잊고 육으로 변화를 이루려다 지옥에 던져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말은 그 어떤 교회, 목회자에게서도 어떤 주석서나 신앙서적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서 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고 반드시 죽고 불타 없어져야 하는 육신임을 새길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모지란 나
첫째 날 교제를 마치고 교제 나눴던 내용과 말씀들을 그날 저녁과 이틀의 시간을 들여 묵상하면서
깨닫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교제를 나눌 준비를 한 후 두 번째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간단한 안부인사와 함께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교제들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을
이야기 해보라는 형제님의 주문에 저는 교제했던 말씀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묵상해서
얻었던 제 나름대로의 여러 깨달음들을 최대한 하나로 묶어서 자연스럽게 죽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말을 마치고 난 후 형제님의 반응이 영 별로라는 그런 느낌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자신이 교제해주셨던 대로
말씀을 죽 짚어가며 거기에 맞는 깨달음이 뒤이어 나와야 하는데 그것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깨달음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깨달음이 제대로 된 깨달음이라면 형제님이 제시해 줬던
내용들의 말씀들이 잇따라 죽 나와야 맞는 것인데 깨달음은 있긴 한데 그 깨달음에 대한 실체가
없다보니 교제해줬던 내용의 말씀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저의 깨달음은
제대로 된 깨달음이 아니고 제대로 된 깨달음이라면 형제님께서 교제해 준 내용들과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말씀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교제한 그대로 정확하게 나올 수
있도록 묵상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형제님에게 교제 신청할 때부터 이분에게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을 통과해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님과 교제한 말씀과 내용들을 어떻게 묵상하고 말해야하는지
얼른 그 스타일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님 스타일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한편으로 일방적이라는 생각에 어떡해야하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교제하고 나서 깨달음에 대해 계속 점검하고 점검해서 형제님이 교제해 준대로 안 나오면
퇴짜 맞고 다시 해야 한다 할 때 이렇게 이틀 만에 교제 하는 건 불가능이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다른 분들은 교제하고 나서 바로 그날부터 메시지로 막 물어보고 교제하다가 다음날
통화하고 그랬다는 말을 들으니 제가 제 자신을 보니 멍청이 중에 완전 상급 똥 멍청이였습니다.
자괴감을 깊이 느꼈지만 머릿속에서는 교제한 다음에 어떤 식으로 깨달음을 말해야 할지 거리가
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마음에 이 형제님은 먼저 이 과정을 거쳤고 경험 했으며
분명한 깨달음에 도달했기 때문에 내가 이 과정을 통과하려면 먼저 이 길을 가 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은 믿고 무조건 전진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삐걱대는 교제─정확히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나
첫 번째 교제한 온전한 회개에 대한 점검을 불안하게 마치고는 그 다음 진도를 나가지 않고
다시 겉사람과 속사람 그리고 온전한 회개에 대한 복습을 이어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회개가 아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과정을 통과하면서 알 수 있었지만 온전한 회개가 정확하게
될수록 그 뒤의 과정들이 수월하게 통과되면서 죄의 생명을 분명하게 폐기처분 할 수 있었습니다.
복습한 것을 가지고 다시 묵상에 들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 생각하고 기도하며 말씀들을 묵상하는
시간들을 4일 동안 가진 후 온전한 회개의 다음 과정인 죄 해방에 대한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죄
해방 교제를 들어가기 전 검증을 하는 시간에 저는 또다시 퇴짜를 맞았습니다. 주의를 기울여서
일러주신 대로 깨달음이 나올 수 있도록 묵상한다고 했지만 참복음 형제님의 기준에는 못 미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아니라는 소리만 듣고는 제가 구원에 대한 전체적인 과정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처럼 느끼셨는지 다시 또 한 번 긴 시간을 들여 구원의
전체과정을 훑어 주셨고 그 후 죄 해방에 대한 교제에 들어갔습니다. 교제가 끝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고 그 깨달음을 어떻게 간증해야 할지
거리계산이 명확하게 서질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시간에 쫓겨 형제님이 교제해 주시고 일러주신
말씀들과 내용을 보고 또 보고 계속 묵상하기를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또 했습니다.
나흘 동안 온전한 회개와 죄 해방에 대한 말씀들과 내용들을 나름 충분하게 묵상과 깨닫는 시간을
가진 후에 참복음 형제님과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난 시간 교제한
내용들에 대한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에는 저의 깨달음이 진짜 맞느냐고 아무래도 이론인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며 제 자신에게 슬슬 화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도대체가 나는 어떻게 깨닫기에 참복음 형제님이 만족할 만한 깨달음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짧게 저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 이뤄진 후 율법해방에 대한
교제를 바로 이어갔습니다. 이제 실수를 하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무려 일주일 이라는 시간을
들여 다시 온전한 회개부터 죄 사함, 죄 해방, 율법 해방에 대해 묵상하고 깨닫는 시간을 가졌지만
어떻게 교제한 말씀들과 내용을 정확한 깨달음으로 말해야 할지 거리계산이 분명히 서있지 않았던
저는 일주일 만에 다시 만난 형제님에게 무참히 깨지고 그게 아니라는 말만 들은 후에 또 다시 전
과정을 복습 한 후 십자가 죽음과 장사 과정의 진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또 일주일
동안 묵상하고 깨달았던 것을 가지고 간증하는 시간에서는 도대체가 말씀들을 하나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느냐 섭섭하다는 말까지 형제님께 듣고는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어버렸고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해서 통과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주일 동안 묵상하면서
보낸 시간 후에 만난 형제님에게서 급기야는 어떻게 깨닫는지에 대해 긴 설명을 듣고 이런 식으로
하면 통과 못하고 교제 못한다는 소리까지 듣고 말았습니다.
사실 모든 문제는 저에게 있었습니다. 교제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 것은 정확한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정확한 깨달음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아야 하는데
저는 그것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깨닫고 있다면 형제님에게서
만족스런 대답을 듣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는 포기해야 했습니다. 저의 방식대로
깨닫고 묵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깊이 생각해야했습니다. 이때만큼은 정말 교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많이 들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외면한다고 해도 끝까지 이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 낭비만 하다가 지옥에 갈게 뻔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멍청하고 모지라고 게으르면
제대로 깨닫지를 못해서 사람의 시험 하나를 통과하지 못할까? 인간에게 시험을 받아도 통과를
못하는데 창조주이시고 능력자이시면서도 이 세상 그 어떤 피조물보다 더 낮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시험을 받으면 내가 과연 통과 할 수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자신을
포기하고 다 내려놓고 다시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복음 형제님께 이번에는 제가 지금까지 교제했던 과정들을 제대로 깨달은 후에 전화
드린다고 말씀드리고 하던 일도 쉰다고 연락한 후에 말씀에만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중국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명분이 생겨서 일도 쉬고 묵상에만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일하면서 사흘씩, 일주일 씩 시간의 제한을 두고 그 많은 말씀들을 묵상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부담이 상당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이 제대로 깨달아질 때까지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온전한 회개, 죄 사함, 죄 해방, 율법 해방, 십자가 죽음, 장사과정과 그 과정에 대한 교제
내용은 제외한 후 말씀들만 가지고 손으로 직접 하나씩 다 필기 해가면서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깨달아진 것을 비교하는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1. 온전한 회개
창 6: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땅에서 크고
또 그의 마음에서 생각하여 상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킹제임스 흠정역)
시 51: 5 보소서, 내가 불법 가운데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가운데서 나를 수태하였나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시 51:3 내가 내 범법들을 시인하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킹제임스 흠정역)
마 7:20~23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들 마음에서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레 5:4 만일 어떤 혼이 입술로 말하여
악을 행하리라 하든지 선을 행하리라하고 맹세하면
사람이 맹세로 무엇을 말하였든지 비록 그 일이 그에게
드러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그가 그것을 알게 된 때에는
이 일들 중 하나에서 유죄가 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4:7~8 이르되, 자기 불법들을 용서받고
자기 죄들이 가려진 자들은 복이 있으며
주께서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벧전 3:21 그 일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사 66:3 소를 잡는 자는 마치 사람을 죽이는 자 같고
어린양으로 희생물을 드리는 자는 마치 개의 목을 꺾는 자 같으며
봉헌물을 드리는 자는 마치 돼지의 피를 드리는 자 같고
분향하는 자는 마치 우상을 찬송하는 자 같으니
참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의 길들을 택하였으며
그들의 혼은 그들의 가증한 것들을 기뻐하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행 10:11~12 하늘이 열리며
마치 네 귀퉁이를 맨 큰 보자기 같은
어떤 그릇 하나가 자기에게 내려오되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온갖 종류의
네 발 가진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는 것들과 공중의 날짐승들이 있더라. (킹제임스 흠정역)
레 13:9~13 사람에게 나병이 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볼지니, 보라 피부의 종기가 희고 털을 희게 만들며
또 거기 종기 속에 급히 생살이 생겼으면 그것은 그의 살 피부의 오래된 나병이니라.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고 선언할 것이요, 그가 부정한즉 가두지는 말지니라.
제사장이 어디를 보든지 나병이 피부에 크게 생겨
그 병을 지닌 자의 머리부터 발까지 모든 피부를 덮었거든
제사장은 깊이 생각할 것이요, 보라 만일 나병이 그의 온 살을 덮었으면
그는 그 병을 지닌 자를 정결하다고 선언할지니라.
그것이 전부 희게 되었으므로 그는 정결하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온전한 회개에 관한 38개의 말씀들을 기도하고 쓰고 묵상하며 입에 붙이고 마음 판에 새기면서
그 중에서 특히나 마음에 깊이 남았던 말씀들을 적어보았습니다. 위의 말씀들을 통해 나의 원래
본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나라는 인간은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일평생 동안 뱀의
밥이 되어 전신에 죄 밖에 없는 흙, 산 혼, 육신, 육체, 지체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분명하게 보여 지니까 지난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는 막연한 개념의 회개가
아니라 죄악 중에 출생했고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현행범이며 하나님도 복음으로 “나”라는 육신을
변화시키는 게 불가능한 전신에 오로지 항상 죄 밖에 없는 죄인이며 내가 지극히 선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조용함, 순함, 친절함, 배려, 인내, 불쌍히 여김, 하나님을 향한 진심과 진실과 정성과 예배와 숨
쉬는 것 그리고 존재 자체까지도 모두 악한 죄인이고 마귀인 이 육신을 반드시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 온전한 회개라는
개념이 서게 되어 실제로 이 육신을 처리하는 작업을 마음과 몸으로 실천에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전신에 100% 죄 밖에 없는 마음 상태가 되는 온전한 회개를 하고 나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정결하다 하시고 정죄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2. 죄 사함
롬 7: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출 21:23 그러나 어떤 손해가 뒤따르면 너는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매는 매로 갚을지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레 13:7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르단으로 요한에게 오사
그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거늘 요한이 그분을 말리며 이르되,
내가 주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하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은 이렇게 되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그분을 허락하더라.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바로 물속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하늘들이 그분께 열렸으며 또 하나님의 영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내려앉은 것을 그분께서 보시더라.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레 1:2~13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 중에 누가 주께 헌물을 가져오려거든
너희는 가축에서 곧 소 떼나 양과 영소 떼어서
너희 헌물을 가져올지니라.
만일 그의 헌물이 소 떼의 태우는 희생물이면
그는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되 자원하여 자기 의지대로
회중의 성막 문에서 주 앞에 그것을 드릴 것이요,
그는 번제 헌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그를 위해 속죄가 이루어지도록
내가 그를 대신해서 그것을 받으리라
그는 주 앞에서 그 수소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중의 성막 문 옆에 있는 제단 위에 돌아가며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 헌물의 가죽을 벗기고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자를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아들들은 제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은 그 조각들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가지런히 놓으려니와
그가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이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요 8:3~11 예수님께서 일어나사 그 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보시고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아무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그녀가 이르되 주여, 아무도 하지 아니 하였나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구원파선교회에서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모든 죄가 용서되며 눈처럼 깨끗하게 씻어지는 체험을
하고 나서 참 좋았는데 죄 사함에 관한 말씀들 중에서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개역성경)
사 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개역성경)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개역성경)
이 말씀들이었는데요 무엇이 마음에 남아서 저를 자꾸 찜찜하게 만들었는가 하면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 모든 죄를 등 뒤에 던지셨다, 허물을 도말하다” 는 구절이었습니다.
죄를 옮기거나 던지거나 도말하는 것은 전부 죄가 그대로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나 도말 같은 경우에는 “발라서 드러나지 않게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죄 사함 의미가
너무나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도장공사업체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저는 도말이라는 의미를 어려서부터 알았습니다. 외벽에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데 그 위에다
도장 공사를 하려면 그 전에 외벽에 있는 페인트를 벗겨내고 새로운 페인트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죄에 적용 시키면 우리의 죄 위에 피를 바르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벗겨내시고 피를 발라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죄를 완전히 제거하시고 피를 바르는 게 아니고
죄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피를 발라서 죄만 보이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외벽에 있는 페인트를 벗겨내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페인트를 칠하게 되면 그 페인트가 전부
뜨게 되어 결국 다시 칠해야 해서 그 전의 페인트를 반드시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것이죠.
그래서 사람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왜 하나님은 죄를 이렇게 처리하시는 걸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 말씀 말고 다른 말씀에서는 죄가 제거가 된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냥 그러는가보다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이 말씀은 똥 위에 포장지를 살포시 덮어놓는 것 밖에 되지 않아서 포장은 되어있어
깨끗한데 더러운 냄새는 계속 풍기고 다니는 꼴이어서 하나님이 그 꼴을 진짜 보신단 말인가?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회개와 죄 사함 과정을 통과해 보니 왜 그렇게 처리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육체는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그리고 완전히 죽여 없애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롬 8:7~8에서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다고 말씀
하시는 것처럼 육신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깨끗이 씻어서 다시 재활용할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지난날 구원파선교회에서 말하는 개념의 죄 사함을 받았을 때에 죄를 짓는 것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담대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그 죄도 이미 예수님께서 씻으신
미래의 죄를 포함한 세상 죄안에 있어서 죄는 없어졌지만 죄를 만들어내는 악한 육체는 그대로
둔 채 죄만 처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죄를 처리한다는 것은 죄 그자체인 나를 처리한다는
말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께서 말씀하시는 올바르고 정확한 죄 사함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문둥병 즉 죄 밖에 없는 전신의 문둥병자와 남자와 간음 하다가
바로 그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세상 모두가 간음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돌에 쳐 맞아
죽기로 이미 작정된 간음 중에 사로잡힌 여자처럼 자신의 죄가 자신과 하나님과 세상 앞에
완전히 드러나서 율법에 의해 사망을 당해 정확히 죽은 그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정결하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을 때가 바로 죄 사함이었습니다.
“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죄 밖에 없는 죄 그 자체인 마귀라서 지옥에 가는 게 당연하고
죽는 게 마땅하며 죽여 달라고 죄를 완전히 드러낸 그 마음을 하나님은 정결하다고 하시는구나!“
“이미 사망당한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피가 뒤덮여 피만 보이는 상태가 바로 죄 사함이구나!”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신 피는 죄가 완전히 드러나 사망당한 사람의 마음에만 발라지는 거구나!”
“이미 이렇게 죄로 인해 완전히 죽은 상태를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거구나!”
“전신의 문둥병자와 간음 중에 사로잡힌 여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구나!”
“나는 전신의 문둥병자와 간음한 여자같이 현행범으로 지금도 죄를 짓고 있구나!”
“나는 이미 죽었구나! 나는 정결하구나! 정죄 받지 않는구나! 죄 사함 받았구나!”
이런 깨달음들이 죄 사함 과정을 통과하면서 제 자신에게 들어오자 그동안 왜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사로잡힌 여자에게 정죄하지 않는다 하시고서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 사람에게 하셨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레위기에 있는 번제를 마음에서 실제로 드려보니까 소를 잡아
죽인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일이며 살인하는 것이라는 걸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죄에 대한 정확한 대가가 어떻게 치러지는지 알 수 있었고 또한
이런 정확한 과정을 거쳤는데 대가가 치러지지 않았다고 절대 말할 수도 없다는 것과 죄만 가득한
내가 이미 불태워져서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흔히
유월절을 지켜야 천국 간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유월절 어린양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제대로
한 번도 잡아 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3. 죄 해방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창 3:7 그들 두 사람의 눈이 열리매
그들이 자기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을 함께 엮어 자기들을 위해
앞치마를 만들었더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5: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나니 (킹제임스 흠정역)
갈 2:19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6:6~7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27:51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킹제임스 흠정역)
히 2:14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킹제임스 흠정역)
골 3:3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죄 해방에 관한 30개의 말씀들을 계속 적어가면서 입에 붙이고 기도하고 묵상하다보니 죄 사함의
깊이가 더 깊어져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날 저는 한 번도 제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인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라는 말을 본 적은 있어도 그게 실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보니 죄와 사망의 독이 온 몸에, 온 마음에, 온 생각에
다 퍼져서 죄에 대하여(죄 때문에=죄로 인하여) 죽음으로 세상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죄에 대해서 이미
반응조차 할 수 없는 죽은 자들 이였고 죄와 사망이라는 독으로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죄와 사망 밖에는 없었습니다.
해방을 받는 다는 것은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복종하고 다스림 받는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해방을 받으려면 딱 두 가지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는 이겨서, 다른 하나는 죽어서.
내가 죄를 이겨서 해방을 받든지 죄에게서 죽음으로 해방을 받던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 합니다
교제와 묵상을 통해서 보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죽는 것 뿐 이었습니다.
죽어서 해방을 받고 죽어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죄를 회개하고 자백해서 깨끗이 씻어보려고 하고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 살아있는 자만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아! 우리 모두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깨끗이 씻어보려고 하고,
죄를 이겨보려는 노력을 아예 할 수조차 없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구나!“
“나는 죄와 사망의 독이 전신에 퍼져 죽어서 내게서 나오는 건 오직 죄와 사망밖엔 없구나!”
“세상 모든 사람은 그리고 거기에 속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구나”
“세상과 나는 죽어서 죄에서 해방된 자구나”
말씀은 내게 이런 깨달음에 이르게 하면서 지난날 죄에 대해 그토록 열심히
반응하던 죄와 나의 싸움을 저절로 멈추게 해주고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4. 율법 해방
롬 6:12~14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7:1~4 형제들아 내가 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법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를 지배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는
법에 의해 그에게 매여 있으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자기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그런즉 만일 그녀가 자기 남편이 살아 있을 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 간부라 불릴 터이나
그녀의 남편이 죽으면 그녀가 그 법에서 해방되나니
그러므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간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7:7~11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명령을 통해 기회를 타서 내 안에서 온갖 종류의 욕정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기 때문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7:17~20 그런즉 이제 그것을 행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지는 내가 찾지 못하노라.
이는 내가 원하는 선은 내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아니하는
악을 곧 그것을 내가 행하기 때문이라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내가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7:21~24 그런즉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곧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가 속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 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킹제임스 흠정역)
롬 7:25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즉 이와 같이 내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킹제임스 흠정역)
율법해방에 대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교제해주시는 분의 중요성을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죄 사함으로 인해서 구속과 의와 거룩과 화평의 하나님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겨보고 싶은 그
마음을 죄 해방으로 없애버리셨고 그러자 내 육신은 그것으로 안 되니까 이제는 그 사랑을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율법아래 있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시고 또한 없애버리셨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칫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율법주의로 흘러갈 수 있는
것을 잡아주셨습니다.
말씀을 보면 볼수록 육신은 하나님과 원수였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육신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말씀의 묵상을 통해 본 내 육신은 죄의 법 아래에 있어서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열매만 맺는 사망의 몸이기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섬기는 것을 반드시
포기를 해야 되는 존재였고 예수님께서 이러한 나를 죽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임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와 악이 항상 함께 있구나!”
“왜? 그럴까? 내가 죄의 법 아래에 있어서 살아있는 동안 죄의 지배를 받아서 그렇구나!“
“나는 죄의 법 아래에 있어서 오직 죄를 섬기며 오로지 죄의 열매만 맺는 사망의 몸이구나!“
“나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의의 종이 아니라 불의의 도구, 불의의 종이구나!”
“나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구나! 율법을 통해 하나님 섬기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구나!”
“예수님이 이런 사망의 몸을 죽여주셔서 하나님 섬기는 일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오직 예수님만 하실 수 있고 예수님만 하시는 거구나!”
올바른 교제와 기도와 말씀 묵상은 지키고 유지해야 할 것만 같았던 거룩하신 율법에서
나를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난생 처음으로 율법에서도 해방 받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5. 십자가 죽음
고후 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5: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롬 6:6~7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고후 5:14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라
우리가 이같이 판단하노니 곧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면 모든 사람이 죽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갈 5: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27:51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 (킹제임스 흠정역)
요일 3:8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온전한 회개부터 죄 사함, 죄 해방, 율법 해방, 그리고 심지어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씀에서조차 시험하는 말로 가득했고 저는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끊임없이 시험을 당해야 했습니다.
말씀은 저보고 육신으로 율법으로 영으로 하나님을 섬겨보라고 떠보시면서 죽음으로 몰아갔는데요,
이런 과정은 자신이 포기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정을 통과하며 더러운 육신의 깊은 것을 볼 수 있었고 처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에 대한 말씀들을 묵상할 때 전에는 제가 아담과 죄와 율법과 정욕과 세상과 마귀와
별개인 것처럼 인식이 되었는데 온전한 회개와 죄 사함과 죄 해방과 율법 해방을 거치고 나니까
내가 죄 그 자체이며 마귀요 아담과 하나이고 세상과 정욕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하나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인식이 되었고 그것을 넘어서 아담과 하나였던 내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실이 분명하게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왜 성경에서는 이 세상에 마치 두 사람 즉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예수님 두 사람만 있는
것처럼 기록했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회개를 통해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죄 해방과 율법 해방을 거쳐도 여전히 내 자신인 육신은
영의 생각을 아예 할 수가 없는 사망의 몸이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며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는
시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어오면서 나와 하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
나라는 육신을 인정사정없이 죽이셨으며 더불어 내 육신과 하나였던 죄, 율법, 정욕, 세상, 마귀
모든 사람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다는 사실이 깨달아져서 마음에서 현실로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이 못 박혀 죽으신 그 십자가에는 내가, 마귀가, 죄가, 율법이, 정욕이, 세상이, 모든 사람이
분명하게 못이 박혀 꼼짝 못하고 죽어있었습니다. 그러자 지난날 날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어지나 내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 한 순간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6. 장사
행 2:38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에 이르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 (킹제임스 흠정역)
마 26:12~13 그녀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나를 장사지내기 위함이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이일 곧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출 12:7~11 그들은 피를 취하여 그것을 먹을 집의
양 옆 기둥과 우의 문기둥에 뿌리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먹되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채소와 함께 그것을 먹을지니라.
그것을 날로 먹거나 결코 물에 삶지 말고
그것의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불에 구우라.
너희는 아침까지 그것 중에서 아무 것도 남겨 두지 말며
그것 중에서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로 태울지니라.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곧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그것을 먹을지니라.
그것은 주의 유월절이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갈 5:17 육신은 성령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19:29 또 내 이름으로 인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토지를 버린 모든 자는
백배를 받고 또 영존하는 생명을 상속 받으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요일 2:15 세상이나 세상에 이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킹제임스 흠정역)
롬 6:3~4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안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 (킹제임스 흠정역)
죽은 사람의 시체는 절대 그대로 두지 않고 반드시 매장하거나 화장을 시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장사를 통해서 육신을 완전히 폐기처분하는 절차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은 아주 분명합니다. 육신인 죄인은 죄의 대가인 죽음을 치르고
지옥으로 가서 불태워져 없어지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 먼저 죽음을
당하고, 장사를 피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에 먼저 장사를 당하고, 지옥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동안에 먼저 지옥에 가라는 것입니다.
장사 과정에 대한 말씀들을 묵상해보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당하고 장사되고 지옥을 다녀온
사람들이지 죽음과 장사, 지옥을 피한 사람들이 절대 아님을 말씀들을 통해서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과 나란 육신은 반드시 장사를 통해 불태워 없어져야 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이며
나 그리고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전부다 죄와 사망의 더럽고 썩은 악취 나는 시체이기에 불태워서
없어져야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시체고 예수님과 같이 죽은 시체이며 같이 장사되어 불태워져
없어져서 이 세상에 존재자체도 하지 않으며 나는 이미 지옥으로 가 있고 새로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이 죄의 생명은 불태워 없애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들어오면서 이미 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장사가 되었음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회개부터 장사과정까지 170개나 되는 말씀들을 하나씩 기도하고 묵상하고 깨달은 것을
3월 11일 교제할 때 참복음 형제님에게 장장 두 시간에 걸쳐 간증을 했습니다. 전에는 과정에
대한 말씀들 깨달은 것들을 하나로 만들어서 간증하려고 했는데 이번 교제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하나씩 말씀들을 언급하며 간증을 했는데 결국 O. K 사인이 났습니다. 마침내 통과했다는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고 그날은 너무 지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다음날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왜 참복음 형제님과의 교제가 원활하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결국은 하라고 하는 대로
하지 않은 저의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참복음 형제님이
일러 주신대로 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로는 하고 있지 않으면서 “나도 열심히 하는데 안 된다”
하는 헛소리를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었고
안하니깐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깨달아질 때까지 하고 또 하고
계속 하는데 안 되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결국 원래
참복음 형제님의 의도대로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음날 제가 제일 궁금하고 힘들었던
부활에 관한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7. 부활
엡 1:4~5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자신의 크게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아이로 입양하심으로써 (킹제임스 흠정역)
골 2:12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22:31~32 그러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매
(킹제임스 흠정역)
고전 15:7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킹제임스 흠정역)
롬 6:5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고전 15:20~22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을 통해 임한 것 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도 사람을 통해 임하였나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마 12:28~29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으면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재산을 노략하겠느냐?
결박한 뒤에야 그가 그의 집을 노략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벧전 1:3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죽은 자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킹제임스 흠정역)
십자가 죽음과 장사 과정을 통과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 아담과 내가 하나이며 예수님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장사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어
마음에서 현실이 되어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 참복음 형제님과 부활과정의 진도를 나가다가
골 2:12 너희가 침례 안에서 그분과 함께 묻혔고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침례 안에서 또한 그분과 함께 일어났느니라.
말씀을 듣게 되니까 곧바로 주 예수님과 내가 함께 부활되었음이 깨달아졌습니다.
형제님과 교제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부활과정을 거쳐보니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과 하나 되어 죽고
장사되는 죽음과정을 거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을 때 하나님께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침례는 죽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정확한 침례는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 까지가 침례였습니다. 침례의 공정과 하나 되는 대표성의
원리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주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된 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시는
부활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사람이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며 새 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영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숨인 성령을 불어 넣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생명
그 자체이신 성령께서 영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우리의 영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창건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정하셔서 아담과 하나 되어 아담 안에서 죄를 알고 죽게
하시고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현재의 부활로, 생명의 부활로, 산 자의 부활로,
썩지 않는 부활로, 속죄 증거의 부활로 부활했으며 예수님께서 내 형제가 되셨다는 게 깨달아지자
성령께서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내주하시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이 바로
마음에서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죄 사함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문제가 해결이 되자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되지 못해서 항상 마음속에 궁금증만
품고 있었던 문제가 한 순간에 해결이 되어버렸습니다
부활에 관한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작지만 희한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 20:22 그분께서 이것을 말씀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령을 받으라.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자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장면의 말씀이었는데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읽고 또 읽고 계속 읽다가 갑자기 성령께서 주 예수님의 호흡이고
바람이며 소리이고 말씀이면서 생명인 것이 어느 순간에 바로 깨달아지게 되었습니다.
성령=바람=주 예수님의 호흡=소리=말씀=생명
그래서 요 3:14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살리는 것은 영이며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라고 말씀하셨구나 하는 게 생각나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숨이
저에게 불어오고 저는 그것을 들이마시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8. 승천과 하늘보좌
딤전 3:16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졌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 (킹제임스 흠정역)
계 3:21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요 7:38~39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빌 3: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도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킹제임스 흠정역)
부활이 깨달아지니 승천과 하늘 보좌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을 때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셨기 때문에 그 중간에 있는 과정들을 통과 안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제를 통해 말씀들을 묵상해보니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늘 왕좌에 까지 오르는 것
즉 왕이 되는 것이 승천이고 하늘 보좌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승천과
하늘 보좌에까지 이르시는 이유는 생명주시는 영으로 사람의 육체 안에 오시기 위함이었고 그 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살로 이뤄진 신부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승천과 하늘보좌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 되어 침례과정을 거쳐 부활한 세상 모든 사람과
내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늘왕좌까지 승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오른편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이 되게 하셨다는 것과 이로 인해 성령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 아버지가 되셨으며 또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시고 중보 하시게 되었다는 사실과
죽을 육체에 충만하게 부어질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제 마음에 실제가 되게 해주면서
늘 죽어서 가는 줄로만 알았던 하늘왕국이 내 마음에서 지금 당장 이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9. 성령 충만
롬 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히 2:14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킹제임스 흠정역)
요일 4:2~3 이로서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에 관하여는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행 2:17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날들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아들딸들은 대언하며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들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출 20;24 너는 내게 흙으로 제단을 쌓고
너희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과
양과 소를 희생물로 그 위에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록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네게 복을 주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킹제임스 흠정역)
고전 6:19~20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느니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그동안 저는 제 자신도 모르게 성령 충만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불을 받고 방언을 받는 것이 절대 그 증거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성령 충만을 경험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결국은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불과 방언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혹시나
내가 이런 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으니까 이러한 것들이 증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온전한 회개부터 부활 승천, 하늘보좌의 과정을 통과
하면서 보니 성령 충만이 어떤 환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겠구나 하는 짐작은 되었습니다.
행 1:5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말씀을 보니 성령 충만은 곧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침례를 받을 때 전신이 물에 잠기는데 몸이 완전히 잠긴다는 의미는 몸인 육체뿐만 아니라
몸과 하나인 혼도 같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혼과 육이라는 나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죽어서 폐기처분 되는 것이 바로 물 침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침례 또한 전신이 성령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의 모든 영과 혼과 육체가 생명 그 자체이신 성령으로 잠겨서 그 생명이 나의
영과 혼과 육체에 스며들어가 꽉 채우는 것 그래서 내 영과 혼과 육체가 하나님 생명으로 꽉 들어차
살아나 생명이 되는 것이 성령 충만 이라는 것을 말씀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롬 8:10~11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킹제임스 흠정역)
그러면 사도행전 1:5 말씀처럼 도대체 언제 성령 충만인 성령 침례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로마서 8:10~11 말씀을 묵상하다가 아!!! 하고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함께 죽고 장사되어 부활했을 때 모두에게 새 영,
새 생명, 새 마음이 생기게 되었고 이 새 영에 생명 그 자체이신 성령께서 들어오셨을 때
죽은 내 혼과 몸으로 확장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육체에도 성령이 들어오셔서 육체도 살아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거주하시는 성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이 됐으며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과 하나인 예수님의 아내가 된
것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이 마음에 임하고 나서 다른 말씀들을 죽 묵상하다가 굉장히 끔찍한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닌 요일 4:2~3 말씀이었는데요. 성령 충만의 필요성이 너무나 절실히
느껴지는 말씀이었습니다.
요일 4:2~3 이로서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에 관하여는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말씀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육체에 성령이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면 즉 성령 충만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적그리스도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지,
적그리스도는 기독교인들에게 굉장히 부정적인 단어인데 결국 제가 성령 충만을 받지 않았다면
제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는 부정함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은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만인 게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 과정이었습니다.
10. 그리스도와 한 몸
요 15:1~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니
내 안에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가지는
그분께서 제거하시고 열매를 맺는 모든 가지는
깨끗하게 하사 그것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 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바로 그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나 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킹제임스 흠정역)
그리고 성령 충만을 깨닫고 난 후 드디어 마지막 교제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앞두고
그 핵심을 이루는 말씀을 먼저 깨달아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제를 진행 할 수 있다 하셔서
말씀을 묵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쉽게 안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저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길 계속해서 다음 날 교제에서 깨달음을 말씀드렸으나 그게 아니라는 말만
듣고는 그 소리를 듣는 즉시 다시 기도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길 2시간을 했습니다. 그 끝에
드디어 말씀이 제 안으로 녹아 들어왔습니다.
“이제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
내 안에 거하라. 너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
“아!!! 이미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거하시고 있구나!”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구나!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이구나!”
“예수님과 우리는 절대로 나눌 수 없는 한 영, 한 혼, 한 몸이구나!”
“하나님의 성전 되신 예수님이 나이고 성전 된 내가 곧 예수님이구나!”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셨구나!”
“이제 예수님과 나는 절대 나뉘지 않는 한 몸이구나!”
이 말씀이 마음에서 깨달아져 말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그대로 저의 마음속에서 이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2020년 4월 8일 (음 3.16) 유월절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깨닫자 참복음 형제님이 정말 좋아하시면서 맞다고, 그것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것이라고 말씀해주시고 그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교제를 시작해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면서 지난날 지방 교회가 그토록 원하면서도 그 실체를 경험하지
못해 늘 울면서 아무것도 못하던 한 영, 한 혼, 한 몸을 이미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주셨다는
사실이 제 마음에선 현실과 실체가 되었다는 것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다루고 있는 성경은 이미 다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기록된 사실들이 과거완료 시제가 아닌 미래 시제로 기록됨으로 사람을
시험하는 말로 가득하며 그러함으로 그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려면 정말 순수하고 낮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직접 해보면서 그 과정에서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낮고 겸손하신 하나님의 말씀께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낮은 마음이 되어 본 사람만 깨달을 수 있고 자기 것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소경인 자신 스스로 절대 헤쳐 나갈 수 없으며 눈뜬 자가 인도해줘야 가능하게
되어 있는 코스입니다. 그렇다고 눈뜬 자가 소경인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없고 깨달음은 소경인 내가
하나님께 은혜와 긍휼을 입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깨달음을 받아서 눈을 떠야 합니다.
제가 장로교회를 다니면서 구원파 형제님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면
죄 사함의 은혜를 입지 못했을 것이고 그 후 구원파선교회와 지방교회, 킹제임스교회 안에서
번민하고 죽음의 공포를 맛보지 않았다면 마음이 낮아지지 않았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참복음
형제님을 통해 말씀하시는 과정들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았다면 온전한 회개, 죄 사함, 죄 해방
율법 해방, 십자가 죽음, 장사, 부활, 승천, 하늘보좌, 성령 충만의 과정을 거쳐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기적을 절대로 마음에서 현실화 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무언가 남다른 것이 있고 내 노력으로 인해서 마음이 낮아져서 이런 과정을 통과한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착각을 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도 너무나 싫었던 죽음을 맛봄도
과정을 통과하면서 고통 하는 것을 인내하고 집중하는 마음도 또한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회개부터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과정을 통해서 이 귀한
보배가 제 안에 들어와 현실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라는 혼, 육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죄 밖에 없는 죄 그 자체인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귀한 보배인 속사람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죽어야 할 겉사람으로 이뤄진 사람일 뿐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며 저는 은혜를 입었을 뿐입니다
말씀께서 말씀하시는 내용 그대로 제 마음의 세계에서 이뤄지고 보니 세상 모든 사람과 나는
이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있으며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속에 들어가 있었고 나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하나님의 왕국도
새 하늘과 새 땅도 이미 전부 이뤄져서 그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진 사람,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사람이 앞으로 오실 주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왕국을 가는 것이지 앞으로 이뤄질 걸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면 고생하고 죽고 세상에서 없어지는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만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 또한 고통스런 죽음과 장사라는 과정을 거쳐서 영광을 받으셨고 자신의 뼈인 피와
살로 이루어진 아내를 얻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과정을
거치는 것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갈 될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칠 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을 위해 은혜와 긍휼을
구해야하고 은혜와 긍휼을 구하려면 내 자신이 말씀이 흘러 들어올 수 있도록 더 낮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깨달음이 아닌 나의 깨달음은 한낱 지식일 뿐이고 과정에서 낙오시키게
만드니 오로지 하나님께만 매달려야 빛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려는 모든 형제님들과
자매님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시길 기도합니다.
첫댓글 감동적이고 상세한 간증에 감사를 드리며
진리를 찾기 위해, 엄청난 과정을 겪으셨기에
역시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마침내 진리를 찾으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18, 1. 27에 참소리 선교에 가입한 이래
2년동안 6백여번 방문하신 후
2020. 1.2에 복음나눔반을 두드렸군요
1월 3일과 6일에 복음에 대한 총론을 나눴고
1월 10일에 온전한회개와 죄사함 죄해방을 나눴으며
1월 14일에 율법해방을 그리고
1월 21일에 십자가와 장사에 대해 나눴습니다.
그리고 1월28과 2월3일의 복습, 점검을 거쳐
3월 12일에 부활승천을
4월 2일에 성령충만을
4월 8일과 9일에 포도나무 비유를 묵상하시므로
그리스도와 한몸됨의 까지의
창조 6일을 복음을 다 깨달으셨습니다.
그리고 6월 14일인 오늘
간증까지 올리셨네요
정말 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남은 생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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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소리선교에서는
복음을 다 깨달으신 브랑이님을
2020. 7. 1일부로
복음나눔반의 강사로 임명하오니
많은 상담바랍니다.
(브랑이(남) : 010 - 3086 - 0017 경기)
4월 9일부터 형제님과 교제 나눴던
그리스도와 한몸에 관련된 말씀들을 하나씩
전부 써가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고나니
한달이 걸리더군요 말씀 묵상이 끝나고나서
이제 간증을 썼는데 글쓰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얘기를 상세하면서도 다른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생각하면서 추려 쓰다보니
한달이 또 걸렸네요 이끌어 주신 형제님께
마음깊이 감사드리구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