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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의 왕실세계
◇ 1세 김수로왕 시조대왕 휘 수로(首露). 서기 42년 김해에 가락국을 세우고 500년 왕업의 기초를 닦았다.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왕후로 맞이하여 왕자 10형제와 공주 자매를 두었다. 신라와의 여러번에 걸친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고 선정을 베풀었다. 199년 23일 붕어하여 대궐 동북쪽 평지에 능침을 모시니 현재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납릉이 곧 그것이다. ◇ 2세 도왕(道王) 시조대왕의 맏아들 휘(諱)는 거등(居登)이다. 서기 199년에 즉위하여 253년에 붕어하시니 재위 54년이다. 능침은 김해 장유면 유하리 야산 기슭에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미상이다. 재위기간동안 신라와 화친하여 왕 즉위 10년 포상팔국이 침략해 왔을 때 신라에 청병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 3세 성왕(成王) 도왕의 아들이며 휘(諱)는 마품(麻品)이다. 서기 253년에 즉위하여 291년에 붕어하니 재위 38년이다. ◇ 4세 덕왕(德王) 성왕의 아들이며 휘는 거질미(居叱彌). 291년에 즉위하여 346년에 붕어하니 재위 55년이다. ◇ 5세 명왕(明王) 덕왕의 아들. 휘는 이시품(伊尸品). 346년에 즉위하여 407년에 붕어하니 재위 61년이다. ◇ 6세 신왕(神王) 명왕의 아들. 휘는 좌지(坐知). 407년에 즉위하여 421년에 붕어하니 재위 14년이다. 용녀(傭女)를 총애하여 한때 국정을 어지럽혔으나 박원도(朴元道)등의 충간으로 용녀를 귀양보내고 정사를 바로 잡았다. 능침은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사능산에 있다고 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 7세 혜왕(惠王) 421년 즉위하여 451년에 붕어하니 재위 30년 휘는 취희(吹希). 신왕의 아들이다. ◇ 8세 자왕(莊王) 451년에 즉위하여 492년에 붕어하니 재위 41년이다. 혜왕의 아들이며 휘는 질지( 知). 장왕은 영명한 군주로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시조대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나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짓고 불교를 일으키고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고구려, 말갈이 신라를 쳐들어 왔을 때 신라의 요청에 의해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격퇴했다. ◇ 9세 숙왕(肅王) 492년에 즉위하여 521년에 붕어하니 재위 29년이다. 휘는 감지(감知)이며 장왕의 아들이다. ◇ 10세 양왕(讓王) 휘는 구형(仇衡). 521년에 즉위하여 532년에 나라를 신라에 선양하니 재위 12년이요 가락국의 역년은 491년 이었다. 양왕은 신라 법흥왕의 침공을 받게 되자 친히 낙동강 연안에 출전하여 전쟁을 지휘했으나 피아간에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것을 보고 군왕은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백성들을 전화에서 구출하고 생명을 보전케 하는 것이 군왕의 도리인즉 양민지도(養民之道)를 펼치어 스스로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였다.
이에 신라는 양왕을 상등으로 예우하고 가락국 전토를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나 양왕은 나라를 선양한 후 산청 왕산 태왕궁에 은거하다 붕어하니 능침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방장산 기슭에 모셨는데 국내 유일의 석릉으로 사적 214호로 지정되었다.
(2)양왕 이후의 세계
시조 김수로왕 이후 17세까지 세계가 이어졌으나 그후는 상고할 길이 없다. 이는 신라가 가락계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후 가락계(김해김씨)의 세력확장을 싫어하여 김유신가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가락계 김유신가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김춘추)계는 33대 성덕왕 때 이르러 극성을 이루면서 윤중(김유신의 손자)을 대표로 하는 김유신계를 중앙 정부에서 제거시켰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왕을 섬기어 대아찬이 되었는데 왕의 친족들의 질투가 심했다.
8월 대보름 왕이 월성 산마루에서 주연을 베풀고 윤중을 부르니 이루 만류하는 자가 있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왕은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 무사한 것은 윤중의 조부(김유신)의 덕이다>라고 했는데 많은 군신들이 불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제왕권을 확립한 성덕왕때부터 결국 유신계는 무열왕계의 심한 견제와 반대속에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된다. 혜공왕대에 이에 대한 또 하나의 주목되는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다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혜공왕 15년 유신의 혼이 자기의 자손이 경술년에 처형된 것을 노여워하여 무열왕계의 조상인 미추왕릉에 가서 불평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혜공왕이 두려워서 김경신을 김유신릉에 보내어 사과하는 제사를 올리게 하는데 김경신은 반혜공파의 거두였다.
김경신은 혜공왕 6년(경술년)에 일어난 김융의 난으로 처형된 융을 비롯한 그들 연루자들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유신계의 세력만회 운동이었다. 김유신의 장손 윤중의 아들이 36대 혜공왕때 일어난 김융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됐거나 혹은 김융 자신이 윤중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쨌든 신라는 혜공왕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권 쟁탈과 극심한 혼란에 빠졌는데 이런 와중에서 42대 흥덕왕은 김유신계를 선무포섭하기 위해 사후 162년만에 김유신을 흥무왕으로 추봉하는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유신계를 견제하는 정책은 변함 없어서 김유신계는 장청 이후 거의 쇠퇴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신라가 망하고 왕건이 고려를 세운 이후 차츰 가락계 김씨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기 시작하여 고려 중엽 이후 비로소 그 후손들은 현달한 인물을 중심으로 본관은 그대로 두고 입중조(立中祖)를 삼아 파를 형성했다. 김해김씨가 단일 본관으로 가장 번성하나 파가 유달리 많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입중조들은 대개 고려 충신으로 조선조에 벼슬길을 사양한 관계로 조선조에도 김해김씨가 크게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가락후예들은 김유신가에서부터 가문을 형성하고 가훈(가풍이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을 전승시켜 국가와 왕조의 큰 변란기에는 항상 충신의 반렬에 섰었다. 고려말엽에 많은 충신들이 가락후예이거나 김해김씨 각파의 입중조들이란 사실(史實)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조선조에도 지조와 충과 신념으로 생애를 마친 탁영 김일손, 양의공 김응서, 학성군 김완, 안경공파의 김대건, 김홍도 등이 다 가락후예들임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