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안정복이 아내를 위해 지은 제문. 광주안씨 순암종택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했다. | | |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 “내가 당신 잘 돌봤더라면…” 시·제문 통해 애틋함 표현 혼인 60주년을 맞은 노부부가 이를 기념해 다시 치르는 리마인드 웨딩을 ‘회혼례’라 한다. 60주년을 맞이하려면 적어도 나이가 80세 안팎은 돼야 한다. 두 사람의 혼인 관계 유지와 혼인식을 다시 올릴 만큼의 애정도 중요하지만,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조선시대에 두 사람이 모두 건강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경사스러운 일로 당시엔 매우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회혼례는 자녀들이 준비해 부모에게 올리고 자손과 하객들은 시문을 지어 올려 장수와 여생의 평안을 빌었다. 부부는 60년 전에 그랬듯이 혼례 복장을 하고, 생애 두 번째의 혼례식을 치른다. 부부가 화합하고 오래 살며 자식들이 번창하는 것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여긴 조선시대의 회혼례는 더할 수 없는 복이었다. 두 사람이 모두 건강하고 서로의 도리를 지켜 회혼례까지 행복하게 치르면 좋았겠지만 대부분 부부는 한쪽이 세상을 등지게 된다. 남은 사람은 함께 살아온 짝을 잃은 고통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조선시대의 많은 외기러기도 남편이나 아내를 먼저 보내고 시나 제문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중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1712∼1791)이 죽은 아내 창녕성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있다. 1775년(영조 51) 정월, 예순을 훌쩍 넘긴 안정복은 평생을 동고동락했던 조강지처를 떠나보냈다. 아내가 떠나고 그는 한동안 비통에 젖어 있었다. 아내의 죽음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출하고 돌아와서도,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상의할 일이 있어도 여전히 아내가 곁에 있는 것 같았고 부르면 나올 듯, 손에 잡힐 듯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지내다가 석 달이 지난 3월 초하루가 돼서야 비로소 아내의 영전에 제문을 올리며 통곡할 수 있었다. 아내의 병세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젊은 시절 곤궁과 기근 때문에 아내의 몸이 그렇게 약해진 것은 아닌지, 병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 더 잘 돌봤더라면 이렇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적었다.안정복의 슬픈 마음을 적은 통한의 기록은 그 심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읽는 사람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그는 아내의 정성과 극심한 가난 그리고 살뜰한 내조를 떠올렸다. 아내의 수의를 마련하고자 할 때, 그녀가 평소에 짜 둔 명주로 수의를 지으려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이를 거절했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당신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라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안정복은 아내와 자신의 관계를 ‘금슬을 연주하는 뜻(鼓瑟琴之義)’으로 표현했다. 금슬은 거문고와 비파를 가리키는데 ‘시경(詩經)’에 출전을 둔 표현이다. 두 악기의 소리가 유독 잘 어우러져 전통적으로 부부간의 애정에 비유된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석 달 동안 실감하지 못하던 남편이 그제야 아내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적은 이 기록은 통곡이 돼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의 마음에까지 메아리친다.“당신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났구려. 석 달이 지났으나 당신이 죽었는지 여전히 모르겠소. 밖에서 돌아오면 당신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배가 고프면 밥 달라 말하고 싶으며, 몸이 아프면 돌봐 달라 말하고 싶구려. 집안일을 헤아릴 때면 당신과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일어났다가 곧 그치고는 하오. 47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흡사 금슬을 타는 듯 하였거늘 이제 끝났구려… 병세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장례 준비를 하고자 하였는데, 당신이 손수 짠 명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쓰려고 하였으나 당신이 극구 말렸으니 그 뜻이 훗날 나를 위해 쓰게 하려는 것이었소. 비록 병중에 있었으나 나를 향하는 뜻이 이처럼 지극하였구려.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 온다오….” 윤진영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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