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판화가 열전 (1)
(1)캐테 콜비츠 Käthe Kollwitz(독일, 1867-1945)
독일의 여성작가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를 시작으로 <현대 판화가 열전>을 펼치고자 한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났으나 20세기에 들어 주요 활동을 펼친 캐테 콜비츠는 유럽의 산업화와 1차,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러시아 혁명 등 이른바 ‘현대’라는 세계의 갈등과 소요와 변혁을 그 한가운데에서 체험했거나 지켜본 작가였다. 그녀의 일생은 급변하는 현실 앞에서 비켜서지 않고 자기 나름의 미학과 윤리를 가지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대응해간 삶이었다. 때로는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등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젠 지쳤다“고 말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다.
그녀는 말 그대로 진정한 ‘판화작가’였다. 그 작업의 중심은 언제나 판화(에칭, 석판화, 목판화)였고 수없이 한 드로잉도 판화를 위한 밑그림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녀의 유작에는 서양의 화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매체인 ‘캔버스에 유채’가 거의 없다.
판화와 드로잉 이외에 특별히 그녀가 집착한 것은 조각이었다. 잠시 파리를 방문했을 때, 줄리앙아카데미에 등록하고 조각을 배우는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입체적인 작업을 시도했다. 말년에 상당 기간 조각작업에 심혈을 기우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슬픔에 잠긴 부모> <자소상>등 여러 조각 작품을 남기고 있다. 조각에 대한 그녀의 친근성은 어릴 적 건축 및 석조각 장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영향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녀가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판화 작품 <직조공The Weavers>에서부터, 그 후 이어진 <농민전쟁The Peasant War> 시리즈를 지나 말년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지속되는 주제와 정서와 태도가 있다. 즉 그녀는 언제나 사회에서 힘이 없는 사람들, 즉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했다, 소재도 그들의 삶에서 나오고 있으며 그들이 겪는 가난, 기아, 전쟁 등으로 인한 고통과 그것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주제가 되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표현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녀는 초기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작업을 하고 지속한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단순한 현실의 재현을 넘어 보는 이의 감성을 파고드는 극적인 효과가 두드러지고, 때문에 최근에는 그녀의 작품을 ‘표현주의’로 해석하고 분류하고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간의 남성중심주의적 미술사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여성 특유의 감성이자 세계관을 그녀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별히 외부의 위험에 시달리는 어머니와 함께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어머니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 인간관계 및 세계질서는 그간의 미술사에선 상당히 낯선 작품세계라 할 수 있다.
그녀는 Prussian Academy of Arts(우리식으로 말하면 독일예술원)의 첫 여성회원으로 선정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정기적인 수입이 있게 됐으며, 큰 작업실과 교수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혜택은 이후 나치정부가 들어서자 철회되고, 오히려 박해를 받는 신분으로 변한다.
성장
도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일곱 아이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칼 쉬미트(Karl Schmidt)는 법률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 중도 포기했다. 그는 석공의 일과 함께 건축일을 하면서, 후에 ’독일 사회민주노동당(SPA)에 가입한다. 어머니 카타리나 쉬미트(Katherina Schmidt)는 에반젤리칼 교회에서 개혁을 주장하다가 쫒겨난 후 독립적인 교회를 세운 아버지로부터 종교적 사회적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케테는 당시 상당히 진보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부모 아래서 성장한 셈이다.
그녀는 12살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운 드로잉과 석고 캐스팅(주물 뜨는 기술)에서 재능을 드러냈다고 알려져 있다. 16살 즈음부터 그녀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본 노동하는 사람들, 뱃사람들, 농부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의 지원으로 그녀는 베를린의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것은 여성이 그 학교에 입학한 첫사례로 기록됐다. 거기서 그녀는 막스 클링거(Max Klinger)의 친구인 칼 스타퍼 베른(Karl Stauffer-Bern)의 지도를 받았으며, 특히 작가 막스 클링거의 사회적 관심과 에칭판화의 테크닉이 콜비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7살 때 콜비츠는 의대생인 칼 콜비츠와 약혼했다. 1885년부터 그녀는 베를린의 여자미술대학에 다녔다. 거기서 그녀는 회화가 아니라 드로잉에 자신의 장기가 있음을 깨닫았다. 1890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작업실을 빌려 처음으로 동판화(에칭)을 시도했다. 주로 일하는 노동자 등을 그렸다.
1891년 약혼한지 7년되는 해에 작가는 칼 콜비츠와 결혼하면서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 칼은 의료보험조합 소속 무료진료소 의사였다. 그는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자로서 베를린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개선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개혁적이면서도 다정한 성품이었다. 그가 진료하는 환자는 주로 산업 노동자들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의 환경 (노동자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내가 발견한 단순하고 솔직담백한 아름다움을 나는 작품의 모티브로 선택했다. 나는 부르주아 출신의 사람들에게선 매력이나 관심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중산층의 모든 생활은 나에게 현학적으로 보였다. 그와 반대로 나는 프롤레타리아들은 경건하다고 느꼈다. 얼마 지나서 내가 의사남편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여자들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마음은 프롤레타리아의 운명과 그 삶의 방식 등 모든 것에 강하게 이끌렸다. (.....) 하지만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처음 프로레타리아의 삶을 묘사하도록 이끈 요인 중에서 연민과 동정심은 내 관심의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신혼집에서 작가 부부는 2차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될 때까지 50년 이상을 살았다. 1940년 칼이 먼저 세상을 뜨고, 1차대전에서 둘째 아들이 죽은 데 이어 2차대전에서는 또다시 손주가 전사하는 비극을 치룬 후, 1943년에는 그 집마저 파괴되고 말았다. 그 집에서 함께 한 수많은 기록들과 함께 그동안 제작했던 그녀의 작품들도 대부분 사라졌다.
<직조공들>
(...................................)
이 연작은 비평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시민으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그 작품은 아돌프 멘젤(Adolf Menzel:Caspar David Friedrich와 함께 독일 19세기 최고의 화가로 간주되는 화가)의 추천으로 대독일미술전시회 금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문화부장관의 거부로 수상은 무산됐다. 작품 <직조공들>로 콜비츠는 유명한 작가가되기 시작했다.
<농민전쟁>
콜비츠의 두 번째 작품연작은 <농민전쟁>이었다.
(...........................................)
<1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
콜비츠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잠시 머물고 돌아와 <농민전쟁>시리즈를 계속한다. 한편 전후에 새롭게 활기를 띠며 일어나는 표현주의 작가들과 바우하우스의 젊은 동료들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기도 한다,
1914년 10월, 그녀의 둘째 아이 페터가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터에서 사망한다. 그녀의 일기에 소위 ‘국가주의’와 ‘애국심’이란 것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자주 나타난다. 한편 그녀의 우울증이 시작된다. 그녀는 사회주의로 통일되는 세상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음을 드러내는 글들을 일기에 쓰고 있다.
50살 생일을 맞은 콜비츠는 1917년 파울 카시러(Paul Cassirer)화랑에서 150여점의 드로잉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콜비츠는 사회주의자이자 반전주의자이며 공산주의에도 동조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의 리더 중 한사람이었던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1919년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창설했으며, 그녀와 함께 살해당함)를 추모하며>를 여러 장 그린다. 하지만 에칭으로 표현한 그 작품에 미흡함을 느끼며 고민하던 중 조각가 에른스트 발라흐의 목판화를 본 후 그 작품을 다시 목판화로 시도한다. 그것이 유명한 작품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이다.
살해당한 후 가족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시작한 작품 <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는 강렬한 구도와 목판화 특유의 흑백대비로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그녀는 석판화와 동판화를 주로 해왔으나, 1926년 그녀는 목판화를 30여 점을 시도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그 전후>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통합을 위한 긴급소환(Urgent Call for Unity-Dringender Appell-독일의 저명한 과학자, 문학인, 예술가 등 30여명이 1932년 7월의 독일연방선거에 앞서 나치정권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알버트 아인쉬타인, 하인리히 만, 아놀드 츠바이크 등과 함께 콜비츠 부부도 서명에 참여했다. 그러자 나치정부는 그녀에게 예술 아카데미에서 탈퇴하도록 강요하고,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리고 전시회를 금지시키고 미술관에서 그녀의 작품을 철수시켰다.
1936년 7월 콜비츠부부는 게슈타포의 방문을 맞는다. 그들은 현정부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체포되어 수용소캠프에 수용될 것이라 협박한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면 함께 자살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콜비츠는 이미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로 주목받고 있었으므로 나치는 실제로 그러한 일을 실행할 수는 없었다.
캐테 콜비치는 50세를 전후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유럽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아시아와 중남미까지 그 이름과 작품이 알려졌다. 잘 알려져 있듯이 루쉰이 주도한 중국의 목판화운동에도 캐테 골비츠의 영향이 컸다.
70세를 맞는 생일 날, 그녀는 세계 예술계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150개의 축전을 받았다. 또한 미국에서는 주택을 제공하겠다는 제안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치정부가 가족에게 보복할 것이 두려워 그 제안을 거절했다.
1940년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42년 손자 피터가 2차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망함으로써 그녀는 1차대전에선 아들을, 2차 대전에선 손자를 잃는 불행을 겪는다.
1943년 그녀는 베를린에서 쫒겨난다. 그녀는 처음엔 노르트하우젠으로 쫒겨났고 1944년에는 드레스덴 근처의 모리츠버그로 강제 이주해야 했다. 50여년을 살았던 그녀의 집은 그 후 폭격으로 인해 그동안 제작한 드로잉과 판화 등 작품들이 멸실된다. 동시에 수많은 사진, 편지 등 가족과 함께 한 기억물들도 사라져버렸다.
1944년 6월경 그녀는 매일 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사상자들의 증가를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아들 한스에게 자신의 자살 허락을 요청한다. 그녀의 그러한 요청은 반복된다. 한스는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저명예술가로서의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1945년 4월22일, 78세를 일기로 콜비츠는 눈을 감았다. 그 날은 독일 나치가 ‘무조건 항복’을 하는 5월8일, 즉 유럽에서의 종전 16일 전이었다.
그녀는 모두 275점의 판화(에칭, 석판화, 목판화)를 남겼다. 그녀는 5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그 자화상들은 자신의 일생을 정직하게 검증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정신적 이정표였다”라고 그녀는 스스로 평가했다.
그녀의 작품을 연이어 보노라면 삶의 고통과 비극으로 인한 울음을 그저 침묵으로 참고 견디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삶의 고통이라는 긴 터널을 오직 화구 몇 자루만을 쥐고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차대전에서 잃은 아들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데, 2차대전에선 손주를 잃어야 했던 어머니는 더구나 그 전쟁을 일으키고 자식들을 죽게 만든 그 악마의 정권으로부터 갖가지 위협과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그들의 회유를 그녀가 거부한 탓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른바 ‘살롱미술’이라 불리는 것, 즉 있는 사람들 집의 '장식품'이나 ‘감각적 유희의 대상’으로서의 예술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작업을 할 수 있는 한, 나는 실효성 있는 작품의 작가이고 싶다(As long as I can work, I want to be effective with my art)." 라고 그녀는 쓰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 현실에서 실제 쓰임과 효과가 있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예술을 위한 예술“, 이른바 ‘순수미술’의 반대편에 서 있다.
<전쟁은 이제 그만!> <빵!> <비엔나가 죽어가고 있다-어린이를 도와주세요> 등 케테는 여러장의 포스터도 남겼다, 위와 같은 신념을 알면 포스터 제작에도 열성을 쏟았던 그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대체로 차분하고 우울하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인간이라는 존재와 이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한다. 따라서 복잡한 감정이나 무거운 감각을 싦어하고 즐거움만을 원하는 관객에게 그녀의 작품은 외면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색채의 잔치....“ 어쩌구 하면서 감각의 유희로 그림을 소비하기에는 그림 한점 한점이 그녀에게 너무도 중요했다. 또한 나날이 확장되고 있는 악의 세력 앞에서 자신에 주어진 탈렌트를 의미없이 낭비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콜비츠는 말년에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수없이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렸고, 드로잉과 판화 뿐만 아니라 조각으로 만들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아직 사상자들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백년 전과 똑같이, 2백년 전과 똑같이 가족들은 이별하고 있고, 젊은이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다. 조각작품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가 오늘에도 이토록 인류의 가슴을 통렬하게 때리는 이유는 모성애라는 신비하고 놀라운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상 수없이 되풀이된 전쟁이라는 노골적인 살인행위가 오늘날에도 태연히 또다시 벌어지고 있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