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시인이 본 53선 지식 23.47. 만해의 생가터의 복원
만해의 생가 집터는 가짜
만해의 부친이 동학 농민군들에 대하여
홍주 성안이하고 있는 농민들을 조선 총독부에
전달하는 만행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만해가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이후에
만해가 유생으로서 유학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가문에 악행을 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슬퍼했다
본래 유학을 숭상하고 있는 만해 가문은
스스로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유학을 버리는 역할을 하려고 결심했는데
오직 한성으로 가서 한성에서의 지인들을 친견하려고
고향 홍주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홍주를 떠났다.
만해의 아버지가 동학 농민들을 탄압하는데
앞장을 섰다는 점에 대하여 부끄러운 유생의 지위를 버리고
정치 없이 고향을 떠나는 결사를 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고향 사람들과 동참하여 떠났는데
발걸음을 이탈하여 속리산 법주사로 갔는데
법주사에 도착하니 고향 사람들이 있어
발길을 아주 멀리 떠나기로 결심하고
오대산으로 떠나갔다.
오대산에 도착했을 때도 홍주 사람들이 있어
방향을 아주 멂 곡 백담사로 향해 발길을 옮기었다.
만해가 홍주성을 떠나니 홍주에는 아들 한 보국이자 있고
한 보국하는 1905년 12월 20일 태어났지만
아버지 없는 몸으로 살았다.
만해가 홍주를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닌 몸
특히 불가에 입문한 이후에는 고향을 돌보는데
아비지 형이 한보국이를 보호하고 있었을 수 있다,
만해는 홍주에서 한보국이가 성장하고 있음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한보국이가 성장하고 있을 무렵에 만해는 출가의 몸으로
만해의 아버지 형이 한 보국이를 돌보고 있었는지
만해의 부인이 어떻게 살고 갔는지
한보국는 성장하면서 승려가 된 아버지
승려 아버지 만해를 알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보국는 성장하면서 만해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아버지의 존재를 바르게 성찰했을 수 있다,
만해는 신간회 1927년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한보국이는 나이가 23살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보국이는 23살 시기에 신간회를 발기하는데
만해가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주 지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만해의 영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는 신간회를 조직했으니 한보국이는
만해 아들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졌던
그것이 아닌가 하여 친근감이 간다.
만해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있을 때까지
한보국이든 홍주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는 신간회에 참여한 민족진영이 결집했다.
이러한 시기에 한보국이는 35살 시기에 치안 유지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용되었다
한보국이의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소화 6연 1931년에 9월 20일에는 치안유지 법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본적은 홍성이지만 경기도 경성부 광의 1정 222에 기록이다,
한보국이는 1933년 9월 21일 조선공산당 제건 운동 사건으로
출소한 이후 한보국이는 1934년에 동아일보 홍성 지국지사로
홍성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보국이는 동아일보 홍성 지사로서 홍주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해 아버지와 형은 홍주에서 역할을 행할 수 없는 이유는
홍주성에 집결했던 홍주 인들이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만해 아들 한보 국도 홍주에서 재산을 지킬 수 없는
시기에 홍성 군수는 만해 한보국이의 재산을 관리
한보국이의 재산을 처분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만해가 태어난 지역을 소멸하고
만해가 지키던 선산마저 홍주 고등학교
터로 변하고 시절이 좋아져서 만해의 생가
터를 조성하였다는 점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만해가 독립운동 가문이라고 점
그 점을 이용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2023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