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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로마서5장1~11절
제목 :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설명한 후, 그로 인해 하나님과 맺게 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이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그 결과로써 영적 화평과 기쁨을 누린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1~4장) 이후,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는 과정(5-8장)으로 전환하면서 의롭게 된 자가 누리는 열매를 설명합니다.
로마서5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절은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생활이며,
12-21절은 아담 안과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나는 연대성의 심오한 진리입니다.
1. 의를 얻은 결과(1-2)
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림(1절)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습니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입니다.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십니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2)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은 무엇이며, 그 결과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2절)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1)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 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히 2:10;벧전 5:4).
2. 소망을 낳는 인내와 연단(3~5절)
1)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3절)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됩니다(마 13:20-22).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합니다(W. Hendriksen).
2)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절)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1) 인내는 연단을.
-연단'(鍊鍛)은 연단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 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됩니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됩니다(벧전 1:7).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2)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합니다(행 28:20).
*행28: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됩니다.
3)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브끄럽지 않게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넘칩니다(5절).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1)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 14:6).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2)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5)?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며 은혜의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합니다.
은혜의 생활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며 환난에서 인내를, 인내에서 연단을, 연단에서 소망으로 전진합니다.
또한 소망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음으로써 소망에 관한 보증을 주십니다.
3. 죽음으로 확증된 사랑(6~8절)
1)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6절)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는가(6)?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킵니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2) 죽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십니다(7~8절)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입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게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4. 소망과 화목(9~11절)
1) 축복된 삶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인데 무엇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한가(9)?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됩니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입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10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되었는가?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누리는 축복은 무엇인가(10)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입니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십니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입니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 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3:25-28).
3) 우리 주님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사는가 (11절)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이러한 생활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나타 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 경건치 않음, 죄인 됨, 원수 됨 때문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입니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과거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었으니 현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합니다(1,2절).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았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재력과 무력으로는 한 점의 평화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실현된 ‘의’와 ‘평화’와 ‘영광’은 개인의 내면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경험하고 누리는 실재입니다.
2)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3~5절).
이제 삼위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기에, 비록 현실은 광야처럼 환난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영광에 이를 날이 있음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옛 광야 백성은 인내하지 못하여 소망을 잃고 부끄러움을 당했지만,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인내를 배우는 자들입니다.
인내는 우리의 소망을 더 단단하게 만들 것입니다.
3)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6~8절).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어서도 아니고, 착한 사람이어서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드물지만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위해 죽을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배신한 원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는 선언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4)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용서받은 죄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화목한 가족이 되게 합니다(9~11절).
그가 장차 올 진노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자랑하고 기뻐하며 화평을 누리게 하십니다.
옛 구원 사건은 현재 내 삶의 방식과 목표를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기도
공동체-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원의 유익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소서.
열방-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도시 50개 중 17개가 있는 브라질의 범죄 상황이 심각하다. 인구 90%에 이르는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노력을 통해 브라질이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